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죽음처럼 조여들었다.
T 모텔은 심하게 낡아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갈라진 페인트칠이 흩날리는 그곳은 노인의 어떤 말로처럼 쓸쓸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고객 하나 없는 정문은 이에 화답하듯 조심스럽게 삐걱거리곤 했다. 시간의 흐름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공간이었다.
그러한 번지르르한 언사가 어울릴 정도로 공간은 나름의 시간을 꼼꼼히 저축한 것만 같았다. 그 앞에서는 어떠한 생도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아무리 열띤 열정의 부르짖음조차 그 건물 앞에서는 그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정랑은 그 모텔 앞에 서서 야상의 옷깃을 세웠다. 반년마다 한 번 이상은 오다시피 하여 어느덧 익숙해진 T 모텔의 외양은 익숙한 정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직도 불쾌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항상 약속을 왜 여기로 잡는 건지.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왼손의 카시오 손목시계는 아직 새벽 두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는 셈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야상 위로 담뱃재가 가늘게 흩날렸다. 긴 시간을 여행해서 그런지 낡은 야상은 금방이라도 삭아 후두둑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이제는 군데군데 해지고 찢어진 구석이 개성으로 봐주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시려 오고 있었다. 정랑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무미건조하게 혀를 찼다. 또 옷을 구해야 하는 건가.
담배가 모두 불로 화했다. 정랑은 담배를 퉁겨버리고 어깨로 나무문을 슬쩍 밀고 들어갔다. 문에서 끼익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비명 같은 소리였다.
모텔의 로비에는 사람이 없었다. 공간을 메우는 것은 오직 라디오가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89.1 메가헤르츠에 맞추어진 라디오 채널이 무진 교통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해룡면 도로의 정체를 말했다. 이 도시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결국 안개 때문이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정보를 오 분간 듣고 정랑은 앞으로 나아갔다. 주인 노파는 담배나 콘돔 등 갖가지 것을 마구잡이로 진열해 놓은 가판대 뒤에 앉아 있었다. 정랑이 다가가자 노파는 손님을 예상치 못한 것처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여기 와 있는 걸로 아는데.
노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호수를 적어주었다. 고객의 신변 보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않는 태도였다. 하기사 이런 쓰러져 가는 건물의 존재들이 산 사람을 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랑은 단순히 고개를 까닥이고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둠은 마치 생명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힘겹게 꾸물대고 있었다. 마치 바람이 그러하듯. 정랑은 창 밖에서 붉게 밀려들어 오는 안갯속의 네온사인에 무심히 시선을 던지고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모텔 벽에 그림처럼 걸린 시계는 어느새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13호였다. 정랑은 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가정집처럼 조금 페인트칠이 되고 조금 녹이 슨 철조 문짝은 신기할 정도로 위태위태해 보였다. 손을 가져다 대어, 두어 번 노크를 하면,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듯한, 그런 위태함.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정랑은 문득 노크하기 두려웠다. 두렵다는 감정이 쑥스럽고 애매했지만 그래도 목전에 닥쳐온 현상은 피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수십 년 전 그때도 그랬다. 모든 현상은 현상이기에, 진정으로 저 밖에 다가올 모든 미래와 가능성과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리려고 애쓰는 듯했다.
노크를 하자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초록색 아디다스 저지를 입고 있었다. 정랑은 시선을 내렸다. 목덜미에 작은 타투가 있었다. 전에 보지 못한 타투였다. 아마 새로 했겠지. 서로 보지 못한 지 어느새 두 달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새 한 걸까. 정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자도 정랑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유정이었다.
유정은 지친 듯 피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하루 중 유일한 휴식을 맞이했을 때 으레 나타나는 눈빛이었다. 누군가에게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정랑은 다시금 느껴지는 일말의 쑥스러움에 부러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늦었네.
— 버스가 밀렸다.
— 어련하시겠어.
유정은 정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언니가 시간관념은 한참 전에 엿 바꿔 먹은 거, 내가 알지.
정랑은 걸음을 옮기면서 유정의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얼굴을 숙였다. 짧은 파열음. 부드럽게 스며드는 아릿한 감각이 혀끝에서 전해져 왔다. 말은 필요 없었다. 단지 잠깐의 스침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깊어졌다고, 정랑은 생각했다. 당초 생각한 것보다 서로에게 너무 깊어졌다. 쉽게 끊어내리라 생각했던 관계였다. 그리고 그렇게 끊어내야 했던 관계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무심결에 발을 담근 늪처럼.
정랑이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서로의 입술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문이 그들의 뒤에서 서서히 닫혔다.
□ □ □ □ □
알아내라.
무슨 말인지 안다.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저 고급진 양복. 양복의 주인은 제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깍지를 끼고 앉아 있다. 어둠에 반쯤 묻힌 그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다. 무언가를 알아내고서, 그로 인하여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다.
병신 같은 새끼.
내가 무슨 수로요.
그는 이를 악물며 내뱉는다. 헛된 저항인 줄 안다. 이 정도로 조여 온다는 것은 남자가 이미 깨달았다는 뜻이다. 언제부터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남자가 거미처럼 웃는다.
강 과장이 순진하네.
양복이 상체를 숙인다. 그 바람에 그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점멸하는 푸른 빛깔의 기안(器眼). 그는 흠칫 몸을 떤다. 날카로운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 를 공언하는 그런 눈빛.
알텐데.
남자의 눈빛에 서슬이 어린다. 그는 목덜미를 흐르는 땀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인다. 잘못 건드리는 순간,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 꼴이 되리란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이다. 양복은 그 거대한 거미줄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여러 개의 눈을 가늘게 뜨고.
도대체 언제부터 줄을 쳐놓은 걸까.
더 말해야 하나?
그는 고개를 젓는다.
긴 말 안 하지. 알아내. 앵기든 살살 쓰다듬어주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란 말야.
다시 남자는 의자에 등을 기댄다. 칠흑 같은 어둠, 어둠 같은 침묵. 남자의 앞에 꼿꼿이 서 있는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잘못 걸렸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새끼한테. 이 미친 새끼한테.
어둠 속에 묻힌 남자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 □ □ □ □
새벽.
네온사인이 몸 위에서 관능적인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공기는 그저 엷게 떨릴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공간 사이의 욕망이 분산되었다. 유정의 목에서 흘러나온 옅은 웃음이 그 간극을 채웠다. 수건을 목에 걸치고 나온 정랑을 보고 지은 웃음이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정랑은 툴툴거리며 쏘아붙였다.
ー 웃지 마라.
ー 아 왜애. 그거 진짜 아재 같다니까?
장난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정랑은 '그러거나 말거나'를 표방하는 시선을 보내면서 유정이 앉아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유정은 얼굴만 내놓고 이불로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ー 아주 주무시게?
ー 나 그냥 자면 언니가 가만 안 놔둘 거잖아.
ー 잘 아네.
정랑이 이불을 확 끌어당겼다. 유정은 비명을 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불 안의 유정은 알몸이었다. 군데군데 낙서처럼 그려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의 육체라면 그 문신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유정의 몸은 달랐다. 오히려 문신은 시선을 끌기에 부족할 지경이다. 사방에 이식된 기계들이 푸른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왼쪽 옆구리에 이식된 밸브를 열었다. 정랑은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증기를 보면서 자기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인정하기 싫었고 실감도 안 나는 일이었지만, 유정이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흥분된다는 것이 정랑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정랑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정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기계로 교체된 부위를 어루어 만졌다. 이불로 감싸여 있어서 그런지 금속은 차갑지 않고 따뜻했다. 유정은 작게 낄낄대면서 거칠지 않게 정랑의 손길을 뿌리쳤다.
ー 언니, 간지러워.
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정랑은 침대에 앉아 유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서늘한 쇠의 감촉이 배에 닿았다. 유정의 등은 온통 금속질로 개조되어 있었다. 유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액체 금속 근육이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정랑은 느낄 수 있었다. 이유가 불분명한 쾌감이 일었다. 이내 손길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목, 옆구리, 배, 골반. 그리고 마침내. 몸의 상당수가 기계로 대체되었다 한들 감각 센서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유정의 얼굴은 급속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이제 웃음 섞인 신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랑은 그의 몸에서 손을 거두고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그대로 올라탔다. 정랑은 즉시 살풋이 깔깔대던 유정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유정은 이 순간을 평생 기다려 왔다는 듯이 정랑에게 응했다. 지직거리는 기계음은 서로의 살갗이 맞닿을 때 곁들여지는 화음이었다. 유정이 정랑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짓눌린 신음은 둘 모두의 욕망에 활시위를 당겼다. 창 밖의 네온사인이 관능적으로 타올랐다.
정랑은 유정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살갗 밑에서 진동하는 거대한 육(肉)의 갈망을 느꼈다. 즐거운 갈증이었다. 유정의 몸은 샴푸 내음과 살 내음, 기계의 날카로운 쇳냄새가 섞여 향기로웠다. 정랑은 시선을 내리며 옅게 웃었다. 그를 위해 준비된 제례였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제전.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이기 이전부터 시작된 순수성의 발로(發露). 그 일련의 동작들이 막 시작될 찰나였다.
정랑은 조심스럽게 유정의 입에 입 맞추고는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전희(前喜). 그의 움직임은 상냥했지만 정확했고, 초침 소리만이 똑딱일 뿐 고요했던 방 안은 이내 점점 커져가는 둘의 숨소리로 채워졌다. 유정의 육(肉)이 진동함에 따라 정랑의 감각도 더욱 예민해져 갔다. 붉게 물든 얼굴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유정은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흐릿한 한숨이 유령처럼 떠다녔다.
ー 오래 참았어?
ー 그걸 말이라고 해?
유정은 조금 인상을 쓰고 신음을 흘리며 베개를 끌어다가 등 뒤를 받쳤다. 기계 작동음이 순간순간의 간극을 메웠다.
ー 우리 안 본 지 한 달은 됐거든. 어딜 그리 싸돌아다녀서…
정랑은 대답 대신 몸을 기울여 유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몸에서 전달되어 오는 진동은 점점 그 강도를 불리고 있었다. 유정은 이제 입을 열지 않았다. 대화는 어느새 언어의 영역에서 몸의 영역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달뜬 숨소리가 그 표상이었다. 숨소리 사이 사이에 섞여드는 나직한 신음에 정랑의 숨 역시 거칠어져 갔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의 눈가에는 같은 것을 욕망한다는 사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체할 필요가 없지.
갑작스레 몸을 틀어 일어선 유정에게 놀라, 정랑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유정을 바라보다가, 붉어진 채로 실실대고 있는 얼굴을 보고서야 그 안에 내재된 의향을 깨달았다. 유정의 어깨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분명 별로 내키는 의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이 정랑의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둘 다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무르기엔 너무나 진척되어 있다는 생각은 참이었다.
정랑은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방금 전까지 유정이 누워 있었던 자리는 체열과 기계 열로 달구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덥다고 툴툴거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정랑이 준비되기도 전에 유정은 덤벼들었다. 그의 모든 부분이 오로지 정랑 하나만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세를 퍼부었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이 이용하는 부위들, 그러니까 손, 다리, 입술, 표정, 정욕. 이러한 인간적 부위들과 강력한 유대로 연합하고 있는 인공적 개조의 산물들은 사정없이 정랑의 육(肉)을 공격했다. 오로지 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하여ー 절정. 맞닿은 지점에서 저릿하게 맴도는 감각은 전신을 맴돌며 흘러갔다.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정이 그녀의 입에, 가슴에, 어깨에 키스할 때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쾌감이 신경계를 불태웠다.
아래에서, 정랑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쾌감의 조류에 휩싸여 자그마하게 헐떡였다. 다리가 잘 빠진 기계 대퇴근에 의해 정복되었기에 쉽사리 저항할 수도 없었다. 유정은 이따금 그가 잘 느끼지 않는 것 같다며 웃음 섞인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드러나지 않을 뿐, 모든 감각은 그 자체의 존재 밑바닥까지 가득히 정랑에게로 전달되어 왔다. 마치 지금처럼. 모든 것이 용인된 낙원이 있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이 그 단면의 일부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랑은 유정이 주무르고 있는 자신의 육(肉)을 느꼈다. 감각이 집중되었다. 행위에서 흘러나오는 관능의 흐름은 취할 정도로 영롱해 보였다. 유정의 허리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아름다웠다. 정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정은 그를 잘 알았다. 너무나도 잘 알았다. 유정은 위를 차지할 때마다 숙련된 백파이프 연주자처럼 정랑을 다뤘다. 그의 손길 아래서 정랑은 자신의 갈망을 남김없이 쏟아 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의 행위로 이렇게 무너지는 자신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어쩌면 막을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결과는 쾌락이었으므로, 정랑은 밀려들어 오는 감각의 홍수를 힘겹게 받아들였다.
창틀에 네온사인이 으깨졌다. 어둠이 깔린 방 안에, 빛이라고는 오직 붉은 네온밖에 없었다. 유정의 육체는 그 빛을 받아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군데군데 이지러지는 문신들. 꽃과 용이 혼재된 피부 여기저기에는 금속성의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각각의 장치에서는 네온과 맞물리는 푸른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유정은 정랑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승리자의 미소, 정복자의 미소였다. 다리가 저절로 서로에게서 간극을 뒀다. 정랑은 감각이 시키는 대로 허리를 조붓이 올려붙이며 이를 악물었다.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 아래서부터 척추로 치달아 올랐다.
ー 자셀 좀 바꾸지.
갑작스레 정랑이 던진 말에 유정은 허리를 멈추고 아리송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ー 뭐, 좋아. 어떻게 하게?
정랑은 대답 대신 유정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돌렸다. 이불이 흐트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유정은 아래 있었다. 정랑을 올려다보고 있는 유정의 시선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순수와 관능이 공존하는 그 미소가 욕망에 기름을 부어대고 있었다.
ー 잠깐… 언니.
ー 왜.
ー 설마…
ー 설마 뭐.
유정은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랑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멋쩍은 웃음을 날렸다. 샅 부위에 자라나고 있는 무언가. 체내의 불필요한 살과 근육들을 잠시 끌어다가 만든 것이었다. 구색을 갖추듯 정랑의 옆구리에는 기이한 무늬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유정은 조금 성난 표정을 지으면서 정랑의 볼을 꼬집었다.
ー 내가 그럴 거면 그냥 부착형 쓰쟀지.
ー 난 기계 안 믿는다.
ー 그게 무슨 기계냐!
ー 아무튼,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 번거로운 걸 왜 해.
ー 와… 꼰대…
ー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꼰대라 그러는군. 됐다. 엎드려 봐.
유정은 궁시렁거리면서도 몸을 뒤집고 늘어졌다. 정랑의 입에서 피식 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ー 귀엽게 구네.
ー 뭐래.
ー 엉덩이나 들어 보시지.
ー 싫어. 내 말도 안 듣고 언니 맘대로만 할 거면 알아서 해.
그러면서 유정은 부루퉁한 얼굴로 정랑을 슬쩍 돌아보았다. 정랑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는 숨기려는 시도였지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출 길이 없어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ー 나 진짜 화났거든.
ー 알겠다. 내가 미안해.
정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정의 몸을 전보다는 조심스럽게 애무했다. 이미 준비되어 있던 그녀의 몸은 처음보다 자연스럽게 정랑의 손길에 응했고 진동은 거셌다. 저절로 유정의 입에서 한숨 같은 교성이 흘러나왔다. 듣기 좋은 음률이었다.
손길이 맞닿는 곳마다 관능의 건반이 존재하는 듯 잠깐만 스쳐도 욕망은 끓어올랐다. 정랑은 몸을 숙여 유정의 상체를 어루만지고는, 네온을 받아 번쩍이고 있는 회색빛 어깨에 키스했다. 유정의 고르지 않은 숨소리는 정랑이 하고 있는 마사지가 그리 싫지 않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육(肉)에 그의 손길이 가 닿을 때, 유정은 누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었다.
정랑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ー 왜 나 편하라고 들어주고 있지?
ー 조용히 하고 하던 거 해.
유정은 툴툴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 말투와는 달리 몸만은 자기에게 여실히 협조적인 것을 알고 있는 정랑은, 조금씩 웃음을 흘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자세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듯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바라본 유정의 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자극이 강했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일렁이는 푸른 불빛들. 그 불빛에 번들거리는 유정의 대체되지 않은 부분들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철새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정랑은 그 자유로움을 사랑했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라서. 그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라서.
내민 굴곡에 정랑의 육(肉)이 가 닿자 유정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정랑은 자신이 만들어 낸 그 부위로 유정의 몸을 조심스럽게 상하로 훑었다. 이어질 듯 말 듯 애태우는 움직임에, 정랑은 붉어진 귀로 유정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정의 숨은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이따금 은밀한 공간에 정랑의 몸이 닿을 때, 교성이 되다 만 한숨 소리가 어둠 속 간극을 채웠다. 정랑은 유정의 등에 그려진 거대한 용의 눈을 노려보며 계속 손을 뻗었다. 정랑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불꽃, 아래에서 스파크처럼 튀는 쾌감. 유정의 입가에서는 신음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들어갔을 때, 정랑은 조여오는 따스한 온기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가쁜 숨을 토해냈다. 몸과 몸 사이로 전해지는 진동은 이제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그는 움찔거리는 유정의 몸을 감싸 안고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유정의 악문 입에서는 짓눌린 교성이 슬금슬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정랑은 심호흡을 하며 숫자를 거꾸로 세는 동시에 밀어 넣었다. 너무 세게 움직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예전에 혼자만의 감각에 취해 너무 거칠게 굴었다가 혼쭐이 난 뒤로 의식적으로 하기 시작한 행동이었다. 몇백 살이나 어린 애인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퍽 우스운 일이리라. 그러나 정랑에게 있어서는 그 행위가 이제 퍽 중요한 과제가 된 상황이었다. 아무렴 다른 부위에서 끌어다 만든 육(肉)이라지만 감각은 필요 이상으로 느껴졌고 그 때문에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있었으니까.
움직임에 탄력이 붙었다. 정랑은 숨을 헐떡이며 조금씩 높아지는 속도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서로의 살갗이 부딪히며 나는 파열음이 방 안을 울렸다. 유정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정랑의 손이 얹힌 얇은 허리는 여러 가지 불빛으로 가득 빛나는 채 떨리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온기가 각기 다른 세기로 덤벼들었고, 둘 모두의 입에서 숨 가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랑은 서서히 강도를 높여갔다. 점점 강해지는 교성을 들을 때마다 정랑은 이전보다 더 깊게, 더 빠르게 움직였다. 유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임에 맞춰 신음했다. 정랑은 자신의 온몸이 붉게 타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먼 옛날, 육체에 내재된 죄악을 벗어 던졌을 때처럼. 어미에 의해 한 삶을 부여받았다는 죄를 청산했을 때처럼.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았으나 흥분은 여전했다. 아래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쾌감의 전율이 온몸을 강타했다. 유정의 몸은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누가 입을 열어 알려주지 않아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은 둘 다 알 수 있었다. 정랑의 손이 유정의 살갗에 거세게 내려앉았고 신음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어느덧 둘의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마찰음이 요란하게 퍼졌다. 정랑은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온기가 조여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감각에 저릿저릿하게 물든 신경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
진동이 극에 달했다.
□ □ □ □ □
그래, 네년이 올 줄 알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앞에 선다. 산 중턱. 아무도 오지 않고 오로지 산바람만이 찾는 곳. 남자의 행색은 너무도 초라하다.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듯 엉거주춤 입은 옷은 흐트러져 있다. 살려고, 살아보려고 그렇게까지 한 그의 모습이 언뜻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쨌거나 놈은 단죄되어야 마땅했으므로.
남자의 손에서 미끄러진 망가진 휴대폰이 바닥에 나뒹군다. 방금 전, 그에 의해 휴대폰은 박살이 났다. 남자와 통화하고 있던 자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상관 없으리라.
상대자는 이제 더는 남자와 통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야상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넣고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의 지친 눈은 적개심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그간 도망을 다니느라 심신이 지친 모양이다. 감히 아무것도 모르고 선을 넘은 대가는 가혹하다. 이미 한 생명이 그 대가를 치루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더는 도망갈 생각 없다.
남자가 말한다.
철륜을 죽이고도 너는 만족하지 못하는군. 피에 굶주린 년.
마지막이라고 되는 대로 말하는구나. 어리석은 중생아.
남자는 점점 다가가는 그를 피해 뒤로 주춤 물러선다.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남자의 턱관절이 부르르 떨린다. 남자가 느끼는 감정은 확연하다. 공포.
뭐, 뭐가 그렇게 내가 미우냐?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냐!
그는 픽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는 펼친다. 순식간에 살은 불어나고 뼈는 단단해져, 곧바로 무지막지한 흉기로 변모한 손이 흔들거린다.
네가 정녕 제도 될 여지가 없느냐. 아직도 죄업을 참회하지 아니하고 굴레에 매여 종알대느냐.
더, 더럽고 천한 살덩이 주제에ー
섬광.
저주의 말을 머금고 있던 남자의 입이 경련하더니 언어 대신 핏물을 쏟아낸다. 심장을 관통한 그의 손은 검은 선지를 묻히고 있다. 남자의 등을 이루고 있던 철판은 구멍이 뚫렸다. 그는 실소를 머금으며 아직까지도 숨이 붙어 있는 남자를 노려본다.
왜 널 이리 미워하느냐고? 문(問)하는 것이 틀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남자의 귀에 속삭인다.
널 연민하는 게다.
남자는 쌕쌕거리며 애써 숨을 쉬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통만이 심해질 뿐.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널 혐오할 뿐이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본다. 증오와 고통으로 가득 찬 눈빛이다. 그러나 그런 시선도 잠시, 남자의 목이 꺾인다. 마지막 숨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대부에게나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