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년 11월 6일. 정찬우는 문 앞에 섰다.
평범한 나무 문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고풍스러운 거북이 조각상이 장식으로 달린 문. 손잡이 사이로 주인장의 취향을 반영한 듯한 새콤한 레몬 향기가 은은히 번졌다.
그를 제외하고 주위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은 점심 시간이니까. 기지 행정동의 다른 직원들은 지금쯤 구내 식당에서 사골우거지해장국을 퍼먹고 있거나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서 여유로운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조금 창의적인 사람들은 동료들과 시덥잖은 수다를 떨면서 내일은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토론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피로에 쩔어 사는 사람들은 쏟아지는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 1층의 수면실에서 단잠을 청할 것이다. 찬우는 어렵지 않게 각각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머리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동료들. 15년 동안 같은 기지에 근무하면서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
찬우의 동료’였’던 사람들.
문손잡이가 저절로 열리며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문 너머로 엄격한 표정의 땅딸막한 중년의 남성이 그를 마주했다. 문 밖에 누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그의 눈썹이 잠시 위로 올라갔다가 곧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아, 어서 와요, 정찬우 박사. 마침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제21K기지의 새 인사이사관보, 이호창 박사가 말했다.
찬우는 그를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쪽에 마호가니 목재로 만든 낮은 테이블과 가죽 소파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놓여 있었고, 그 왼쪽으로 이호창 박사가 근무할 때 쓰는 듯한 스탠딩 테이블과 모니터 두 개가 달린 노트북, 고급 오피스체어가 있었다.
예전 구미래 박사가 쓰던 가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전부 처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재단은 버려지는 인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을 정도로 빠르고 효율적인 일처리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찬우는 그 냉정함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테이블 위의 막 끓인 듯한 커피포트에서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 나왔고, 구석에는 레몬 향기의 근원으로 보이는 작은 레몬나무가 아직 다 익지 않은 푸릇한 과실 몇 개를 매단 채 조용히 익어 가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 더미와 자기계발서가 꽂힌 책장이 이곳의 새로운 주인의 취향이 어떤지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앉고 싶은 쪽에 앉아요. 난 상관없으니까.”
이호창 박사가 무심한 어투로 말하며 책상에서 티백 봉투를 꺼냈다. 찬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에서 가까운 쪽의 소파에 앉았다.
“차? 아니면 커피?”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찬우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호창 박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티백 봉투를 밀어넣고 커피 드립백 두 개를 꺼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종이컵 두 개를 꺼내서, 드립백을 컵 가운데에 고정하고 커피포트의 물을 조금씩 드립백 주위로 적셔 주며 물을 내렸다. 상큼한 레몬 향기 사이로 담백하고 씁쓸한 커피향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찬우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었다.
“그래, 좀 잘 쉬었어요? 최근에 신관에 카페 하나가 새로 개업했던데.”
잠시의 침묵 끝에 이호창 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 보려는 노력인 듯했다.
“네, 한 번 가 봤는데 구관 쪽 카페에 비해 커피가 너무 달더라고요. 전 신세대 입맛은 아닌가 봅니다.” 찬우는 여전히 온화하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호창 박사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커피포트의 물이 종이컵 밖으로 조금 흘렀다. 그의 말이 퍽 즐거운 듯했다.
“우리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슬퍼지지 않겠습니까? 높으신 분들한테는 우리도 아직 파릇파릇한 애송이들이라고요.”
찬우는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다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호창 박사는 컵에 물을 다 따른 뒤 축축해진 드립백 두 개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종이컵들을 테이블로 가져왔다.
“받아요. 컬럼비아 산 원두라서 좀 쓸 수도 있는데,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오히려 좋죠. 전 달달한 커피는 질색입니다.”
“하하, 우리 취향이 생각보다 잘 맞네! 저번에 다과회 할 때 그쪽도 부를 걸 그랬습니다.”
“전 부르면 언제든지 가죠.”
허울뿐인 대화 사이로 또다시 오고가는 한 차례의 웃음. 문득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형수의 사형 집행은 그가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일까지 기밀에 부쳐진다고.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사형수는 그가 사형장이 있는 오른쪽 복도로 가게 될지, 식당이 있는 왼쪽 복도로 가게 될지 모른다. 그저 간수가 이끄는 대로 따르며 하루라도 더 왼쪽을 향하기를, 발걸음이 오른쪽으로 가는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찬우는 차라리 자신의 사형 집행인이 빠르게 결단을 내려주었으면 했다. 이런 가식적인 편안함보다는 날카로운 진실이 덜 아플 테니까. 갈비뼈 아래 심장이 시큰거렸다.
“커피 맛이 어때요, 정찬우 박사?” 이호창 박사가 말했다. 아직은 오른쪽 복도로 꺾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먼저 운을 띄워 볼까. 찬우는 생각했다. 정해진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몸부림과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혼자서 감정을 삭히고 싶은 욕구가 속에서 충돌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직은 이호창 박사의 의도에 따라 주기로 했다.
“아주 좋습니다. 제가 자주 먹던 커피랑 비슷한데 더 깊은 맛이에요.”
“입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이사관보님도 쓴 커피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다들 달달한 커피를 좋아하길래, 제가 특이 취향인가 했어요.”
“저야 없어서 못 먹죠. 야근하는 날이면 하루에 세 잔씩 먹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주치의한테 매일 잔소리를 듣고 있지만.”
“원래 뭐든 과도하게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하더이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그래요, 정말 그렇죠.”
이호창 박사는 그 말을 끝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찬우도 따라서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의 취향에 딱 맞는 담백하고 씁쓸한 용액이 혀와 식도를 적셨다. 이런 날만 아니었다면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동료들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호창 박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찬우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괜찮습니다. 다들 충격을 좀 받긴 했지만. 마리나-02 대원들도 영구적인 부상이 없고, 심리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떴다더군요.”
"직접 확인했나요?"
잠깐의 정적. 찬우는 이어질 말을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아뇨. 서면으로 확인했습니다."
"평소 동료들과 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박사. 맞나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입밖으로 터져 나온 말. 선을 넘었다. 찬우는 이호창 박사의 눈빛이 순간 번뜩이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황급히 엎지른 물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호창 박사는 너털웃음과 함께 그의 실수를 확정지었다.
"아, 확실히 그렇네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박사. 사과드리죠. 우리가 모인 의도는 이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죠?"
찬우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곧바로 놓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여기서 정신적으로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간 완전히 끝장이다. 심호흡하고, 태세를 유지하자.
“아닙니다. 부적절한 어투를 사용한 것은 저니까요. 저야말로 사과드립니다.”
여전히 온화한 말투였으나 끝부분이 조금 갈라지게 나왔다. 명백한 감점 요소였다. 그래도 크게 동요한 모습은 아니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호창 박사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테이블 아래 서랍에서 얇은 서류 파일을 하나 꺼내, 찬우가 볼 수 있도록 180도 돌려서 올려놓았다. 종이의 맨 위에는 ‘징계의결서’라고 적혀 있었다.
찬우의 숨이 턱 막혔다.
“더 수다를 떨고 싶긴 하지만 그럴수록 피차 마음만 상할 것 같네요, 정찬우 박사. 깔끔하게 끝을 봅시다.” 이호창 박사가 말을 이었다. 무감정한 어조로, 빠르게.
“준비되셨나요?”
이호창 박사의 사무적인 어조 위로 무표정한 얼굴이 덧씌워진다. 그것은 재단에서 오랜 시간 일한 사람다운 능숙한 감정 조절이자, 앞으로 벌어질 판결에 대한 일종의 예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찬우는 그가 앉은 이 자리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해고되고 장막 밖으로 다시 튕겨져 나갔을지 잠시 생각했다. 곧 그의 이름 역시 거기에 추가로 덧붙여질 것이다. 그가 재단에서 쌓아 온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사형수가 마침내 사형장으로 들어섰다. 이호창 박사가 입을 열었다.
“수신, 제21K기지 SCP-1490-KO 담당 연구원 정찬우에게. 최근 발생한 SCP-1490-KO 격리 파기 및 무효화 사건에 대한 인사위원회 심의 결과를 안내드립니다.”
찬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앉은 소파가 바닥으로 꺼져 맨틀 아래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집중이 끊기며 이호창 박사의 목소리가 의미 없는 백색 소음으로 변했다가 곧 되돌아왔다.
“귀하의 동료 연구원들의 면담 기록과 과거 보고서 내역을 주의 깊게 검토한 바, 귀하는 SCP-1490-KO의 연구 과정에서 휘하 연구원들에게 자주 부적절한 언행을 일삼았으며 동시에 객체에 대한 관리감시 지도 역시 소홀히 하였다는 것이 파악되었습니다. 이는 재단의 의도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되지 않는 실책입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마음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울린다. 격리 파기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외쳤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찬우는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귀하는 SCP-1490-KO의 선임 연구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객체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결과적으로 SCP-1490-KO-B의 빙의와 재단 시설 탈주에 간접적으로 일조한 혐의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저희 인사위원회는 이후 발생한 SCP-1490-KO의 격리 파기 사태에 귀하의 책임 소재가 상당 부분 존재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인사위원회 회의에 출석을 요구하는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찬우는 열한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출석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덧붙여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대신 식칼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기를 기도하면서.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시간 동안 귀하가 안정적으로 연구실을 운영하며 다양한 성과를 기록했다는 점, 실험실에 Sei 장비1 등의 장비를 미리 구비해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마련하려 노력했다는 점 역시 참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호창 박사의 목소리가 윙윙 울린다. 저건 어차피 해고 직전에 날 위로하려는 가식적인 치켜올리기에 불과하다. 정말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나름 연차가 6년이나 쌓인 사람인데.
찬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귓바퀴 너머로도 웅웅거리고,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슴이 시큰거릴 정도로.
“…따라서 귀하의 제21K기지 연구원 자격은 4주 후 박탈될 것이며, 그때까지 귀하는 근신 조치될 예정입니다. 해당 기간 동안 타 기지로의 전근을 희망할 경우 각 기지 인사팀과의 상호 합의 하에 이직이 가능합니다. 4주 후까지 이직 계약을 맺지 못했을 경우에는 귀하의 소속이 자동으로 재단 휘하 위장 회사로 전환되며 관련 역정보 처리가 진행될 것입니다.”
"뭐라고요?" 더는 참지 못하고 찬우가 되물었다. 이호창 박사의 눈썹이 둥글게 휘어졌다.
"4주 후에 당신은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고, 장막 밖에서 민간인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당신을 거둬가겠다는 다른 기지가 나타나지 않으면요." 이호창 박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통보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찬우의 긴 경력 속에서 사고를 친 인원이 바로 기억소거제를 먹인 채로 장막 밖으로 버려지거나 권고사직 후 사직서를 내는 케이스는 종종 보아 왔지만, 기지 연구원 자격 박탈이라니. 이제 이류 축구선수처럼 날 받아 줄 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가차없이 허물어졌다.
“그때까지 귀하의 개인 사무 공간과 격리동으로의 출입은 금지되며, 월급 역시 지급되지 않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귀하는 지시가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고지를 받은 날짜로부터 5일 이내에 재심의 요청을 할 수 있으며, 개인적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인사이사관보와의 면담을 통해 근신 기간을 조정 가능합니다. 언제나 행복한 하루 되시길.”
이호창 박사가 문서철을 탁 덮었다. 아무 변론도 하지 못한 채 창백한 안색으로 앉아 있는 찬우를 보는 그의 시선에 아주 약간의 연민이 깃들었다.
"괜찮으세요?" 이호창 박사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찬우의 그제야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오한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입을 몇 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네, 괜찮습니다." 그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다행이네요."
이호창 박사는 몸을 소파에 편안히 기댔다. 자신의 임무를 다해 또 한 명의 불운한 퇴사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정반대로, 찬우의 뇌는 이제 막 맹렬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장막 안에 붙어서 내 삶을 유지하려면 제21K기지 밖의 다른 기지를 찾아야 한다. 제202K기지? 제145K기지? 아니면 눈 딱 감고 무진으로? 그의 경력 동안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리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다.
아,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 줄 걸. 그의 머릿속에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던, 타 기지에서 협동 업무 차 파견 왔었던 연구원이 스쳐지나갔을 때 찬우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4주 안에 이직을 성공시켜야 했다.
"정찬우 박사?"
골똘히 상념 중인 그의 의식 사이로 가벼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찬우는 고개를 돌렸다. 이호창 박사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섭섭하게."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 중입니다만." 찬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요? 어디로 가려고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면 전 이만 가도 될까요?" 찬우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어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박사. 다시 앉아 주세요."
이호창 박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찬우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앉았다. 이호창 박사가 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전임 인사이사관보를 대체하고 새로 부임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은 알고 있으시겠죠, 물론."
"그래서요?"
"할 일이 아주 많다는 소리죠. 솔직히 몸이 다섯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매일같이 야근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찬우는 굳이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아까부터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졸음이 그의 몸속에 느릿하게 차올랐다.
"그래도 이사관님과 다른 이사관보님들의 도움을 받아 대충 인수인계는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사이동 처리에 대해서는 이제 숙지가 끝났고요."
다시 잠시간의 침묵. 찬우는 이호창 박사의 말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세가 무너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바로세웠다. 어지러웠다.
"이 징계의결서를 처음 받았을 때는 저도 놀랐습니다. 연구원의 자유계약직화라니, 이론상으로야 가능하지만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아마 정찬우 박사님도 들어 보신 적이 없으실 텐데, 맞죠?"
"네, 없습니다." 내 어투가 왜 이렇게 웅얼거리지?
"그래서 이사관님께 한 번 개인적으로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고요. 이 서류가 사실은 쓸모없는 종이더미라는 겁니다."
뭐라고? 찬우는 고개를 들어 이호창 박사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흐려졌다.
쫘악.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징계의결서를 이호창 박사가 찢어 버린 듯했다. 찬우는 차마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윤리위원회에게는 정상적인 서류가 갈 겁니다. 당신이 4주 동안 적합한 계약을 찾지 못해 재단 소속 위장 기업으로 발령되었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겠죠. 어차피 당신 같은 인간을 찾을 기지는 아무 곳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죠?"
아냐, 그렇지 않아. 하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을까? 찬우의 의식이 바닥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좋은 꿈 꾸세요, 시체 비누 회사 소속 정찬우 대리님."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는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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