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 진짜 가는 곳곳마다 시비네.”
탑차에 얻어 타고 검문소까지 달려온 스트링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사람의 존재가 영 거슬렸다.
‘그래, 처음. 가넷은 처음부터 어떻게 된 거지?’
스트링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떤 이유로 가넷이 잠재적인 변칙 개체에 잠입했으며, 개체에 대해서도 꽤나 긴 시간 동안,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알고 있었다. 가넷이 들어간 직후에 재단에선 가넷을 구출하고 개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 팀이 파견되었으며, 그 책임자로 화이트가 들어온 상태다. 그 사이 가넷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흔적을 남겨뒀다.
‘대체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가넷은 왜 이런……’
한참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작전 장소 중앙에 다다랐다. 스트링은 주변을 둘러보며 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려오기 전보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좀 더 적어진 느낌이 들었다. 스트링은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전투복 차림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전술 팀은 안에 진입했나요?”
“전술 팀? 아아, 특무부대 말인가요? 아뇨,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한답니다. 저기 앞에 서 있네요.”
직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건물 입구 부분에 정렬해 있는 십여 명의 전투복 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다. 직원에게 인사한 스트링은 거의 뛰다시피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중엔 얼굴이 익은 사람도 있었다.
“아, 스트링 박사님. 다시 뵙네요.”
케일렙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스트링과 케일렙 쪽을 쳐다보았지만, 특별히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케일렙, 오늘 아침에 진입했을 땐 어땠나요?
“아아, 기밀이긴 하지만, 스트링 박사님이시니까 그냥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우리 들어가면 좀 있다 전환될 정보니까. 처음에 들어갔을 땐 그냥 허름한 폐건물 모습이더군요. 그런 형태의 구조는 시야에 걸리는 게 없으니까 탐색하기 수월해서 쉽게 끝나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말이죠.”
케일렙은 고개를 쭉 빼며 앞에서 다른 직원과 기기를 들여다보는 지휘관의 눈치를 보고선 말을 이어 나갔다.
“위층 수색은 다 끝났어요. 정말 별거 없었고요. 그런데 건물 구조상으론 지하 3층까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안 보이더라고요. 설계도에 나와 있는 위치엔 계단도 없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바닥이 끝났어요. 그 뒤론 아예 갈 방법이 없다 생각해서 밖으로 나왔고요. 이번엔 회수 장비를 동원해서 안에 뭐가 있든 떼어내서 들고 나올 계획입니다.”
“케일렙, 자리 지켜라. 5분 뒤에 진입한다.”
지휘관이 케일렙이 아닌 스트링을 쳐다보며 소리 질렀다. 케일렙이 경례하는 동안 스트링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지휘관과 케일렙에게서 등을 돌리던 스트링은 무심코 전술 팀의 다른 요원들의 부서 마크를 훑어보았다.
‘웬 내무부 소속 요원들이 이렇게 많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저만치서 화이트가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느긋해 보일 정도로 태연했던 어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화이트는 이상하리만치 굳은 채 스트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과장님. 먼저 인사 못 드렸네요. 지금……”
“스트링, 따라오게.”
짧게 말을 던진 뒤 화이트는 곧장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당황한 스트링이 서둘러 뒤쫓아 갔다.
“과장님?”
“시간이 없어. 얼른 차에 올라타.”
거의 뛰다시피 하여 검문소 쪽으로 간 스트링과 화이트는 열려있는 밴에 올라탔다. 차량은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을 꺼내 들여다보는 화이트에게 스트링이 물었다.
“과장님?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잠시만, 지휘관님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예정대로 진입 후 대형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다른 인원은 다 철수했습니다. 행적 확인된 마지막 인원은 제가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네.”
태블릿을 통한 화상 전화로 대화를 마친 화이트는 기기를 덮고 카시트에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링은 화이트에게 재차 물었다.
“과장님, 저한테 설명을……”
갑작스런 굉음에 스트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스트링은 한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옆면 의자에 거꾸로 처박혔다. 혀를 씹은 스트링은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뭐……!”
차량은 갑자기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다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부딪혀 멈춰 선 차량은 기우뚱하더니 제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스트링 주위의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트링! 스트링! 밖에 나가서 다른 차에 타게!”
흐릿한 가운데 화이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고개를 털어낸 스트링은 기어서 깨진 유리창으로 나갔다. 먹먹한 물결 소리는 이윽고 커다란 굉음소리로 바뀌어갔다. 총소리였다.
스트링은 입에서 핏덩이를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머리 위로 빠른 무언가가 지나갔다. 스트링은 다시 주저앉았다.
“박사님!”
누군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스트링은 저항했으나, 붙잡은 팔의 힘이 더욱 셌다. 그는 끌려가다시피 하며 수풀 속으로 기어갔다.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 앉았다.
“박사님! 정신 차려요!”
갑작스레 눈앞에 불이 번쩍하더니 왼쪽 뺨에 얼음을 갖다 댄 느낌이 들었다. 얼얼한 뺨을 감싸자 초점이 서서히 들어왔다. 케일렙이었다.
“따라와요!”
이번엔 그의 팔뚝에 기대며 일어섰다. 스트링은 케일렙의 부축을 받아 뛰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등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스트링은 케일렙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연기가 나는 원래의 밴을 돌아가자 수풀 너머에 문이 열린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좁은 흙길을 둘러싼 빽빽한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서 밴에 올라타자마자 밴이 출발했다. 바람에 맞서며 케일렙이 문을 닫는 동안 스트링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스무 발걸음 너머에서 수십 개의 불꽃이 번쩍였다.
“적대 조직의 습격이에요. 벨트 매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적대 조직이라니?”
스트링의 손이 벨트에서 빗겨나 제대로 매지 못하자 케일렙이 끼워주며 말했다.
“이번 작전은 모두 덫이었어요. 재단 안에 숨어 있는 스파이를 찾아내려고!”
흙길 위에서 밴이 덜컹거리자 케일렙이 윗 손잡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 건물 안에 있던 개체를 어느 요주의 단체에서 훔쳐 갔다고 들었어요. 반만! 그래서 나머지를 가지러 분명히 올 거고, 나머지가 있다는 걸 알려준 누군가도 함께 잡아들이기 위해서 작전을 짠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면 가넷은요? 가넷은 어떻게 된 거에요?”
“가넷 박사님은 건물 안에 잘 계십니다. 전술 팀의 절반은 저 건물 안으로 진입해서 경계 중이고, 나머지 절반 중 다시 반은 남은 직원분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제가 있는 반은 마지막 호송 팀 호위를 위해 따라왔어요.”
밴이 격하게 흔들렸다. 공중에 떴다 내려온 케일렙이 소리 지르듯 말했다.
“지금 우린 57-2 기지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박사님과 일부 직원들은 그곳에서 보호하기로 되어 있어요!”
갑작스레 케일렙의 어깨에 달린 무전기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케일렙은 이어피스를 눌러 전환한 뒤 스트링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외쳤다. 동시에 차량 옆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스트링은 의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엎드려요!”
케일렙은 차 문 옆에 난 스위치를 눌렀다. 창문 옆에 살짝 열린 실틈 사이로 총구를 내밀어 발사했다. 귀를 때리는 발포음이 계속해서 터졌다. 다시 한번 커다란 폭발이 반대편에서 터졌다. 잠시 삐끗한 차량은 다시 질주했다. 탄창을 갈아 끼우며 케일렙이 다시 소리 질렀다. 곧바로 차량 앞이 폭발했다. 창문 너머로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갑자기 터진 하얀 섬광으로 하얗게 물든 창문에 가느다란 실금이 길게 내달렸다. 유리에 비쳐 더 짙어 보이는 잿빛 하늘 아래로 새까만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올랐다.
“터널로 진입! 터널로 진입!”
한동안 수풀을 헤치며 달리던 차량은 갑자기 터널로 진입했다. 주황색 전조등 아래 이따금 비추는 벽면은 차가운 금속면이었다. 더 이상 굉음과 폭발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후, 굉장했네요, 박사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데요.”
간신히 대답한 스트링의 말에 케일렙은 시원하게 웃으면서도 눈은 창문 밖에서 떼질 않았다. 스트링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터널이 끝나자 길게 뻗은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 주변으로 새까만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텅 빈 이차선 도로를 따라 달리던 밴은 공장 지대를 지나 외곽으로 들어섰다. 외곽의 좁은 도로 끝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검문소가 보였다. 철조망과 감시탑 사이의 검문소를 멈추지 않고 지나친 밴은 공터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스피커에서 째지는 목소리가 터지면서 밴의 문이 덜커덕거리며 열렸다. 스트링은 땅에 내려서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늘이 잠시 노랗게 보였고, 저 멀리서 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두들기며 케일렙이 지나갔다.
“고글이랑 헬멧 쓰세요! 안에서 뵙겠습니다!”
스트링은 허리춤을 뒤졌지만 고글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헬멧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자 시큰한 통증이 머리부터 턱까지 내달렸다. 앞주머니에서 액체가 든 주사기 하나를 꺼내 허벅지에 찔러 넣자 약물이 천천히 퍼지는 게 느껴졌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스트링은 주위를 살폈다. 매끈한 군청색 벽이 높게 둘러싼 넓은 구역의 양 끝 벽에 검은 차량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 사이 공간에 몇 대의 밴이 불규칙하게 서 있었다. 새까만 구멍이 나지 않은 차량이 없었다.
“스트링! 이쪽이네!”
멀리서 화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링이 고개를 돌리자 차량 건너편에서 화이트가 자리에 앉아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텐트와 칸막이가 가득 서 있었고, 하얀 가운과 파란색 수술복을 입은 의료부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처치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임시 구호소의 모습이었다. 스트링은 화이트에게 뛰어가 그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갑한 전투복을 벗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스트링이 물었다.
“과장님! 다치지 않으셨어요?”
“보다시피, 꽤나 굴렀지. 허허.”
“구른 정도가 아닌데요, 과장님.”
너털웃음을 짓는 화이트는 왼팔에 스플린트를 감고 팔걸이를 목에 맸으며, 같은 쪽 다리는 전체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얼굴은 군데군데 까만 멍이 들어 상당히 아파 보였다.
“자네 학부생 때 졸업 논문으로 낸 진통제가 여기서 잘 먹히지 않나. 난 기쁘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우선 이곳에서 움직이세. 듣는 사람이 많으니.”
스트링은 몸을 일으키는 화이트를 부축했다. 화이트는 목발을 짚으며 구호소를 가로질러 갔다. 멀지 않은 곳에 반듯한 벽돌 모양의 건물로 향한 화이트는 스캐너에 자신의 카드를 댔다. 문이 열리고 나서 바로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음? 화이트 박사님, 벌써 오셔도 됩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스트링은 고개를 들었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마주 선 딕슨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게 선 채로 화이트에게 팔을 뻗던 딕슨의 뒤에서 톰슨이 나와 인사했다.
“무사한 걸 보니 다행입니다, 스트링 박사님. 화이트 박사님은 좀 더 쉬시다 오시지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이 친구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화이트를 자리에 앉힌 뒤, 스트링은 책상에 기대어 선 딕슨에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화이트는 그런 스트링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걱정 말게, 스트링. 기지로 데려온 직원들은 모두 신원 확인이 된 사람들이야. 안심하게. 또 윤리위원회 소속 분들 아닌가.”
“아닙니다, 다른 일로 이분께 실수를 했습니다.”
스트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딕슨 씨, 어젠 제가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급하다 보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비록 저와 톰슨은 소속된 기지가 다르지만, 저라도 톰슨이 위험에 처했다면 같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동료니까요.”
“실없는 소리를 하는 군, 딕슨. 이리 와, 눈치 없이 알짱거리지 말고.”
톰슨은 딕슨을 끌고 사무실의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널찍한 사무실 안엔 다치지 않은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이 다른 기지에서 온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 설명해 주세요, 과장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스트링은 화이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무 의자에 가라앉듯이 기대앉은 화이트가 말했다.
“처음 우리가 있던 작전 장소의 개체를 발견한 건 스틸러스라는 이 지역의 현장 요원이었네. 마을에서 실종 신고가 두 건 들어오자마자 자체 조사에 착수할 정도로 우수한 요원이었다더군. 삼 주 전에 첫 보고가 올라왔고, 이곳 기지 관리자는 근처에서 의료 시설 점검 중이었던 가넷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에게 조사를 명령했네.”
“맞아요, 그때는 저와 가넷이 시설 점검을 할 순번이었어요. 로드는 기지에서 잡무 중이었고요.”
“여튼, 개체에 대해선 대강 파악이 되어서 보고를 올린 모양이야. 요원이 직접 목격한 바로는, 저 건물 지하 2층엔 수영장 시설이 있는데,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수영장의 물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은 모두 원인 불명의 임신을 하게 된다더라고. 남녀 불문으로 말이야.”
“남자고, 여자고 말이요?”
“그래. 여자야 어떻게든 생물학적으로 가능은 하다고 쳐도, 남자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지. 수영장에서 임신을 하게 된 사람들은 물에서 나오는 즉시 출산을 한다고 하네. 이 과정에서 여자는 통증 없는 자연 분만을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배가 터지며 출산을 한다고 하네. 물론 남자와 태아 둘 다 사망하게 되지.”
스트링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럽네요. 그런데 뭐가 문제였나요?”
“보고서도 깔끔했고, 희생자도 총 여섯 명 정도인 선에서 마무리되어서 사령부는 특별하게 생각 안 했나봐. 그런데 이틀 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가넷은 그 자리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네. 개체와 요원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총격전이라면 설마……”
“그래, 요주의 단체지. 그 자리에서 파괴를 하지 않고 들고 간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반란 쪽이 아닌가 싶네. 하지만 꽤나 큰 실수를 했지.”
“실수요?”
화이트는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실수. 어떻게 들고 갔는진 모르지만, 여튼 들고 간 수영장 물은 이 변칙 개체의 일부에 불과해. 진짜 핵심은 여과 장치였지. 가넷이 저장고에 고인 물과 다른 액체로 실험해 보니까, 여과 장치를 통과시킨 액체는 영양 성분이 수배로 급증했다더군. 끔찍한 비유긴 하지만, 그 건물이 사람이라면 수영장은 생식 기관, 수영장 물은 양수, 여과기는 태반이라고 볼 수 있다네.”
“……”
할 말을 잃은 스트링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화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거네. 가넷은 곧바로 내게 먼저 보고를 올렸어. 아마 이 기지의 위치나 연락할 주소를 몰라서 그랬겠지. 근데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하던 대로 사령부에 보고를 올려버렸네. 당연히 내부 보안부에서 노발대발하며 쫓아왔지. 신분이 기밀인 현장 요원이 실종 사태이면 기밀 유출이 있었던 거고, 내부에 변절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아무 생각 없냐고 하면서.”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야, 스트링. 참 끔찍한 일인데, 내 머릿속에선 가넷이나 그 요원의 안전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네. 내 제자가 큰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걸 역이용하자는 생각이 들었어. 덫으로 말이야.”
“덫이요?”
스트링이 의아해하자 화이트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내부에 변절자가 있다면, 내부 보안부에서 쳐들어온 그때쯤이면 아마 사실 확인을 위해 사람을 보낼 테지. 그렇다면 우린 저 건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치면 되네. 그 사람을 통해 내부의 변절자를 잡아낼 수 있을 테지.”
“무슨……”
“나는 가넷에게 우선 위치 교란 장치로 위장한 뒤에 숨어 있으라고 했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사령부와 기지 관리자 모두에게 재차 보고를 송신했지. 개체는 이동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거짓 보고와 함께. 얼마 뒤에 개체를 향한 움직임이 보이는 조직을 포착했고, 동시에 가넷에게 개체에 접근해 있으라고 했네.”
스트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왜 이런 일에 과장님과 가넷이 목숨을 건 겁니까? 내부 보안부에 그냥 맡기고 가넷은 피해 있을 수 있었잖아요!”
“내부에 적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하잖아. 그럼 시간이 생명이야. 최대한 빨리 꼬리를 낚아채서 끌어내야 한다고. 심지어 사령부도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이대로 냅두면 아무리 재단이라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말을 마치며 화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발을 짚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린 화이트를 따라나서며 스트링이 따졌다.
“하필 왜 가넷이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거기에 가넷이 들어갈 이유는 없잖아요!”
“나라고 그곳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 괴물 안에 들어 있던 건 내 제자였어. 자네나 로드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제자라고! 또 내 제자가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 걸 내 손으로 직접 저지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자네가 알아!”
어느새 언성이 높아진 화이트에게 스트링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다고 가넷을 거기에 집어넣었습니까? 과장님 손으로 직접! 아무리 그게 중요하다고 해서, 거기에 또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집어넣었어요?”
“자네는 몰라.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어렵고 힘든 일은 다 함께 손을 잡고 이겨내면 그만이지만, 서로 맞잡은 손을 거꾸로 넘어뜨리려고 당기면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이 무너지게 돼! 그건 막아야지 않겠나?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잡아야 해. 내부 보안부도 동의한 일이라고!”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해야 해. 이게 재단에서 돌아가는 원칙이야. 이것이 순리라고. 이게 재단이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방법이야.”
화이트는 스트링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든 게 무너지고 다시 세우는 일,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네.”
“썩은 나무가 왜 위험한 줄 아나? 껍데기만 멀쩡한 채로 겉만 번지르르하기 때문이야. 가뭄도 벌레도 가지를 쳐내면서 버틸 수 있지만, 안에서부터 썩어버리면 방법이 없어. 베어 넘기고 새싹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생물학 시간, 화이트는 슬라이드를 넘기며 건강한 나무와 병든 나무의 단면도를 보였다. 몇몇 여학생은 비위가 상했는지 신음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무 상한 거로도 저러냐.”
“그럴 수도 있지.”
턱을 괸 채 펜을 굴리던 스트링의 옆에서 로드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스트링은 펜을 윗입술로 고정한 채 로드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런 비위 약한 애들은 버리고 나랑 과제 하자, 응?”
“네가 제일 역겹다.”
“조용.”
화면을 탁탁 치며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병든 가지가 있다면 이파리를 모조리 뜯어서라도 쳐내야 해. 그래야 뿌리가 썩지 않고, 그래야 나무 전체가 살아남는 법이네. 그래야 모든 게 다 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지.”
“교수님, 병든 나무는 심폐 소생할 순 없나요? 어레스트일 수도 있는데.”
스트링이 손을 들며 말하자 교실의 반은 괴상하다는 눈초리를, 반은 키득거리는 웃음을 보냈다. 화이트도 찡그린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