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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는 거였구나」
「뭐, 일단 그렇지」
지혜가 신기하다는 듯이, 석순처럼 자라난 책더미들 사이를 요리조리 두리번거렸다. 헌책방을 처음 보나? 싶었다가, 하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지혜 주변에 날리는 먼지를 발견한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전기포트 물을 티백 녹차에 따르면서 말했다.
「거, 가만히 좀 앉아 있어」
최대한 덜 퉁명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아, 미안미안. 나 때문에 정신 사나웠지?」
「그게 아니고, 먼지 날려서 그래. 나는 물론이고, 네 호흡기에도 별로 좋지 않을 걸」
도리질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에도 펄펄 날리는 먼지는, 딱 맞은 각도로 비쳐 들어오는 저녁 햇살 덕분에 더 도드라져 보였다. 안 보여도 먼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똑같을 터인데, 보이면 괜히 숨을 참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공기청정기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녹차가 적당히 우러난 것 같아서 티백을 건져내고, 한 잔을 지혜에게 건넸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왜 따라왔어?」
「어? 아니, 그, 오면 안 돼?」
헌책방 안쪽에 비밀결사 본부로 통하는 매-직-포-탈이 있으니 곤란한 것도 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없지. 그리고 지금 불편한 이유가 그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딱히 그런 뜻은 아니고……. 네가 나한테 궁금한 건 따로 있을 텐데, 아까부터 내 얘기만 자꾸 물어보는 것 같아서」
하교길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을――그것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지혜는 기어이 여기, 빨강뱀 헌책방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내가 서점에 손님으로 들어간 줄 알고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올 기미가 없자 들어와본 것이다. 뭐하자는 것인지, 정말.
「따따따, 따로 있는 건 아니야. 나는 림이 네가 서점 아르바이트 하는 줄 전혀 몰랐는 걸.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그러냐」
「림이 너 아르바이트한다는 얘기는 전에 수현이한테 듣기는 했는데, 어디서 하는 줄은 몰랐거든」
「그렇구나」
「……혹시, 나하고 이야기하기 싫어?」
「그렇지……않아! 방금 건 말실수야. 절대,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턱을 괴고 건성으로 대답하다 보니 말이 헛나갔다. 당황해서 손을 내젓다 그만 녹차가 든 종이컵을 엎어 버렸다.
「아뜨뜨!」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놀라서 반사적으로 뜨겁다는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손을 데지는 않았다. 다행히 녹차가 노트북 컴퓨터 위로 엎질러지지는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놓고, 티슈곽에서 뽑아낸 티슈로 녹차를 닦아냈다.
「보다시피 여기는 손님들이 잘 오지도 않거든. 그래서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이 나한테는 사실상 휴식시간이야. 그래서 피곤하기도 해서, 대충 말하다가 말을 잘못 했어」
어느샌가부터 이 퀴퀴한 책 냄새 나는 곳에서의 서너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 내가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요새 어찌 되어서 사방에 나를 부려먹거나 놀려먹으려는 인간들밖에 없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 집에서는 우리 누나, 조직에서는 대장에 모리안……. 생각해 보니 다 여자들밖에 없네. 이거 나름대로 여복인가.
아무튼, 그러니까 요컨대, 지금 나는 지혜에게 귀중한 휴식시간을 방해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휴식을 방해를 한 거구나. 미안해」
「그래, 맞아. 그게 맞고. 절대로, 네가 이수현이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마음에 안 들어하거나 그런 게 절대로, 절대로 아니니까! 그런 오해는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해. 나는 말이야, 네가 이수현하고 사귀어 주는 게 정말로 고맙거든. 나는 너희 둘이 잘 되게 만들어 주려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진짜로 뭐든지 다.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제발 하지 말아 주라」
목덜미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너무 당황한 티를 내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지혜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오해 안 할게. 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평소처럼 편하게 쉬고 있어」
하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나는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늘어졌다.
「그런데 림이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솔직히 너가 나 대하기 불편하다는 티를 내긴 했잖아. 그래서 오늘 네가 날 왜 따라오나 싶었어」
「정말?」
「서율이가 언제 나한테 너하고 싸웠냐고 묻던데?」
「어어……. 모르겠어. 나 그렇게 보였어? 나는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아니, 뭐. 이해해. 자기 남자친구의 소꿉친구인 여…자애가 안 불편하면 이상하지」
젠장. 나 스스로 내가 여자라는 말을 입에 담자니, 그야말로 존엄성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만약 이 모습을 누나나 회장이 봤으면……. 음,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군.
「이참에 확실하게 하자, 그럼. 나는 걔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 오히려 난 이수현이한테 너하고 잘 해 보라고 그랬다고. 너 좋은 애라고 생각했고, 또 이수현이한테 여자친구가 생기면, 괜히 나하고 걔하고의 그……, 사이를 오해받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랬어?」
「못 믿겠으면 이수현한테 물어보던지」
지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얘 정말 감정이 티가 잘 나는구나.
「그랬구나. 그건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나도, 뭔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태도에 드러나고 그런 게 있었는지 몰라도, 림이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사실, 오늘 너 따라온 게, 곧 수현이 생일이라서 생일 선물로 뭐가 좋을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기는 했거든」
그러면 그렇지. 얘가 이수현하고 상관 없이 괜히 날 따라올 리가 있나. 이수현 이 망할 놈. 내일 학교에서 보면 줘패 줄 테다. 그러고 보니 곧 그 녀석 생일이었구나. 마술과 비일상의 세계에 휘말리고 나서부터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냥 네가 이수현이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놀래켜 주고 싶어서」
「학교에서 물어봤어도 됐잖아」
「수현이 몰래 물어보고 싶어서」
「왜 하필 나한테?」
「그거야 림이 네가 수현이……」
「소꿉친구니까. 어휴」
아니 진짜. 너희 둘 사귀게 이어줬으면, 좀 알아서 둘이 좀 잘 사귀면 안 돼? 왜 자꾸 날 중간에 끼워서 닭살 돋게 만들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 이림은 이미 미안해서 쪼그라들어 있는 지혜에게 그렇게 짜증을 낼 만큼 경우 없는 남자가 아니다. 심지어 좀 전에 내 입으로 너희 둘이 잘 되게 해주려면 뭐든지 다 해준다고 말까지 했다.
물론, 수현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자식은 내일 학교에서 반드시 줘패 줄 테다.
「그리고 림이는 취미도 남자애들하고 비슷하니까 뭔가 더 잘 알 거 같고」
「그거 칭찬인지 욕인지 잘 모르겠다?」
「……딱히 칭찬도 아니고 욕도 아니지? 취미가 그러면 안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수현이 참 복 받았다. 너희 둘이 꼭 결혼까지 해라」
「겨, 결혼?!」
지혜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안 하면 내가 그놈의 자식 가만 안 둬」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노트북으로 플레이스테이션 패키지 가격을 확인했다. 적당해 보이는 것들을 추려 보여주니, 지혜는 이 정도면 용돈 가불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겠다고 기뻐했다.
나는 이제 슬슬 좀 가 주라, 싶은 마음으로 책상 서랍에서 ‘영업 끝’ 팻말을 슬그머니 꺼내들었다. 하지만 지혜는 수현의 생일 선물 자문 이야기 외에도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 아무래도 빈말이 아닌 듯했다.
「너 학원은 안 가니?」
「오늘은 학원 없어. 밤에 과외만 있거든. 그러고 보니 여기 아르바이트는 몇 시까지 하는 거야?」
「일단 와 보고 사장 안 계시면 사장 올 때까지만 자리 맡고 있는 거야. 굉장히 널널하지. 사장이 계속 안 오면 9시에 문 닫고」
「그렇구나. 그런데 집 가까워? 그렇게 늦은 시간에 다녀도 돼? 림이는 학교에서도 도서부고, 아르바이트도 서점에서 하고, 책을 참 좋아하나 봐?」
「한 번에 하나만 물어, 좀」
귀가야 가게 문을 닫고 가게 안쪽의 매-직-포-탈로 아지트를 경유해서 우리 집으로 가면 그만이지만――오히려 학교에서 집으로 직행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까지 알려 줄 이유는 없다.
「아 참, 그러고 보니까 미성년자인데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하게 된 거야? 보통 안 받아주지 않아? 받아주면 불법인가 그렇지 않던가?」
「그거야 여기 사장이 우리 대……, 이모니까 그렇지」
「아, 그렇구나. 저번에 학교에서 본 그 분 말이지?」
「어, 그 양반 맞아」
「그럼 일하기는 편하겠다」
「편하기는. 잔소리를 얼마나 하는데. 청소 안 했다고 갈궈, 책 정리 안 해놨다고 갈궈. 막말로, 네가 보기에 여기가 청소한다고 깨끗해질 것처럼 보여? 헌책이라는 게 가만히 두기만 해도 얼마나 먼지가 생기는데」
「그러니까 청소를 매일 해야지. 자식이 빠져 가지고. 진폐증 걸리고 싶어?」
「아, 젠장」
내가 고개를 젖히고 탄식하는 사이,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구더라? 나 알아요?」
「림이 학교 친구인 송지혜입니다. 저번에 학교에 오셨을 때 뵀던 것 같아요」
「아, 그러니?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일찍 가렴. 여기 오늘 일찍 닫을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혜가 빨리 좀 가 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는데. 이제는 지혜가 떠나면 이 500년 묵은 여우에게 끌려가서 대련을 핑계로 이리 던져지고 저리 메쳐질 생각을 하니 갑갑해졌다.
「네, 안녕히 계세요! 림아, 다음 주에 봐」
「어여 가」
가게 앞문의 풍경소리가 짤랑 울리는 것과 함께 나는 책상에 엎어졌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업어치기 열 번으로 봐 주세요」
「……」
하지만 대장은 말 없이 영업 종료 팻말을 챙겨 갈 뿐이었다. 대장은 창문 밖에 팻말을 걸어놓고, 안에서 셔터문을 내린 뒤, 자물쇠를 채우고, 주술적 방범장치의 스위치를 올렸다.
「무슨 일 있어요?」
「인영이 호출이다」
「아」
인영 쌤의 호출이라면 그거다. 대장은 이를 갈며 자기 목을 문질렀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가시나무 덩굴 모양으로 문신처럼 새겨진 것이 드러났다. 나도 노트북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쪽으로 향하는 대장을 따라갔다.
「이번에는 무슨 퀘스트인데요?」
「몰라. 이번에는 보통 일이 아니라면서, 브리핑이 좀 필요하다 그러던데」
대장이 열쇠 꾸러미에서 본부로 통하는 열쇠를 찾아 뒷문 자물쇠에 꽂았다.
「내가 진짜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염병할 거 진짜」
문이 열리고, 본부 입구 복도가 드러났다. 내가 대장을 따라 들어가자 내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오셨어요?」
병길 형이 우리를 반겼다.
「오셨어요? 기다렸다는 듯한 말투다?」
「저한테도 호출이 왔거든요」
「너도? 내 일로?」
「네」
대장과 병길 형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기남 형이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먼저 와 계셨네요?」
「뭐야. 너도 호출 받은 거야?」
「네」
기남 형이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이거, 아무래도 다 부른 거 아닐까요?」
병길 형의 말에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저는 딱히 호출된 거 없던데요」
「흠」
「일단 가서 얘기를 들어 보죠. 아마 회의실에 다 모여 있지 않을까요」
기남 형의 말에 우리 넷은 말 없이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이 마지막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뭐?」
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일이라고요」
인영 쌤의 대답에도, 대장은 자리에 다시 앉지 않았다. 인영 쌤이 대장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회의실 전체를 휘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맡기신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고도 하셨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 구성원들 전부 다 불러 모은 것이에요」
병길 형의 추측대로, 다른 멤버들도 모두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뭐, 모리안이 부재 중이라서 ‘모두’는 아니지만, 없어도 다들 그냥 없는가 보다 하니까, 지금 상태면 멤버 전원이 모인 것에 근사적으로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단 말이지. 헌책방에서 대장하고 합류하지 않았으면, 나 혼자 집을 보고 있었을 거란 얘기 아니야, 이거.
「이건 제 판단으로 부른 겁니다. 우리 조직 전체의 힘을 다 모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서요」
그러니까 나는 전력 외니까 안 불렀다, 그 말씀이시군. 나는 턱을 괴고 반쯤 감은 눈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서율을 곁눈질로 살폈다. 서율은 인영 쌤을 바라볼 뿐,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우리 누나는 팔짱 끼고 앉아 있고, 병길이 형이나 기남이 형은 평범하게 경청하는 분위기. 모리안은……, 부재 중이고. 희지 누나는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본부에 상주하고 있는 희지 누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무슨 임무인지 그 내용을 먼저 들어서 그런 것이겠지.
「진짜 마지막이라 그랬어?」
「제가 듣기로는,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최종, 끝이요」
「이게 마지막이면? 내 목에 이거도 없어지고, 더 이상 우리한테 간섭하는 지랄도 없어진다는 건가?」
「제가 신통하는 것을 간섭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주석 개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섭 없을 거라고 합니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보증하지요」
「이렇게 느닷없이 풀어 준다니까 오히려 의심스럽단 말이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서천의 성모들은 인간에게 거짓말하지 않아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인간이죠. 신들이 아니라」
「……」
대장이 말 없이 인영 쌤을 노려보았다. 인영 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무슨, 저라는 인간이 거짓말을 할 가능성, 그런 건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주석이 원하신다면, 제가 참말을 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 능력 일부러 안 쓰는 것도 네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한다」
대장이 언짢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할망구가 시킨 마지막 일이 뭔데?」
「오래 전에 봉인된 어떤 존재를 강원도에서 찾아내서, 처리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처리하라고? 죽이라는 말이야?」
「죽이라는 말은 없었고, 다만 처리를 우리한테, 아니 정확히는 주석에게 맡긴다고 하셨어요. 어떻게 처리할지 주석의 재량에 맡긴다는 뜻 아닐까요」
「그렇게 얘기하면 절대로 못 죽이지. 우리는 망나니 사형집행인이 아닐 뿐더러, 그게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무슨 신 나부랭이 따위가 시켜서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못 해」
팔짱 낀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던 우리 누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생포로 가닥이 잡힐 것 같은데, 생포를 해서 그 뒤엔 어쩐다 싶기도 하네요. 우리 동료로 받아줘라, 그런 말랑한 요구사항일 리는 없잖아요? 만에하나 그런 요구사항이라 해도, 교전이 예상되는 적대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그게 가능할 거 같지도 않고요. 해서, 우리가 생포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서천에서 받아 가기라도 하는 건가요?」
「글쎄, 그건 어떨지……」
「게다가 이미 봉인되어 있다는 걸, 굳이 그 봉인 깨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저, 저기요」
이번에는 기남이 형이 손을 들었다.
「그, 봉인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제 재주가 필요하게 될 상황인 거 같은데요. 봉인되었다는 그 존재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요?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 것이고? 아니, 다른 무엇보다 이 정보가 가장 먼저 공유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 그게……,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인영 쌤이 말을 바로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희지 누나가 나섰다.
「표적은 17세기에 봉인된 요호. 이름은 <서구>라고 하더군요. 꼬리 개수는 추정 아홉 개. 혹시 대장의 과거 기억 중에 없으신가요?」
요호라는 말에 대장이 움찔하고 반응했다. 하긴, 인영 쌤도 대장 속을 더 긁고 싶지 않을 텐데, 그야말로 역린 그 자체인 키워드니 고민이 되었겠지.
그렇다고 희지 누나가 대장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 아니다. 한 사람이 자꾸 속을 긁는 것보다, 좀 나눠서 분담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일 것이다. 인영 쌤의 경우에는 서천의 지령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대장에게 스트레스일 테니까. 인영 쌤 본인도 미안해 하고.
「17세기? 강원도에? 요호가 봉인돼?」
대장은 턱을 짚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턱에서 손을 뗐다.
「모르겠다. ……잠깐 담배 좀 태우고 올게」
대장이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요〜」
우리 누나도 뒤따라 일어섰다. 두 흡연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의실을 나섰다. 아마 흡연실로 가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일어나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몰라. 내 기억에는 없어」
「기억 중에 있는데, 기억이 너무 많으셔서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다」
「흠……」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한성의 보전원으로 보고가 올라왔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평범한 요호가 아니라, 진짜 구미호라면 괴력난신 중에서 패란 급이야. 그 당시에 내가 보전원에 있던 건 아니지만, 패란급 이물이 봉인당하는 빅 이벤트가 있었으면, 그런 이벤트의 존재 자체가 내 귀에 안 들어왔을 리가 없지」
「혹시 을묘화변 이후의 일이라서 대장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는 없겠네요. 을묘화변이 1795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으로 보전원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라거나?」
「그 쪽이 가능성은 더 높겠지」
「뭐, 이따 상세 내용을 브리핑할 때 구체적으로 몇 년도인지 제시되지 않을까요? 아마 희지가 기본적인 자료조사는 다 해 놓고 우릴 불렀을 것 같은데요」
「그렇기야 하겠다만, 몇 년도인지 알아 봤자 17세기에 내가 아는 구미호 사건은 없었으니까. 아니, 17세기가 다 뭐냐. 내 인생 통틀어서 구미호 사건은 을묘화변 딱 한 번 뿐이었어. 그러니 내 기억은 어찌되든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겠네요」
누나가 먼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런데, 대장은 괜찮으세요?」
「뭐가?」
「요호라는 말 듣고 담배 땡기신 거 아니에요?」
「뭐,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 없겠지」
대장이 궐련 물부리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흡연실 문을 벌컥 당겼다. 그 바람에 문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던 내 몸이 흡연실 안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흡연실 벽에 스며든 담배 쩐내가 순간적으로 코를 찔러서, 나는 바닥을 뒹굴며 기침했다.
「자식이, 듣고 싶으면 그냥 들어와서 듣던가. 되도 않은 스파이 놀이를 하고 있어」
「콜록콜록. 듣고는 싶은데, 간접흡연에 노출되고 싶지는 않아서요」
「저는 다 태웠으니까, 마저 다 태우고 오세요」
누나가 흡연실 문을 열고 나갔다. 흡연실 안에는 나와 대장만 남았다. 대장은 물부리에 끼운 궐련이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도록 빨았다가, 필터만 남은 것을 뽑아서 버리고 다음 궐련을 꺼내 끼웠다.
「줄담배 몸에 안 좋아요」
「아무리 태워도 내가 너보다 오래 살 거다. 간접흡연 무섭다며? 안 나가?」
대장이 턱짓으로 흡연실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대장에게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대장이 화를 내거나, 또는 내게 수련을 빙자한 체벌의 스택을 늘리는 한이 있어도.
「그, 요호라는 게, 그렇게 신경쓰이는 건가요?」
「뭐가?」
「아니 뭐, 그래서 담배 태우러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냥 담배타임 돌아와서 태우러 나온 거야, 헛소리 하지 마, 임마」
「아까 우리 누나한테는 맞다면서요. 어린애 취급 마세요. 저도 알만큼 알아요. 어떤 의미에선, 그동안 대장 따라다니면서 옆에서 지켜봐온 제가 오히려 가장 잘 알 것 같은데요」
아마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대장을 따라온 것이다. 그러다 내가 따라온 줄 알자, 자기가 하려던 이야기를 내가 하라고 떠넘기고 가 버린 것이다. 십중팔구 대장이 화낼 이야기니까.
물론, 누나가 대장의 화를 무서워할 리는 없다. 그저 내가 그 화를 뒤집어쓰는 것을 재미있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작년 같았으면, 대장은 요호종은 없어져야 한다고 당연히 그랬을 거고. 저도 뭐 당사자가 그렇다니 그러려니 했을텐데, 그런데 지금까지 보고 들은 거,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고민이 있었고. 대장도 그래서 대장 나름대로 고민이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주제넘은 소리를 한다고 혼날 각오를 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마지막 퀘스트라니까.
서천 쪽의 정확한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요호종에 관한 문제가 그 의도에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은, 나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체벌을 각오한 내 비장한 각오와 달리, 대장은 나른하게 반쯤 감은 눈으로 담배만 계속 태웠다.
「대장?」
「뭐, 왜 임마」
「아까, 절대로 안 죽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타겟이 요호라는 걸 이제 알았으니까, 죽일 건가요? 죽이고 싶어졌나요?」
「후우」
대장은 세 개피째 담배를 꺼내 물부리에 끼웠다.
「제기, 나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론 마고 할망구 꿍꿍이의 반대로 해서 그 꿍꿍이를 망쳐 놓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이긴 한데, 애초에 그 꿍꿍이가 뭔지 그것을 알지를 못하니……」
「아니, 마고할미하고 상관 없이 대장 본인의 뜻이 어떠하냐고요. 마고할미 신경 쓰지 마요. 그렇게 자꾸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대장의 감정을 마고할미한테 지배당하는 거 아니에요?」
「아, 자식 진짜. 거슬리게 쫑알쫑알대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거두절미하고 두괄식으로 말해」
「저는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부터 이 말을 입 밖에 꺼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대장의 신경줄을 심하게 긁게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니까 이 말을 대장에게 해야 한다, 그런 기묘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는, 대장이 이번 기회에 요호종을 그만 미워했으면 좋겠어요」
툭. 물부리 끝의 담뱃재가 중력을 더 이상 거스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 담뱃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귀 먹먹한 정적이 흡연실 안을 채웠다. 대장이 물부리를 든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 채, 목만 내 쪽으로 돌려서――그럴 리 없지만 끼긱끼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대장 괴롭히는 못된 누가 그러는 것처럼 대장은 인간이 아니고 요호다,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제 말은, 대장이 요호를 미워하지 않아도 대장은 우리 대장이고, 우리 중 아무도 대장이 요호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아니고 위험한 요호다, 우리 대장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대장이 다시 고개를 돌려, 담배 물부리를 빨았다. 회피인가. 화를 벌컥 낼 것으로 예상했는데. 어느새 이번 담배도 필터 끝까지 타들어갔다.
「그게 왜 안 되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겪어 보기로 대장은 말이죠, 좀 무섭지만 싸움은 엄청 잘 하는 든든한 대장이었고, 이쪽 세상의 뭐가 뭔지 모르는 저한테 이런저런 거 가르쳐 준 선생님이기도 하고, 제 마음 이해해 주는 친구였고, 또……, 제가 곤란할 때 나서 준 ‘이모’기도 하잖아요?」
「참, 웃긴다. 마지막 거, 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니」
대장이 피식 웃었다. 그건 창피를 무릅쓰고――그러니까 내 나름대로 용기를 쥐어짜서 한 말이었는데, 그 용기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창피하기는 하지만.
「야, 너랑 나랑 만난 거, 이제 겨우 1년인 거 아냐? 날 그렇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거야 다른 형・누나들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대장이 요호종을 미워하기를 그만둔다고 해서, 든든한 대장, 친구, 이모가 아니게 되지 않는다고요, 저한테 있어서.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대장이 담배를 더 꺼내지 않고 물부리를 갈무리했다. 회의실로 돌아가자는 뜻――그러니까 이 대화를 그만 하자는 뜻의 신호다. 하지만 나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무슨 이유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건 힘든 일이잖아요. 심지어 그 미워하는 대상이……」
하지만, 이 말까지 정말 해야 할까? 대장이 미워하는 요호종의 핏줄이라는 것이, 대장 본인의 몸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자기를 이루는 일부일 때 말이지」
내 마지막 고민이 무색하게, 내가 하려던 말의 마지막 문장은 대장이 직접 완성해 주었다. 그리고 뒤이은 대장의 말에, 나는 찬물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참, 쉽게 말하는구나」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대장의 붉은 오른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실로 돌아와 보니, 한쪽 벽에 칠판을 불러내 놓고, 칠판 앞에 희지 누나가 서 있었다. 대장이 담배 피우고 오는 그 사이에 본격적인 브리핑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런 것이겠지.
분필대 위에서 대나무 병정들이 각자 머리 위로 백묵분필과 칠판지우개를 지고 있었다. 굳이 왜 저러고 있나 싶은데, 희지 누나가 칠판 앞에서 좌우로 움직임에 따라 분필대 위의 병정들이 우루루 희지 누나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아하, 분필과 지우개를 언제나 손 닿는 곳에. 그런 서비스로군.
함께 회의실로 돌아온 대장은 말이 없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건지, 아니면 필요한 일을 하긴 했지만 선을 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한숨이 나왔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왔어? 표정이 왜 이래?」
「아, 누나. 저리 좀 가」
나는 괜히 내 옆자리에 앉아 신경을 긁는 친누나에게 짜증을 부렸다.
「나는 우리 동생이 오늘도 한 발짝 더 어른스러워졌구나 싶어서 기특하고 대견하던데」
「아씨, 그걸 문 밖에서 다 엿듣고 있었어?」
전언 취소. ‘괜히’가 아니다.
「대장이 요호종을 미워하지 않아도, 대장은 제가 사랑하는 이모일 거에요〜」
「그런 식으로 말한 적 없어! 역사왜곡 하지 마!」
「자기의 일부를 미워하지 말아요〜」
「아, 그런 식으로 말한 적 없다고!」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진짜, 그만 좀 해!」
하지만 내가 정색을 할수록 누나는 나를 놀리는 수위를 더하여 이제는 헤드락을 걸고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나는 신경질을 내면서 누나의 손을 쳐냈다.
「내가 대장 따라 나가니까 왜 나가는지 눈치채고 따라나온 것도 아주 귀여워, 응?」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우롱의 스파이럴에서 나를 건져 준 것은, 옆에서 보고 있던 서율이었다.
「언니, 너무 심하게 놀리는 것 같아요」
「괜찮아, 림이는 단단하니까. 그지?」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됐는데. 그래도 누나는 더 이상 나를 놀리지는 않고 떨어져 나갔다.
「고맙다」
「고맙긴, 뭘」
힘이 빠져서 회의실 탁자에 엎어졌다. 희지 누나가 브리핑 준비 다 하면 일어나야지. 그런데 누가――누구인지 뻔하지만――내 목덜미를 콕콕 찔렀다. 엎드린 그대로 고개만 돌려 보니, 서율이 나처럼 아예 엎드리지는 않고, 몸만 숙여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율의 세미롱 헤어가 중력에 이끌려 커튼처럼 아래로 늘어졌다. 얘 참, 예쁘긴 하다니까.
「지혜가 서점에 왔다 갔더라?」
「그걸 언제 봤어?」
「’언제’가 아니라 ‘어디서’가 맞는 질문이겠지. ‘언제’야 당연히 지혜가 서점에 왔다 가는 사이에 봤고」
「아, 그래. 그럼 어디서 봤는데?」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지혜한테 뭔가 쓸데없는 얘기 한 거 아니지?」
「내가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
「그런 거 치고 꽤 오래 있다 가던데?」
「진짜 별 얘기 안 했어. 조만간 이수현 생일이라고 생일 선물 뭐 사면 좋을지 묻길래, 상담 좀 해 준 게 다야」
「그게 다야?」
「그게 다지, 그럼?」
「아, 그으래」
서율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나하고 더 이야기할 것 없다는 느낌이라,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왜, 뭐?」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가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머쓱해서 서율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서 서율이 뒤이은 대답을――
「그냥 그렇구나 싶어서」
어떤 표정으로 하는지 나는 볼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목소리가 좀 가벼워진 것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싱겁긴」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대꾸했지만, 사실 내 대꾸야말로 싱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것보다는 좀 더 재치있게 받아칠 방법이 있을텐데.
눈을 찌푸려 감고 뒷머리를 긁고 있는데, 누가 짝!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눈을 떠 보니 희지 누나였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브리핑을 시작할게요」
희지 누나의 말에 회의실 구석에서 서로 대화하고 있던 기남 형과 병길 형이 자리로 돌아와 착석했다. 인영 쌤은 의자를 좀 빼서 회의실 가장자리에 자리잡았다. 대장은 아까 흡연실에서 돌아온 뒤 바로 자리에 앉았고……. 마치 희지 누나가 발표자, 인영 쌤은 사회자, 나머지 우리는 방청객이라는 느낌이다.
대나무 병정 하나가 희지 누나의 분필대 짚은 왼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 위에서 분필을 쑥 내밀었다. 그것을 희지 누나가 오른손으로 받아들었다. 분필을 건넨 대나무 병정은 폴짝 뛰어 분필대 위의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녀석이 분필대에 착지하면서 타닥, 하고 대나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전달받은 위치는, 강원도 삼척군 설운동 취병산 서쪽 백월산 중턱 바위굴. 그런데 이건 조선시대 지명이고요. 현재 행정구역으로 보면 강원도 동해시에 있어요」
희지 누나가 분필로 칠판을 똑, 두드리자 하얀 선으로 그린 지도가 칠판 위에 스르르 저절로 떠올랐다. 아마 동해시의 그 위치 일대를 나타낸 지도겠지. 희지 누나가 지도 위에 판서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삼척군지』에 보면, 서구라는 마녀・노파가 거기에 살면서 그 지역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다 최진후라는 사람에게 퇴치당했다는 전설이 있어요. 이 최진후라는 사람은 실존인물이고요. 1605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지역 유지였던 것 같고요. 1650년에 정려문을 표창받았다고 하네요」
「퇴치했다고 하면, 그 최 뭐라는 사람이 이 서구라는 존재를 봉인했다는 건가?」
대장의 질문에 인영 쌤이 대답했다.
「기록에는 아예 죽여버렸다고 되어 있는데, 서천 쪽에서 이르기를 봉인되었다고 하니까, 아마 봉인 정도로 그친 것을 당시에는 죽여버린 것으로 잘못 알고 그렇게 기록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봉인을 했다는 구체적인 시기는?」
「1650년대쯤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그 즈음에 그 일대에 자연재해가 빈발했거든요. 1651년에 홍수가 났고, 1653년에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고, 1655년에는 3월에 바닷물이 얼었고, 1657년에는 농사를 망쳐서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서구라는 존재가 진짜 구미호라면, 이 자연재해를 일으킨 결과로 봉인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봉인된 이후에 봉인이 완전하지 못해서 후폭풍으로서 재해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겠지요」
대장이 다리를 꼬고 자기 턱을 짚었다. 전자인지 후자인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내 생각에는 후자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까 흡연실에서 연이하고 먼저 얘기한 거지만,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재난을 일으켰다면 그게 그 당시에 내 귀에 안 들어왔을 리가 없어. 아마 그 최 뭐라는 지역 유지 선에서 야매로 봉인해 놓고 그걸 아주 퇴치한 걸로 착각해서 중앙에 보고가 제대로 안 되었겠지. 중앙에 보고 이전에 보전원 말단에 보고조차 제대로 안 되었을 거야. 보전원이 1654년에 만들어졌고, 그 전후로 불어도감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어수선했으니까」
「그렇다는 말씀은……」
「아마 1650년의 정려문 표창이 그 봉인의 공을 치하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 시기적으로 봤을 때, 여러 정황이 자연스럽게 들어맞지. 맞을 확률은 어디……, 90% 정도 맞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대장의 말에 희지 누나가 칠판 한 구석에 ‘1650년’이라고 쓰고, 그것에 다시 동그라미를 쳤다.
「이따 준비하면서 1650년 전후로 자료를 좀 더 수집해 볼게요」
「그래, 그건 희지한테 맡길게」
인영 쌤이 대답했다. 대장은 여전히 턱을 짚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희지 누나가 칠판 가운데로 돌아오자, 분필대 구석으로 몰려갔던 대나무 병정들이 또 우루루 따라 나왔다.
「야, 저것들 정신 사나우니까 좀 분필대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으라 그래」
대장이 대나무 병정들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희지 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나무 병정들에게 눈짓했다. 대나무 병정들은 마음이 상한 듯――저 녀석들, 표정이 없을 텐데 왠지 울상이 된 것처럼 보였다――축 처져서 분필대 왼쪽 구석으로 몰려가서 거기 켜켜이 쌓였다. 그 모습이 마치 여름에 대량발생하는 대벌레 떼 같았다. 진짜 대벌레 떼처럼 징그럽지는 않고 오히려 귀여운 편이지만, 이미지적으로.
희지 누나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브리핑을 계속했다.
「문제는, 이 취병산 자락이라는 곳이 쌍용시멘트 동해공장하고 연결되는 도로 공사 때문에 다 파헤쳐지고 공구리칠이 되어서, 17세기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을 확률이 굉장히 희박하다는 거예요」
「그럼 그 봉인된 장소를 어떻게 찾지?」
병길 형이 질문했다.
「취병산 산신령에게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겠죠」
「와, 산신령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거였어요?」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으면서 덧붙였다.
「아니, 우리 동네 관악산에서는 산신령 같은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그냥 귀신은 많이 봤는데」
내 말에 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네가 관악이 어떤 산인지 잘 모르는구나. 관악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흉측하게 생긴 흉산이야. 말하자면 마의 산이라고. 남태령 옛날 이름이 여우고개인 건 아냐?」
「우리 그렇게 무서운 데 살고 있었던 건가요?」
「무섭긴. 덕분에 우리도 큰 문제 없이 묻혀 살잖아. 종종 잡귀들 잡아가면서. 여기 산신령 같은 거 있어 봐라, 우리한테는 귀찮기만 하지」
「왜, 대장도 산신령하고 싸우기는 좀 쫄리나요?」
기남 형이 끼어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런 잡스러운 터주신들하고 비교하면 내가 훨씬 세지」
「그럼 왜 귀찮아져요?」
「내가 훨씬 세니까 걔네들이 쓸데없이 사린단 말이야. 교섭하기도 힘들고. 그러니 아예 걔네들 없는 관악산 같은 경우가 나한테는 속 편하지. 나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로 봐도, 쓸데없이 눈치 봐야 하는 대상이 하나라도 줄면 좋은 거고」
「그래도 교섭을 잘 해서 라포르를 터 놓으면 나쁠 건 없지 않아요?」
「산신령 선에서 컷 되는 문제라면 우리한테는 큰 문제가 안 되니 산신령이 있어 봤자 무슨 큰 도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종합적으로 봐서, 없는 게 차라리 속 편하지」
희지 누나가 또 헛기침을 했다.
「자, 일단 브리핑으로 좀 돌아갈까요?」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쓸데없이 삼천포로 샜기 때문에, 바로 냉큼 사과했다. 반면에 기남 형은 대장의 산신령 이야기를 더 못 들어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저 형은 눈치가 너무 없다니까.
「아니, 괜찮아. 아무튼, 계속할게요? 아무튼, 이 서구라는 존재……, 자꾸 존재, 존재 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 마귀할멈이라고 할게요. 이 마귀할멈이 온갖 사이한 이적을 부리면서 삼척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했는데, 그걸 최진후라는 사람이 퇴치했다는 게 『삼척군지』에 기록된 전설 내용의 대강이에요」
「사이한 이적이라고 하면, 구체적인 내용은요?」
우리 누나가 묻자 희지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료 뭉치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일단 미래를 예언할 수 있었다고 하고요, 수십 리 밖의 일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하고. 투시 능력이 있었다는 거겠죠. 그리고 천연두나 홍역을 일으킬 수 있었고. 돌을 흙처럼 주무를 수도 있었다고 해요. 처녀에게 무슨 약을 먹여서 아이를 배게 하기도 했다고 하고……」
희지 누나가 나와 서율 쪽을 슬쩍 보았다. 미성년자가 듣기 좀 그렇다는 건가.
「……임신한 아이를 떼어 버릴 수도 있었고. 그리고 뱃속에 ‘담력’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준다며 사람들과 그……」
「답답하네. 성교했다 이거잖아」
대장의 말에 희지 누나가 다시 우리 눈치를 살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우리 고3이라고요. 기본적인 성교육도 안 받았을까봐? 한편, 내 옆의 서율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우리가 무덤덤해 하는 것을 보고, 희지 누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에게는 무슨 기름을 먹여서 그……, 불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생소하게 들리는 것도 있고, 굉장히 익숙한 이야기도 있군」
대장이 말했다. 희지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서구가 그런 이적을 행하며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서구가 사는 그 동굴은 삼척에서 정선을 거쳐 한성으로 가는 길목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고 해요. 그런데 서구가 소를 바치지 않으면 지나가지 못하게, 사람과 말의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게 하는 그런 주술을 부렸다고도 하고요」
「굉장히 민폐가 심했는데. 그 당시에 삼척에는 그걸 저지할 터주신이 없었나?」
병길 형이 묻자 희지 누나 대신 인영 쌤이 대답했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존재는 산신령 같은 하급 터주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까 주석이 말씀하신 대로」
인영 쌤이 대장 쪽을 바라보았지만 대장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희지 누나가 인영 쌤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 아마 그 당시의 취병산 산신령은 이 서구라는 존재에게 쫓겨났거나, 최악의 경우 소멸당했을 수도 있겠죠. 그 즈음에 병자호란 이후 피해 수습 때문에 불어도감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걸 생각해 보면, 서구는 말 그대로 삼척의 폭군으로 군림했을 거예요. 그러던 중에 최진후가 주도해서 장정 수십명을 끌고 쳐들어간 거죠. 그래서 최진후가 서구를 붙잡아 끌어냈고, 태형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세 가닥 뽑아낸 뒤 머리에 쑥뜸을 300번 놓았더니 정신을 잃고 며칠 뒤에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는 거로군」
「실제로는 봉인으로 그쳤다는 거겠지. 머리카락이니, 쑥뜸이니, 이런 게 물리 피해라기보다는 굉장히 주술적인 느낌이 드는 걸」
병길 형과 기남 형이 말했다. 희지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 뭉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일단, 서천 쪽에서 연락이 온 직후에 부주석하고 저하고 자체 조사로 정리한 정보는 이상과 같습니다」
「뭔가 납득이 되면서도 의문점이 많은 이야기인 걸요. 무엇보다 그 최진후라는 사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길래 그렇게 강력한 마귀할멈을 봉인했을까요? 아무리 불어도감이 보전원 독립 때문에 어수선했다 하더라도, 최진후를 영입하거나 하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나요? 대장 기억에 없다고 하는 걸 보면 그 사건은 중앙에 보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삼척 안에서의 사건으로 끝나버렸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단 말이죠?」
우리 누나의 말에, 희지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문대로예요. 일단 제가 파악한 바로는 최진후는 술자가 아니었던 걸로 보여요. 만약 술자였다면 불어도감이든 보전원이든 영입이 되었겠죠. 하지만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그냥 지방 유학자. 마을 유지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전설이 굉장히 과장된 것이었고, 서구라는 존재도 별 것 아니었을 가능성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서천 쪽에서 전달된 정보를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죠. 그럼 이제 서천 쪽에서 전달된 정보들을 말씀드릴게요」
희지 누나가 분필로 칠판을 똑, 두드리자 지도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판서한 내용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는데, 대나무 병정 둘이 칠판 지우개를 들고 분필대 위를 도도도 달려왔다. 지우개를 받아든 희지 누나가 판서를 쓱쓱 지워나갔다.
「일단, 이 서구라는 존재가 요호라는 정보. 이거는 서천 쪽에서 제공된 거예요. 자료에서는 서구가 여우나 고양이 등으로 둔갑할 수 있는 마귀할멈이고, ‘일설에 따르면’ 여우가 늙어서 인간처럼 화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 서구가 요호라고 단정적으로 쓰여 있지는 않아요. 물론, 요호의 둔갑 능력을 생각해 보면, 서구가 애초에 요호였고 그래서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었다면, 다 설명이 되는 부분이죠. 아까 대장……, 주석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에 남은 에피소드들 중에 굉장히 익숙한 요소들이 겹쳐 보이기도 하고요」
희지 누나가 거기까지 말하고, 대장 쪽을 살폈다. 하지만 대장은 일단 잠잠했다. 그것을 확인한 뒤에, 희지 누나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 서구라는 존재가 확정적으로 요호가 맞다면, 중요한 문제가 얼마나 강력한 요호이냐 그 문제겠지요.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은, 아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미호라는 것입니다」
「꼬리가 백 년에 하나씩 늘어날 텐데, 그럼 900년 이상 묵은 요호라고?」
대장이 물었다. 거기에 대한 희지 누나의 답은 예상보다 훨씬 막나가는 것이었다.
「900년 정도가 아닐 것으로 추측되는 게, 아무래도 이 서구라는 존재가 서천의 태고신들이 인간계를 떠나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 같거든요」
「뭐? 그거 확실한 거야?」
「말하는 걸 봐서는 그런 것 같아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던가, ‘오래되어 그만큼 안타까운 연’이라던가……. 표현이 좀 두루뭉술하긴 하지만요」
「그럼 못해도 수천년 묵은 여우라는 건데. 천년구미호보다 더 오래된 요호라고?」
「의문이 점점 커지는데요. 최진후는 정말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우리 누나가 옆에서 끼어들었지만, 대장은 다시 생각에 잠겼는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말한 것은 기남 형이었다.
「그럼, 더 오래된 만큼 더 강력한 거 아닌가?」
「그게 반드시 정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죠」
「아까부터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혹시 겁나?」
우리 누나가 견제구도 없이 기남 형을 훅 찔러 버렸다. 기남 형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니 뭐, 위험하면 나는 빠지겠다 그런 뜻은 당연히 아니고. 지피지기해야 백전불태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렇지? 가서 봉인도 풀어야 할 텐데, 우리 중에 최고의 봉인 전문가가 빠져서야 안 될 말이지?」
「그렇겠지, 뭐……」
기남 형이 어물거리자 희지 누나가 지방방송을 끄고 브리핑을 계속했다.
「상대해야 할 적이 얼마나 강력한지 파악하는 것은 전투 준비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 맞죠. 사실 그와 관련해서 정말 걱정되는 건 따로 있는데……」
「뭔데요?」
「아마 이 서구라는 요호, 호정을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죠. 그것도 최소 2천년 동안 정기를 모은 것으로. 이것도 추측이 아니고 서천 쪽에서 전달받은 정보예요. ‘구슬을 조심하라’고. 그럼 그 호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능력의 증폭도 엄청날……」
쾅!
어매, 놀래라.
「하! 결국 그거였구만?」
대장이 자리에서 세차게 벌떡 일어나서 의자가 뒤로 넘어가 있었다. 넘어진 의자가 우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의 눈이 모두 대장에게 모였다. 분필대 구석에 쌓여 있던 대나무 병정들도 와르르 무너지듯이 흩어지더니, 희지 누나의 등 뒤에 달라붙어 숨어 버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맡기는 ‘처리’라는 게, 결국 그 여우구슬을 어떻게든 ‘처리’하라, 그 소리로군? ‘너 요호 싫어하잖아. 너 요호종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시킨다고 안 할 거냐?’ 이런 거 아냐?」
「진정하세요」
우리 누나가 대장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대장이 팔을 뿌리쳤는데, 얼마나 세게 뿌리쳤는지 누나 몸이 휘청였다. ……그래도 저 양반이 진심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아예 휙 날아갈 텐데, 손속은 두셨구나.
「야, 량인영. 말해 봐. 할망구가 원하는 게 결국 그거냐? 어? 내가 어떻게 하든 나한테는 좆같은 꼴을 보고 싶으시대? 야, 제주 심방. 할망구가 뭐라 그랬냐고? 어!」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런 워딩으로 말만 안 했지 그게 결국 그 뜻 아냐!」
나도 일어서서 누나와 함께 대장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는지는, 음, 잘 모르겠지만. 대장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인영 쌤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안 하실 거 아니잖아요」
「나한테 선택권이 있냐?」
대장이 자기 목을 가리켜 보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시니까, 고풀이도 해 주실 거예요.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자연히 깨달을 것이니 고를 묶어 놓을 필요도 없어질 것이라고」
「자연히 깨달아? 뭘? 내가 그 서구인지 하는 요호한테서 여우구슬 빼앗아 먹고, 여우짓 하는 게 나 다운 거라는 걸 깨달아?」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식의 말씀은 없으셨어요. 제가 마고 할망과 주석 사이에 중개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주석이 지금껏 고생하게 되신 것에 대해서 제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성모들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기만하고 조종하지 않아요. 애초에 그럴 수가 없어요」
「할망구가 나를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줘야 말이지?」
「그 얘기 하자면 끝이 없어요」
대장과 인영 쌤이 눈싸움을 시작했다.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희지 누나가 나서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인영 쌤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대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안 하실 거 아니잖아요」
「……」
대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결국 눈싸움에서 이긴 것은 인영 쌤이었다. 대장은 목줄처럼 채워진 고를 벗어던지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또다른 요호의 존재라는 정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의지일 텐데, 그 의지의 방향이 누가――그것도 자기가 굉장히 싫어하는 누가――시켜서 그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평행하니 속이 터지는 것일 테다. 이를 뿌득뿌득 씹는 대장의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대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대장에게 가장 미안한 것은 인영 쌤일 것이다. 그리고 대장도 인영 쌤의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씩씩대고 마는 것이다. 인영 쌤도 씩씩대는 걸 받아주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나로서는 이 ‘마지막 퀘스트’가 어떻게든 끝나서 이 불편한 분위기가 해소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또 줄담배를 태우러 나간――나도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았다――대장이 회의실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랬다.
「그래, 뭐. 모가지에 이 염병할 거 없애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이 일을 해야 한다 치자. 그런데 가만 있자. 그런데 왜 아까부터 너희들까지 다같이 나서는 걸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얘기가 진행되는 거야?」
「당연히 다같이 나서야 할 일 아닌가요?」
병길 형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기남이가 자꾸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지금 코 꿰인 건 나 하나 뿐인데, 이렇게 위험한 일에 너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아뇨, 저는 제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요. 어디까지나 지피지기해야……」
「그만큼 위험한 일인데, 혼자 가셨다가 죽도 밥도 아니고 죽사발이 되실 수가 있어요?」
「새끼, 말을 해도 꼭」
대장이 우리 누나에게 짐짓 화내는 척을 했다. 하지만 손만 들어올렸지, 표정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주석, 아니, 대장. 우리 중 누군가의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잖아요. 지금까지 서천 쪽에서 시킨 일들이야, 대장 혼자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면 힘을 보태야죠」
희지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기남 형은 한 박자 늦게,
「다, 당연히 함께해야죠. 당연히. 네」
「이연 너는?」
「저야 뭐, 우리 대장님, 아니지, ‘이모님’께서 가시는 데라면 섶단 지고 불 속이라도 따라가야죠」
「까분다, 진짜」
대장이 주먹을 들이댔지만 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요」
이 목소리는, 인영 쌤이다. 대장을 포함해서 모두들 인영 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영 쌤은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그 동네 산신령하고 교섭하려면, 제가 같이 가는 게 편할 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책임을 져야 하고요」
「하이고. 책임? 네가 날 책임을 져? 야, 말만 들어도 소름 돋는다」
「제가 못 해서 주석을 고생시킨 죄책감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조직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한 간부로서의 책임도 말하는 거죠」
「간부로서의 책임?」
대장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주먹 쥔 손으로 탁자를 짚고, 탁자만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다. 인영 쌤의 말에 대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지만, 아무도 뭐라고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인영 쌤이 일부러 대장의 속을 긁으려고 저리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지금은 저 말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말.
그런 식으로 해야 해서 했던 말들이 오가는 사이에, 얼마나 두 사람 사이에 골이 패이고 꼬였을까.
「저기요」
짧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내 옆에 앉은 서율이었다.
「저한테는 안 물어 보세요?」
「음? 뭘?」
대장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저한테는 따라올 각오, 안 물어보세요?」
그 말을 듣자 동그랗게 떴던 대장의 눈이 팍 찌그러졌다.
「이 위험한 일에 내가 고등학생 달고 가야겠냐?」
「그렇게 치면 림이는 계속 달고 다니셨잖아요」
뭐야. 날 왜 이렇게 걸고 넘어져? 고개를 확 돌려 서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율은 대장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위험한 정도가 달라. 무슨 MC&D 화물에 불지르고 폭탄 까고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고. 너, 진짜 요호하고 붙어본 적이 있어? 천 년 이상 묵은 진짜 구미호하고?」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면, 고등학생이든 성인이든 위험한 정도에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야」
대장이 눈을 부라렸다. 이건 좀 무섭지. 서율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서율의 어깨 바깥쪽에 얹었다. 서율이 살짝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괜찮아. 하고 싶은 말 다 해.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서로 돕는 공동체잖아요. 대장이 우리는 그런 조직이라고 말했잖아요. 지금 다른 언니・오빠들 모두 각자의 자유의지로 위험을 무릅쓰고 대장을 돕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언니・오빠들보다 어리다지만, 고3이면 사리분별 가능할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제 자유의지로 대장을 돕는 데 동참하고 싶은 거고요. 그러면 안 되나요?」
「하아……. 진짜 그런 식으로 말하기냐?」
「단순히 제가 어려서라는 거 말고, 제가 따라가면 안 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아 주시면, 저도 고집부리지 않고 단념할게요. 그렇지 않으면, 전 제 의지로 따라갈 거예요. 제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거 아시죠? 그러면 처음부터 같이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와……」
대장이 팔각모를 벗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너 언제부터 말을 그렇게 잘 했냐?」
「배운 대로 말한 것 뿐인데요」
「누구한테?」
「대장한테요」
「……너희들도 다 똑같아? 율이 말대로, 각자 자유인으로서 나를 돕겠다 그거야?」
대장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형・누나들은 바로 대답을 못 했다. 이 대답의 여부에 따라서, 나하고 서율도 따라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형・누나들도 우리를 데려가는 걸 탐탁치 않아하니까 그런 것이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아무 고민 없이 바로 오케이 했으면, 너희도 따라오너라 선선히 허락했으면, 나는 오히려 형・누나들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형・누나들이, 그리고 대장이 정말로 우리를 걱정해 준다는 것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길지 않은 침묵을 깬 것은 우리 누나였다.
「뭐, 괜찮지 않을까요? 율이가 틀린 말 한 거 딱히 없는 거 같고요」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형・누나들이 차례차례 동의하거나 수긍했다. 마지막으로 인영 쌤까지――
「아까 제 말 때문에 또 기분 상하셨을 것 같은데, 제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 책임을 다하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제 의지예요」
대장이 서율을 보고 말했다.
「그래, 따라오던가 말던가. 너 마음대로 해라」
「고마워요. 하마터면 대장한테 실망할 뻔 했어요」
「맹랑한 녀석」
대장이 서율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서율은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대장은 회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을 한바퀴 쭉 둘러본 뒤,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5분 정도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 끝에, 대장이 입을 열었다.
「……야, 인영아」
「말씀하세요」
「솔직히 말하자. 요 1년간, 우리 서로 너무 좆같았지?」
「불편한 게 없었다고 말은 못하겠죠」
「말로만 안 하지 서로 티는 졸라 냈잖아」
「확실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누가 먼저 잘못했다 그런 소리는 안 하련다. 네가 나 좆같이 생각한 거 원인을 따지자면 60년 넘게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문제고. 그리고 그걸 굳이 따져야 한다 쳐도, 지금이 그걸 할 때는 아니겠지」
「……」
이번에는 인영 쌤이 말이 없었다. 대장이 고개를 들어 인영 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먼저 미안하다」
「주석」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다 끝나고 나서 제대로 풀자. 일단 지금은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그래도 그 전에 하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두고 넘어가야 하는 거」
대장이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갔다. 나 뿐만 아니라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짐작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나 없이 재건된 조직, 유지해오면서 버텨와 줘서 고맙다. ……그리고 60년동안 잠수타서 소식도 없던 나를 다시 받아줘서, 그것도 고맙고」
「저도, 돌아와 주셔서 고마워요. 작년에 했어야 하는 말인데. 너무 늦었네요」
「그럴만 했지」
대장이 인영 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영 쌤이 대장의 손을 보았다가, 잡았다. 대장이 손을 들어올리면서 고쳐 잡아 두 사람의 자세가 팔씨름 악수가 되었다.
「이야, 감동적이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누나가 왼팔로 내 어깨를 안으면서 오른손은 자기 눈 위에 대고 먼 데 보는 시늉을 했다.
「꼭 그렇게 비꼬아야겠어?」
「비꼬다니. 진심인데. 그리고 여기에 이르기까지 내 동생도 기여했다고 생각하면 기특하지」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기여는 무슨 기여. 내가 뭘 했다고」
누나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그걸 따라 박수를 쳤다. 야, 저거 창피하겠다. 내 예상대로 대장이 인영 쌤의 손을 놓고 우리를 돌아보며 역정을 냈다.
「뭐해, 이것들아! 박수는 또 왜 쳐?」
「어, 얼굴 빨개지셨다」
「시끄러! ……그런데 모리안 이 년은 왜 내내 안 보여? 안 불렀냐?」
「말도 돌리시네」
우리 누나는 동문서답하고, 희지 누나가 대답했다.
「부르긴 했는데요. 답이 없네요. 다시 불러 볼까요?」
「아, 됐어. 그거 그냥 부르지 마……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 명이라도 전력이 아까운 상황이니……. 일단 다시 좀 불러 봐」
「알겠습니다」
「그 년은 맨날 지 멋대로야」
대장이 투덜거렸다. 뭔가 얼렁뚱땅이지만, 저 두 사람이 결국 화해하는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음음.
「그럼, 뭐부터 준비하면 될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실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뭐?」
대장이 좀 멍청한 느낌으로 되물었다. 이것은 마치 좀 전에 서율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비슷하지만, 그것과 조금 다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그런 반응. 아니, 설마?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비슷한 반응으로――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저는요? 저는 안 따라가요?」
「야. 너는 진짜 절대 안 돼」
대장이 정색을 했다. 와, 배신감 느낄 것 같네.
「왜요? 왜? 왜? 서율이는 되는데 왜 저는 안 되죠? 왜?」
「미쳤냐? 율이하고 너하고 같아? 자기 한 몸 지킬 수도 없으면서 어딜 따라오겠다고!」
엄청난――아까 서율이한테 하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프레셔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대장과 정면으로 대거리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내 편을 찾았다.
「누나!」
「대장이 틀린 말 한 거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어깨 으쓱이며 말하면 상처 받을 것 같아.
「야, 서율!」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서율이 움찔했지만, 곧바로 왜 자기한테 그러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지금 그런 표정 짓고 싶은 건 나거든? 좀 전에 내가 뒤에서 어깨 잡고 용기를 전해 준 건 다 잊었어?
「병길이 형!」
「……다희 볼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제주도에서 다희랑 같이 펜션 지키고 있어」
「와, 형까지 진짜 이러기에요?」
「상대가 정말 천 년 이상 된 구미호라면, 비능력자인 네가 따라오면 오히려 짐이다. 널 지켜가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야」
우와, 너무해. 짐이래.
「뭘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이야. 새삼스럽게」
「누나!」
「짜식이, 왜 고함을 질러, 지르기는」
대장이 나한테 꿀밤을 먹였다.
「자자, 집 지키는 것도 중요한 임무니까. 림이가 집 지키는 임무를 맡는 거에 찬성하는 사람?」
나 빼고 모두 동시에 손을 들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건 내 자유를 압살하는 다수의 횡포야!」
「그게 아니고 능력과 필요에 따라 임무를 분배하는 거지, 만장일치를 한다고 너한테 없는 능력이 생겨?」
「왜 나만 못 가! 나도 따라갈래! 나도 따라갈래!」
「너 나이가 몇 살인데 바닥에 드러누워서 생떼를 쓰고 있어. 당장 일어나!」
대장이 힘으로 나를 일으키려 하자 나는 탁자 다리에 내 다리를 감고 버텼다.
「야, 우리가 지금 놀러 가는 줄 알아? 그리고 어차피 한 명은 남아야 할 거 아냐」
「아, 희지 누나가 남으면 되잖아요! 왜 나한테 남으라고 그러는데!」
「희지는 본부 지키고 있어야 하고, 너는 제주도에서 다희 보면서 같이 펜션 지키고 있으라고. 인영이가 나하고 같이 동해 가야 하니까 다희가 혼자 있어야 하잖아.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아, 몰라! 나도 갈래, 갈 거야!」
「야, 그동안 실감을 못 했는데 얘가 원래 남고생이 맞기는 맞구나」
「대장도 참, 어디 사내애들이라고 다 그래요? 얘가 유독 정신머리가 어린 거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
「대장이 얘한테 너무 무른 거예요. 저 같으면 정강이를 까서 탁자 다리 놓치게 만들었을 걸요」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우와악!!」
다리를 감싸고 바닥을 뒹굴며 내가 눈물을 쏙 빼는 와중에 손들이 달려들어 내 어깨를 붙잡고 끌어냈다. 와, 진짜 인정사정 없네.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서율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배신자.
「무기고에서 각자 연장 챙기고, 준비할 거 해서, 내일 아침에 집결하자」
「네, 대장」
「이림이, 너는 괜히 따라올 생각 하지 말고, 오늘 밤에 바로 제주도 가 있어」
대장이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말하곤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형・누나들도 그 뒤를 따라 나가면서 나한테 한 마디씩 툭툭 던졌다.
「얌전히 펜션 잘 지키고 다희 잘 보고 있어」
「선물로 오징어 사올게〜」
「필요 없어! 씨이」
서율도 나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인영 쌤이었다.
「다리 괜찮니?」
「괜찮아요. 사실 그렇게 세게 걷어차인 것도 아니고. 저도 제가 따라갈 자리가 아니라는 거, 이해는 했어요. 하지만 마음으로 납득은 어디 그렇게 바로 되나요」
그렇다. 이렇게 떼를 쓰고 체벌로 응징당하는 것은, 그 납득하기 싫은 것을 납득하기 위한, 일종의 합을 맞춘 의식이다. 최소한 그 의식을 거쳐서 납득을 했다고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다.
「근데요, 대장이 힘들고 조직이 곤란하니까 다들 각자 힘 보태겠다고 나선 거잖아요. 제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서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나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어? 근데 보탬이 안 되어서 내가 답답하고 아쉽고 또……, 또……, 아무튼 그렇다는 걸, 좀 이해해줄 수는 없나요? 위로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위로받고 싶은 거구나」
「……네」
「림이 네가 나 대신 다희를 봐주는 게, 동해에 함께 가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보탬이 될 거라고 말해 줘도……, 그걸로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
「잘 아시네요. 오히려 더 울적하네요」
인영 쌤이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나도 순순히 이끌어 주는 대로 일어났다. 다들 나가서 생쇼를 더 해 봤자 봐줄 사람도 없고. 엄마뻘인 분한테 버릇없이 틱틱거릴 수도 없다.
「무사히 다녀올게. 다희 잘 부탁해?」
「네, 뭐」
「불 끄고 나오렴」
참고 문헌
이번 편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 강진욱 (1993), 「마고할미 설화에 나타난 여성신 관념」, 『한국민속학』, Vol.25, No.1, 한국민속학회, pp. 3-47.
- 권도경 (2015), 「<여우설화>에 나타난 여우신성 관념의 내셔널리티와 <신라신화>의 여우신 배제 원리」, 『동방학』, 33(0),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pp. 7-50.
- 삼척시청 (2021), 「삼척의 풍속 » 설화 » 서구암」 — 『삼척군지』(1985) pp. 349-350의 내용임.
- 최순기 (2022), 「마고할미 신화와 그 변이」, 부경대학교 대학원 문화학부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