살짝 어둑한 카페, 약간 구석진 테이블에 여자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한 명은 약간 풀이 죽어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풀이 죽은 여자를 노려보고 있다.
"아하… 내 동생이 누굴 만나나 했더니…"
고개를 치켜든 여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풀이 죽은 여자는 등을 더 굽혔다. 다들 신경 쓰지 않는 척 구석진 곳에 앉은 두 여자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쳐든 여자는 의기양양하여 풀죽은 여자를 더 쪼아댔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여자는 자기 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고개를 치켜든 여자의 입술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샐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앞에 떨어진 핸드폰에는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미안해, 샐. 더이상은 못 만나겠어.
얼마 전까지 잘 되고 있었던 여자였다. 그런데 오늘, 헤어지자고 문자가 왔다. 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그 여자와 헤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결국에 헤어졌네, 샐… 이거 어떡하니? 오늘 술이라도 마시겠네?
샐리가 제법 걱정스럽게 말했다.
"닥쳐! 너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
샐이 소리쳤다.
-어머? 나 때문이라고?
샐리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그 애를 만나려고만 하면 네가, 네가 주도권을 빼앗아서 내 누나인 척했잖아! 이 빌어먹을 시누이 자식!"
-얘, 너 너무 말이 심하잖아. 나는 네 여친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고작 이 정도에 헤어진 거면…
"닥쳐… 닥쳐 샐리! 제발, 좀, 입, 닥치라고!"
샐이 소리쳤다.
방 안은 그의 목소리로 울렸다. 샐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편에서 애써 참는 웃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샐은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힘 조준을 잘못해서 벽에 맞고 튕겼다. 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소개팅으로 만나서 에프터 신청을 하고, 그 뒤로 일곱 번 정도 만난 여자였다. 한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고, 그 일곱 번 만난 동안 정은 생겼지만, 사랑하냐고 물으면 조금 머뭇거릴,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 여자와 평생을 약속하지도 않았고, 아직 그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샐이 샐리에게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샐리가 이런 식으로 샐의 연애를 방해한 것이 벌써 5번째였기 때문이다.
이번이 다섯 번째.
애프터까지 포함해서 7번 만난 뒤에야 훼방 놓은 것은 늦은 편이다. 첫 번째랑 두 번째는 소개팅이 들어올 때마다 퇴짜 놓는 문자를 보내서 친구들이 여자를 소개시켜 주지도 않게 만들더니, 세 번째랑 네 번째는 간신히 따낸 소개팅과 미팅 자리마다 난입해서 친구들과 상대방 여자가 자기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게 만들고는, 그래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샐리가 무의식 속에서 잠이라도 자는 건지, 아무튼 그런 시간만 골라 조심조심 잘 만나왔다고 생각했건마는…….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다고 윙윙거린다. 분명 소개해 준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난리가 나서 연락을 하는 것이다. 샐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왜 빌어먹을, 짜증 나는, 얼어 죽을, 말아먹을, 개같은 SCP를 만져서 쓸모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방법이라곤 사진밖에 없고, 하는 일마다 훼방 놓는, 민폐만 끼치는 내면으 또 다른 자아를 현실화해 버렸을까. 이 상태로는 안 된다. 자신이 결혼을 한다거나 아이를 낳는다던가, 이런 것을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여자 손이라도 한번 잡아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한밤중이었다. 커다란 별들은 여전히 멀쩡했다. 달은 똑같이 둥글었고, 지구는 내일과 똑같이 빙빙 돌고 있었다. 지금 케테르급 SCP가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손 쳐도 오늘 당장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별들과 별들 사이는 빛의 속도로나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근무시간이지만 딴짓을 해도 된다. 절대, 샐리가 무의식 저편에서 잠들어있기 때문이 아니다. 샐은 주위를 힐끔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공책을 꺼내 죽 뜯었다. 샤프를 들고 맨 위에 적었다.
샐리를 피해 연애하는 법
샐은 샤프를 빙빙 돌리다가 그 밑에 생각나는 대로 주욱 적었다.
1. 연애를 하지 않는다.
2. 샐리가 자는 동안에 연애를 한다.
3.
3… 샐은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샐리를 피해 연애할 수 있을까. 벌써 세 번째 방법부터 막힌다. 서로 다른 자아라 해도 샐과 샐리는 한 몸, 사실 샐리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그나마 피한답시고 피한 게 일곱 번. 바로 오늘 "샐리를 피한다" 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하… 차라리 게이가 될까…"
샐은 종이를 구깃구깃 구겼다. 하지만 사람의 성적 취향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만 바글거리는 곳만 골라 왔지만 아직도 여자가 그리운 걸 보니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글러 먹은 것 같다.
"가만. 샐리가 내 제 2의 자아라면, 걔도 결국 나니깐, 샐리도 여자를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샐이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레카!!! 하고 외치고 싶었다.
"야, 샐리! 샐리!!"
샐이 소리쳤지만 샐리는 묵묵부답. 샐은 들뜬 마음에 그 좁은 돔 안을 방방거리며 뛰어다니다가 자기가 구깃구깃하게 구겨버린 종이 뒷면에 "샐리, 너도 여자 좋아하지? 너도 나니깐!" 이라고 써서 곱게 접었다. 다음 날 아침, 샐리가 일어나면 이 쪽지를 볼 것이고, 적어도 자신은 저녁에 그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샐은 주변을 대충 치워놓고 헐레벌떡 침실로 내려갔다. 뭐, 일찍 잔다고 샐리가 일찍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핑계란 건 이럴 때 대야 하는 것이다.
"샐리가 변태라고 전해달래요."
다음 날 저녁, 샐은 저 말을 열 번째 들었다. 그것도 열 명 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때는 정말 흥분해서 꽤 괜찮은 가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벽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저녁에 일어나자마자 샐리가 친절하게 알람음으로 녹음해 놓은 "변태자시이이이이이익!!!!" 이란 고함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삐진 샐리를 어르고 달래며 침실을 나오니 기숙사 복도에서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샐리가 변태라고 전해달래요"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 그래. 나는 변태구나.
샐은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샐이 변태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잘 돼 가던 여자랑 헤어졌다는 것까지 소문을 내서 "샐이 다섯 번째 차이더니 드디어 맛이 갔다"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이 상태로 괜찮은 걸까, 샐. 샐은 자문했다. 괜찮아, 샐리를 피해 연애하기 방법 1이 연애를 하지 않는다, 가 아니었는가. 근본적인 문제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연애라는 문제를 뿌리째 뽑아버리면 되는 거다!
"제기랄… 입맛 없어…"
샐은 밥을 다 버렸다. 그냥 연애를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오손도손 데이트도 해보고 싶다. 그래, 제2의 자아가 튀어나온 지금 결혼까지는 무리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연애도 해보고 싶고 사랑도 해보고 싶은 것이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딱 한 번 사는데, 연애 한 번도 못 하게 방해하고……. 샐은 왠지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것 같아서 뺨이 후끈거렸다. 어디서 저기 변태 지나간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 같기도 하다. 저러니깐 여자한테 다섯 번이나 차이지, 쯧, 하고선 누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샐은 이를 악 물었다. 당신네들 같으면 왠 여편네가 당신들 데이트 하는데 난입해서 난 이 결혼 반대요 하고 테이블이며 뭐며 다 뒤집어 엎으면 당신은 헤어지지 계속 연애할 수 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샐은 속으로 앓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든, 샐리에게 들어가면 곧바로 놀림감이 될 뿐이다.
달에서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관리하는 일. 지금은 전파망원경이니 뭐니 렌즈가 없는 천체망원경이 많아졌다. 누가 렌즈를 훔쳐 가는지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 도둑을 감시할 일도 없고, 하늘은 오늘도 멀쩡하다.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것 같다. 차라리 생물학과나 유전공학과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보다 훨씬 바빴을 것이다. 샐리든 여자 친구든 뭐든 잊을 만큼 아주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물학자도, 유전공학자도 아니다. 아주 한가한, 천체물리학자일 뿐이다. 샐은 핸드폰을 켰다. 뭔가 단순한 일로 생각을 지워야 할 것 같았지만, 핸드폰을 켜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제2의 자아는 연애를 훼방 놓고, 여자들은 모두 떠났으며, 친구들은 자신의 탓을 하며, 재단은 제2의 자아의 편을 들어주고있다. 차라리 이 인생을 모두 샐리에게 헌납할까. 샐은 핸드폰이 그냥 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핸드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샐은 주춤 놀랐다. 자신이 버튼을 잘못 누른 줄 알았는데 연락이 온 것이었다. 스팸 문자일 거라고 수십번 되뇌면서도 굳이 핸드폰 메시지함을 열어보았다.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진짜로 스팸 문자라면 이 자리에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친구였다.
샐은 급히 친구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너 때문에 내 평판이 땅을 친다 아주.
그래 미안하다, 내가 쓸모도 없는 SCP를 만져서 그래. 내가 바보지. 샐이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를 소개시켜 준 친구이며, 발이 꽤 넓은 녀석이다. 천체 관측을 주로 하게 되고, 또 재단의 특성상 친구들과 만날 시간이 없어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지만 이 친구만은 아직도 꽤 살갑게 굴고 있다. 샐은 핸드폰을 잡고 미안하다며 줄줄이 변명을 적고 있는 동안 메시지가 왔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게 마지막이라며 소개해 준 여자는 멀쩡하게 생겼지만 다들 고개를 설설 흔들며 퇴짜 놓은 사람이었다. 친구가 그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친구의 동아리 후배… 아무튼 그런 경로로 알게 된 것이다. 착하고 멀쩡하게 생겼는데, 말만 하면 흐름이 뚝뚝 끊기고, 뜬금없고, 눈치가 부족하기도 하고, 뭐, 종합하자면 말을 시작하면 여자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부류인 것이다. 예쁜 것은 아니었지만, 못생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샐은 먼저 연락을 했다. 당연히 샐리가 조용한 때를 골라서였다. 사실 밤이 깊어서 기대는 안 했지만, 연락을 한 지 몇 분 뒤에 답이 왔다. 아직 안 자는걸까, 아님 자다 깬걸까. 잠시 가만히 있었다. 샐리는 분명히 자는 것 같다. 어차피 핸드폰은 무음이고 소리라고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샐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샐리가 제 풀에 뒤척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천체물리학자라고요?
여자가 먼저 물었다.
여자는 사서라고 했던가, 어딘가에 있는 연구소의 사서. 기록물을 관리한다고 했던가, 연구소 내부의 도서관 사서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렇다고 했다. 잠시 자기소개처럼 짧은 말들이 오갔다. 어디서 언제 만날지 물은 것은 여자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늦은 밤에나 시간이 됩니다.
그래, 최대한 샐리를 피해 다니자. 샐리에게 들킬 것을 생각하자니 눈물이 났다. 정말이지,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아무도 안 만나고 독수공방하는 청상과부처럼 살다 가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늦게라, 만날 곳이 많지는 않겠네요.
여자는 늦은 밤에 불러내는데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말했다.
우리 집 근처에 바(bar)가 있는데 거긴 어때요?
문제는 너무 거부감이 없는 것 같다…….
브란덴부르크. 진짜 작은 바였다. 클래식 바라고 문짝에 적혀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니 가게 이름에 맞게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곳은 또 뭐람, 샐은 좀 멋쩍게 가게를 들어갔다. 실내의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닿았다. 밖에서보다 더 크게 음악이 들렸다. 살짝 흐린 등불은 평범한 조명이었다. 요사스럽지도 않았고, 그저 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프렌차이즈로 잡다하게 늘어져 있는 그런 카페가 아닌, 어디 구석에 박혀있는 조용한 카페 말이다. 가게 자체도 작았지만, 사람도 거의 없었다. 여자가 몇몇 있었고, 연인과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도 그 중 있었다. 당연히 남자랑 같이 앉아 있는 사람은 아니겠고. 그렇게 넓지도 않은 공간을 휘휘 둘러보다가 저쪽 구석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눈을 돌리지 않았기에, 샐은 주춤거리며 그 여자에게 갔다.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샐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친구가 준 사진의 그 여자와… 닮은 것 같기도…… 사실 사진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이름도 딱히 적지를 않았다. 샐리 때문에 많이 우울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서로 소개하고 그럴 때도, 심지어 약속이 잡힐 때도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마주 앉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앉아요, 뭐해요."
여자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샐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늘여놓았다. 흰 블라우스에 댕기머리라니. 어쩐지 이 시대가 아닌 것 같았다.
"엄… 안녕하세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샐은 괜히 입을 다셨다.
"혹시 술 안 하시는데 여기로 부른 건 아니겠죠?"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눈은 동그랬다. 원래 저렇게 동그란 것일까. 그러고 보니 얼굴도 동그란 것 같기도 하고.
"아뇨, 술은 마십니다."
샐은 손사래까지 쳤다. 조금 오버했다 싶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여기로 불러냈으니, 제가 낼게요."
여자는 씽긋 웃었다. 동그랬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음악 소리가 조금 큰 것이 아닌가. 샐은 입술을 핥았다. 자기 앞으로 펼친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괜히 안경을 밀어 올렸다. 이름이 무진장 복잡했다. 대부분이 칵테일인 것 같았다. 맥주집이었다면 그저 생맥주 500 하나요, 하고 외치면 끝이겠건만. 설마 샐리가 갑자기 깨어나지는 않겠지. 다른 술집이었다면 취객이 떠드는 소리에 샐리가 깰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여기라면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샐은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 그쪽은…"
샐리가 더듬으며 말했다.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게 새삼 생각났다. 샐은 헛기침을 했다.
"그냥 제가 시킬까요?"
여자가 또다시 웃었다. 샐은 왠지 비참해졌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으니. 주문 하나도 스스로 못하고. 여자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더니 곧 손을 들었다. 음악 소리에 가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딱 이거였다. 이거랑, 이거요. 그냥 아무거나 짚을걸, 어차피 내가 사는 것도 아닌데. 샐은 입맛을 다셨다.
"천체물리학자라, 천문에 대해서는 언제 알게 되었나요?"
여자가 갑자기 물었다.
샐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여자는 또박또박하게 질문을 다시 했다. 신문기자 같았다.
"어… 음… 그냥…"
점수 맞춰서 과를 선택했는데요. 샐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대답이 좀 아니지 않는가.
"그냥 SF소설 보다가요. 네."
샐은 멋쩍게 웃었다. 하하.
"아이작 아이시모프, 그런 사람 말이죠?"
"아세요?"
"안다기보다는……."
여자는 잠시 눈을 굴렸다.
"사실, 어렸을 때 그 사람이 쓴 천문학 책을 읽었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이 천문학자인 줄 알았어요."
거 참 대단한 착각이다.
"아이작 그 사람이 SF 작가인 것은 대학 들어와서야 알았어요."
아… 네… 샐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란덴브루크 협주곡이 악장별로 흘러간다. 그나저나 나는 저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은근슬쩍 물어보도록 하자.
"사서는 왜 되신 거예요?"
샐이 여자가 물어본 것처럼 물었다.
발음을 또박또박 하게 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되고 싶어서요."
여자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그렇게 답했다.
"세 번째로 가고 싶었던 과가 문헌정보학과였고, 그래서 사서가 된 거예요."
"그래도 되고 싶은 게 되셨나 보네요."
샐은 반격에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천문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여자가 물었다.
샐은 어물쩡거리다 그냥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여자가 더 캐묻기 전에 술이 나왔다. 물처럼 투명한 게 한 잔이었고, 주스처럼 알록달록한 게 또 한 잔이었다. 투명한 것에는 얼음이 들어가 있었다. 저것이 내 잔이려니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여자가 투명한 잔을 가져갔다. 뭐지. 당황해서 여자를 쳐다보니 꽤 짓궂게 웃고 있었다. 이래서 다들 퇴짜를 놓는구나.
"근데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시니 이거 그냥 드세요."
꽤 선심 쓰듯 제 잔을 건넨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래서 다들 퇴짜를 놓는구나! 쌉쓰레했다. 향은 없었다. 이게 술인 걸까, 확실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보니 술은 맞는데.
"저는 뭐 정상이 아니라지만요."
여자가 또 갑자기 말을 꺼낸다.
샐은 잔을 내려놓고 여자를 보았다.
"당신은 왜 자꾸 퇴짜맞는 거죠?"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아 맞다. 샐리. 샐은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가, 자기 발끝을 쳐다보고는, 잔을 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애프터를 신청하지 말아야겠다. 군대 가기 직전에 남자들이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 처럼, 샐리가 어떻게 사라지기 이전에는 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 말아야겠다. 아마 평생이겠지만.
"…곧 알게 될걸요."
샐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린아이처럼 잔을 두 손으로 쥔 채로 홀짝였다. 얼음이 조금 녹아있었다. 그리고 계속 녹고 있었다.
"왜요, 뭐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거예요?"
샐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듣고 왔거든요?"
그럼 왜 물어보는 건데, 이 여자야. 샐은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여자는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샐이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것의 의미를 안 것인지, 입을 한동안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잔에 든 것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잔 속에 담긴 음료는 소주보다 독한 것 같았다.
"가끔, 그런 생각하지 않아요?"
조용하다 했더니 또 묻는다.
거 참 괜찮은 탐구 정신이다. 확 샐리가 깨버려서 그 탐구 정신을 깨트렸으면 좋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신이 쨘! 하고 나타나서 모든 것을 코치해 주고 다시 쨘! 하고 사라지는, 아니 근데 그게 뭐. 샐은 약간 게슴츠레하게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하고는 샐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말이다.
"당신, 당신 누나가 갑자기 끼어드는 거 싫잖아요."
"그래서 말리자고요?"
샐이 찌뿌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둬요, 관둬. 차라리 여자를 안 사귀고 말지."
"근데 또 안 사귀면 옆구리 시리잖아요."
젠장.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샐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럴 때 D가 나타나서 교통 정리를 해주면 얼마나 편할지, 생각해 봤어요?"
"D라뇨."
"신의 약자요."
여자가 턱을 괴었다.
"사실 편한 건 아니죠. 얼마나 인생이 지루할까요, 신이 나타나면."
"동감입니다."
뭐 종교가 있는 여잔가. 샐은 얼음을 씹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여자는 꿈꾸듯 중얼거렸다.
"근데 당신 누구예요?"
여자는 고개를 바로 했다. 기도하듯 손을 모아 턱에 가져갔다.
"잠깐만, 한 잔만 더 마시고 계속 말합시다."
샐은 확신이 없었다.
아침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일상.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이 꿈결같이 느껴진다. 환상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기는 나는데 어른어른하게만 보인다. 뭐라고 서로 말은 했지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당신 누구에요? 그 다음의 기억이 모호하다.
-야, 샐. 너는 어제 뭔 술을 그렇게 먹었던 거야?
방금 몸의 주도권을 넘긴 샐리가 투덜댄다.
"아. 좀 안 좋았어?"
샐은 어젯밤에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 들킬까 봐 조심스러웠다.
-안 좋았냐고? 아침 7시가 되서 몸의 주도권을 넘겨받으려니 네가 풀밭 위에서 자고 있더라.
샐리가 비웃었다.
-여름에 밤바람 맞아서 감기에 걸리기만 해봐, 아주.
샐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잘 자, 샐리."
-어이구, 웬일로 그렇게 친절하셔?
샐리가 깔깔거렸다. 당연히 네놈한테 아부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긴 뭐겠냐. 샐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주머니에 넣자마자 웽웽거린다. 이상하다, 분명 무음이었는데?
-누구야? 우리 왕따 샐한테 연락이라니?
"네가 알 건 없잖아……."
샐이 약간 웅얼거렸다.
한 번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연달아 몇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서 샐은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어제 만났던 여자였다. 어째선지 이름이 "여자"로 저장되어 있었다.
-우와아아아 이건 뭐야? 어머, 여-자-아-?
샐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야, 야야야, 새… 샐리!"
샐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던졌지만, 몸의 주도권을 빼앗은 샐리가 잽싸게 달려가서 핸드폰을 잡았다. 그 이전에 핸드폰이 꺼졌으면 좋으련만, 상황은 샐의 편이 아니었다.
"어머, 샐의 핸드폰에 여자라니! 분명 내가 다 쫓아냈을 텐데?"
샐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메시지를 읽었다.
"잘 들어가셨나요."
-샐리, 샐리, 샐리!!
"혹시 모월 모일 시간이 되나요. 어머머, 이 여자 참 적극적이네? 도대체 우리 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샐리는 까르륵 웃었다.
-샐리, 제발! 그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여자라고!
"아 이름도 모르는 여자 번호가 왜 핸드폰에 있어? 샐 학생,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자, 그럼 이 여자가 실망하지 않게 답장을 줘볼까?"
-샐리, 멈춰! 멈추라고 쫌!
샐은 억지로 몸의 주도권을 뺏으려고 했지만, 샐리에게 밀렸다.
-부탁이야, 부탁! 제발…….
"어머, 샐. 나는 네가 이 여자랑 잘 이어졌으면 좋겠어. 내 시험을 통과한 뒤에 말이지."
샐리는 깔깔 웃었다.
"그럼 답장은, '당연하죠. 어디에 있는…' 아니야, 이 여자가 모월 모일이라고 했으니깐, '당연하죠. 모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요.' 하. 내 문장력 좀 봐."
-하나도 안 좋거든!
"전송. 꾹!"
샐리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 샐 씨, 몸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샐리는 쇼를 끝낸 서커스 단장처럼 팔을 벌렸다. 샐은 황급히 몸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샐, 이미 보낸 메시지는 회수가 안 돼요.
샐리가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한다.
샐은 샐리의 말을 무시했다. 핸드폰을 꺼냈다. 정말로 갔다. 샐은 울상이 됐다. 곧 답이 왔다.
-그럼 거기서 뵙죠, 오오. 좋아… 어머! 공교롭게도 시간이 낮이네! 내가 몸의 주도권을 갖는 시간 아니야?
"샐리… 그러니깐 나 이때 몸의 주도권 좀…"
-거절한다. 안녕!
"샐……. 하."
샐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저 여편네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몸의 주도권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밤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밤중. 이제 하늘이 무너지든 말든 억겁의 시간이 흐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샐의 관심은 오로지 샐리의 횡포가 이 여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는 데 있었다. 샐은 초조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때 만나면 안될 것 같아요.
답이 없다. 샐은 하나를 더 보냈다.
그 때 만나면 큰일 날 것 같아요.
답이 없다.
그 때 만나면 안되요. 약속을 바꾸던지 만나지 말던지 해야합니다.
읽지도 않았다. 샐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연락주새에ㅛ
아.
연락 주세요!
오타까지 내고. 샐은 다리를 떨었다. 좀 봐, 인간아, 보라고 봐! 안 그러면 샐리 이것이 당신 얼굴에 물을 뿌릴 거야! 아주 화끈… 아니 시원하게 말이지. 기도하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꽉 잡았다. 눈을 감았다. 차라리 하늘아 무너져라! 핸드폰이 웽웽거린다. 샐은 황급히 핸드폰을 확인한다.
샐 씨 누나가 보낸거 알고있었어요
곧이어 다음 메시지가 뜬다.
만약 제가 모월 모일 시간 있어요, 하고 보내면 샐 씨는 분명 단답형으로 답했겠죠?
네, 혹은 아니오.
당신은 절대 장소를 정할 사람이 아니에요.
아 그래 거 참 자세하게 인물됨을 파악해서 감사합니다요. 샐은 뭐라고 더 오는 답을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쳤다.
그 날 만나면 안된다고요. 단답형으로 네, 아니오!
저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필름 끊겼어요?
이건 또 뭔 말인가.
우리 당신 누나를 끌어내오기로 약속했잖아요! 사진도 줬으면서.
몽롱한 가운데서 했던 말이 그런 거였나? 샐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계획 바꿀래요, 그럼. 어… 음, 작전상 후퇴?
계획이 뭔지도 모르는데 생판 처음 본 여자랑 그 뭔지 모를 계획을 실현한다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그럼 당신은 뒤에 있어요.
샐은 왁, 소리 질렀다. 샐리든 이 여자든 둘 다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먹는다.
당신이 험한 꼴 당한다니깐요!
답변은 역시 독불장군, 스스로 사지로 나가시겠단다. 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 여자랑도 헤어지고 나면, 반백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럼 모두들 샐리가 제 1의 인격이고, 늙은이 샐이 제 2의 인격이라고 생각하겠지. 축하해, 샐리. 이제 네가 우선이 되겠구나!
그래, 지금 생각도 안 나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들어나 봅시다.
샐은 반쯤 자포자기했다. 영 말을 안 들어먹으면 그 전날에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뭐. 그래! 그거 좋겠네,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아니 저 연극반이랬잖아요. 그건 기억나요?
기억이 날 리가. 제발 내 질문에 답을 해줘요, 숙녀분.
그래서 제가 연기하기로 했잖아요! 당신 누나에 맞먹는 미친년 연기를!
샐은 멍하게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이게 뭔 소리인지, 정말로 자신이 그 술집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정말로 옥상에서 뛰어내려야겠다. 그 전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샐은 고민했다. 내일 잡힌 샐리와 그 여자의 만남을 회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는 무엇이 있을까. 옥상에도 올라가 봤지만 그 한 걸음 내딛는 게 어려웠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한 발짝 뗐더니 어느샌가 뒤에 기지관리자가 서 있었다. 결국 뒷목을 잡힌 채 질질 끌려와서 한시간가량 훈계를 듣고선 돌아왔다. 옥상에서 떨어져서 부상을 입지 못했으니, 평범한 것을 가져와야 한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레파토리는 언제나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는 것은 어떤 핑계를 대야 샐리가 번복하지 못할까, 이다. 감기에 걸렸어요. 샐리는 뒤에 약 먹었더니 다 나았어요, 하고 붙일 것이다. 조금 더 고민해 보았다. 수술이…… 이건 너무 수습하기 힘든 핑계다. 샐은 아주 조금 더 머리를 굴렸다.
제 오촌 당숙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샐은 자신에게 오촌 당숙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없는지도. 실제로 계시다면 그분께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내일 장례식을 도와야할 것 같습니다.
제 누나도 말이죠.
설마 친척이 돌아가셨다는데 뭐 우리가 짠 게 어쩌구 계획이 저쩌구하고 붙들고 늘어지지는 않겠지. 샐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면 샐리도 말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리겠는가. 샐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지금은 새벽 세 시다. 여자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15시간이 남았다. 마음을 놓았다. 아침즈음에 메시지를 확인한 여자가 고인의 명복을 전하며 잘 다녀오라는 내용의 답변만 받으면 되는 것이다. 샐은 간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업무 효율이 확 올라간 느낌이었다. 오늘도 별자리는 안녕합니다. 오늘 달은 제대로 떴고, 달의 바다는 여전히 조용합니다. 오늘도 저쪽에 있는 말머리성운은 아름답습니다. 우리 위에서 비추는 별들이 하나쯤 폭발해서 없어진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고 조치를 취할 시간은 충분합니다. 별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은 몇억 년이나 지나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 적어도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습니다. 오늘, 지구는 평안합니다.
그리고 샐은 절망했다. 어제는 지구가 평안했지만 오늘은 지구가 평안하지 못하시다. 무의식 저편에서 푹 자고 일어난 뒤 샐리에게 몸의 주도권을 받으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때와 같다. 하지만 샐리는 오늘따라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웨이브를 넣었으며, 얼굴에 분칠을 하고, 눈썹을 동그랗게 그리고, 속눈썹을 붙였으며 거기에 마스카라까지 예쁘게 칠해놓고, 눈두덩에 발그레한 아이섀도를 바르고, 귀에는 자석으로 된 피어싱을,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 뺨에는 말간 볼터치를, 눈 밑에다는 하이라이터를, 발에는 높은 힐을, 그리고 심지어는 샐, 자신의 근무를 미리 빼놓기까지 했다. 샐은 무언가 아주, 아주 나쁜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샐리.
샐이 샐리를 불렀다. 샐은 필사적으로 그 나쁜 일을 부정했다. 분명히 샐리는 오늘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했으며, 저녁에는 내 근무를 내 허락도 없이 뺀 채로 어딜 놀러 가려……
"쨘!"
하며 샐리가 샐의 핸드폰을 보인다. 그 여자와의 메시지 화면이다.
오촌 당숙이 부활했습니다!! 만세!!!
샐은 한참이나 말을 할 수 없었다. 샐리가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어머나, 축하드려요.
또 그 말을 믿는 사람에게 놀라 말을 잃었다.
그럼 오늘 그대로 만나요. 오늘처럼 감사한 날을
친척과 함께 보낼 수는 없죠
아니, 친척과 그냥 보내란 말이야.
그래요. 오늘 그 시간에 만나죠.
샐은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질러봤자 몸 밖으로 나갈 일은 없겠지만.
"시끄러! 머리 울린다고! 닥쳐, 샐!"
샐리가 주먹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고!
샐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이게!
"그럼 넌 없던 오촌 당숙이 돌아가신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거보단 있을 법하거든?
"흥. 왜 불가능해? 여긴 재단이야, 재단. 뭐 어떤 SCP로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뭐. 아님 오촌 당숙이 SCP던가."
샐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됐어, 비켜. 나한테 주도권이나 넘겨.
"아하.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
샐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가 아끼는 가방을 들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에는 사람이 많았고, 다들 샐리에게 인사를 했다. 샐리 역시 그들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샐리, 다시 방으로 들어가.
샐이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하지만 샐리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샐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봐 샐. 아니 주도권을 가져가라니까?"
샐리가 말했다.
샐리는 벌써 기지를 나서고 있었다.
-그러니깐 방으로 들어가. 여기서 어떻게 주도권을 가져가?
"왜? 우리의 신사 샐씨는 여자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멋진 구두까지 신고 밖을 못 나다니시나?"
-야 임마! 그건 여자 복장이잖아! 난 남자고!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난 신사가 아니라고.
"네가 여기서 가져가 봐! 난 네가 가져가기 전까지는 네 여친한테 간다!"
-그 여자 여친 아니거든?
샐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럼 왜 만나자는 말이 들어올까나. 자, 이제 슬슬 버스 탈건데, 주도권 안 가져갈 거야?"
-그러니깐 방으로 가자니까?
버스가 멈췄다. 사람이 꽤 지나다니는 길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까지 진하게 한 변태로 오해받는 것 이전에 첫 번째 인격과 두 번째 인격이 서로 바뀌는 것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아마 감봉이나 근신 같은 것으로 끝나지는 않겠지. 샐은 계속 속에서 징징거렸지만 샐리는 또박또박 구두 소리를 내며 버스에 올라탔다.
결국 약속이 잡힌 카페에 도착하고 말았다. 카페도 꼭 그 사람 성격처럼 어디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이었다. 입구도 한 사람이 지나갈까 한 그런 골목길에 아주 작게 나 있었다. 남자라면 머리를 부딪힐만한 입구에, 가파른 계단까지. 저기 계단 끝에 화장실 표지가 있다. 샐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여기는 사람이 얼마 없다.
-내 주도권 내놔!
샐이 소리를 질렀다.
"가져갈 테면 가져… 어? 어? 야!"
샐리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행히 완전히 빼앗지는 못했지만, 샐은 자신의 의지로 입구 문을 꽉 잡고선 그 자리에 버팅기고 섰다. 하지만 샐리도 주도권을 완전히 뺏긴 것은 아니기에, 또 샐리는 샐리의 의지대로 낑낑거리며 몸을 움직여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정말이지 혼자서 2인 역할을 하며 싸우는 사람이라니, 누가 보면 설치미술가인 줄 알겠다. 그 이전에는 미친년으로 보겠지만, 지금 당장 샐과 샐리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샐은 IP충돌, 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났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단어가 생각난 순간 샐리가 나머지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사실 샐리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샐리는 대충 머리를 손으로 빗어넘기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계단을 세 칸씩 성큼거리며 올라갔다. 샐은 그 와중에서도 계단이 가파른데, 그 뒤에서 누가 올라오면 어쩌나 이런 걱정을 했다.
"헹, 내가 이겼다고 샐!"
샐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한 다음에야 샐은, 자신이 몸의 주도권을 빼앗지 못한 것을 실감했다. 샐은 약간 멍해졌다. 조금 더 열심히 주도권을 뺏기 위해 투쟁했어야하나? 아니 그 이전에 투쟁이란 단어가 여기에 어울리는 것인가? 샐리는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처럼 카페 문을 열어젖혔다. 이 카페에도 고전음악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카페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샐리도, 샐도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짧은 커트머리때문이었다.
"너….가 만난……"
샐리가 중얼거렸다.
-머리 길었는데……
"저 여자 맞아?"
남자마냥 짧은 머리에, 머리는 또 투톤으로 염색을 해놓아서 아래는 선명한 붉은색이고 위에는 또 검은색이다. 여자는 문이 열릴 때 나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샐리를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면서 말이다. 샐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주춤 여자에게 다가갔다.
"샐리씨!"
여자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며칠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무잡잡해졌다. 헐렁한 원색 박스티에 짧은 반바지에 커다란 백팩.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흰 블라우스에 땋은 머리, 약간 촌스러운 듯하면서 단정했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맨날 말로만 듣다가 오늘 처음 만나니깐 반갑네요!"
여자가 샐리의 손을 답싹 잡았다. 손톱에도 자주색 계열로 매니큐어를 발라놓았다. 새끼손가락으로 갈 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설마 저 색을 모두 산 것일까. 샐리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절… 알아요?"
샐리가 물었다.
"당연하죠. 샐이 소개해준 걸요. 오늘 이 자리도 샐이 만든 거잖아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샐이 뭘 어쨌다고요!"
샐리가 탁자를 짚었다.
"아… 왠지 샐이 주저하더라니 말을 제대로 안 전했나 보군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으이그, 내가 괜찮다고 몇번씩 말했는데. 오늘 그럼 무슨 목적으로 만나는 건지는…?"
"그냥 샐이랑 만나려는 거 아니었어요?"
샐리의 물음에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샐 이 녀석이 이상하게 전해줬군요?"
여자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샐리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늘 소개팅이잖아요!"
여자가 간신히 말했다.
"예? 에… 예에…. 에…. 잠시 저 화장실좀… 하… 하하…"
샐리는 가재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야아아아! 샐!"
샐리가 소리쳤다.
딴에는 변장을 한답시고 꺼져있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였다. 샐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너 핸드폰 가져왔어?"
샐리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임마, 네가 챙길 시간이라도 줬어? 다짜고짜 밖으로 튀어나온 주제에.
어느 장단에 박자를 맞출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샐리처럼 모르는 척 나올까, 아니면 진짜로 저 여자와 짠 것처럼 나올까. 샐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그럼… 그럼 그 소개팅이라는 건 뭐야?"
샐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건 뭐냐고!"
-그… 그야! 진짜로 소개팅이지!
샐이 변명하듯 소리쳤다.
"진짜 소개팅이라니?"
-소개팅이 달리 소개팅이냐? 음… 그… 그래, 그런 거지 뭐…
"그럼 여태껏 속인거야? 날?"
샐리가 팔딱팔딱 뛰었다.
-소… 속였다니, 난 그저 그게!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안 나올까 봐!
"몰라, 진짜 넌 최악이라고."
샐리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화난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섰다. 이거 난감하다. 그냥 샐리 편을 들걸, 왜 저 여자랑 비슷한 말을 한 걸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샐과 통화했나요?"
여자가 생긋 웃었다.
"도대체 소개팅이란 그게 뭔가요?"
샐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건 설명하자면 긴데요."
여자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니깐 먼저 커피나 마실 것을 시키는 건 어떤가요? 뭐… 원두커피밖에 없어서…"
"아니, 소개팅이 뭔지부터 설명해 주세요."
샐리가 강하게 나왔다.
"당신과 저의 소개팅이에요."
여자가 오늘 날씨가 참 맑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
"거봐요. 말하자면 기니까 먼저 마실 것을 시켜요. 제가 임의로 정한 카페라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여자는 메뉴판을 샐리에게 건넸다. 샐리는 여자를 보면서 메뉴판을 펼쳤다. 샐리는 영 멍한 표정으로 아무거나 짚었다. 눈치로는 다시 한번 화장실로 가서 샐에게 뭐라 말을 잔뜩 쏟아부을까, 아니면 여기서 여자에게 잔뜩 쏟아부을까,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너무 샐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샐도 샐리씨 걱정을 많이 했고, 사실 이번 만남도 그런 것의 연장선이었으니까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걱정이라뇨?"
샐리는 한숨처럼 말했다.
"샐리씨 혹시 다른 남자들을 만난 적 있나요?"
여자가 물었다.
"아뇨… 딱히."
"음,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짓으로는 직원을 부르고 있었다. 여자도 대충 이것저것 짚는 것 같았다.
"샐과 만난 것부터 시작할까요. 사실 저랑 샐은 같은 학교 출신이에요. 같은 대학교 말이죠. 학창시절에는 만난 적이 없어요. 과도 완전히 다른 과고, 사실 만날 일도 없었죠. 샐과 저는 접점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딱 하나 있다면 친구의 친구의 후배가 샐의 친구라는 정도?"
"친구의… 친구의…. 뭐요?"
"같은 연극부 친구의 친구의 후배요. 그 있어요, 마당발 녀석인데… 하나걸러 아는 사람이라니까요. 아무튼 그 친구의 친구의 후배가 갑자기 연락을 하더군요. 샐한테 소개해 주고 싶다고요. 뭐였지, 자기 주변에는 레즈비언인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나요? 그것도 커밍아웃한 사람 말이에요."
"뭐요?"
"레즈비언이요. 동성애자 말이에요, 여자 동성애자."
"아니, 그건 아는데, 내 동생이 왜……."
"음, 샐이 샐리씨를 걱정해서 말이죠."
"그럼, 샐이 저를 레즈비언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하… 왠지 저번에 나보고 여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더니만."
"샐리씨가 남자도 안 만나고, 샐의 여자 친구한테 가서 훼방을 놓고 하니 동생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겠죠?"
여자가 생긋 웃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동성애자는 아니에요."
샐리가 말했다.
"네. 샐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뭐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음료가 나왔기 때문이다.
"직접 가져다줘요, 여긴."
여자가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샐리씨 뭐요? 라는 말 꽤 자주 하네요."
"아니, 지금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잖아요. 세상에, 내가 레즈가 아닌 것을 알고서도 레즈를 부르고……."
"동성애자 이전에 상담가거든요."
"상담가요? 뭐요?"
"음. 상담하는 사람이요. 사회복지사면서 동시에 어려운 청소년들의 상담도 해주고 싶어서 청소년 상담 자격증도 땄거든요."
저 여자 어디 여대의 문헌정보학과 나와서 사서 하는 사람 아니었나? 샐은 혼자 중얼거렸지만, 샐리가 여자의 말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샐의 말은 못 들었다.
"그래도 학교 후배라는데 말은 좀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만나마, 했죠."
"그럼 그게 며칠 전인 건가요?"
"아뇨. 만난 지는 꽤 됐어요. 다만 며칠 전에 만난 이유는… 샐리씨를 어떻게 꼬여서 나오게 할까 이것 때문이었죠."
여자가 또다시 웃었다.
샐리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아마 샐리도 샐만큼이나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오늘의 이 자리는…"
샐리가 정리를 해보려는 듯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저와 샐리씨의 소개팅?"
샐리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벌써부터 피곤한 모양이다.
"아니, 그러니깐 저는 동성애자가 아니에요."
샐리가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뭐 어때요. 남자와 할 것 저와 먼저 해본다고 생각해요."
샐리는 한숨을 쉬었다.
"아… 저 좀 화장실을 다시 다녀와야 할 것 같네요."
여자는 웃고 있었다.
샐리는 화장실의 문을 닫았다.
"저 여자 뭐야?"
완전히 진이 빠진 목소리였다.
-원래 저런 여자야.
샐도 진이 빠졌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샐… 있잖아."
샐리가 말했다.
"정말로 이 자리 네가 만든 거야?"
뭐라 말해야 죽지 않을 수 있을까.
-글쎄… 사실 만들고 싶었지만, 또 반대로 반대도 많이 했거든. 겁이 났었다고.
샐도 약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내심 저 여자가 저런 말을 지어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뭔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달까, 여자의 말에 약간씩만 맞장구 쳐주면 중간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겁은 왜 또."
-아니 네가 뭐라고 말만 하면 화를 내고 놀리기나 하니 내가 겁이 나지 안나?
샐리는 입을 비죽 내민 채 땅을 봤다.
"여기 계속 있어야 하니? 아니면 그냥 이쯤에서 끝내고 나와도 되는 거니?"
샐리가 축 처진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하지만… 소개팅에서든 미팅에서든 아님 그냥 이런저런 만남에서든 여기서 끝내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샐리가, 맨날 여자들에게 물이나 뿌리고 탁자를 뒤집어엎던 그 샐리가, 지친 것 같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니, 그것이 또 재미있었다. 샐리는 제자리에서 발을 쿵쾅거리며 굴렀다. 힐을 신어서인지 몇 번 하지는 못했다. 결국 씩씩거리며 화장실을 나온 샐리가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음료가 나온 차였다. 샐리가 고른 것은 뜨거운 음료였다. 샐리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했다. 뜨거운 것도 모자라서 샐리가 가장 싫어하는 블랙커피였다.
"여기가 원두커피를 잘 내리기는 하는데, 이 날씨에 그런 걸 고르시다니 원두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샐은 긴장했다. 아니야, 저 말은 아니라고.
"아뇨. 이런 시커먼 건 싫어하는데요."
샐리가 잔을 거칠게 밀어놓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럼 제 것 드실래요?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원두커피이긴 해도 케냐 AA는 얼음을 넣어서 주더라고요. 다른 원두는 그렇게 뜨겁게 먹어야 해요."
여자는 나름 호의인지 자신의 잔을 샐리에게 내밀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요?"
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생글거린다.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알아요."
"알면 좀 눈치 있게 행동해 주시죠?"
샐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판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샐은 마냥 고소해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자신이 다 책임을 지겠다고 저 여자가 호언장담을 했지만, 다른 여자들처럼 샐리 때문에 훌쩍이며 집에 가는 것을 본다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샐은 머리를 굴렸다.
"아… 죄송해요. 불쾌하셨다면 사과할게요."
여자가 멋쩍게 웃었다. 웃고 있는 상이었지만, 얼굴 표정은 정말 천벌이라도 지은 것처럼 애처로웠다. 아니, 웃고 있는 것이 진짜 웃고 있는 게 아니라 샐리에게 애걸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묘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샐리는 그 표정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
"하긴, 이 자리가 불편하시겠네요.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 하고요. 영 모르는 여자한테 와서는 너 동성애자냐 뭐냐 이런 질문이나 받고 말이죠. 솔직히 저도 그럴 것 같아요. 어떤 남자한테 갔더니 너 이성애자냐 뭐냐 이런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어휴."
여자가 진저리를 쳤다.
"어 음, 뭐, 잘 아시네요."
샐리는 헛기침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커피라 많이 마시진 못했다.
"뭐, 샐리씨가 동성애자가 아니래도, 그냥 친구를 사귄다 하고 잠시 좀 앉아계셨으면 좋겠어요."
여자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당신이 말했듯이 저는 이 자리가 엄청 불편한데요. 그냥 후딱 뜨고 싶은데요?"
"응, 그럼 좀 마시던 것은 다 마시고 가세요."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에요? 설마하니 이런 걸 확 뒤엎고 나가는 그런 교양 없는 여자인 줄 알고있던 거예요? 적어도 이거 다 마실 때까진 자리에 있어야죠!"
-너 이거 뜨거운 커피만 아니었으면 저 여자한테 부으려고 했잖아.
샐이 중얼거렸다. 샐리는 살짝 인상을 구겼지만 곧 폈다.
"아뇨. 교양 없는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여자가 활짝 웃었다.
"정말이지 샐리씨는 샐과 인상이 정반대에요."
"아니 비교할 녀석이랑 비교해요. 어딜 그런 녀석이랑……"
샐리가 입을 비죽였다. 샐은 안에서 무슨 소리냐며 아우성쳤지만, 샐리는 그럴수록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생과 사이가 안 좋은 건가요?"
여자가 물었다.
"어후, 혹시 동생 있어요?"
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있죠! 샐리씨와 똑같이 남동생이에요!"
여자가 반갑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은근히 커서 샐리도, 그 여자 스스로도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남동생 있으면 아시겠네. 정말이지 그 샐 녀석, 성격은 음침해서 맨날 천문대에나 콕 박혀있다니까요? 그러니깐 여자들이 떨어지지."
아니, 성격이 음침하다니? 오히려 음침하게 남을 음해하는 것은 샐리 아닌가? 샐은 꿍얼거렸지만, 그 생각이 어디로 나올 수는 없었다.
"어머머 그래도 얌전하잖아요. 제 남동생은요, 얼마나 천방지축에 깝죽대는지, 잠시라도 가만히 안 있는다니까요? 그렇다고 말이나 재미있게 하면 몰라, 뭔 말만 하면 의성어에 의태어에……. 어디 가려고 길 좀 물어보면 어떻게 답하는지 아세요? '어 누나 이쪽으로 쉬이이익 가다가 홱 꺾어서 쭈우우우우우우욱가면 쨘! 하고 나와!' 어휴. 정말이지 미치겠다니까요."
"그래도 그렇게 밖으로 나다닌는 성격이 좋아요. 친구는 많을 것 아녜요?"
샐리는 커피를 홀짝 마셨다.
"정말이지 샐, 그 녀석은, 친구라곤 하나도 없다니까요.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옆에서 일하는 사람도 몰라. 이렇게 발이 좁아서야 뭐 승진이라도 제대로 하겠어요?"
"어머 그것참 걱정이네요. 사실 저도 발이 좀 좁은데, 아니 학생 시절이나 사회 초년생일 때는 별 어려움 없다가, 나중에 되니깐 이게 참 힘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상담사다 보니 이런 성격도 문제가 되고 말이죠."
"성격만 그러면 내가 말을 안 해요. 그 뭐냐, 그…….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도 자신한테 문제가 닥치면 무슨 집게마냥 쏙 숨어가지고 나오질 않는다니까요."
"아휴, 샐리씨가 걱정이 많으시네요. 정말 남동생 이렇게 걱정해 주는 누나가 어디 있어?"
샐은 정신이 멍해졌다. 방금까지 어색해서 쭈뼛쭈뼛하던 사이가 맞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정말 이래가지고는 여자라도 제대로 만날까 싶다니까요."
샐리가 한숨까지 섞어서 말한다.
"샐리씨, 저랑 샐리씨랑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여자가 슬쩍 말을 꺼냈다.
"그런가요? 솔직히 저, 존댓말 쓰니깐 좀 불편하단 말이에요."
-너 중간중간 말 놨잖아.
샐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샐리의 미소가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곧 돌아왔다.
"어머, 나도 그랬는데. 그럼 샐리씨, 우리 말 놓아요. 뭐 어차피 우리 나이 차이 나봤자 한두 살 정도일 텐데. 샐리씨말고 샐리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당연하지, 말끝마다 씨, 씨 붙이니깐 얼마나 낯이 간지러웠는지…."
그러고선 까르르 웃는다. 동네 반상회가 딱 이런 느낌일까, 샐은 생각했다. 이제 시나리오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아니,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도 못 잡을 것 같았다.
"샐은 그래, 천문학자 일 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너는 무슨 일 해?"
여자가 친근하게 물었다.
"나는…."
샐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음, 인사과야."
-뻥치지 마, 이 여자야!
샐이 속에서 소리쳤다.
"인사과? 회사 다니는 거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회사라기보다는 뭐랄까, 뭔가 연구소 같은 곳이야."
-아주 막 지어내고 다니네, 아주.
샐리는 갑자기 자기 핸드백을 뒤졌다. 그러고는 조용한 핸드폰을 꺼내서 괜히 켜본다.
"쯧. 샐이 전화했네."
"가서 받아보지 그래?"
"아냐. 뭘 받아. 뭐 내가 성정체성을 깨달았는지 말았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겠지."
샐에게 가만히 입 다물고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달라는 소리이다. 샐리가 저녁 시간에 친구들과 만나서 종알거릴 때, 자신의 주도권을 뺏긴 샐이 부루퉁하게 딴지를 걸면 늘 저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기가 샐리의 주도권을 받아서 친구들과 말할 때, 샐리의 불평을 막기 위해 저 말을 하면 나중에 꼭 변태 취급당한다.
"성정체성은 무슨. 샐한테 너나 깨달으라고 일갈해 줘."
여자가 생글거리며 말한다.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 편인지를 모르겠다.
"그럴까? 정말, 걔야말로 동성애자 아니야? 게이?"
-야!
샐이 버럭 소리쳤다.
"에이 설마. 게이면 그렇게 여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었겠어?"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가… 뭐, 그쪽이라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아, 지금 사귀는 사람은 있는 거야?"
"아니. 정말이지 나는 내 연애 훼방 놓을 사람도 없는데 왜 없는지 모르겠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에이, 너 정도면 직장에서 남자들이 줄줄 따라 붙을 것 같은데? 연구소면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지 않아?"
"그거야 그런데……. 알잖아."
샐리가 싱긋 웃어보인다.
-하긴. 누가 남녀의 성별이 휙휙 바뀌는 사람이랑 사귀고 싶을까! 밤에 들어갔더니 어여쁘신 아내는 어디로 사라지고 웬 시커먼 남정네가 침대에 누워있을 텐데.
샐이 툭툭 던졌다.
"아, 잠깐만. 나 잠시 문자 좀 보내고. 아무래도 샐이 걱정할 것 같다."
샐리가 핸드폰을 집어 든다.
"그래, 지금 잘 보내고 있다고 말해줘. 네 성정체성은 이성애자라고, 홍콩행 레즈비언 바 같은데 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
샐리는 여자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닥쳐. 안그럼 죽는다.
샐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왜!
머릿속 시끄러워. 말이 헛나올 것 같잖아!
-허 참, 마음에 들으셨나보네. 그렇게 좋으셔요? 아주 내 연애 망치려고 득달같이 달려왔다가 아주 반상회 나온 아줌마처럼 시시덕거리고 있네?
연애라니 넌 레즈비언이랑 연애하냐? 무튼 됐고, 닥쳐. 나 놀거야.
샐리가 핸드폰을 껐다.
"정말 동생 잘 생각해 주네."
여자가 잔을 들었다.
"생각해 줘도 그 녀석은 언제나 배신때린다고. 정말 좋은 남자 하나도 소개 안 시켜주고!"
-네가 내 여자를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샐리는 위협하듯 헛기침을 했다.
"근데, 이거 샐한테 들은 말인데 말이야……."
여자가 비밀을 말하듯이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샐이 나한테 온 게 상담을 받으려고 온 거였거든."
"아, 그 내가 뭐 레즈인거 같다? 뭐 그런 거?"
"아니."
여자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걔가 요즘 우울해서 말이지. 그… 여자관계가……."
"뭐? 설마 걔, 그걸 내 탓으로 돌린 거야?"
샐리가 벌떡 일어섰다.
"좀 앉아봐. 걔 얘기 정말이야?"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하, 어이가 없어서. 완전 나를 시어머니로 몰고 가는데?"
"시어머니?"
"아니아니, 시누이었나. 아무튼. 막 내가 자기 여자 사귀려고 나가면 뭐 내가 깽판을 놓는다네 뭐가 어쩧다네…."
"그럼 그냥 누명인 거야?"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명이라고 말하기만 해봐.
샐리는 잠시 망설였다.
-누명이라고 말하기만 해보라고. 아주 우리가 SCP의 영향을 톡톡히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서 스스로 SCP-몇 번 하고 딱지 붙인 채로 격리실에 하루 종일 멍하게 앉아버릴 테니까.
샐은 자기가 무슨 협박을 하는지도 헷갈렸다. 하지만 샐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샐리가 소개받은 여자한테마다 가서 깽판이라고 불러도 모자랄 짓들을 했던 것이 차례차례 생각났기 때문이다.
"누명…. 은 아니지."
샐리가 자신없는 소리로 말했다.
"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둘이서!"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솔직히 샐이 그 말 했을 때도 별로 안 믿겼거든. 아니 어떤 누나가 그런가… 하면서. 근데 그게 누명이 아니라니? 그럼 샐리, 너 설마……."
"그게 아니라!"
샐리가 황급히 말을 막았다.
-뭐가 아냐! 맞잖아! 나 아주 첫 번째부터 샅샅이 말해줄 수 있어!
"그게 사실은……."
-첫 번째 여자 생각해 봐. 그래, 들어가자마자 시원하게 물을 뿌리셨지?
"어, 그게……."
-여름날이라서 얼음물이었는데, 아주 얼음 다 떨어지고. 응? 나중에 걔 얘기 들어보니깐 막 일주일 동안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데? 막 고소한다는 거 내 친구랑 나랑 열심히 빌어서 간신히 막아놓았다고. 넌 그런 거 모르지?
"아니, 그 샐이… 그렇게 말해주지도 않았고……."
-아하, 그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군요. 내가 몇 명 만났지? 아, 그래. 다 말하면 너무 오래 걸리겠다.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로 말해줄게. 그래그래.
"난 정말이지 샐한테 맞는 여자를 골라주고 싶었다고! 그런거 있잖아.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하는! 그런 여자라면 샐이 어떤 상태라도 받아줄 것 같았거든."
-하, 어떤 상태? 무슨 상탠데? 내가 암이라도 걸렸냐?
"알잖아!"
샐리가 그 자리에서 소리쳐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 샐이 어디 아파?"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샐리는 헛기침을 했다.
"어…. 아니, 샐은 지금 건강해. 하지만 내 주변에 말이지, 막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혼하는 사람이 많아서. 응, 샐도 그럴까 봐. 하하……."
샐리는 말을 주어섬겼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은 없어. 순정 소설이나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에 있는 이야기야. 오, 나의 줄리엣! 우리 가문이 뭐라 해도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소! 뭐 그런 게 현실에나 있는 줄 알아? 남자든 여자든 바람이나 안 피는 상대를 만나면 그게 장땡이라니까?"
"그, 그러니깐 나는 그런 상대를 만날까봐 걱정인거야! 그래서……."
-그래서 판을 뒤엎으셨어?
샐은 여전히 부루퉁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긴. 좀 미안하네, 생각해 보니깐."
샐리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그래도 속마음이야 좋은 의도였잖아. 하지만 남이 골라주는 것 보다 자기가 당해보면서 고르는 게 더 낫겠지. 샐이랑 말해봤어?"
샐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서 샐이랑 말해봐. 정말 마음고생 많이 하는 것 같더라. 맞다. 예전에 내가 만났던 여자 중에 말이야……."
여자는 다시 종알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예전에 어느 여자를 만났는데, 그게 자신은 그냥 동성애자라니깐 동성애자도 아닌데 호기심으로 만났고, 심지어는 남친도 갖고 있었다고, 근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 여자와 진지하게 만났다가 된통 데이고 끝났다는 내용이었다. 샐리도 적절히 맞장구를 쳤고, 샐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여자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켰다.
"아 맞다. 샐리는 남친 없어? 꽤 예뻐서 막 줄을 섰을 것 같은데."
여자가 물었다.
"없다고 샐이 그랬다며."
"아… 그랬나…"
여자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소개해 줄까?"
샐리가 여자를 쳐다봤다.
"뭐 내 주변에 동성애자만 있는 건 아니야."
여자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샐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다가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필요 없어."
왜 아주 만나봤다가 아주 봉변 좀 보지 그래, 내가 너의 오빠로 나서줄 테니. 샐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어쩐지 억지로 화를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 내가 너처럼 상을 뒤엎을 만한 배짱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 그런 거지. 샐은 멋쩍게 중얼댔다. 여자가 무엇을 더 말하려는지 자세를 바로 했을 때, 갑자기 샐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미안."
샐리가 양해를 구하고는 핸드폰을 보았다. 기지관리자였다.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지금 당장 샐을 내놓지 않으면 유혈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 진짜 미안."
샐리가 사과했다.
"지금 내 직장 상사가 샐을 내놓으라고 해서 좀 가봐야겠어."
"샐? 근데 왜 네가?"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샐리는 잠시 얼어있었다.
"아, 어, 그게 지금 샐이 천문학자잖아, 그래서 낮에 자는데, 그게, 내가 지금 가서 깨워야 해. 하하, 오늘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하하하, 막 전화했는데 아무도 안 받는다네. 어, 뭐 가서 깨워서 밥 먹이고 보내야지? 내가 언니… 아니 누나잖아?"
샐리는 횡설수설하며 급하게 가방을 둘러맸다.
"누나라 많이 힘드네. 난 내 동생 그냥 방치하는데 말이야."
여자도 따라 일어섰다. 다행히 샐리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뭐야, 그럼 샐이랑 같은 직장인 거야?"
"아, 뭐…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일하는 부서는 좀 달라."
여자는 다행히 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쉽네, 잘 가."
여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샐에게 미안하다고 꼭 말하고."
여자가 마지막 말만 하지 않았다면 샐은 이런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샐은 안달복달하는 샐리를 두고 혼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돌아와서 샐리가 수십번 주도권을 내놓겠다고 말했지만, 샐은 꽁하니 무의식의 저편에서 나오지 않았다. 기지 관리자가 찾아오기까지 했다. 샐은 덜컥 겁이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해서 그 두 여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며칠 근신이나 아니면 감봉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도대체 무슨 일인 거기에 샐이 안 나와요?"
기지 관리자가 남자 옷을 입은 샐리에게 물었다.
샐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꾸 흘러내리는 옷을 가다듬을 뿐이다.
"샐이랑 싸웠어요?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꽤 예쁜 옷을 입었다는데, 혹시 샐 헤어진 거 약 올리려고 남자 만난 건가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 아님 말고요."
샐리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제가 한번 애걸복걸해서도 샐을 꺼내볼게요."
샐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나 보군요."
"저, 급한 일이 아니면……."
"네 급한 일이에요."
기지 관리자가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지금 당장 샐이 필요합니다. 혹시 샐이 아직도 떼를 쓰나요."
"야… 샐……. 화나신듯하니깐 그만 나오면 안 될까……."
샐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샐은 나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면 강제로 나오게 하는 수가 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말투와 더불어서 저 말은 협박처럼 들렸다. 기지 관리자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아마 협박처럼 들린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기뻐할 것이다. 샐은 순간 나갈까 싶었다.
"샐, 뭐라도 말해줘 봐! 왜 안 나오는 건데!"
샐리는 애가 타서 소리쳤다.
"근데요, 진짜 강제로 나오게 하는 법이 있는 거예요? 그 또 다른 자아 말이에요."
"음."
기지 관리자는 짧게 답했다.
"여긴 재단입니다."
"야, 너 큰일 났어! 당장 안 나와!"
샐리가 펄쩍 뛰었다.
"도대체 무슨 이윤데! 왜 안 나오는데!"
일이 이쯤 되니깐 샐은 나가는 것 자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유를 말하자니 너무 부끄러웠다.
"샐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기지 관리자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샐리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아, 네 말을 하네요."
샐리가 급히 둘러댔다.
"잠깐만요… 그게요… 저 때문이라네요…."
샐리는 무슨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띄엄띄엄 말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늘 하루를 스페이스 환타지스럽게 지내는 것일까. 샐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자의 마지막 말에 시위를 할 용기를 내긴 했지만, 샐은 나갈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있다가 갑자기 뿅 나타나서 뭐라고 말을 할 것인가. 샐리한테 화난 건 맞지만 당신에게 화난 건 아니거든요! 아, 뭐래니. 생각해 보면 샐리에게 화났다고 이 재단에게 피해를 입히는건 타당치 않습니다. 오 이건 괜찮다. 샐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시 집중했다. 그래,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타당치 않습니다… 그래, 그래서……. 샐리의 무의식 속에서 땡깡 부린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닌데. 뭐가 약간 아니다. 샐은 자신의 허접한 문장력을 탓했다. 나는 왜 평소에 글쓰기 연습을 안 했을까!
"…샐, 미안하니깐, 이제 나오면 안 될까?"
샐은 순간 생각을 멈췄다.
-뭐?
"나한테 화난 것 있으면 나중에 다 말해줘. 뭐든지 다 사과할게, 그러니깐 이제 나와서 일 좀 처리해 주면 안 될까?"
샐리가, 사과를 한다! 하지만 샐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성에 덜 찼다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이런 방법은 아니었다. 샐리의 사과를 듣고 싶었고, 샐리가 바닥에 꿇어서 싹싹 비는 걸 보고도 싶었고, 남의 앞에서 골탕을 먹는 것을 보고도 싶었지만, 하지만 지금 보니 이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샐은 샐리와 자리를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샐은 샐리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만난 여자들에게 얼음물을 뒤집어씌우고, 찻집 탁자를 뒤엎고, 3:3 미팅 자리에 예쁜 여자 차림으로 나서고, 문자 메시지에 욕을 잔뜩 적어서 보내는 등, 사람이 저질렀다기엔 너무 끔찍하고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행동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샐은 샐리의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삐져서도, 토라져서도 아니었다. 샐리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이 뭔가 쑥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샐리는 자꾸 샐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기에, 샐은 샐리와 말을 하지 않았다.
샐과 샐리는 서먹해졌다.
분명 샐리는 샐이 토라져서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샐은 샐리가 책상 위에 놓아둔 폭신한 조각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한 번도 샐리와 말을 섞지 않은 날이라면, 샐리는 늘 샐의 책상에 군것질거리를 올려놓았다. 주변 동료들은 샐과 샐리가 어서 화해하기를 바랐다. 특히 기지 관리자가 그 둘의 사이를 걱정하며 샐리 대신 사과한다는 말도 했을 정도이다. 샐리가 평소의 샐리답지 않다. 그 이야기를 듣는 샐도 힘들었다. 샐리에게 사과는 필요 없어, 라고 말도 했다. 하지만 샐리는 샐의 말을 잘못 받아들인 것 같았다. 주변 동료들과 기지 관리자가 샐에게 샐리의 사과를 받으라고 종용했기 때문이다. 샐리가 잘못했다. 왜인지. 샐은 샐리가 약간 쭈뼛거리며, 또 약간 수줍게, 그리고 미안한 목소리로 그동안 마음 상하게 해서…. 하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게 너무 싫었다. 샐이 샐리의 사과를 듣지 않자, 샐리의 목소리는 자꾸 기어들어 갔다. 샐은 늘 의기양양한 왈가닥 샐리가 그리웠다. 이렇게 라면 샐리의 사과를 받는다 쳐도 샐리는 계속 작아지는 샐리일 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샐은 조각 케이크의 크림을 긁으며 생각했다. 또 생각하고, 계속 생각했다. 케이크의 크림이 다 없어지자, 샐은 빵을 긁었다. 샐리는 언제나 그에게 크림 없는 케이크를 주었다. 크림을 샐리가 다 긁어먹은 다음, 그 찌끄러기를 준 것이다. 핑계는 이 빵 부분이 진짜 "케이크"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사실이었기에, 그는 샐리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작은 포크가 접시를 찌르자, 샐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만난 후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샐은 먹다 남은 케이크를 들고 천문대로 갔다. 내일 아침 샐리가 먹을 수 있게 직원 휴게실의 공용 냉장고에 있는 기지 관리자의 조각 케이크를 슬쩍 빼 와서 책상 위에 올려놓을 생각이다. 죽는 건 내가 죽겠지 뭐. 별들 따위 필요 없었다. 큼지막한 망원경의 렌즈 따위 누가 뺏어가라지. 샐은 케이크를 아무 데나 놓았다. 부스러기가 기계 사이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고장이다. 하지만 샐은 상관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었다. 샐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행히 여자와는 계속 연락이 오갔기에 쑥스럽다던가, 그런 것은 없었다.
주말에 시간 되나요?
샐이 먼저 연락했다. 지금까지는 여자가 연락하면 샐이 받는 식이었다. 샐리도 연락을 주고받는 느낌이었지만, 느낌일 뿐, 실제로 연락을 하는 것은 못 보았다. 답장이 올 때까지 샐은 무슨 기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역시 엄청 민감한 기계라 잘못 때리면 뭐가 고장 나겠지만,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짧고, 경쾌하게 울었다. 답장이었다.
오!
이 한 마디만 적혀있었다. 빌어먹을 인간이! 샐이 속으로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도서관은 월요일에 쉬는 것 같았다. 연구소라 다르려나. 공공 도서관은 월요일인데… 그… 연구소는… 빌어먹을!
아… 도서관이면 월요일….
정도까지 쳤을 때 답이 하나 더 왔다.
토요일인가요 일요일인가요.
이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답을 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혹시 나는 샐리를 변호하는 것일까? 샐리가 모르는 여자들에게 심통을 부리며 괴롭힌 것을, 이 여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샐은 조금 더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서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샐은 도무지 몰랐다. 하지만 여자의 사과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샐은 답을 보냈다.
주말이면 역시 일요일이죠!
보내놓고 뭔가 말투가 그 여자를 닮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여자가 답장을 보냈다.
오!
역시 한 글자.
다섯시란 뜻인가요?
뭔가 오! 라고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괜히 보내봤다.
오오!
그래 참 성의있는 답장이 왔다. 갈 때까지 가보잔 이야기인가. 샐도 오기로 답을 보냈다.
그럼 오십오분이란 뜻이군요.
설마 다음에는 오오오! 라고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 오오오! 라면 555…. 555초….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오오! 라고 보냈을 때 이이! 라고 보낼 걸 싶기도 했다.
토요일 다섯시 오십오분에 만나요.
여자가 답했다. 정말 그런 뜻이었나. 샐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그럼…..
"설마 기계가 망가지지는 않았겠지."
샐은 뭔가 후련한 표정으로 기계들을 내려다보았다.
토요일. 샐은 몇 벌 없는 옷 가운데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샐리를 피해 가장 많이 만났던 그 사람을 만나러 갈 때도 이렇게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옷들도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샐은 어느 옷이 가장 점잖아 보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으면 점잖아 보이기는 하겠지만, 장례식을 가는 분위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티에 청바지를 입자니 너무 후줄근해 보일 것 같았다. 구석에 독일군 군복이 걸려있는 것 같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것도 같은 것으로 세 벌 걸려있는 것 같지만 역시 무시하기로 했다. 샐리의 옷장은 항상 그득하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슬쩍 열어보았다.
-뭐 하는 거야…
샐리가 저편에서 말한다.
"옷 좀 빌릴까 해서…."
샐은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선도 스스로 바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샐리는 여자가 아닌가. 샐리는 조용했다. 제발, 야 이 변태 새끼야! 하고 고함이라도 쳐달란 말이야. 샐은 샐리의 옷장에서 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이것저것 섞어 입어야겠다.
"아 샐리. 너 이상한 데에 기어들어가 있지 마. 깨 있으란 뜻이야."
샐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 여자 만나러 가거든."
샐리는 아, 하고선 말했다. 그뿐이었다. 샐은 눈을 감고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 두 개, 바지 하나를 꺼냈다. 눈을 떠보니 도저히 볼 수 없는 이상한 조합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옷을 입고 가시겠다?
샐리의 말에 샐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옷을 갖춰 입는 것을 못 하는 샐이래도, 이 조합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냥 와이셔츠에 청바지 입고 가.
"너무 늙어 보이지 않으려나…"
샐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맞다. 난 평소에도 늙어 보이지."
샐이 중얼거렸다.
평상시였다면 샐리는 저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그 여자에게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아무것도 물어볼 것도 없었다. 꾸물거리면서 옷을 입은 뒤, 샐은 꾸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부쩍 해가 짧아졌다. 아마 다섯 시 오십오분이라면 노을이 지기 시작하겠지. 아마. 위에 겉옷을 걸칠 걸 그랬나, 싶었다. 샐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저 멀리서 타야 하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달렸다.
장소는 처음과 같은 곳이었다. 여전히 고전음악은 흐르고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똑같은 테이블에, 그 여자는 앉아 있었다. 머리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이 길었다. 커트한 투톤 머리는 어디 갔는지 원. 옷은 평범한 티셔츠였다. 그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약간 촌스러웠다.
"애프터 신청인가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샐이 받아쳤다.
"자아, 그래서 샐리씨에게는 사과를 받아내셨나요?"
여자의 눈에 웃음이 돌았다. 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샐리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뇨."
샐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
여자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술이라도 마실래요?"
"오늘은 별로네요."
"그럼 물 마셔요. 왜일까요, 샐리씨가 샐씨에게 사과를 안 한 이유는…."
여자가 고개를 살짝 눕혔다.
"샐리가 안 한 게 아니라 제가 안 받았어요."
샐은 시선을 떨구었다. 깨어있냐, 샐리.
"가혹하네."
여자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걸려서요, 그… 뭔진 몰라도…."
"이크. 어느새 남매의 상담원이 되어있군요."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상담사라며요."
샐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 샐리씨가 말했나 봐요. 그거 친구 명함이었어요."
여자는 웃고 있었다.
-…들킬 뻔했네.
샐은 샐리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했다.
"사기 친 거에요?"
"연극이죠."
"그게 사기란 뜻이라고요."
"아쉬워라."
도대체 뭐가 아쉬운 건지. 여자는 여전히 싱글거렸다.
"머리는 가발. 약간 달라 보이는 이미지는 화장. 사실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요."
여자가 말했다.
"샐씨의 말대로라면 저는 샐리씨를 속인 것이 되겠군요. 샐씨의 부탁이었지만 말이에요."
-뭐야, 이거.
드디어 샐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사람이 취중에 말한 부탁, 마음대로 들어주지 말란 말입니다."
샐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그…. 동성애… 는 뭐에요?"
"연극?"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님 진실? 믿기 나름이죠. 하지만 전 연극이라고 믿고 있네요."
"그것도 거짓말이란 뜻이군요."
샐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뭐야 이거. 뭐냐니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여자가 손을 모았다.
"그럼 샐리에게 했던 것들 모두는 다 거짓말인가요?"
샐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아녜요. 배경은 거짓이었지만. 샐리씨는 참 좋은 사람이죠. 들어보니 샐씨를 상당히 걱정하고 있던데요? 좀 다른 부분으로, 좀 격하게 표출된 것 같지만."
여자가 활짝 웃었다.
"샐리에게…"
샐이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샐리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아요."
"아."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샐리가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왠지 저랑… 그… 서먹서먹해졌단 말입니다. 샐리가 한 짓을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사과를 받는 것도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샐이 머뭇거렸다.
"일단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저를 찾아온 거군요."
여자가 말했다.
"아니, 당신 때문이라고 탓하는 건 아닌데…"
"알아요. 왠지 고해성사 분위기가 나는데…."
맨 끝은 농담이었지만, 샐은 웃지 못했다.
"농담이에요."
여자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덧붙였다.
"알아요. 근데 재미가 없잖아요."
샐이 탁자를 툭툭 쳤다. 이번엔 여자가 활짝 웃는다.
"아… 어떻게 말하지…"
샐은 괜히 고민하는 척했다.
"샐리한테 사과를 들으면 다 나아질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샐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결정했잖아요?"
여자가 턱을 괴었다.
"아마 샐씨가 영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샐리씨를 속이서라도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요."
"알아요."
"됐네요. 샐씨가 사과하면 되겠네. 역시 부끄러운 일을 사과하는 것은 술김에 하는 게 최고죠! 이번에도 제가 시킬까요?"
여자는 이미 주문을 하고 있었다. 샐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사실, 아직도 저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그래… 그렇게 나한테 사과를 받고 싶으셨어?
샐리가 투덜거렸다.
샐은 잠깐 긴장했지만, 곧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샐리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라고 이미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빴어, 너. 여자의 마음을 갖고 놀다니 말이야!
요즘 순정만화 보나. 샐은 마음이 묘하게 편해졌다.
-어차피 너도 잘못했으니깐 쌤쌤이네. 그럼 난 사과 안 해. 쌤쌤이니까.
"마음대로 해라, 뭐."
샐이 중얼거렸다.
"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샐을 쳐다본다.
"아… 혼잣말이요."
샐은 손을 휘휘 저었다.
"처음엔 샐리에게 사과를 받을 일을 생각하더니, 이젠 샐리에게 사과를 할 생각을 하니 뭔가 이상해서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여자는 웃었다. 동그랗던 눈은 곧 휘어졌다. 기지로 돌아갈 때까지 문을 열고있는 케이크 가게는 없겠지. 빵집은 열고 있으려나. 샐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 영 안 되면 기지 관리자의 케이크를 슬쩍하면 되는 것이다!
"케이크 줬으니 봐준다."
샐리가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먹으며 말했다.
샐리의 이마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덕분에 나는 직원카드에 꽂혀 죽을 뻔했다고!
샐이 투덜거렸다.
"넌 죽어도 싸!"
-내가 죽으면 너도 죽거든요?
샐이 한껏 비꼬았다.
"아무튼 역시… 이 케이크는 맛나다고. 남의 케이크가 더 맛있는 법."
-…다행이네, 맛없다고 트집 잡으면 어쩔까 싶었는데.
"더 맛있는 거 사와."
샐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기 쇼트케이크는 너무 흔하단 말이야! 뭔가 더 맛난 거 사와."
-잠깐, 그래봤자 내가…
"그래 모카 무스케이크 괜찮다."
-아 야! 그건 또 뭐야!
"자랑해야지!"
샐리가 먹다 남은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녕하세요! 샐이 저한테 무스 케이크를…"
-야! 나 약속 안 했다고!
샐이 안에서 소리쳤지만, 그게 밖으로 새 나갈 일은 없었다. 샐리는 여자 직원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었고, 그날 저녁이 되면 모든 여직원들이, 특히 기지 관리자가 자신에게 와서 케이크를 사달라고 할 것이다.
샐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늘 있던 일이라 상관하지는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