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워진 인연




그것 참 얼기설기 이어진 소꿉놀이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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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기억은 어느 고성이었다. 그는 한 탁상 위에 놓여 참으로 길고도 긴 시간을 보내왔던가. 주인 없는 옥좌에 먼지가 내려앉고, 대합실을 배회하는 유령들의 이야기가 희미해져 갈 때 쯤, 마침내 성에는 한 손님이 찾아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왕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한 검의 영원한 주군이었다.

그는 검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식이 되지 않겠느냐 말했다. 검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 맹세하였고, 왕은 검에게 아홈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때부터 검은, 검이 아닌 아홈이 되었다.

왕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수많은 검들을 품었다. 그들의 아버지를 자처하였다. 그때부터 왕은, 아버지가 되었다.



아아, 아버지.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토록 당신의 그림자를 쫓고 있나이다.





아홈은, 이제까지고 마흔 여덟 개의 검을 모았다. 몇 개는 은닉처에 숨겨두었으며, 몇 개는 항상 곁에 두었으며, 몇 개는 부서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흔 아홉 번째가 되어야만 할 검을 방금 놓친 참이었다.

조춘, 이라고 했던가. 방금 그의 것—이어야만 했던—을 훔쳐 달아난 자의 이름. 참 빼어난 검이었다. 청동으로 된 한검. 분명 옛 제사장의 의례품이겠지. 그런 물건엔 필시 무언가 경이한 힘이 깃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것을 노리는 자 또한 많아지는 법이다.

아홈은 달렸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어느 옛 유적이기에, 그자가 달아날 곳 또한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 어느 회당. 그곳에 그자가 있었다. 옷춤에 검을 숨긴 채.

“검을 내놓게나.“

아홈은 정중하게 물었다.

“지랄을. 남의 유적 보물 훔쳐가는 게 자랑이가?“

조춘은 품에서 나이프 두 개를 뽑아들었다. 위협적인 몸짓으로 칼을 휘두르는 그는, 마치 이 검을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러한 의지를 내뿜고 있는 듯 했다.

“허… 말이 통하질 않는구나. 난 대화로 풀어가는 것이 좋다만…“

아홈은 허릿춤에서 얇은 열쇠 모양의 칼을 뽑아들었다. 칼은 유적 위로 내리는 희미한 달빛에 비쳐 반짝였다.

“사라. 검을 꺼내주려무나.“

아홈이 든 칼이 공중에 붕— 뜨더니, 이내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라, 라고 불린 소녀는 자그마히 끄덕이더니, 허공에 팔을 불쑥 꽂아넣었다.

“오늘은 어떤 것이 끌리십니까.“

“큰 놈이 좋겠구나.“

사라는 잠시 손을 휘적이더니, 상처투성이인 대검을 꺼내들었다. 거궐. 구자야의 다섯 명검 중 하나. 아홈은 검을 받아들고는, 조춘을 향해 들어보였다.

“그래… 결투를… 신청한다.“

아홈은, 빙긋 웃어보인다.





결투가 끝난 후의 아홈은 피투성이였다. 힘든 기색이 없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피는 아닌 듯 했다. 그는 새로이 얻은 검을 등에 찬 뒤, 근처에 다시 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라를 불렀다.

“사라, 문을 열어주거라.“

“네.“

사라는 짧게 대답하고는, 손으로 허공을 살며시 긁었다. 마치 어떠한 마법적 의식처럼, 거미줄같은 선이 허공에 그어졌고, 이내 열렸다.

이동은 짧았다.

“고마워, 사라.“

자신의 오랜 안식처로 돌아온 아홈은 조심스레 말했다. 어쩌면 오늘은— 하는 기대감으로, 조용히.

“네. 주인님.“

아빠, 라고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수만 번도 더 곱씹은 생각. 이제는 너덜너덜해져 희미한 잔향뿐이 남아버린 생각. 아홈은 다시 검으로 돌아가버린 사라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던 것일까.

어쩌면, 애시당초 단추와 구멍의 갯수가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구멍을 뚫었으나 사실은 단추가 하나 적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옷 따위는 없었던 것일수도.

그는 사라를 조심히 들어올렸다. 열쇠 모양 칼날에는 그의 눈이 비쳤다. 지금쯤 사라도 나를 바라보고 있으려나, 우린 아마 일종의 교감을 하고있는지도 모르지, 사라 또한 마음을 아직 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 누구의 말도 흐르지 않는 자그마한 안식처에서, 아홈은 그렇게 생각했다.





왕, 처럼 되고 싶다 말했었다.

그가 그리 말할 때면 왕은 항상 무엇을 닮고 싶은 것이냐 되물었다.

닮고 싶은 것은 참으로 많았기에, 그는 수없이 고민했고, 결국 대답은 전부 다, 였다.

그것이 만족스런 대답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 할 수 있었고, 그것 말고 더 나은 대답이 있는가,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왕은 그의 그런 대답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왕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참으로 닮아있어, 그것이 태양이던, 청풍이던, 혹은 깊은 바다던 간에 어떠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왕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는가.

만일, 다시 한번만 왕을, 어버이를 만나 그 질문을 듣게 된다면,

더 나은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제는 이미 너무 오래되어 빛바랜 꿈.





아홈은 벽에 걸린 수많은 검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목숨 걸고 모아왔던 검들. 수없이 찾아다닌 검들. 아홈은 어째서 검을 모으게 되었나. 그것은 또한 왕 때문이요, 민들레 뿌리처럼 깊숙이 박혀있는 어버이의 옛 잔상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저 수많은 검들이 전부 에고소드라면, 그래서 좀 더 왁자지껄했다면. 혹은 아예 사라를 만난 적이 없어, 이런 감정마저 몰랐더라면.

아홈은 가끔 먼 옛날을 회상했다. 너무 오래되어 회색으로 칠해져버린, 해상도 낮은 옛 영화같은, 기억을.

아홈 위로는 3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아홈 아래로는 9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왕하(王下)의 열세 검들 중 넷째. 그것이 아홈이었다.

그는 언제나 왕을 주군이자 어버이로 섬겼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였고, 효심 깊은 아들이었으며, 가족에 충실한 사내였다.

그리곤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지.

왕은 지금쯤 죽었는지도 모른다. 남매들 중 몇몇도 이미 죽었겠지. 하지만, 하지만 혹시나, 왕이 살아있다면, 내 기꺼이 찾아뵈리라. 어버이의 자식들과 함께.

아홈은 잃어버린 형제자매를 찾아다녔었다. 가족들은, 너무나 많은 곳으로 퍼졌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두째는 어느 협회에 묶여있다지. 아홉째는 남매를 죽이고 자살했다. 다섯째는 어디서 뭘 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막내는 어느 귀신들과 함께하고 있던가.

아홈은 어쩌다 가족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새의 깃털마냥, 저 멀리로 흩날리었는지, 수천 번이고 생각했다.

가족은, 이렇게 쉽게 무너져서야 안된다고.

아니, 애초에 그랬던 것인가. 가족이란 것은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지탱할 기둥이 없는 지붕처럼 산산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인가.

아홈은 사라를 생각했다. 자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자식, 권속. 가엾은 아이였다. 너무나 어리고, 또 여린 아이였다. 그는 아버지를 자처했으나, 사라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사라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였다만, 단 한번도 어버이라 부른 적이 없었기에.

사라에게 그는 그저 주인이었다.

왕이시여.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저는 마침내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까.

아.

나의 대답은, 언제이고 틀렸었다.

왕의 모든 것을 닮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는 그저,

왕을 따라하는 껍데기처럼, 바스라져 버리고 만 것인가.

결코 왕이 될 수 없음에도, 제 운명은 그저 신하이자 아들인데도.

아홈은 마침내 눕는다. 손에 작은 열쇠를 쥔 채.

이내 놓는다.

내일부턴 여정을 떠나야겠구나.

가족들을 다시 한번만 찾아봐야겠구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주군이시여.

저는 언제쯤 당신이 될 수 있나요.

오늘도 그 밤에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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