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요?"
벨이 울리는 소리에, 법의학과 연구원 백연서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 마침 근무가 없는 날이었기에, 손님을 받을 여유는 차고 넘쳤다.
"아, 그… 안녕하세요? 좀, 그… 놀러 왔는데…"
연서를 반기는 것은 왼팔에 깁스를 한 여자였는데, 돌핀 팬츠와 검은 면티 차림에 대충 후드집업을 뒤집어쓴 모습이 마치 '나 딱 한시간 전에 일어났소' 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악마학과 우나은이! 오늘 근무 안 가?"
"팔이 이런데 어떻게 근무를 가요." 나은이 왼팔을 내밀며 말했다. 하얀 붕대로 단단히 감싸져 있었다.
"아…"
"덕분에 잠은 실컷 잤지만요. 딱히 할 일이 없어 가지고 저처럼 오늘 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연서 언니가 있더라고요."
슬슬 재단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건만, 그동안 다른 사람을 자기 방에 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던 연서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내쫓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래, 어서 들어와!" 연서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은이 건조하게 대답한 뒤, 연서를 따라 방으로 입장했다. 하얀색으로 깔맞춤된 가구들은 마치 양산되는 기숙 시설이 아니라는 듯 깨끗이 정돈된 인상을 주었다.
"이야, 언니는 평소에도 방 청소 주기적으로 하는 거에요? 내 방은 내가 봐도 어지러운데. 근데, 지금 뭐 요리라도 하세요?"
나은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부엌의 냄비로부터 무언가 조금씩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으응, 그러니까… 파스타를 한번 만들어보려고." 어색함을 억누른 백연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것도 해줄까? 뭐 먹고 온 것처럼은 안 보이는데."
"좋아요." 나은도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자주 만들어 먹어요? 뭔가 익숙해 보이는데."
"아니? 라면이라면 많이 끓여 봤지만, 파스타는 처음이야."
"그렇군요…"
뭔가 불안이 담긴 뉘앙스를 뒤로하고, 연서는 찬장에서 파스타 면을 꺼냈다. 입이 두 개로 늘었으니 파스타도 그만큼 많아져야 했다만, 얼마나 넣어야 할지 잘 예상되지 않았다.
"나은아, 그, 혹시 네가 먹을 만큼 직접 면을 넣어줄 수 있을까? 양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어서…"
"에, 이거 DIY였어요?" 뭔가 예상 못했다는 듯 말하면서도, 나은은 후드집업을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은도 양이 잘 가늠 안되는지, 적당히 덜어내어 냄비에 대충 투하했다.
"저기, 이거 냄비가 면에 비해 작은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건가요?" 나은이 연서에게 물었다. 확실히, 라면 하나 끓일 만한 크기의 냄비로는 조금 부족해 보였다.
"음… 뭐 풀어지면 괜찮겠지." 연서가 말했다. 라면 끓일 때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슬슬 소스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 토마토에요, 크림이에요?"
"크림이야. 냉장고 안에 있어."
나은이 냉장고를 열었지만, 파스타 소스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는지, 나은은 냉동실을 열었고, 소스는 거기서 발견되었다.
"언니, 그… 이거 소스가 얼었는데요?"
"어라?"
연서는 크림소스가 든 병을 받아들었다. 진짜로 얼어붙어 단단해져 있었다.
"…이런, 어떻게 하지?" 연서가 말했다. 자기도 황당함에 얼어붙어 못 움직이겠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음…" 나은이 턱을 만지며 고심하다, 한 가지 좋은 방책을 생각해냈다는 듯 말했다.
"다 쓰면 병은 버릴 거죠?
"응. 근데 왜?"
"이거, 그냥 부숴버리죠?"
"아니, 그래도 돼?"
"괜찮아요. 이거 유리 아니고 통짜 아크릴이니까, 몸에 들어가도 다치진… 않을 거에요. 아마도."
"어… 그러면 한번 그렇게 해 볼래?"
연서가 풀어져 가는 면발들을 조심스레 저으며 열심히 데치는 동안, 나은은 단단히 얼어 있는 소스 병을 수건으로 감싼 뒤 망치를 가져와 강하게 내리쳤다. 아크릴은 유리와 달리 잘 깨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됐어요. 부쉈어요." 다섯 번쯤 반복된 망치질이 끝나고, 나은은 연서를 불렀다. 수정처럼 빛나는 아크릴 조각들 사이에 병 모양으로 굳은 소스 덩어리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물로 한번 닦아야 하려나?" 백연서가 물었다.
"그럼 순식간에 녹아서 흘러가 버리지 않을까요? 최대한 털어는 냈으니까, 일단 프라이팬에 올려서 천천히 녹여봐요."
연서는 찬장에서 프라이팬을 꺼냈고, 전기레인지 위에 올려 식용유를 두른 뒤 소스 덩어리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
"이거, 소스 부피에 비해 팬이 너무 작은 거 같은데요."
"넘치려나?" 연서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바꾸는 거 어때요? 녹으면 그땐 이미 늦어버릴 거 같은데."
"그래, 그러자."
연서가 더 커다란 팬을 꺼내 다시 식용유를 두르고는 이전의 팬과 바꿔 놓았다. 덩어리가 이미 살짝 녹아 있었기에, 손에 크림이 조금 묻어 나왔다.
"이 정도면 문제 없겠지?" 연서가 싱크대에 손을 헹구며 말했다.
"네, 뭐. 그런데, 우리 면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은이 물었다.
"아! 그, 이제 체에 걸러서 면만…"
연서가 면이 든 냄비를 들려고 했지만, 냄비에서 올라오는 고온에 놀라 자지러져 버렸다. 우나은이 들어올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끓고 있었으니, 지금처럼 내용물을 아예 졸여 버리려는 기세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나은아, 그, 저것 좀 어떻게 해 주면 안 될까?"
"음…"
뭔가 생각하던 나은은, 침착하게 전기레인지의 전원을 껐다. 끓어오르던 살기가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이러면 들 수 있겠죠. 직접 하기엔 제 팔이 이래서."
연서는 다시 냄비의 손잡이를 잡았다. 확실히 이전보다 덜 뜨거웠다. 내용물을 체에 걸러 싱크대에 전부 부어 버리자, 남은 열기에 피어오른 수증기가 부엌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켈룩! 어으, 김이 아주 그냥…"
"그, 나은아… 이거 익은 거 맞겠지?" 증기를 뚫고 나타난 연서가 나은에게 체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떤 면발은 물렀고, 어떤 면발은 아직도 조금 딱딱했다.
"어, 잘 모르겠는데요." 나은이 답했다. 연서만큼이나 요리에 아는 바가 없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소스에 넣어봐요. 그럼 어떻게든 되겠죠."
연서가 고개를 끄덕이곤 소스를 녹이던 프라이팬에 모든 면발을 투하했다. 덩어리가 많이 녹아 원래의 액체 형상을 되찾기는 했지만, 2인분의 파스타에 소스 한 병은 지나쳤던 것인지 흡사 크림 수프에 면발을 얹어둔 모양새가 되었다.
"뭔가 이상하네…"
"그러게요…"
돌이킬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열심히 파스타를 저었다. 예상과 달리, 아직 단단한 면은 그대로였고, 잔뜩 불어버린 면은 더더욱 불어 버렸다.
"먹어도 죽진 않을 거에요." 나은이 힘을 들여 저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연서도 계속 저으면서 말했다.
몇 분 후, 드디어 파스타는 완성되었고, 두 사람은 식탁에 착석해 각자의 몫을 그릇에 담았다. 파스타도 아니고 크림 수프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무언가의 비주얼은 못 봐줄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은이 먼저 포크로 면을 떠 입에 한움큼 넣었다. 우물거리던 나은은 내용물을 목구멍으로 삼키곤 연서에게 한 마디 건넸다.
"그, 저희 설마 독요리 속성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니, 그럴리가. 만약 진짜 있다면 내가 미안해지겠지만…" 연서도 면을 떠 입에 넣었다. 순간 오도독하는 소리가 나더니, 포크에 아크릴 조각이 걸려 나왔다.
"그, 나은아? 이거 최대한 다 털어냈다고 안 그랬어?"
"그러게요… 이상한 일이네." 나은이 연서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튼, 졸지에 합동 작전이 되어버린 파스타 조리는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은과 연서가 식사를 하며 씹은 아크릴은 총 21조각이었고, 덜 익은 면은 48가닥에다가, 불어서 물러진 면은 36가닥이었다. 정상적으로 조리된 면은, 총합 0가닥이었다.
"완전 망했네…"
"아니에요. 아크릴 조각 뱉어내느라 먹기 불편했긴 해도 나름 맛은 있었어요! 그게 파스타로서 맛있던 게 아니라, 수프로서 맛있었던 거라 문제긴 하지만…"
"그냥 적당히 라면 같은 거나 끓일걸 그랬어…"
"솔직히, 그것도 뭔가 좀 — 아니다, 에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은 그럭저럭 있었으며 우나은 요원과 백연서 연구원의 친목 또한 더욱 돈독해졌다고 하니, 성과가 제로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의 위안을 찾을 수가 있기는 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