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로 뒷골목 어느 한 구석에는 최대한 집중을 해야만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헌책방이 하나 있다.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벌이가 되는 모양인지 이제까지 주인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에서 바뀌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지금 책방을 찾아온 두 사람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입구 위에 있는 종이 문이 열리면서 딸랑거렸다. 맞은편 구석에 있는 카운터에서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인 뒤에는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나머지 벽은 모조리 책장과 책으로 꽉 차있었다.
손님은 두 명이었다. 정갈한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남녀였다. 둘 다 최대한 튀지 않으려는 차림으로 보였지만, 각자의 특성은 나름대로 살려둔 게 보였다. 남자의 목에는 오팔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여자는 분홍색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 장갑을 꼈으며, 얼굴 곳곳에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남들에게 인상이 남을법한 꾸밈이었지만, 이들 등에 멘 기타 가방이 이런 별남을 감춰주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스까?” 주인이 커플 밴드에게 인사했다.
“책을 하나 찾고 싶어서 왔는데요.” 남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책이믄 찾아줄 수 있는디, 어떤 책 말씀이요?”
여자와 함께 카운터로 다가오면서 남자가 말했다.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주인의 오른쪽 눈이 살짝 떨렸다. “논어 말이여?”
“그게 책 제목입니다. 오직 여기서만 구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주인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기 찾는 사람이 많이 읎어가지고… 아마 창고에 있을 텐디, 잠깐 따라오실랑가?”
“기꺼이요.”
주인이 먼저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커플 밴드도 곧장 따라왔다. 창고는 세 사람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로 책들이 가득했다. 한 쪽 구석에는 조선 시대에서나 볼 법한 붉은 실로 엮인 책도 보였고, 그 위쪽 천장에는 죽간도 보였다.
그리고 주인은 여자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 조선 시대 책 안에서 권총을 꺼내 두 사람을 겨누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작 기타 가방 속에서 총과 일본도를 들고 주인을 겨누고 있었다.
“총이 아니라 무전기를 꺼냈어야지.” 여자가 입을 열었다.
“해치고 싶지 않고, 소란 피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자가 말을 이어받았다. “제05K기지로부터 미리 연락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기는 내려두고 얘기하죠.”
“아, 재단 쪽 사람인가.” 주인이 총은 내리지 않고 말했다. “보안은 아무리 걱정해도 부족하지가 않거든. 그리고 보통 먼저 위협한 쪽에서 무기를 먼저 내려야 하지 않나?”
그리하여 남자가 먼저 총을 내렸지만, 여자는 일본도를 내리지 않았다. 이 총과 칼의 대치를 잠시 지켜보던 남자는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뭐, 이건 나중에 두 사람이 알아서 동시에 내리기로 하고.” 남자가 재단 마크가 그려진 명함을 탄창에서 꺼내며 주인에게 보였다. “SCP 재단 제05K기지 외무부 소속 오팔 요원입니다. 이쪽은…” 남자가 여자 쪽으로 눈치를 주며 말을 흐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끊길 즈음에 두 사람이 각자의 칼과 총을 내렸다.
“SCP 재단 제05K기지 외무부 소속 루비 요원입니다.” 여자가 말했다.
“국가초상방재원, 광주감시소 소장 윤원상이요. 만나서 반갑소.”
책방 지하에는 충장로와 금남로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감시시설이 있었다. 오팔과 루비는 그 중에서 안전가옥으로 기능하는 모텔 지하의 공간에서 대기했다. 윤원상은 잠시 오늘 책방 장사를 접으러 다녀온다고 했다.
방문이 슬쩍 열리더니 모텔을 관리하는 윤원상의 부하직원이 쟁반 위에 요구르트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대학생 한 분이 오셔가지고 잠깐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뭐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시죠.”
“아뇨, 괜찮습니다. 외근 나왔을 때 남이 주는 음식은 안 먹는 게 원칙이거든요.” 오팔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부하 직원은 원하시면 그러라는 표정으로 침대 옆 탁자에 요구르트를 올려놨다. 그 순간에 윤원상이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안 마신디야?”
“네, 외근 나왔을 때 외부인 음식은 안 먹는데요.”
“하여간 재단도 참 사람 빡세게 굴려잉.”
“이 바닥 사람이 다 그렇죠, 뭘.” 이 말을 마치고 부하 직원은 밖으로 나갔다.
윤원상은 침대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두 사람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요구르트 하나에 손을 뻗고 뚜껑을 벗겨 한 번에 마셨다. 루비가 살짝 침을 꼴깍인 것 같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겨?” 윤원상이 입을 훔치며 얘기했다.
“사람 한 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재단이 뭣허러 생긴 지 얼마 안 된 조직에 찾아와서 그런 걸 부탁한데? 추적능력은 니들이 더 발군 아니여?”
“이번 일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기가 곤란한 문제거든요.”
오팔이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루비를 툭툭 건드리자, 루비는 안주머니에서 증명사진 크기의 사진을 하나 꺼냈다. 안색이 창백하고 볼이 움푹 들어간, 길쭉한 얼굴에 안경을 낀 노년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루비가 이 사진을 윤원상에게 들이댔고, 오팔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누군지 아시죠?”
“백사(白蛇) 임정표…” 윤원상이 망설임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죽지도 않고 살았다는 건 알지만, 재단이 찾는 줄은 몰랐군.”
“살아있는 걸 아셨습니까? 역시 정보력 하나는 저희와 뒤지지 않군요.”
“매 4월마다 여그 근처를 싸돌아다니거든. 주로 광장 쪽을 서성거리다가 가드라고.”
이번엔 오팔이 눈살을 찌푸릴 차례였다. “‘강골 사업’ 개발자가 광주에요? 뭐 속죄라도 하려고 왔답니까?”
“그럴라믄 차라리 5월에 오거나 묘지라도 들렀어야지. 써글놈의 자식. 속죄나 추모는 개뿔. 추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거여. 자신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던 그 때의 추억. 그 이후로 자신의 조직이 해체되고 자신의 자리가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 그저 지 인생의 황금기였을 다른 사람의 지옥을 회상하러 왔을 거여.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자슥.”
윤원상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고는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이윽고 숨을 길게 몰아내쉬고는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뇨 저희도 이해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도…”
“그래, 그래. 예순에 가까워지면서도 이런 일을 맡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게지.” 확실히 아까보단 풀어진 표정으로 윤원상은 아직도 뻗고 있는 루비의 팔에서 사진을 빼냈다. “그래서 이 뱀새끼는 무담시 찾는 거여?”
“저희 중에서 이 양반을 실제로 갈아마셔버릴 사람이 있어서요.” 오팔이 편안한 척 웃으면서 말했다.
망월동 묘지에 두 남자가 걸어간다. 아니,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뒤의 사람이 든 권총에 끌려가는 거에 가깝다. 끌고가는 이는 자신의 짐을 구묘역과 신묘역 사이에 무릎 꿇렸다.
살아있는 짐을 끌고 온 남자는 이 공원을 잘 알았다.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갔을 때 이 묘역에 안치시켰다. 80년 5월에 집에 오지 않는 삼촌을 걱정하며 밖으로 나섰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머니는 남자의 왼쪽에, 동생은 남자의 오른쪽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죄해라"
서 있는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무릎꿇은 남자는 파들거리며 떨기만 할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공포 때문이라기 보단 좁쌀만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게 작지만 완고한 몸집에서 보였다. 그렇게 무릎꿇은 사람이 떠는 진동음만이 묘역의 유일한 소리가 되자, 총을 겨눈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게 내 마지막 자비겠군."
남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누르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남자의 팔을 밑으로 확 내렸다. 갑작스레 격발된 총알은 무릎꿇은 남자의 오른발을 스쳐지나갔다. 총을 든 남자는 즉각적으로 뒤로 총을 휘둘렀지만, 습격자는 간단하게 몸을 숙여 피하고 품에서 총을 꺼내 남자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남자의 총은 어느새 습격자의 머리를 향해있었다. 격한 움직임 속에서 습격자의 오팔 목걸이가 달빛에 반짝였다.
"갑자기 복수를 하러 나가신다길래 어디 다른 지방에서 잡아오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온 놈을 납치해올 줄이야. 등잔 밑이라는 게 참 어두워요. 동의하시죠?"
"백, 아니 오팔, 날 죽이려고 온 거냐?"
"죽이다뇨? 저희 외무부의 전설적인 선배님을, 그리고…"
오팔은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제05K기지의 가장 깊숙한 비밀까지 말하기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말리려고 온 겁니다. 이런 식으로 더럽게 처리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요."
"하, 말리러 왔다니, 그래서 놈이 도망치게 두는 거고?"
"무슨 말씀. 그런 대비는 잘 해놓았죠."
둘은 무릎꿇은 남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반쯤 일어선 자세였지만, 목을 위협하는 긴 칼날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루비는 그보다 더 편한 자세로 자신의 칼을 남자의 목 바로 앞에 들었다.
오팔과 남자는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유는?"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선배가 임정표 잡으러 갔다니까 죽이지 말고 생포해오라고요."
"뭐하러?"
"뭐 어디에 쓰겠죠. 인성 빼고는 쓰임새 있는 양반이잖아요, 저거."
"우리가 언제는 상부 말 들었냐."
남자가 총을 내렸다. 신뢰의 보답으로 오팔도 총을 내렸다.
"따르는 척이라도 하잖아요. 무엇보다 더 위에서 온 명령이면 최대한 따르는 방향으로 가고. 반항의 최전선에서 살짝살짝 간보기 하는 거랑 항명이랑은 분명히 다르죠, 암."
오팔은 품에 총을 집어넣고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 물었다. 곧바로 라이터를 꺼내 키려고 했지만 스파크만 튈 뿐 불이 붙지 않자 포기하고 라이터와 담배를 모두 집어넣었다.
"그래서 당신이 죽이면 좀 곤란해지는 거 같아요. 위에서 필요하다는 사람을 저희 손으로 죽이면 이미지가 좀 그래지니깐. 그래가지고 외무부장이 특무부대원 데리고 말리러 나왔지."
갑작스레 남자의 몸에 힘이 빠졌다. 남자는 한숨을 크게 쉬고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만든 사람을 재단에 데려가서 쓴다는 거지… 그거 01K에서 내려온건가? 그 케이크 아가씨는 말이 더 통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오팔은 다시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몇 번 당겼다. 작은 스파크만이 탁탁 튀었다.
"어쩌겠습니까. 결국 여기 사람이 아닌데. 저도, 루비도, 이사관님도. 케이크 씨도 그럴 겁니다."
남자는 이 말을 듣고 아까의 침묵보다 더 길게 오팔을 쳐다보았다.
"돌아가자. 기지로."
루비가 칼을 치웠다. 임정표는 다리에 쥐가 났는지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기지로 돌아가는 낡은 다마스는 묘한 긴장감에 조용했다. 맨 뒤에는 임정표가 침묵한 채로 앉아있었다. 운전석에는 오팔이, 조수석에는 루비가, 가운데에는 그들의 대선배가 임정표에게 총을 겨눈 채로 앉아있었다. 마치 차의 움직임 탓에 방아쇠가 당겨지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내 차는 무등산의 초입에 들어갔다.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헬기도 주변에 날아다녔다. 차는 계속해서 구불구불한 길을 헤쳐나갔다.
"좀 빨리 가자. 이러다 자정 넘겠다." 루비가 푸념했다.
"아니 비밀 작전이라고 이런 똥차를 지원한 기지를 탓해. 이게 최고 속도라고." 오팔이 마주 푸념했다.
"아니 엑셀을 더 밟아보라고. 야, 잠깐 나와봐."
"야, 면허도 없는 애가 왤케 운전대를 탐내!"
오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루비가 운전석에 몸을 구겨넣으려고 하면서, 차가 좁은 산길에서 크게 흔들렸다. 방아쇠에 잠깐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임정표가 쭈그러들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유일하게 흔들림없이 앉아있었다.
"야! 미친! 죽고싶어!?"
"순순히 운전대를 넘겨주면 별 일 없을 걸!"
"불법이라고!"
"어차피 우린 존재 자체가 불법이야!"
"갑작스러운 사회학적 논의 만들지 ㅁ..!"
오팔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다마스가 끝이 났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차가 멈춰섰다. 전조등 사이로 연기도 보이는 듯 했다.
"오 좆됐네."
"야호 좆됐다."
앞좌석의 두 사람이 달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물차 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기지로 지원요청 해야겠다. 여기 신호 잡히나?"
"잡히는 곳으로 가야지."
"얏호 시발.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자. 선배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녀와라."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오팔과 루비는 말이 끝나자 마자 차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내 창문 옆으로 아른거리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재단 차량답게 썬팅을 짙게 한 창문은 담뱃불마저도 쉽게 보이게 하지 않았다.
갑자기 임정표가 웃었다.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남자의 눈은 다시 망월동 묘지에 들어왔을 때로 변해갔다.
"그래,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 속 후련하게 죽이려고 묘지에서 그 생쇼를 했는데, 윗사람 때문에 막히다니. 정말 속이 불편하겠어. 그렇지?"
남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임정표는 뱀의 혓바닥을 놀렸다.
"그래, 어쩌면 우린 닯았을지도 몰라. 난 상부에 의해 꼬리와 목이 동시에 잘렸지. 자네는 용서 못할 복수심을 상부에 의해 가로막혔어. 난 사람을 죽이게 뒀지. 그리고 자네도 사람을 죽게 뒀어. 결국 우린 같은 편인 거야. 왜 그렇게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복달인가? 날 그냥 받아들여보라고."
남자의 표정은 분노에서 변하지 않았다. 목소리 톤은 얼굴에 비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용서나, 인정은 당사자의 반성하는 마음이 우선해야 하는 거지. 너에겐 그게 없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쓸데없는 자신감은 넣어둬. 어떻게 할지는 도착해서 정해진다."
"나에겐 쓸모가 있다지 않나? 재단의 현실과 타협을 좀 해보는 거야. 그 때처럼! 재단은 항상 그래왔다고. 악과 손을 잡는데 주저함이 없지. 그러니까, 괜한 짓거리 하지 말라는 거네. 난 이제 재단의 보호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픽, 하는 웃음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이젠 임정표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결국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본인 목숨을 어떻게든 보장받고 싶어하는 거였군. 정말 치밀하면서도, 정말 겁쟁이야 당신은. 그래서 살았다는 안도감 하나 때문에 중요한 사실 두 개는 모르고 있군."
"두 개?"
"하나," 남자가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헬기 소리가 아까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둘," 남자가 손을 내리며 바로 말했다. "쟤네 담배 안 펴."
순간적으로 강렬한 불빛이 차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서있던 곳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었다. 담배 대신 거대한 플래쉬라이트가 두 사람 손에 들려 있었다. 임정표는 쏟아지는 빛을 막아보려고 하다가 남자의 자리에는 빛줄기가 닿지 않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안 다니는 조용한 산길에서, 임정표만이 위치가 노출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죽은 격발음.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 뇌수가 튀는 소리가 짧은 간격 하에 한꺼번에 들렸다.
남자는 임정표의 마지막 움직임이 멎고 나서야 한 번도 쏘지 않은 총을 품에 집어넣었다.
"네, 윤 소장님, 명중했습니다. 솜씨 좋은 부하를 두셨네요. 헬기 저격 어렵다고 하던데."
오팔은 밖에서 몰래 협조해주었던 방재원 인원들에게 연락하는 중이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한 루비가 먼저 조수석에 들어와 앉았다. 차가 고장난 건 진짜니까 어쨌든 본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그러다가 여전히 뒷좌석을 바라보는 남자를 발견하고, 루비는 말을 붙였다.
"만족스러우신가요? 역보안부장님."
역보안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루비가 생긋 웃어보이자, 흐뭇한 미소도 보였지만, 바로 사라졌다.
"시원섭섭해. 결국 내가 현실에 타협해버린 걸까 싶어서. 보통 복수는 자기 손으로 하기를 원하잖아."
"그렇죠. 모두가 통쾌한 걸 원하긴 하니까. 하지만 혼자 지기에는 너무 큰 짐일지도 몰라요."
역보안부장이 코웃음쳤다. 기지 이사관이 데려왔을 때부터 본 아이인데, 어느 순간 너무 훌쩍 커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선배가 좀 져야겠습니다. 상부에서 명령내려온 거, 딱히 연기나 농담이 아니었거든요."
어느새 운전석으로 들어온 오팔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하, 그래 우리가 상부 말은 안 들어도 후배 말은 들어야지. 이번 일 덮으려면 오랜만에 협잡질 좀 제대로 해야겠는걸."
"뭐 도와드려요?"
"됐다. 이건 '우리'의 일이야. 그리고 복수의 마무리지."
제05K가 보낸 견인차가 도착했다. 견인차는 다마스 앞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췄고, 오팔과 루비는 운전자를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역보안부장은 조수석 뒤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조수석으로부터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모습을 감쌌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