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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고문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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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니카 반란Chapter V: Nika Riots
저자:
ProfoundAbyss
"민테 양?"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는 민테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필록세노스가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민테 양."
"……"
"자네 지금 자는 척하고 있는 거지?"
"젠장. 프라테스였으면 10분은 더 뭉갤 수 있었는데."
"그럴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네." 필록세노스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네. 자네는 어제저녁 니카를 생포한 뒤 기절해서 그다음 날 아침에 은비부대 본부의 자네 처소에서 깨어난 걸세. 그 말인즉슨 황제 폐하께서 히포드롬에 당도하시기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지. 빨리 일어나서 준비하게."
"이런."
민테는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엉망이 된 옷이 깨끗한 튜닉으로 갈아입혀진 것을 확인한 민테는 몸을 씻기 위해 튜닉을 그대로 벗어 던지려다가, 필록세노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계속 계실 생각이세요?"
"……밖에서 기다리지."
"아니다, 준비하는 동안 여기 계세요."
"뭐?" 필록세노스가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저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기절 상태였어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거든요." 민테는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어디선가 찾아낸 수건을 들고 방 한켠에 설치된 욕실에 들어가 휘장을 펼쳤다. "그러니 준비하는 동안 제 질문에 대답 좀 부탁드려요."
그제서야 민테는 튜닉을 벗고 휘장 너머로 던졌다. 민테로서는 나름 필록세노스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할까봐 휘장을 친 것이었지만, 그녀의 배려심이 무색하게도 욕실에 난 창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테의 윤곽선이 햇빛을 받은 휘장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민테를 대하면서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필록세노스가 빠르게 시선 둘 곳을 찾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일단 첫 번째 질문, 니카는 어떻게 됐어요?" 민테가 몸에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니카는 생포됐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반죽음 상태였어. 베레니케 양의 요청에 따라 니카의 신병은 그녀에게 넘겼네."
"베레니케한테 넘겼다고요? 그러면 지금 그녀의 배에 감금되어 있는 건가요?"
"그럴 걸세."
"베레니케를 니카와 단둘이 있게 해도 괜찮을까요?"
"니카가 베레니케 양을 어떻게 할까 봐 걱정되나?"
"아뇨." 민테가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 반대가 걱정돼서 그래요."
니카는 고통 속에 신음했다.
그녀는 어린 신부의 배 아래, 민테와 필록세노스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어떤 비밀스런 공간의 천장에 마치 등불처럼 매달려 있었다. 양 손목과 발목에는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고, 그 구속구는 쇠사슬로 한데 묶여서 니카의 사지를 잡아당겼다.
쇠사슬과 쇠사슬에 묶인 니카를 지탱하는 것은 천장에 설치된 갈고리 하나뿐이었다. 그 의도적인 불안정함 때문에 니카가 움찔거릴 때마다 그녀의 몸 전체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진동했다. 니카의 나신을 따라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녀의 아랫배에 맺혀 아래로 떨어졌다.
니카가 매달린 지점 아래에는 검은 액체가 가득 담긴 거대한 구유 형태의 석재 구조물이 있었다. 니카의 땀이 검은 액체 속으로 빠질 때마다 똑, 똑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후텁지근한 방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또각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군." 니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의 포로로 전락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대접은 예상하지 못했어."
"내가 네 발이라도 씻어줄 거라고 생각했나?" 어린 신부가 반문했다.
"네가 내 발을 핥아주길 원했지. 원래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너는 지금쯤 도모코로의 내실에 놓인, 휘장을 친 침대 안에서 나를 섬기고 있었을 테니까."
신부는 니카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흘겨보고는 벽에 설치된 어떤 장치 쪽으로 다가갔다.
"네게 도모코로의 여주인을 섬기는 여전사에게 걸맞는 아름다운 갑옷을 입혀 줄 생각이었어. 배꼽 위까지 내려오는 황금빛 흉갑에, 그 아래로는 붉고 긴 치마로 구성된 멋진 갑옷 말이야. 너의 아랫배를 가로지르는 은색 사슬이 그 둘을 이어주고, 사슬 아래로 드러난 하얀 피부에는 여주인의 문양을 새겨, 너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구의 소유물인지 알게 해 줄 생각이었지."
니카의 희롱에 말로 응수하는 대신, 어린 신부는 장치에 달린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갑자기 니카의 무게를 지탱하던 갈고리가 시끄러운 금속음과 함께 하강하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떨어지던 니카가 구유 속 검은 액체에 빠지기 직전에 신부는 다시 레버를 위로 올렸고, 그에 따라 갈고리를 고정시키는 잠금장치가 다시 작동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갈고리는 강제로 하강을 멈추었다. 그 충격은 그대로 니카의 사지를 붙들고 있는 사슬에 전달되었다. 그녀의 팔다리가 확 잡아채이자 니카의 허리는 무자비하게 뒤로 꺾였다. 척추가 뒤틀리는 듯한 충격에 니카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수 시간을 잡아당겨진 나머지 한계에 다다른 그녀의 몸은 애처롭게 파들거리고 있었다. 니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의식적인 신음을 내뱉어 어린 신부가 만족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고 애썼다. 그 시도는 마냥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의외로 고통에 약하군.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것은 즐기면서, 정작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지?"
"너……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겠어……"
"공허한 위협은 집어치워. 난 더 이상 너와 어떤 식으로든 상관하고 싶지 않아." 어린 신부가 말했다. "너를 자줏빛 궁정에 데려가 여왕님께 바치겠다. 그분께서 너의 운명을 결정하실 테고, 그러면 우린 끝이야."
"바보…… 같으니." 니카가 흐릿해지는 시선을 억지로 신부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군."
"용서받을 수도,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지. 둘 중 어느 쪽도 확실한 근거는 없어."
"천만에, 후자에 대한 증거는…… 있어."
"뭐라고?"
"나를…… 봐라, 버림받은 신부." 니카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꼴사납게 패배한…… 도모코로의 여주인을 보란 말이다…… 도모코로가…… 날 용서할 것 같아? 신들은…… 다 똑같아…… 불경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여왕님을 네 추악한 주인 따위와 비교하지 마."
니카는 아픔 속에서도 키득거렸다. "전에도 말했잖아. 너나 나나…… 똑같은 노예라고. 너도 언젠가…… 이런 꼴로 천장에…… 매달리게 될 거다."
신부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 같은 녀석과 유의미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더는 못 들어주겠군. 남의 포로가 된 자로서 너는 너무 방자하다."
"그래서? 내 혀를…… 뽑기라도 할 거야?"
"그 더러운 혀를 뽑아내도 다시 자라나겠지. 아니, 난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어."
구유에 담겨 있던 검은 액체 한가운데에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품은 더 격렬해지더니, 곧이어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한 차례 일으켜진 불꽃으로 인해, 구유에 가득 담긴 기름이 활활 타올랐다. 일렁이는 불의 혀가 구유 위에 매달려 있던 니카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흐, 흐으으, 으으아아아아아아!"
살 타는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민테 양!" 필록세노스가 외쳤다.
민테는 그가 외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비부대 본부의 미로 같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지나갔다.
"민테 양! 멈추게!"
민테는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급함과 답답함 때문에 짜증이 날 대로 난 표정이었다.
"왜요?" 민테가 물었다.
"왜긴 왜야?" 필록세노스가 반문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건가? 베레니케 양이 니카와 단둘이 있는 게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건데?"
민테는 몸을 돌려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필록세노스의 머릿속에 '명령 불복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적어도 민테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안 한 채 걷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민테가 말했다. "반란 결행 당일인데도 니카가 부리는 그 용병들이라는 작자들을 봤다는 소식이 어디에도 없잖아요."
"아직 보고받은 건 없네." 필록세노스는 황급히 따라가며 말했다. "하지만 앞서 잠입한 우두머리가 붙잡혔으니 우리 감시망에 포착되기 전에 철수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그 말은 바로 어제까지 감시망의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리잖아요. 만약 그랬다면, 설령 반란 결행일까지 모든 게 놈들 계획대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도시 안에 있는 니카와 합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그건 알겠네. 하지만 그들이 이상하게 조용한 것과 베레니케 양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갑자기 민테가 우뚝 멈춰 섰다. 필록세노스가 보기에 그것은 당황이라기보다는 그녀만 아는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다. 그의 짐작은 민테가 멈춰 선 바로 그 상태로 머리를 감싸쥐는 모습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두 손이 민테의 잘 손질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내려왔다. 민테는 결심한 듯 뒤로 돌아서서 필록세노스를 보고 말했다.
"애초에 니카가 비잔티온에는 왜 온 거죠?"
"그건 베레니케 양이 이미 설명하지 않았나."
"맞아요, 그랬죠. 반란에 호응하는 대가로 이 도시를 약탈할 기회를 노렸다고요." 민테는 다시 몸을 홱 돌려 걸어갔다. "근데 비잔티온이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약탈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가요?"
"뭐?"
"애국심은 접어두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요, 필록세노스. 비잔티온이 니카가 지금껏 본 모든 도시와 왕국 중에 가장 아름답고 찬란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비잔티온이 히에로솔리마보다 더 빛나는 도시인가요? 바빌론은 어때요? 옛 로마는?"
"잠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 우리는 니카의 목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사실 이 도시는 그녀에게 그 정도로 매력적인 보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 뜻이에요. 하지만 이 도시에는 평범한 보물들 말고도 다른 게 있죠. 니카에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단신으로라도 잠입할 가치가 있는 귀한 목표물이요."
"설마, 베레니케 양 얘기는 아니겠지?"
민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심인가? 아니, 그건…… 말도 안 돼!"
"어째서 말이 안 되죠?"
"이보게." 필록세노스가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베레니케 양을 납치해서 반란이 일어난 사이의 혼란을 틈타 여길 떠나는 게 설령 니카의 계획이라고 쳐. 그렇다면 하필 베레니케 양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녀와 자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이유는 또 뭔가?"
"그게 자기 계획의 일부였을 수도 있죠."
"아무리 생각해도 비이성적인 행동이야. 그날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게. 프라테스에게 꼬리를 밟혀서 기습당하고, 결국 붙잡히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니카를 베레니케에게 넘겼고요."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나?"
민테의 발걸음이 멈췄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의 눈앞을 거대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필록세노스에게는 그것이 어쩐지 깊은 의미가 있는 정지처럼 느껴졌다.
필록세노스는 그 철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민테가 왜 이쪽으로 향했는지도. 일단 이 철문을 지나 들어가면 히포드롬에는 제시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여기서 민테를 돌려세워야 했다. 아니면 지휘관의 권한으로 잠긴 철문을 열어주거나.
전자를 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필록세노스는 민테를 알았다. 민테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정을 내렸다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자네는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 그게 무엇인지 나도 알지 못하는 이상 나는 자네의 생각이 무엇이든 거기에 동의하기 어렵네."
민테는 필록세노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아예 앉아버렸다. 필록세노스도 같이 바닥에 앉았다. 그는 오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불바다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민테의 대답은 듣고 행동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저, 베레니케랑 잤어요." 민테가 불쑥 말했다.
"음." 필록세노스는 이렇게 대답한 뒤 잠시 뜸을 들였다. "당황스럽긴 한데, 의외는 아니군. 계속하게."
"그때 그녀에 대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베레니케에게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요."
"결여되어 있다니?"
"말 그대로예요.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타인의 지배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베레니케는 다른 사람을 붙잡거나 복종시킬 수도 없고, 설령 상대가 자기 자신의 자유를 그녀에게 바친다고 해도 그녀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요. 그것 때문에 우스운 일이 일어나죠."
"설명해 보게."
"수갑을 찬 죄수를 감옥 문 앞까지 데려다 놓고는, 죄수의 수갑을 뺏어서 자기 손을 구속한 뒤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는 간수를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천 년 동안 여신의 시종으로 살면서 지배와 강제를 담당하는 정신의 어느 부분이 거세된 건지, 아니면 너무 심성이 착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건지 몰라도 베레니케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본능이 있어요.
처음 베레니케와 제가 욕조에서 그…… 여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베레니케가 제 위에 있었죠. 그래서 저는 그게 그녀에게 익숙한 위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줄 알았는데 침대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나더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타고 눌렀더니 곧바로 항복해 버렸어요. 아래에 깔리는 역할을 맡은 베레니케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는 것도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니, 아니야. 그 정도면 됐네." 필록세노스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아요. 제가 경험한 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에서의 모습이었지, 공적인 상황에서 베레니케가 보여준 모습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았냐고 생각하실 테죠."
"그게 사실이지."
"또다른 사실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둘 사이의 사적인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는 거죠."
"니카와 베레니케 양 사이에 사감이 끼어들 여지가 크다고 생각하나?"
"사감이 끼어들어요?" 민테는 자조했다. "둘 사이는 사적인 원한 관계의 정점이에요. 둘은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세계를 넘나들며 서로를 스토킹하고 있었어요. 처음 그녀와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 베레니케가 니카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었던 것 기억하세요? 디오니소스께 맹세코 니카도 비슷하게 베레니케의 행적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뭐, 지금 와서 말해봤자 너무 늦었지만요."
필록세노스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군."
"우리가 잘못한 거죠."
"내가 결정을 내릴 때 자네는 정신이 없지 않았는가. 알면서도 굳이 계속 '우리'라고 말해준 건 고맙네." 필록세노스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준 뒤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이 늙은 몸뚱아리가 땅에 묻히게 될 때까지 잊지 않겠어. 하지만 이제는 행동할 때야."
민테도 따라 일어섰다. "니카는 분명 베레니케를 제압한 이후의 계획을 세워뒀을 거예요. 높은 확률로 그녀의 용병 부대가 그 계획의 일부일 테고요. 그 부대가 어디 있는지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내야 해요."
"전혀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필록세노스가 철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거죠." 민테가 철문을 힘껏 잡아당겨 열었다.
철문 너머의 음침한 돌벽이 문 바깥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돌벽에 기대 누워 있던 전령이 갑작스런 빛 때문에 눈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매캐한 연기가 피와 불탄 살점의 냄새와 어우러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불은 니카의 피부를 끓어오르는 화산의 표면처럼 바꿔놓았다. 가슴부터 서혜부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그녀의 몸뚱아리는 불길이 닿지 않은 부분에 남은 새하얀 살결과 기괴한 대비를 이루고, 가공할 손상을 입은 니카의 몸에서는 재와 피, 진물과 고름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어린 신부는 니카의 턱을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를…… 죽여…… 줘." 니카가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게…… 영혼이…… 있다면……"
"싫어."
"도모코로의…… 여주인을…… 한낱…… 고깃덩이 취급…… 하다니."
"시간이 지나면 네 화상은 치유되겠지." 어린 신부는 니카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어제 부숴버린 네 머리뼈가 다시 붙었던 것처럼. 그러니 아픔을 감내해. 이대로 자줏빛 궁정까지 항해할 테니까."
"아니야…… 버림받은 신부-"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쓰레기 같은 년!" 어린 신부가 분을 못 이겨 니카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니카의 턱이 돌아갔다.
"난 버림받지 않았어! 나는 돌아갈 거야, 여왕님께 용서를 받을 거다!" 신부는 씩씩거렸다. "나는 황금빛 언어로 그분과 다시 연결될 거고, 어떤 치욕과도 무관한 내 영혼은 영원히 그분의 정원을 거닐 거야!"
그녀는 뒤로 돌아 방을 나서려고 했다. 신부가 문에 손을 대는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우물거리는 소리, 그러나 너무 분명하기에 결코 잘못 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네 자매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몸속의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신부는 살의를 가득 담은 눈으로 니카를 쳐다보았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네 자매들 말야, 신부들 말고. 그 이전의 자매들." 니카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그 잘나신 여왕이 도모코로와 전쟁을 벌였을 때 우리 병사들에게 온몸이 찢겨 장대에 걸렸던 그 전사들."
"넌 아무것도 몰라." 어린 신부는 덜덜 떨리는 턱을 움직이며 말했다.
"천만에. 난 모든 걸 알고 있어. 나도 그곳에 있었거든. 몰랐어? 나는 아우게워스의 발치에서 그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축 늘어진 꼴로 들려 올라오는 네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지."
신부의 몸속에서 하나의 불씨가 생겨났다. 그녀는 그것이 격노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겁게 타올라서 니카의 머리가 땅바닥에 구르도록 만들, 돌이킬 수 없는 불길의 근원이라고.
"내 자매들을 모욕하지 마…… 그들은 나를 위해 희생했던 거야."
"그랬었지." 니카는 평탄한 어조로 말했지만, 경멸감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는 깨어나서 무엇을 했지? 너는 순순히 우리의 목줄을 받아들였어. 우리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고, 우리가 잡아당기면 끌려왔고, 채찍으로 맞으면 부리나케 달렸지. 너는 듣지 못했겠지만, 도모코로의 가장 천한 노예도 너를 농담거리로 삼았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예처럼 군다고."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신부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 보니 그녀가 가한 그 모든 고문에도 불구하고, 니카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신부는 니카의 몸을 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숯덩이였다. 그런데도, 니카는 더 이상 개의치 않고 거의 이전의 조롱 섞인 말투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너무 위험해." 신부는 급히 검을 뽑았다. 몸 안의 불씨가 여기저기에 불을 붙이며 고통스러운 감각을 일깨웠다. "너를 죽여야겠어."
"늦었다, 버림받은 신부."
신부의 검이 금속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어린 신부는 배를 감싼 채, 덜덜 떨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몸 안의 불길이 격노의 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가 도모코로의 강철 사슬에 매였을 때, 도모코로의 병사들이 먹인 끔찍한 약물이 그녀로 하여금 느끼게 했던 뱃속이 타는 듯한 감각이 어린 신부의 몸속에서 되살아난 것이었다.
어린 신부는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도모코로의 압력이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애써 부정해 왔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진 신부가 느끼는 오싹한 전율은 아픔이나 두려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쾌락에서 온 것이었다.
철컥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맥없이 풀려버린 사슬로부터 벗어난 니카가 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나는 너를 오래전부터 지켜보았지." 니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들거리는 어린 신부에게 다가갔다. "너는 패퇴한 우리의 군단이 그날 손에 넣은 유일한 전리품이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지."
"으, 으흑, 하악, 아, 앗……" 어린 신부는 대꾸할 수 없었다. 어두운 자극의 기억에 지배당한 가장 작은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녀를 치욕스러운 절정의 직전까지 몰고 갔다.
"네 아름다운 목에 채워진 노예의 고리, 팽팽히 당겨진 사슬, 채찍이 너의 등을 어루만질 때 나는 날카로운 화음, 뛰고 끌려다니고 맞으면서 네가 냈던 그 헐떡이는 숨소리, 수치 속에 몸부림치는 신음소리, 구슬 같은 눈물까지. 정말 매혹적이었어."
니카는 몸을 숙여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한 신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때 결심했어. 너의 그 푸른 눈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왜냐하면 말이지, 너의 영혼은 노예의 자질을 타고났거든."
민테는 양손에 도끼와 망치를 쥐고 잔해 속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계단 아래에 가볍게 착지한 민테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마찬가지로 완전무장한 은비부대 대원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며칠 전 니카와 전령이 서 있던 바로 그 지하 통로에 있었다. 그러나 통로를 환하게 비추던 횃불들은 다 사라져 내부는 캄캄했다.
민테가 신호하자 대원들은 들고 있던 횃불들을 통로 너머로 집어 던졌다. 내부가 밝아지며 그 구조가 민테와 대원들에게 선명히 드러났다.
"네크로폴리스잖아?" 민테가 놀라서 말했다. "이런 곳에 왜……?"
은비부대는 천천히,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버려진 교회 아래의 지하묘지를 가로질렀다. 내부에는 그들 외에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음이 곧 분명해졌다.
"분명 누군가 있기는 있었어." 민테가 사방에 가득한 불 피운 흔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불을 피울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네."
"어떤가?" 뒤따라온 필록세노스가 물었다.
"전령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에요. 큰 규모의 사람들이 여기서 숙영한 건 확실해요."
"그래, 적어도 백인대 다섯 개 정도는 족히 되겠어." 필록세노스는 지하묘지의 크기를 가늠하며 말했다.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죠?"
"그것보다도 중요한 질문은,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여길 들키지 않고 빠져나갔지?"
"저번에 주점에서 본 그 이상한 검은 공간, 그걸 이용한 것 아닐까요?"
"그랬다면 프라테스가 눈치챘을 걸세." 필록세노스는 품속에서 커다란 등불 형태의 물건을 꺼냈다. "이 공간을 더 주의깊게 탐사할 필요가 있겠군. 따라오게."
등불에서 나오는 파란색 빛이 어두침침한 네크로폴리스를 사람들의 눈 앞에 완전히 드러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비부대 대원들은 그들이 직사각형 방의 정가운데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눈앞에는 걷혀져 있는 장막과 그 너머의 구별된 공간이 있었다.
"지휘관의 방이군." 필록세노스가 말했다.
"니카의 방이네요." 민테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아직까진 아무것도 없습니다." 프라테스가 직사각형의 한쪽 벽 끝에서 외쳤다.
"여기가 절반이야. 계속 찾아보자고."
필록세노스와 민테는 니카의 방을 돌아서 반대편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지하묘지의 반대편 끝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도.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급한 걸음으로 흰빛을 향해 나아갔다. 프라테스와 나머지 대원들도 그들을 따랐다.
은비부대가 전진하는 동안, 그들의 발밑은 판석에서 울퉁불퉁하고 축축한 바위들로 바뀌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지자 그들은 바람에 실려 온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거 바닷바람인가? 해괴하군." 필록세노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해괴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흰빛의 끝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면한 커다란 동굴 입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겨울의 혼탁한 파도가 그들 발밑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역시, 환상이겠죠?" 민테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주님께서 도시를 들어 올려서 흑해 반대편에 내려놓으신 게 아니고서야 그렇겠지."
"어쨌든 니카의 군대가 어떻게 우리 감시망을 피해 빠져나갔는지는 설명이 되겠네요."
"그리고 다음번에는 어디에 나타날지도 알겠군." 필록세노스가 그렇게 말하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프라테스, 조장들에게 전파하게. 전 대원 즉시 항만으로!"
겨울 바다의 잔혹함은 선원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도모코로의 배 아래서 겨울 바다는 지옥에서 흘러나온 유황의 물결 같아 보였다.
도모코로의 전투선들, 특별히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한 장식이나 칠은 되어있지 않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무시무시해 보이는 잿빛 함선들 수십 척이 필멸의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신비한 기술을 통해 난폭한 바다를 얼음 위처럼 미끄러지듯 항해했다.
벗은 몸을 신부에게서 빼앗은 녹색 망토 하나만으로 가린 채, 니카는 흰 배의 갑판 위에서 자신의 병사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뱀처럼 조용히 상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신부가 그녀의 것이 되었으므로 신부의 배 역시 니카의 지배 아래에 들어왔다. 흰 배는 니카의 의지에 압도되어 항만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바다 위로 이동했다.
도시 저편에서는 이미 고함과 온갖 혼란의 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황궁이 위치한 구역에서 피어오르는 실 같은 연기들은 반란이 고전적인 방화와 약탈의 단계로 넘어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밤이 되어도 저곳은 환히 보이겠군요." 뱃전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카는 시선을 살짝 틀어 거룻배를 타고 접근한 전령의 모습을 확인한 뒤,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도시를 바라보았다.
전령은 추위에 떨면서도 흰 배에 간단히 올라탔다. 그는 니카의 강인한 육체를 속으로 부러워하며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놈들이 널 풀어줬군." 니카가 시선을 도시 저편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제가 스스로 탈출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전령이 투덜거렸다.
"전혀."
"쳇. 맞아요, 놈들과 거래했습니다."
"무엇을 주었지?"
"용병 부대의 위치를 알려줬죠."
"허."
"안심하십시오. 현재 위치가 아니라 이전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놈들은 지금쯤 전 병력을 이끌고 그 교회의 잿더미를 뒤지고 있을 겁니다. 자기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니카는 갈수록 두꺼워지는 연기 기둥들을 보며 말했다.
"반란은 시작된 모양이군요. 이제 곧 황제는 자기 치세의 끝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전령은 단언하듯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니카에게 한 발짝 다가가 말했다. "지금 저곳에서 성난 시민들이 뭐라고 외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뭐지?"
"'니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원하니까요."
"그렇군."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요. 우리의 계획에 있어서 은비부대는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전령이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말했다. "그런데 니카 당신 덕분에, 이 이야기의 큰 그림 속에서 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데려온 저 병사들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니카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내 몸에 걸친 것과 이 배 안에 있는 것들이면 보답으로 충분하다."
"그래요? 이상하군요. 일전에 만났을 때 당신은 분명 그 여자 때문에 여기로 왔다고……" 전령이 의아한 듯 말하다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러면 그녀도 저 아래에 있겠군요."
니카는 그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흥, 우스운 꼴을 하고 있겠군요. 한 번 얼굴이나 보고 싶네요."
"원한다면."
"정말입니까?"
"가까이 와라."
전령은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이제 그는 니카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니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망토 속에 숨겨놓고 있던 비수로 전령을 찔렀다. 차가운 칼날이 전령의 갈비뼈 사이를 정확히 뚫고 들어가 전령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의 생명을 갑판 바닥에 흩뿌렸다. 니카는 단검을 뽑지도 않은 채 전령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잠시 후, 배 아래에서 니카의 병사 두 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큰 칼을 뽑아 전령의 시신을 마구 내려친 뒤, 푸줏간 하수구에서나 볼 법한 꼴이 된 전령의 파편들을 하나씩 집어 바다에 던졌다.
그제서야 니카는 몸을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완료됐나?"
병사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니카가 말했다. "여길 지켜라. 곧 은비부대가 온다. 나는 내실로 들어가겠다."
전령이었던 살과 뼈 조각들 위에 공처럼 말린 신부의 녹색 망토가 던져져 풍덩 소리를 내었다.
함께 가라앉는 패자들의 잔해들을 뒤로 한 채, 도모코로의 여주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배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이미 필록세노스와 민테가 보았던 것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어둠이 사방을 지배하고 있었고, 어둠 너머로는 정체불명의 소음이 가득했다. 니카가 그 사이를 가로지르자 어둠과 소음, 그리고 소음을 일으키던 도모코로의 백성들이 여주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니카는 불쑥 나타난 문을 열고 그 안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원천을 알 수 없는 열기로 후텁지근했고, 내부의 전경은 피 안개같이 붉고 희뿌연 색조를 띄었다. 피안개 속 누군가의 손이 니카의 몸에 아주 얇고 가벼워 거의 투명해 보이는 가운을 걸쳐주었다. 마치 화염에 바싹 구워진 적이 없다는 듯이, 니카의 나신은 달처럼 티 없이 맑고 숨이 멎을 듯 고혹적이었다.
그곳은 도모코로의 여주인이 소유한 장소 중 가장 깊은 방이었다. 이 내밀한 공간 속에서는 그 누구도 몸을 가릴 수 없었다. 오직 도모코로의 여주인만이 신성한 육체에 얇은 가운 한 벌을 걸치는 것이 허용되었다.
물론 이는 니카가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내실이 아우게워스의 소유였을 때 이곳은 다른 규칙과 다른 목적을 가진 장소였다. 하지만 아우게워스는 오래전 고통스럽게 죽었고, 니카는 승자의 권리에 따라 새로운 규칙과 목적을 정했다. 그녀의 몸에 걸쳐진 가운이 그 규칙을 대표하고, 그녀의 앞에 설치된 거대한 기계가 이 방의 바뀐 목적을 대표했다.
그 기계란 정교한 고문 기구로, 니카가 자신의 욕망과 재능을 투영해 직접 설계한 그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복잡한 부품들과 연결된 톱니바퀴가 총 네 지점에 설치되어 있고 각 톱니바퀴에는 도모코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강철 사슬이 걸렸다. 네 개의 사슬이 언제나 팽팽히 당겨진 상태를 유지하도록 톱니바퀴가 가하는 힘은 실시간으로 조정되었다.
그리고 강철 사슬들의 교차점에 니카의 불운한 포로가 있었다. 내실의 규칙에 따라 발가벗겨진 그 포로는 허공에 뜬 채 사지가 사방으로 잡아당겨졌다. 톱니바퀴가 회전할 때마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엄청난 힘을 받았지만, 이런 부분에서 예술가적 완벽성을 추구하는 니카는 결코 포로의 사지 중 어느 쪽도 탈구되거나 뜯겨 나가지 않도록 섬세하게 기계를 조작했다.
"솔직히 말할게, 버림받은 신부." 니카는 포로가 간간이 내뱉는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가 그 배의 지하에 만들어 놓은 작은 기구도 초보자치고는 꽤 괜찮았어. 그렇지만 네 작품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 모든 설계 오류와 부주의함을 예의상 참아주고 있으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나의 걸작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부는 여전히 비명과 신음 외에 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감히 도모코로의 여주인에게 고통 운운했겠다." 니카는 겉보기에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신부의 몸을 살살 그으며 걸었다. 배에 맺힌 땀방울과 피부의 진동, 끝없이 사지가 학대당하고 있는 탓에 한껏 긴장한 복근, 그 모두를 니카는 손끝의 감각으로 음미했다. "이제 너는 도모코로의 내실에 있고, 내 사지가 너의 강철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었지. 여주인의 인내가 마침내 결실을 맺는구나. 기쁘지 않아?"
니카의 발걸음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 신부의 머리맡에서 멈췄다. 니카는 식은땀에 푹 젖은 신부의 금빛 머리칼을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이날만을 고대해왔건만, 여기에 매인 너의 달콤하고 잘 익은 향기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즐거워해도 좋아, 내 사랑하는 포로여. 이제 너를 내가 꿈에 그리던 바로 그 모습으로 다시 만드는 일만 남았거든."
니카는 어린 신부의 뺨을 톡톡 두들긴 뒤 그녀의 왼팔에 묶인 사슬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그 끝을 향해 걸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알아, 버림받은 신부. 이 모든 게 도모코로의 무리들이 늘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믿고 있겠지. 그런 알량한 믿음으로 도모코로를 견뎌내려 하는 영혼들을 많이 보아왔단다."
금속음을 내며 그르렁거리는 톱니바퀴 옆에, 여주인의 작업 도구들이 놓인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에 특히 끔찍한 용도를 위해 준비된 한 가지 물건이 니카의 주의를 끌었다.
"우스운 게 뭔지 알아? 그들이 맞다는 거야. 빼앗는 땅 도모코로의 돌멩이 하나조차도 진실이라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해. 여기서는 모든 것이 가짜니까. 널 잡아매고 있는 사슬도, 너를 괴롭게 하는 소리와 공기도, 어쩌면 너를 이렇게 만든 나 도모코로의 여주인조차도."
니카는 뼈톱을 집어 들고 그녀의 희생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고통만큼은 진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