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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드 쇠라
Robert de Seu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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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화가 불명.

신상정보

출생: 1853년 3월 10일
파리
사망: 1979년 11월 8일
에손
직업: 화가, 소설가, 비평가
국적: 프랑스


로베르 드 쇠라(프랑스어: Robert de Seurat, 1853년 3월 10일~1979년 11월 8일)는 프랑스화가이자 소설가, 비평가이다. 그는 심령 매개 예술의 거장이자 프랑스 변칙예술계의 유명인 중 하나였으며 12작의 비변칙 그림과 50작의 변칙적 그림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심령 매개 예술은 장막 개변 이후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SCP 재단의 폐쇄적 관리 하에 있으며1 이로 인해 박물관과 민간 수집가를 막론하고 작품 수집이 어렵다. 심령 매개 예술 특성상 보관이 쉽지 않은 것도 이유이다. 로베르 드 쇠라는 장생한 인물으로서 프랑스의 예술가 중에서는 드물게 변칙적 수단으로 수명을 연장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방법의 내막에는 현지의 신낼캐주의 운동이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생애

쇠라는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확실하게 어떤 가문 출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1910년대 서유럽 변칙예술 사교계에 유행한 무명탈신주의 영향으로 그의 출신에 대해선 침묵하고 예술적 기량과 현재의 개조댄디즘만을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 오컬트 연합 개입으로 다수의 실존 정보가 소실되면서 그의 예술계 투신 이전의 사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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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맥, 1880년, 캔버스에 파스텔 및 심령질 도포.

쇠라가 변칙예술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0년 전시회 Sommes-Nous Devenus Magnifiques?에서이다. 그는 (현재는 소실된) 그의 첫 대외작 시맥으로서 심령 매개 예술을 변칙예술 평가층에게 공개하였다. 이 작품은 실존하지 않는 여성의 캔버스 초상을 기본으로 하여 도포한 심령질이 그림에 빙의하여 관객들에게 웃음을 터뜨리도록 만들었다2. 이에 대한 평은 각 평가자마다 상이하였지만 숙별된 사이킥 사용자기적사라면 심령과 심령질이라는 죽음이나 영혼과 직결된 요소를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는 지평을 열었음이 확실하다.

유명세를 얻은 쇠라는 파리에 작업실을 얻어 다른 변칙예술가인 쥘 에뷔테른과 그의 누이 잔 에뷔테른과 동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대부분의 비변칙 파스텔화는 이 시기에 그려졌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여 그리는 대로 낮은 가격에 팔아버렸다3. 동거인 쥘 에뷔테른은 그를 "수다스럽고, 다정하지만 (…) 반대로 그의 재료들 (심령을 이름)은 그의 예절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것들은 지옥처럼 시끄러웠다. 쇠라가 등잔 뚜껑으로 용기를 덮거나 소금을 뿌려야 고요해졌다"고 회고했다. 반면 누이인 잔 에뷔테른은 이후 그와의 스캔들의 주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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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1889년, 캔버스에 파스텔 및 심령질 도포.

1889년 프랑스 변칙예술 대박람회 혹은 Et Maintenant, On Est Cools?에 개최한 그의 작품 정신은 당시 낭만주의 소설 Les Esprit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쇠라 작품사상 최대의 노력을 쏟은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정신의 모델 되는 여성은 동거인 잔 에뷔테른이나 결정적으로 체형, 모발 색과 헤어스타일 따위는 상기한 소설의 여자 주인공의 묘사를 더 참고하였다. 이 작품은 무려 셋이 넘는 심령체를 내부에 박아 넣었으며 기아스로 하여금 세 심령이 서로를 관측하고 조종하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이들은 그림 속 여성의 심리를 완벽히 학습한 원시적 변칙 인공지능으로서 연극을 수행함으로서 '살아 있는' 그림이 되었다.

이 작품은 그 예술적 평가가 어떻든 끊임없이 관객과 상호작용함으로서 막대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게다가 실존 심령을 삽입함으로서 전시장의 온도가 낮아지고 관객들은 공포, 위화감, 소름 따위 다양한 감정이나 감각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4. 이에 대해 쇠라 본인은 "사람들은 텍스트 바깥의 텍스트 묘사를 낯설어한다. 게다가 묘사와의 상호작용 (…) 예컨대 묘사된 인물이 관객을 묘사하는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고 자화자찬했다.

이 작품은 지성 재료로서의 유령 사용 가능성을 더욱 크게 알렸다. 게다가 20세기 이전까지 프랑스 파리는 살아 있는 인간 당 유령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였기 때문에 유령 사냥이 가속화되어 골렘, 사역마와 같은 고도의 기적술을 요구하는 지성 재료들을 손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판도에 대하여 쇠라 본인은 "고유성의 범람"을 우려하였으며 실제로 재료로서 유령을 이용하는 근현대 화가, 조각가 등이 파리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음이 사실이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 무렵 쇠라와 동거인 잔 에뷔테른은 연애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애는 그로 하여금 다양한 시도를 하도록 부추겼다. 습작 소설인 까마귀 (le corbeau)가 작성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잔 에뷔테른의 오빠인 쥘 에뷔테른과는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어 동거하던 작업실에서 나와 잔 에뷔테른과 동거하게 되었다. 이후 1901년 5월 13일 둘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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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잔 에뷔테른, 1903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연결된 변칙세계 사건인 제5차 오컬트 대전 직전, 로버트 드 쇠라는 부인 잔 에뷔테른과 함께 파리에서 도피한다. 본인은 이후의 사교 담화에서 자신은 자원 입대하였으며 '조국 프랑스와 유럽의 예술계'를 위해 싸웠다 주장했다. 다만 주류 사학계의 연구는 이들 부부가 제3세계의 신낼캐교도들과 거래하여 이들의 보호를 받았음을 시사한다5. 그가 신낼캐교도에 무엇을 대가로 주었는지는 불명이다.

1935년 5월 6일, 로버트 드 쇠라는 파리로 돌아와 다수의 미공개 소설을 발표하고 신인 비평에 착수한다. 그러나 이 시점 그의 작품들은 후대에 의해 혹평받았는데 특히 노골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형태의 제국주의 옹호, 초월주의, 에로티시즘이 드러났음에 더해 이전의 미학적 세계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인 비평에 있어서도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문학적 세계관의 변형이 이전의 신낼캐 경험과 뚜렷한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6.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제6차 오컬트 대전 직전, 로버트 드 쇠라는 심령 매개 조각 지망생이던 카미유 보뇌르(Camille Bonheur)와 불륜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에 잔 에뷔테른이 항의하였으나 이번에는 전쟁 이후 그녀가 아닌 카미유 보뇌르만을 데리고 파리에서 탈출했다7. 진 에뷔테른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몸이 약해져 1941년 폐렴으로 병사했고 1942년 유령이 되어 프랑스의 밴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와 보뇌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프랑스계 신낼캐교로 도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40년 비시 프랑스나치 독일에 항복, 이후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로 진출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역시 신속히 전쟁에 노출되었고 1년 후 태국-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더해 현지 프랑스계 신낼캐교는 현지 민족주의 단체에 의해 해산되었다. 로베르 드 쇠라는 이 시점을 "인생 최악의 황혼"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포에 떨었다.

1943년 8월 11일, 애인 카미유 보뇌르가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상심한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으나 실패한다. 1945년, 추축국 패전 직전 베트민이 현지에서 8월 혁명을 일으켰고 현지 프랑스계 초상세력들이 다수 해체되자 그는 결국 밀항하여 프랑스 파리로 되돌아간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팔아치우고, 완전히 작품 활동을 중단한 후 SCP 재단연합군 오컬트 구상을 피해 은둔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전처 진 에뷔테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유령 상태로 살아 있었다는 점 또한 은둔의 이유였다고 생각했다8. 이후 그는 일드프랑스 에손에 거주하며 변칙예술 밀거래를 주선하며 20여년간 살다가 1979년 11월 8일 사망했다.

사인은 불명인데, 그의 비정상적으로 긴 생애를 미루어 보면 수명 연장 용도 기적술이나 초상의약품 오남용, 수집한 변칙예술 관리 실수로 인한 사고사9, 결핵이 사인으로 추측된다. 변칙예술계의 주요 논쟁거리이자 가십이었던 처남 쥘 에비테른 (혹은 그의 유령)에 의한 암살은 증거가 희박하다.


작품세계

로베르 드 쇠라는 심령 매개 예술의 선두주자이지만, 흔히 후배격 심령예술가들이 선호했던 죽음을 다루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세계가 뚜렷한 전쟁 이전 작품들은 대부분 영혼은 재료이며 관찰자를 자극하고, 관찰자와 상호작용하며, 마치 인격체처럼 실존하는 이상적 인물을 표현하였다. 특히나 로베르 드 쇠라가 여성에 대한 그림을 자주 그렸음도 이의 연장선상10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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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1905년

그림엔 분홍색, 보라색, 붉은색의 다양한 변용이 자주 사용되었고 녹색과 파란색은 드물었다. 특히 그는 평상시 "신록(verdoyante)이야말로 가장 천대에 가까운 색이다"는 주장을 자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11. 현대 심령이 백색, 푸른색과 결부되는 것을 생각하면 로베르 드 쇠라가 정말 현대의 심령 매개 예술의 선두주자인지 아니면 그 가능성만을 제시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후대의 평가와 논란

심령 매개 예술의 대표적 인물으로서 그의 작품세계는 꾸준히 심령 및 사후존재 인권운동 단체에 있어 비판의 중심이 되어 왔다. 특히나 심령을 재료로서 다수 작품을 만든 사실상 첫 인물이기 때문이었으며 유령 매입 및 판매에 있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 전적 역시 이유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2026년 8월 12일, 파리의 프랑스 변칙예술사박물관 앞에서 벌어진 심야클럽 시위에서 대표 유서진이 쇠르 작품 레플리카를 불태우는 행동을 전개하였다. 시위에서 심야클럽 측은 그의 예술에 대해 "가학적 살인예술"이라고 비판했다.

동시에 그가 분명 서구 식민지주의를 옹호하였고 이것이 신낼캐주의의 영향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면 그의 사생활, 특히 부부생활에 대한 논란이나 주목점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변칙예술 교수 위성철위인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인생은 대부분이 제1차 오컬트 대전 이전의 미담 뿐이라고 언급 및 지적한 바 있다12.

이러한 논란에도 로베르 드 쇠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변칙 재료 예술가이자 개척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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