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여기지 마세요. 저 아이는 위험합니다.
이 어린 아이가 사람들을 도륙내며 피를 뒤집어쓰는 것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져야 할 것들을 잃고 알면 안되는 것들을 알아버린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저 애가 웃거나 우는 걸 보는 사람이 있어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단 말입니다.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저 아이를 망가뜨린 건 당신들이야.
카나리아는 문을 열고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침대를 비롯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오늘 하루가 너무나 길었다.
몇 주간의 근신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들려온 소식은 새로운 특무부대에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감독관은 태연히 웃으면서 징계나 좌천같은 게 아니고 재능에 걸맞는 곳에 배정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추적 전문 특무부대에서 경호 목적의 부대로 옮겨졌는데 좌천이 아니라니. 어떻게든 항의하려 했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성의 없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카나리아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 다시금 상관의 웃음을 떠올리면서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짜증을 느꼈다.
며칠 사이에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산더미처럼 불어난 업무들을 떠맡게 되니 자연스레 피로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당장 내일이 기특대 합류를 위한 이송일인데 짐조차 싸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눈꺼풀이 무거워져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 따위는 없으니까 별 상관 없겠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날 성급히 돌격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지려 할 참이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몇 번이고 돌격소총 몇 자루를 등에 짊어진 채로 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살갗을 찢어버리기 위해 날아오는 총알들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다. 총으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쏴죽이는 것을 즐겨서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도 전장의 그 순간순간이 전부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매캐한 화약과 비릿한 피 냄새가 아직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귀를 가득 채운 폭발음과 납탄들이 주변으로 날아드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잔해 속에서 자욱히 피어오른 먼지들, 그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광신도 무리들도 선명히 보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서늘한 냉기가 뼛속을 파고 들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화약이 코를 가득 메운 듯 했다.
매 순간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도끼가 날아와 내 머리를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멈춰서는 안됐다.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보이는 모두에게 총을 갈기면서 나아가야했다. 저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인지 아무 상관 없었다. 혈관 하나하나에 차있는 증오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사람의 형체라면 그게 쓰러질 때까지 총을 난사하며 뛰어들었다. 온몸이 부서져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신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혐오스럽고 역겨웠다. 신이 그렇게도 좋으면, 그의 곁으로 가라지.
카나리아는 그 전장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밀려오는 피로에 몸을 맡겼다.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뿌리치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카나리아는 눈을 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니 아직 창밖은 어두웠다.
'이런 시간에 기지가 소란스러울 일이 거의 없을텐데.'
발을 바닥에 내딛은 순간 익숙하고 불쾌한 열기가 느껴졌다. 검고 뜨거운 연기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여러 명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쇠붙이로 문을 격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머릿속이 점차 새하얗게 되는 동시에 가슴 한 켠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요원복을 갈아입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카나리아는 권총을 집고 빠르게 문을 열어 복도로 뛰쳐나갔다. 사방에 불길이 치솟아 연기가 자욱했고 화재 경보가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자세를 낮추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를 썼겠지만, 카나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온몸에 기분 나쁜 기시감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마음 한 켠에서 용암이 치솟는 듯 했다. 카나리아는 불길 속에서 가만히 서서 자욱한 연기 안을 맹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매워오고 숨이 막히는 고통을 느꼈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에서 인간 형태의 그림자 여럿이 일렁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요원복의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을 꺼내어 삼키자 작은 이명과 함께 카나리아의 귀가 차츰 먹먹해져 갔다. 불길은 잡힐 기미 없이 더욱 거세져만 갔지만 별 상관 없었다. 카나리아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 불길 속으로 돌진했다.
어렸을 적의 나는, 매 순간이 끔찍했다. 어떻게든 입을 열어 소리를 내려 할 때면 어디선가 끔찍한 복면을 쓴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그 날의 매캐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고 물을 마실 때마다 피비린내가 났다. 방에 들어서면 뒤에서 금속이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베개에 머리를 뉘면 그 날의 광경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하늘이 검어질 즈음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으면, 곧 소중했던 모든 것이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숨이 막혀오는 검은 연기 속에서 그들은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새장에 갇힌 채 차가운 도끼날에 찢겨죽어야만 했다.
'철컥.' 카나리아는 장롱 뒤에 몸을 숨기고 슬라이드를 당겨 총을 장전했다. 이제 마지막 탄창이었다.
방 안에는 연기가 가득했지만 얼핏 봐도 복면을 쓴 채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거구 두 명이 달려들었고, 카나리아는 침착하게 자세를 낮추고 머리에 한 발씩 갈겼다. 신발들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남자 여럿이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카나리아는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어 핀을 뽑고 방문을 노려보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가까이서 소름끼치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곧바로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카나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몇몇은 머리에 총알을 맞고 뒤로 쓰러졌으나,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힌 채 연기 속에 있을 카나리아를 찾아 도끼를 마구 휘둘러댔다. 같은 복면을 쓴 사람이 그 도끼날에 맞아 쓰러지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단순히 피가 묻은 도끼를 휘두르는 것만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저 휘두르고 내리찍었다. 가구를 부수는 소리와,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소리들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조금만 더.'
카나리아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복면 하나에게 총을 쏘고 재빠르게 연기 속으로 숨었다. 카나리아의 귀에 총성이 아득하고 먹먹하게 울렸다. 암담한 시야 속에 총구가 여러 차례 불을 뿜자, 복면들이 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카나리아는 총을 버리고 복면들 속 연기로 달려들어갔다. 바로 옆에 도끼들이 날아와 꽂혔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살기가 가득한 흉기들을 피해서 구석으로 내달렸다.
카나리아가 구석에 몰리자, 복면들은 흥분한 채 몰려와 괴성을 질러대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더이상 복면들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카나리아는, 핀을 뽑아두었던 청각 밈 인자탄을 바닥에 내던졌다.
순간 굉음이 울려퍼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소리치고 도망쳤지만 그들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도끼를 손에 쥐고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며 달려왔다. 그렇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어가려던 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겨워.'
공포는 시간이 지나 짜증이라는 감정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점차 두렵기보다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꿈에서 피가 묻은 복면을 볼 때마다 가증스러웠고 신을 부르짖으며 총칼을 들이미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신의 뜻이라고 부르짖으며 사람들에게 총칼을 들이미는 것들 전부를 도륙내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를 날카롭게 깎아냈다. 그 날의 무력함과 분노를, 절대 잊지 않도록 다른 감정들을 필사적으로 죽이고 억눌렀다.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매번 스스로를 몰아세워야 했다.
점차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꿈이든 현실이든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그 날의 꿈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었고, 재단에서도 신뢰받는 요원으로 인정받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게 몇 해가 지나도 결코 분노가 사그라드는 법은 없었다.
이걸 극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카나리아는 바닥에 널린 복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숨을 고르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카나리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모를리가 없었다. 몇 만 번을 꾼 꿈인데. 뒤에서 달려드는 남자를 능숙한 솜씨로 피하고, 바닥의 권총을 빠르게 집어 남자의 복부를 쏘았다.
복면이 반쯤 벗겨진 남자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배를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피칠갑이 된 몸둥이를 어떻게 그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카나리아는 바닥에서 날에 피가 묻은 묵직한 도끼를 하나 집어 들었다.
히끅.
'다시는 당해주지 않아.'
카나리아는 손에 쥔 도끼로 남자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콰직. 오도독.
유란은 출근 직전 급히 들린 편의점에서 사온 과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좋아하는 류의 과자는 아니었지만, 방금 우려낸 차와는 나름 어울렸다. 유란은 아직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을 모두 끝낸 후에 만끽하는 오후의 여유는 꽤 즐거웠다.
유란은 화면에 떠있는 서류들의 창을 닫고, 키보드를 두들겨 히키코모리 크툴루에 대한 문서를 띄웠다. 찬찬히 문서를 읽어내려가던 유란은, 문득 스크롤을 내려 '기지 이동 내역'이라 적힌 부분을 살폈다.
"마지막 기지 이동일이.. 5월 9일. 이제 곧 크리스마스니까 다시 다른 기지로 옮기겠네."
이 크툴루는 스스로도 제어 못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홀리는 이상한 변칙성 때문에,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격리기지를 옮겨야했다. 제어를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크툴루가 무슨 짓거리를 하는 지는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 SCP의 전담 특무부대의 일원이 된 한 사람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요원들도 파견되기를 꺼려하는 교단을 거의 단신으로 박살내버린 직후 유란의 친구에 의해 호전적인 경호원이라는 우스운 별칭을 가진 특무부대에 전출된 카나리아, 그녀의 눈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다. 유란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려 유란이 작성한 카나리아의 심리 보고서의 창을 띄워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현재 피면담자는 심리가 매우 불안정하며 현 특무부대에서 임무를 속행하기는 부적합하다고..'
면담 기록의 막바지에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 문장만 쓰지 않았어도 카나리아가 지금의 부대로 전출되는 일은 없었을 테지. 적을 당시에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문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회스러웠다.
카나리아와의 면담 중에서도, 분노와 역정을 쏟아내는 그녀가 자꾸 예전의 유란과 겹쳐 보였다. 면담을 막 시작할 즈음에는 담담하고 어딘가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마치 바다같았다. 분노를 오랫동안 담고 쌓으면서 속이 썩어가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드러나는 기색 없이 고요하고 평정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배가 떠오르면 단숨에 높은 파도를 일으켜 삼켜버리는 그런 밤바다.
잠시 유란은 눈을 감고 예전을 떠올려보았다. 지금의 보안 인가등급을 가지게 해준 그 일 직후의 면담을.
…그래놓고도 내가, 내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어? 그 미친 짓거리를 내 손으로 하게 했는데도 아직 부족해? 대체 몇 명이나 내 손으로 죽인 거야.'
'유란 요원,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우선 조금 진정하고..'
'입 닥쳐, 난 거기서 죽은 거야. 너희가 날 죽여버렸다고.'
"……"
옛 일을 떠올리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유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남은 과자들을 몽땅 입에 털어넣었다. 해야 할 일이 없으니 사람이 감상적이 되는 거지. 유란은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 뭉치들을 들고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삐이-
순간 비프음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이명인 줄로만 알았으나, 곧이어 사무실의 창문의 블라인드가 내려가고 문이 잠겼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란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곧 스스로가 무언가를 잘못 처리한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던 유란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모니터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의 화면은 새까매져있었고,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떠있었다.
@@ O5-10 긴급 회신.
ㄱㄱ 수신자는 빠른 응답 바람
"연휴가 끝나자 신용대출 금리가 일제히 인상해 많은 시민들이 반발 시위에 나섰다."
그것 참 안 좋은 소식이네, 음.
"도심 한가운데에서 누드 아트를 한 예술가가 공연음란죄로 긴급 체포되었다."
그건 그럴만 했지, 세상에는 또라이들이 많아.
"안타까운 선택을 한 천재 고등학생이 사실 학부모에게서 학대받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
아이구, 저런. 끔찍한 소식이군. 세상이 아주 말세야.
"대선 결과가 인공지능 계산 결과와 65% 동일해.."
여기까지만 읽고 신문지를 찢어버렸다.
"으아아 지루해애!"
등의 촉수를 쭉 피며 소리쳤다. 하는 것도 없이 먹고 자고 싸는 것, 신문지 가끔에 게임 자주. 그것도 전부 보안문제로 솔로 플레이가 전부인 삶이 반복되고 있으니 슬슬 지루해질 만도 했다. 물론 몸에 촉수가 달렸고 오래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환경을 제공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지겨운 것은 지겨운 것이었다.
'차라리 바닷속에 틀어박혀 있었을 때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두컴컴하고, 할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심해보다야는 여기가 훨씬 나았다. 그 어둡기만 한 칙칙한 바다 밑바닥에 쳐박혀 있었다면 벌써 노이로제에 걸렸을 것이다. 한숨을 크게 내뱉고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히 떠올려보았다. 재단의 사람들에게 잠시 산책을 하고 나와도 되냐고 허락을 받을까, 아니면 말동무 요원 한 명을 파견해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채팅 기능을 삭제한 멀티 플레이 게임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할까. 하나하나 생각해보았지만, 모두 매몰차게 거절당할 것을 알기에 점점 울적해지기만 했다.
"슬슬 바깥 구경이 하고 싶은데, 이제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때가 되지 않았나?"
등의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며 혼잣말을 했다. 여기에서는 간단한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으니까, 점차 혼잣말이 늘기 시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몸을 뒤를 젖히니 의자가 심하게 삐걱거렸다. 등에 달린 촉수들이 의자의 등받침에 짓눌렸다.
벌떡 일어나서 등의 촉수를 움직여보았다. 하나하나의 감각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한 번에 여러 촉수들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심심하던 차에 몇 주간 나름 연습에 연습을 거쳐 이제는 거의 모든 촉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촉수를 의지대로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그 감각이 점차 선명해져갔다. 그렇지만 오늘은 한가하게 흐느적거릴 기분은 아니지.
결국에는 침대로 가 누웠다. 잠은 하나도 오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초록색 풀들이 가득한 평원, 그 곳을 뛰노는 양, 양들을 바라보는 양치기 소년 한 명, 그리고 그 위를 흐르는 뭉게구름들, 그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납탄과 철이 스치면서 나는 마찰음과, 긴박하게 내뱉는 숨소리… 곧이어 들려오는,
거대한 비명소리.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나를 감싸던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고, 주변에서 들려오던 모든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촉수의 끝 부분부터 짜르르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전에도 느껴본 감각이었다. 나는 귀를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비명소리들은 살점을 뚫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수 백명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노인이 동시에 고통이 담긴 비명을 내지르는 듯 했다.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구멍을 파고, 문을 지키는 자를 산 채로 파묻으면 온 세상에 꽃이 피어나고 태양과 달이 떠오르고 모두가 녹기 시작하며 자물쇠가 걸린 왕관과 서류공장의 유산을 품은 그 분을 낳아라 마지막 아이야 삶의 한 켠에는 검은 달이 떠있으나 방어기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되나니 진혼곡이 들려온다
"크아아악!"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도망치듯 일어나 단말마를 내질렀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떨치려 악을 내뱉어보아도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숨을 들이마시려 컥컥거려도 주변의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손과 촉수들로 귀를 틀어막으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나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불쾌한 고통에 온몸이 배배 꼬였고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으며 눈 앞의 세상이 미친듯이 돌고 있었다. 곧이어 어지러움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등 뒤의 흐느적거리는 무언가로부터, 익숙한 감각이 짜르르하게 울렸다.
카나리아는 알람 소리에 깨어나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기분 더러운 꿈을 꾸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이대로 다시 누워서 자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이어 여기저기 불려다닌 탓에 아주 피곤한 상태였다는 것은 합당한 지각 사유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일어나서 씻어야겠지. 알람이 울렸으니 이제 막 6시이고, 잠이 부족하면 중요한 서류들을 처리할 때 졸아버릴 거야. 그러니까 10분만, 아니 5분만 더 자자. 카나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상반신의 힘을 풀어 풀썩 누웠다. 오늘따라 유독 침대의 이불이 포근했다. 마음 한 켠에서는 정말 다시 누워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것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로에 밀려버렸다.
그랬어야 할 터였다. 다음 순간 숙소의 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누군가가 카나리아를 흔들어 깨웠다.
"카나리아, 맞죠?"
잠에서 막 깬 몰골의 카나리아는 개인 숙소에 들어온 침입자가 누군지를 단박에 알아차렸으나,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수화를 통해 여기에 들어온 이유가 뭔지 물어보려했지만 감독관의 얼굴은 너무나도 긴박하고 비장했다.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한 카나리아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저랑 일 하나만 같이 해요."
유란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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