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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목: 가지 않은 길
저자:
oratio
작가 페이지:
펜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elikan_M815_fountain_pen,_photo_taken_on_September_2021.jpg
그림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mbrandt_van_Rijn_-_A_Polish_nobleman.jpg그걸 스팸 메일에만 써먹은 배일호는 똑똑한 것인가 아니면 멍청한 것인가
잉크빛 만화경
KTE-1095-스파이럴-돌체(분서꾼들)1
가지 않은 길, 잉크빛 만화경
개요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中2
도해
잉크빛 만화경의 사진.
지식
특징: 잉크빛 만화경은 만년필로, 펠리칸 사에서 출시한 'M815' 모델과 제조사 식별 정보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외형상 차이는 없다.3 재료는 기존 M815와 동일한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예외적으로 펠리칸 제품 특유의 검은 레진은 정체 불명의 재료로 대체된 상태다. 내부에 있는 잉크 자체는 평범한 것으로 밝혀졌다.
잉크빛 만화경의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신아뒤툼어로 음각되어 있다. 다만 몸통 내부, 그것도 만화경을 분해해야 알 수 있으며45 그 흔적 역시 흐릿해 신아뒤툼어를 모를 경우 단순한 스크래치로 오해하기 쉽다.
나의 벗에게, 이것을 바친다.
바라건데 나를 용서치 않도록.
성질: 잉크빛 만화경에게는 두 가지 경이로운 성질이 있다. 첫번째는 이 잉크빛 만화경으로 쓴 편지는 다중우주 속 자신의 동위체들에게 즉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 편지는 내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우체통'에 들어갔는지6를 기준으로 한다. 편지를 전송할 수 있는 차원의 수는 제한적인데 이것이 만화경의 관찰 범위 한계인지 단순 과부하의 문제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전송 가능 거리는 매우 넓은데, 한 예로 발생 확률이 매우 낮은 차원, 혹은 기준 차원과는 법칙 단위로 차이가 극심한 차원에까지 편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렇게 편지를 받은 다중우주에서는 인과율의 변화가 발생해 수신자가 되는 동위체 역시 만화경을 소유하게 된다. 현재까지 능구렁이 손이 도서관에서 확인한 것에 따르면, 이 이동 경로는 차원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형태로 진행된다.78 이렇게 편지와 만화경을 손에 얻은 자는 자연스럽게 이 편지가 다른 차원의 자신이 보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수신자가 답변할 경우 기존 송신자 및 다른 수신자에게만 그 답변이 전송되며, 제3의 차원이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잉크빛 만화경의 또 다른 사용법이자, 이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는 이 만화경을 통해 다른 평행세계 속 자신을 관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화경을 사용하려면 사용자의 평행세계 대응 역치가 낮거나, 시간축이 차원과 엇갈려 있거나, 아니면 별개의 기적술을 경유하는 방법이 있다. 만화경에 자주 접촉한 사람들은 기적술을 떠올리거나 역치가 낮아지는 등 이 두번째 방법을 사용하기 적합해지며 또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측한 차원은 자신과 연결이 강해지며, 이전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간섭할 수 있다. 약하게는 그 차원의 지식과 경험을 배우는 것부터, 연결된 차원으로 직접 이동하거나 나아가 그 차원의 자신에게 빙의, 혹은 흡수할 수도 있다. 이 때 영향력은 사용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나, 적어도 만화경 역시 이를 크게 보조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다른 차원에 부여하는 부하가 상술한 첫번째 방법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다는 단점이 있다. 지나치게 관측할 시 여러 차원의 지식이 한꺼번에 들어와 자기 정체성을 잃고 미쳐버릴 수 있다. 또한 이를 회피하기 위해 특정 차원을 집중해서 볼 경우 특정 차원의 자신과 동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에 나비 효과가 크게 발생할 수 있다. 나아가 흡수 또는 동화하는 과정에서 차원 자체가 융합하거나 붕괴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행세계의 자신이 충분히 악의적이고 강하다는 전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한 위험성이다. 이 때문에 이 만화경이 굳이 펜의 형태를 띈 것, 즉 첫번째 수단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안전 장치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내력 및 관계: 잉크빛 만화경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마공방이 제작 및 판매한 것은 확실하다. 근거는 18세기 초 최초로 잉크빛 만화경이 언급된 일기장에서 당시 마공방이 보낸 편지 역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편지를 통해 유추한 것에 따르면 잉크빛 만화경은 철저히 개인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제3자가 복제하지 않았다면9 한 차원 당 한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륀 백작님께
항상 저희 작품을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다른 고객님들도 백작님의 소개를 듣고 저희 작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더군요.
덕분에 이 차원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그 돈으로 보다 더 새롭고 멋진 예술품을 만들 수 있도록 저희도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보답하고자 이번에 특별히 백작님만을 위해 특별히 만든 선물을 보내고자 합니다.
이 물건은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세계의 백작님과 대화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추체험할 수 있지요.
사용하는 방법은 백작님이시라면 바로 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랑을 주신다면 이 친구가 친절히 가르쳐 줄 것입니다.
백작님은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어 하셨죠.
항상 보던 지루한 세상이 아닌, 보다 자극적이고 멋진 풍경. 백작님께서는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 겁니다.
평소와는 그 기적의 방향이 많이 다릅니다만 부디 편히 즐기시길.
그러면 다음에 또 봅시다. 앞으로도 백작님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들고 오겠습니다.
언제나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Sanctuary Atelier생추어리 아틀리에
륀 백작의 초상화(생몰년도 불명)
잉크빛 만화경의 최초 주인은 현 폴란드 땅 출신 륀 백작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보아 륀 백작은 오래 전부터 마공방의 것을 포함해 여러 진귀한 물품을 수집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위 그림은 17세기에 램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화가가 그린 초상화인데, 만년필 자체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아 륀 백작은 모종의 수단을 사용해 수명을 늘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륀 백작이 가지고 있었던 이 만화경은 이후 프랑스의 한 경매장에서 발견되었다. 어째서 거기까지 만화경이 흘러들어 왔는지는 불명이나 추측컨데 륀 백작이 만화경을 통해 지나치게 정보에 노출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이를 소유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서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생추어리 아틀리에가 만화경을 바친 것이 륀 백작을 몰락시키기 위한 함정인지, 아니면 아틀리에 쪽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문제는 경매 결과 누가 그것을 낙찰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던 것과, 상술했듯이 한 차원에서 특정 개체가 만화경을 사용해 편지를 보낼 경우 일부 다른 차원의 동위체들 역시 만화경을 인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경매가 끝난 시점에서 만화경의 위치는 여러 차원 별로 사방팔방 퍼져나갔고, 그 경로 역시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여러 차원의 기록을 전부 담고 있는 도서관을 통해 그 내력을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어떤 차원에서도 만화경이 파손, 혹은 소실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내구성의 문제가 아닌 파손될 위험에 처한 시점에서 인과 상 자연스럽게 다른 주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차원에서는 이후 한동안 여러 귀족들이 기적을 보여준다는 유물을 소유하다가 미쳤다는 도시전설이 떠돌았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맞다면 어디까지 잉크빛 만화경의 영향이 미친 것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수많은 자신이 융합한 키메라 괴물'에 대한 정보가 사실일 경우 적어도 두 번은 잉크빛 만화경이 최악의 결과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10
이후 만화경의 행방이 다시 밝혀진 것은 20세기 초반에 익명의 수도자가 이를 회수하면서였다. 당시 그는 만화경의 능력과 그것이 마공방 작품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그 제작자였던 사람으로 주장했다. 다만 만화경은 그로부터 최소 150년 전에 제작된 것을 보아 이것이 사실일 경우 수도자 역시 불명의 수단으로 수명을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만화경은 수도자가 이를 봉인하면서 한동안 행방을 감추었으나,11 어째서인지 장사치들이 그 정보를 알고 1962년 만화경을 습득, 판매해 버렸다.12 이후로 만화경은 약 60년 간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며 떠돌다가 이름 없는 신의 광신도가 능구렁이 손에게 넘겼다.
접근법: 현재 이 차원의 잉크빛 만화경은 능구렁이 손의 본거지의 서랍장에 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 잉크빛 만화경이 사라졌는지 여부를 상시 확인 가능하다. 만약 잉크빛 만화경이 어떤 이유로든지 사라졌을 경우, 누군가가 이를 악용하기 전에 신속하게 회수해야 한다. 그 외에는 능구렁이 손 일원 최소 둘 이상의 동의 없이는 건드리지 않는다.13 편지가 왔을 경우 내용은 확인하되 답장은 하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잉크빛 만화경이 만약 발견되었을 경우 믿을 수 있는 협력자에게 협조 및 보관을 부탁한다.1415
관찰 및 이야기
'생추어리 아틀리에', 혹은 도서관의 표현에 따르면 '마공방'이라고 불리는 곳은 일종의 공방으로서 여러 초상 기술이 적용된 조각품 등을 제작, 판매하는 곳이다. 옥리는 'GoI-4050', 분서꾼은 '돌체’라고 부른다. 마공방은 여러 생명체를 개조한 작품, 혹은 기작을 통해 개조할 수 있는 작품을 판매하는데, 이 때문에 이들이 넬케 신도들이거나 적어도 그들의 기술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공방주는 2대째인 '로타리오’며 1대째 공방주의 행방은 현 시점에서 불명이다.
한편 이들은 여러 평행세계와 시간대를 이동하면서 장사꾼들을 경유해 작품 판매를 시도하는데, 이 때문에 이 마공방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마공방이 19세기 당시 습격을 받았을 때 기준 차원에서 임시 후퇴했다 현재 시점에서 귀환한 것이 그 예시다. 현재 직원들, 특히 적어도 로타리오 본인은 다에바인16 출신 아니냐는 추측 역시 있다. 다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넬케와 다에바인들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이 넬케의 기술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제가 만화경을 구한 건 해원읍의 한 장터였습니다. 아, 물론 처음부터 알고 구한 것은 아니고, 그저 만년필이 필요해져서 찾다가 사게 된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다른 세계의 제가 펜을 손에 넣은 결과 인과가 그쪽으로 기울어진 거겠죠.
이계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 건 제 은신처로 돌아간 직후였습니다. 제 시종이 갑자기 주소도 발신자 이름도 적히지 않은 편지가 많이도 왔다며 난처해 하더군요. 제가 적은 만화경에 대한 설명을 먼저 읽으셨다면 눈치 채셨겠지만, 다른 세계의 제가 보낸 거였습니다. 또 다른 제가 그것에 답했고요. 그렇게 10장이 넘어갔으니,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당황해할 법했습니다. 저도 편지에 응했고, 그렇게 한동안 서로 간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철렁한 일이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내용은… 당신에게 갑자기 맡기는 것이니만큼 얘기하는 것이 좋겠죠. 네. 평행세계의 저끼리 그저 현재 상태를 전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저는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심하게 곤란한 듯했습니다. 인과율을 뛰어넘어, 만화경을 손에 얻으려고 한 건 그 때문이었을까요?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누구도 도령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기쁜 일이죠.17
그리고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도령님과 재회한 저도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기뻐하는 것이 한 자 한 자에 그대로 적혀 있더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도령님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저 자신이 붕괴해버리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졌죠. 존재가 사라질 때의 흐릿함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지러움이 아니라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니까요. 죽은 이후 어지럽다는 생각은 든 적이 없었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낸 편지는… 내용이 말 그대로 뭉개져 있었습니다. 본인은 제대로 보냈다고 했는데요. 마치 그 정보를 보낸다는 것이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려는 것처럼요.
그제서야, 제대로 썼다는 편지가 완전히 뭉개져서 도착했을 때에서야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저는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그 발신자가 평행세계의 저 자신이라고 확신한 걸까요. 그저 장난, 혹은 악의적인 행동일 확률이 더 높았을 텐데 말이죠. 그리고 그런 안일한 판단은 사람의 목숨을 옥죄기 마련이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요. 그제서야 저는 펜이라고만 생각했던 만화경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편지에 담기에는 편지지가 작으니, 그건 서류로 같이 보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분명 그건 그저 편리한 연락 수단이 아니요, 보다 더 위험한 현상의 매개체였다는 겁니다. 세계를 이어가며 그것은 헤매어 왔던 겁니다. 하지만 구멍은 남죠. 보통 상황이라면 가볍게 메꿔지겠지만, 만약 그 이상으로 균열이 커진다면… 그렇게 해서 만화경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저처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요? 자신의 안전을 꾀하는 걸까요? 아니면…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만화경이 한 번에 볼 수 있는 차원 수가 늘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제작자가 악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러니 림씨. 만화경을 잘 부탁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찾고 있으니까요. 당신과 동료 분들이라면 만화경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잘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갈 운명이 된다 할지라도 되찾아 올 수 있겠죠. 정당한 주인, 원래 이 펜을 가져야 했던 자가 맞이하러 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이만 총총.
에무, 저 펜과 비슷한 거 봤어. 활동하면서는 아니고, 그냥 여행하다가 봤어. 언제였는지는 기억 안 나. 에무, 워낙 여러 시간대를 돌아다녀서 잘 모르겠어. 만나는 사람도 많고. 지나온 곳도 많고. 이럴 줄 알았으면 기록해둘 걸. 일단 열차를 타고 있었던 건 확실해. 에무, 열차 좋아하거든.
한 남자가 그거 들고 있었어. 옆에 사람도 있었는데, 동생처럼 대하고 있었어. 친동생인지 아니면 그저 동료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차가운 형과 친구하기 좋은 동생. 펜을 든 남자 이름은 '피에트로'. 동생 쪽은 '안드레아'. 에무, 그걸 보면서 약간 슬퍼졌어.21
그 사람들, 떠돌아 다니고 있었어. 전 직장에서 뛰쳐 나갔대. 이걸 만드는 공방에서 일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봐. 물어봤는데 곤란해 했어. 에무, 그게 뭔지 알아. 예전 기억 없어. 말하면 곤란해. 아마 그런 거겠지. 근데 그 남자, 펜을 내게 보여주면서 말했어. 가야할 길이 있대. 가서 빌어야 할 게 있대. 그런데 그 사람이 훌쩍 떠나서 찾을 수 없대. 그래서 찾고 있는 거래. 펜도 가지고 가는 거래. 펜이 동생은 몰라도 형은 용서하지 않았으면 한대. 그게 뭐야.
에무, 이 펜이 뭐냐고 물었지. 세상을 보는 거울이래. 펜인데? 하고 물었는데 펜은 맞대. 근데 이걸로 세상을 볼 수 있대. 에무, 궁금했어. 그래서 써보려고 했더니 곤란해 했어. 이걸 에무가 쓰면 문제가 커진대. 살짝 손을 댔더니 어지러웠어. 눈 앞에서 여러 에무가 보였어. 몇 에무는 행복해 보였고, 또 몇 에무는 서글퍼 보였어. 인간이 아닌 에무도 있었고, 몇은 옆에 에무랑 똑 닮은 사람도 있었어. 그리고 내가 모두를 보듯 모두가 에무를 보고 있었어.
뭔가 에무, 서 있는 땅채로 부서지는 느낌이어서 손을 뗐지. 에무만 이상하게 느낀 게 아니었나 봐. 동생은 놀라고, 형은 펜을 다시 뺏었어. 건드리면 안 된대. 그러면 누가 쓸 수 있냐고 물었지. 에무가 특이하대. 원래는 쓰는 것 정도는 괜찮대. 처음부터 심연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에무가 처음이래. 에무, 정말로 몰랐는데.
에무, 근데 이런 걸 왜 가져가냐고 물었어. 자신이 이거 가지고 일이 있었대. 전 직장에서 그 사람에게 이 펜 가지고 큰 문제가 발생했대. 만드는 과정에서 배신이 있었고 사람이 죽고 그랬나봐. 몰랐대. 나중에 알고 크게 실망했대. 그래도 워낙 일이 안 좋아서 마음에 걸렸대. 그래서 이걸 가지고 도망친 거래. 돌려주기 위해서. 만든 게 자신인데 돌려준다가 맞나?22 그래서 그 찾고자 하는 사람이 누군지 물었지. 그 사람들,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했어. 떠나기 직전 답했어. 에무, 위험해질 뻔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래.
'네로네스'.
육(肉)과 강(鋼)이 모두 현현한, 스스로 헌신하는 자.
창백히 빛나는, 부서지지 않는 별.
그 말을 끝으로 그 남자들은 떠났어. 에무, 여러 시간을 돌아다녔지만 만나지 못했어.
그 사람들은 누굴까? 네로네스를 만났을까?
에무, 잘 모르겠어.23
의문점
상술했듯이, 잉크빛 만화경은 펠리칸 사에서 제작한 M815 모델과 제조사 식별 정보 부재를 제외하면 모든 외형적인 특징이 같다. 하지만 M815 모델은 2018년에 제작된 것으로, 1864년 기준 차원을 이탈하고 도주한 생추어리 아틀리에와는 시간대상 무관하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아틀리에의 직원(피에트로 일행이든, 다른 자든)이 신원을 숨기고 펠리칸 사에 잠입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잉크빛 만화경의 외형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건가? 만약 그렇다면 형태를 바꾼 자는 누구인가?
앞선 증언 두 개 모두 '잉크빛 만화경에게는 지성과 인격이 있으며, 잘못 사용했을 경우 어지럼증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어지럼증'은 다른 차원에 과부하를 일으킨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능구렁이의 손이 잉크빛 만화경을 보관하기 시작한 이후, 그것은 한 번도 지성을 가지고 일원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잉크빛 만화경은 지금 지성을 숨기는 건가? 만화경이 의식을 잃어서 반응을 못하는 건가? 특정한 조건이 따라야 하는 건가?
또한, 찾아본 결과 ‘편지가 반송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25 이것은 단순히 만화경이 조사한 범위가 좁아서일까? 아니면 정말로 발신자가 없어서 그런 건가? 편지의 내용이 뭉개진 사례가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종의 사유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누구의 의지가 개입한 결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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