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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 8월 30일: 길잡이

퉁, 하고 길잡이의 배낭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뒤를 이어 편의점 봉투 속에 담긴 덩어리와 길잡이의 주머니 속에 있던 잡다한 물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가 하품을 하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고, 길잡이는 수 시간 동안의 노동으로 뻐근해진 팔을 주물렀다. 그들은 막 재단 안전가옥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피곤해 죽겠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했어. 누군가가 대충 갈겨 쓴 글씨를 길잡이에게 보여주었다.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펜을 들었다.

저도요. 그래도 오늘 얻은 것들 정리는 해야죠. 이제 마지막인데.

‘마지막’ 부분을 쓸 때 길잡이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마지막이지.

실감이 안 나네요. 여기서… 2년 1년 4개월 동안 살았는데.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어요.

우린 운이 좋았어. 기지를 탈출할 때도 그랬고, 여기로 왔을 때도 그랬고. 그래도

누군가는 펜을 들고 꽤 오래 고민했다. 다음에 쓸 단어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길잡이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제는 서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누군가가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문장을 마무리했다. 그의 표정이 씁쓸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길잡이의 펜이 멈추었다. 그는 글을 쓰다 말고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어쩌면 여기는 저에게 제일 집 같은 곳이었을 거에요, 제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고 해도요. 태어났던 곳을 포함하더라도.

어떻게 알아? 네 부모님이 사실은 엄청 좋은 분이셨을 수도 있잖아.

그랬다면 제가 D계급인가 뭐시긴가에서 일하지는 않았겠죠. 그거, 재단의 실험체 표식 같은 거였다면서요? 먹으라면 먹고, 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고. 제가 제정신이었다면 아무리 보수를 미친 듯이 준다 해도 그런 곳에 스스로 일하러 기어들어가지는 않았겠죠.

누군가는 침묵을 지켰다. 길잡이는 그의 눈에서 고뇌를 읽었다. 그가 가진 몇 안 되는 과거의 파편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누군가가 짓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친다는 기색이었다.

이제 정리하자. 곧 어두워지겠어.

길잡이는 물어볼 것이 많았으나, 펜을 들지 않았다. 그는 대신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며 배낭을 집었다.

둘은 더 잡담을 나누지 않고 정리를 시작했다. 길잡이는 배낭을 열고 노획품을 꺼내 책상 위에 정렬했고, 누군가는 그들의 기호에 맞게(콘 통조림은 누군가가, 숏다리는 길잡이가, 비스킷 한 봉지는 둘이 각자 나눠 가지는 식으로) 양을 적당히 분배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이거 가지고 싶어요? 길잡이가 먼지 묻은 파스 봉투를 누군가에게 건네며 손짓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너도 근육통으로 앓아눕게 되는 날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거다.

제가 머리는 몰라도 몸은 좀 튼튼한지라. 잘은 몰라도 아직 누구 씨보다 젊기도 하잖아요?

괘씸한 놈. 네 얼굴 보면 나랑 별로 차이도 안 날 거다, 이것아.

누군가가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짧은 글을 적어서 길잡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네가 가지고 싶어서 갖고 온 거냐? 작은 하트 모양의 정가운데에 화살이 박힌, 큐피드를 상징하는 장식이 달린 팔찌였다. 길잡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네.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끌려서요. 길잡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적었다. 누군가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가져라 그럼. 남사스럽게 해도 저런

누군가는 글을 더 적으려다가 줄을 좍좍 긋고 포기했다. 이런 일로 길잡이에게 면박을 주기에는 너무 지친 모양이었다. 길잡이는 그에게 다음 물건—반쯤 남아 있는 이클립스 통—을 건넸다.

둘은 그 뒤로 약 20분 동안 더 이런 식으로 물건들을 분배했다. 그 팔찌 뒤로는 거의 모든 물품이 식량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강아지용 사료 봉투였는데, 길잡이가 사람용으로 착각해서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누군가는 화끈하게 사료 봉투를 창문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일이 끝나고 두 개의 탑이 완성되자, 누군가는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 그의 유일하게 비어 있던 가방에 자기 몫의 물건들을 쓸어담았다. 길잡이는 그냥 자기 배낭에 다시 물건들을 넣었다.

해가 지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이제는 바로 앞의 책상도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품에서 자가충전형 손잡이를 꺼내 천장에 매달았다. 방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래도 누구 씨 얼굴은 보이네요. 길잡이가 심드렁하게 적었다.

촛불보단 낫지. 저번에 안전가옥 홀라당 태워 버릴 뻔했잖아. 누군가가 길잡이에게 적었다.

근데 이제 일도 다 끝났는데 굳이 뭐하게요? 그냥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

길잡이가 글을 다 쓰기도 전에 누군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길잡이는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30초 정도 기다리자, 누군가가 다시 나타났다. 왼손에 들린 무언가를 등 뒤로 감춘 채였다.

맞춰 봐. 누군가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손짓으로 말했다. 손전등의 어둑어둑한 조명과 합쳐지자 흡사 연쇄살인마처럼 보였다.

곰인형? 길잡이가 커다란 이면지에 글을 적었다. 누군가가 고개를 저었다.

뾰족이들을 치료할 약? 누군가가 조금 더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츠바이핸더?

길잡이가 마지막으로 적자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왼손에 들린 것을 앞으로 꺼내 보여주었다. 길잡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레몬소주?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구했어요? 요즘 냉장보관된 음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긴데.

저번에 답사 갔다가 발견한 거야. 두 병 있었는데, 나 혼자 먹기는 그래서 같이 마시려고 남겨 뒀다가

누군가는 글을 적다 말고 길잡이의 눈치를 살폈다.

너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 이거 진짜 귀한 거거든?

뭐, 전 술을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잖아요.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도 맛은 알게 되겠네요. 길잡이가 담담하게 글을 적자 누군가는 적잖이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곧 머리를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이번에 다시 경험하면 되지. 어쨌든 진짜 기대되네, 세 달 전에 제대로 된 예술 활동을 해 본 뒤로 이렇게 흥분돠는 건 처음이야.

세 달 전에 뭘 했다고요?

있잖아, 그 변칙예술가. 누군가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가시 달린 손을 흔들었다.

그때 오랜만에 가면을 본래 용도로 사용했었지. 그 놈, 편지를 받고는 벌벌 떨더군. 내가 쇠꼬챙이만 두들기는 놈으로 바꿔 주고 왔어.

누군가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길잡이는 누군가의 특이 취향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고, 대신 레몬소주 병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거 그냥 까서 먹으면 되나요?

누군가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길잡이를 바라보았다.

넌 안주도 없이 술 먹냐?

안주가 뭔데요?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고 뒷목을 잡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적었다.

자,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일단 네 가방에서 사람 한 명분이 먹을 만한 식량 꺼내 와. 최대한 단 걸로. 그리고 바삭한 거. 쥐포 같은 게 있으면 금상첨화고. 나도 내 몫의 식량 가져올 거니까 각자 먹자고. 그리고 컵은 종이컵으로 가져오고, 모닥불에 필요한 나무 찌꺼기들이랑 휴지랑

그게 다 어디에 필요한데요? 길잡이가 끼어들어서 적었다.

당연히, 술판을 벌여야지. 누군가가 대답했다.

***

길잡이가 술병의 뚜껑을 따고 급조한 술잔(종이컵의 윗부분 절반을 자른 것)에 한 모금분을 따른다. 누군가도 따라서 술을 붓는다.

누군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길잡이와 술잔을 부딪힌다. 둔탁한 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술을 한입에 털어넣는다. 목넘김이 능숙하다.

길잡이가 뒤이어 술을 마신다. 그가 곧바로 입을 오른손으로 막더니, 미친 듯이 기침한다. 누군가가 실실 입꼬리를 올린다.

길잡이가 누군가에게 따지는 듯한 몸짓을 한다. 누군가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길잡이에게 안주를 가리킨다. 길잡이는 머뭇거리며 구운 쥐포를 한 입 뜯어먹는다.

길잡이의 눈이 커진다. 그가 쥐포를 몇 입 더 뜯어먹는다. 누군가가 미소지으며 술을 한 잔 더 따라준다.

누군가가 술잔을 들어서 건배를 권한다. 길잡이가 주저하며 술잔을 부딪히고,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술을 먹는다.

이번에는 길잡이도 기침하지 않는다. 둘은 다시 안주를 먹기 시작한다. 쥐포가 빠르게 없어지고, 남은 건 숏다리와 황도복숭아캔, 건빵 두 봉지다.

누군가가 재빠르게 건빵 봉지를 가시로 찔러서 개방한 뒤 봉지를 들어 입에 털어넣는다. 길잡이가 놀라며 누군가에게 달려든다.

잠시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고, 누군가가 건빵 봉지를 놓는다. 길잡이는 승리의 몸짓을 하며 건빵 봉지를 힘으로 뜯어서 연다. 봉지 안은 비어 있다.

누군가가 입에 묻은 과자가루를 손가락으로 쪽쪽 빨아먹는다.

길잡이는 화내려고 시도하지만, 곧 포기하고 크게 웃는 몸짓을 한다. 길잡이도 따라서 킬킬댄다. 둘은 소리 없이, 핏발 선 눈으로 웃음을 흉내내는 마임맨들처럼 배를 잡고 들썩거린다.

길잡이가 술을 한 잔 더 따르자는 손짓을 한다. 누군가와 길잡이는 소주를 더 마신다.

둘은 다시 웃고, 떠들고, 대화하는 몸짓을 한다. 정적이 흐른다. 음식을 씹어먹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엷은 눈물자국이 죽 그어진다. 길잡이는 그것을 보지만, 못 본 척하며 술을 따른다.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술자리는 그렇게 계속되다가…

술판은 정확히 49분 33초 동안 진행되었고, 누군가가 구역질과 함께 책상 너머로 쓰러지는 짧고 강렬한 최후를 맞이하며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길잡이는 오전에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한 통 가져올 걸 하고 후회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재단 안전가옥은 광란의 밤을 맞이해 임시 파티장으로 변해 있었다. 천장에는 휴지로 급조한 리본들이 걸려 있었고, 책상을 치우고 남은 커다란 공간에는 대담무쌍하게도 작은 모닥불이 자리했다(지금은 꺼진 상태였다).

길잡이와 누군가가 절반씩 가져온 안주들은 다 먹지도 못하고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고, 자가충전형 손전등은 누군가의 혓바닥과 오른발가락들을 이용한 신박한 마술에 사용되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요약하자면, 술판은 개판이 된 지 오래였다.

아으이오앙. 누군가가 입모양으로 웅얼거렸다. 길잡이는 어지럼증을 애써 참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괸찬아요?

길잡이도 취했는지라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았지만, 만약 똑바로 썼더라도 누군가는 어차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인 듯했다. 그가 애처롭게 몸을 웅크렸다.

길잡이는 이 인간을 자기 토사물에 질식해서 죽도록 내버려 둘까 잠깐 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1년 6개월 동안 그와 함께했던 여정을 생각해 그를 구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가시로 찌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누군가의 어깨를 잡았다.

암이오암. 누군가가 되풀이했다.

길잡이는 낑낑거리며 누군가를 그의 침실까지 끌고 갔다. 생각보다 몸이 무거웠다. 길잡이는 왼손으로 누군가를 잡고 오른손으로 침실의 문을 열었다.

삼이공삼. 누군가가 세 번째로 말했다.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길잡이는 누군가를 침대 위로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요? 그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물었다.

삼이공삼. 누군가가 의심의 여지 없이 또렷한 입모양으로 말했다. 길잡이는 고개를 누군가에게 더 바싹 붙였다. 술과 위산의 시큼한 냄새가 났다.

삼이공삼, 잡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길잡이는 누군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 소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삼이공삼이 누군데요?

길잡이가 말했다. 물론,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차분한 호흡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서서히 고르게 바뀌었다. 길잡이는 그의 눈이 감기는 것을, 입에서 한 줄기 침이 흐르는 것을, 무의식에서 빠져나온 단어들이 다시 꿈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길잡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의 방. 그들이 안전가옥을 발견한 뒤로 길잡이는 이 방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다. 이곳은 철저히 누군가의 공간이었고, 길잡이는 그것을 존중했다. 그러나 지금은…

길잡이는 누군가를 들어서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옮겨 주었다. 누군가는 아기처럼 꿈틀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잠에서 깨지 않을 게 확실해 보였다.

길잡이는 방 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의 방과 거의 똑같았다. 황량하고, 먼지투성이고, 미약하게 소독제 냄새가 났다. 재단 안전가옥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 놓인 책상에는 누군가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만의 물건들.

길잡이는 조심스럽게 책상에 다가갔다. 표면을 쓰다듬자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첫 사냥 때 구해 왔던 책상으로, 가구가 좀 필요할 것 같다는 누군가의 의견에 따른 결과였다. 그때 누군가는 책상을 들고 순간이동을 하는 데 진땀을 뺀 뒤로 가구를 가져오자는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길잡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하며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책상이 낡아 조금만 빠르게 당겨도 듣기 싫은 쇠소리가 났다.

첫 번째 서랍. 조각칼과 붓들. 누군가가 가끔 예술 활동을 할 때 쓰는 도구들이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두 번째 서랍. 종이더미들. 전북 지역의 지도. 제21K기지의 스케치 사본. 재단 안전가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 리스트. 생존의 흔적들.

그리고 세 번째 서랍. 미완성된 예비용 가면. 언젠가 누군가가 길잡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그가 거부했다. 그 뒤로 이 가면을 본 적 없었다.

길잡이는 서랍들을 다시 닫았다. 당연하게도 삼이공삼에 대한 정보는 없었고, 그는 순간 유일한 친구의 사생활을 뒤진 것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왔다.

찰칵, 문이 닫혔다. 길잡이는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삼이공삼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사실 왜 하필 그 단어가 떠올랐는지도 잘 몰랐다.

입모양만 보고 유추한 것이니, 사실 누군가는 암기공사라고 말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참히농감. 다른 어떤 이상한 단어든 간에. 또는 의미 없는 잠꼬대였을지도 몰랐다.

그냥, 이 모든 생각들은 그의 잡념이었을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은 자는 어떤 사소한 단서에도 매달리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길잡이는 우울감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왼팔을 만졌다. 큐피드 장식이 달린 팔찌가 그의 손에서 대롱거렸다.


2014년 4월 27일: 동오

"아니 시발 이게 왜 죽는데!" 정민이 비명을 질렀다.

동오는 모니터 속 화면에 온 신경을 다해 집중했다. 어두운 협곡 속에서 게임 캐릭터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동오 팀의 캐릭터 하나가 먼저 적 팀에게 점사당해 죽었기 때문에, 난전은 상당히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야 일단 빼! 죽 빼! 우리 수비해야 해!"

동오의 옆에서 기현이 명령했다. 동오는 황급히 궁극기를 켜서 은신 상태로 벽을 넘었지만, 다음 순간 적이 깔아 두었던 함정에 걸리고 말았다. 그의 캐릭터 위에 '공포' 상태가 띵 하고 나타났다.

"흐흐하! 흐하하흐하흐하!" 상대팀의 태우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총알 세례에 동오 팀 하나가 더 폭사했다.

"아… 미안."

동오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를 따라 벽을 넘어온 적이 그의 대가리를 한번에 따 버렸고, 이제 상황은 2 대 5였다.

기현은 아무 말 없이 상대 딜러진 속으로 들어가 연막부터 터트렸다. 쏟아지는 스킬들을 피하며 간신히 한 명을 따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그도 죽고 말았다. 그가 헤드폰을 벗고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걸 진다고? 말이 안 되잖아 진짜!"

"우리 조합부터 꼬였었어."

유일하게 살아 있던 동오 팀의 주환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캐릭터는 우물에 박혀서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2암살자 2원딜이 말이냐? 거기다 정글 니달리 박고 티모한테 블루 뺏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진짜."

"아니 어쩔 수가 없잖아, 라인 주도권이 없는데 나보고 어딜 가라고!" 정민이 소리질렀다.

"그러면 내가 포탑에서 더블킬 땄을 때 스노우볼이라도 잘 굴리던가. 거기서 피도 없는데 전령을… 아 그만하자."

기현이 아랫입술을 빨았다. 기분이 안 좋을 때 하는 습관이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됐지?"

"우오오오오, 기혀이 멋진데?" 모니터들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태우였다.

"하지만 게임은 졌죠? 이야 살다살다 기현이한테 이기는 날도 오는구나!"

"야 근데 기현이 잘하던데? 한타에서 트리플킬 할 때 나 지는 줄 알고 식겁했어. 어떻게 이겼지 진짜?"

태우 왼쪽에서 동오가 이름을 까먹은 반 친구가 말했다. 태우가 윙크했다.

"그대의 물음에 이 다섯 글자로 답하겠다. '아 미드차이'."

"네 글자잖아."

옆에서 헤드폰을 끼고 인강을 듣던 윤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지, '아'까지 쳐야지. 그게 없으면 맛이 안 산다니까."

윤은 저 대답에 눈알을 굴리고는 컴퓨터를 껐다. 그의 키보드 앞에는 절반쯤 푼 학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암튼. 이제 끝났지? 막판이라며."

"네네, 윤 형님, 끝났습니다요." 기현이 비아냥거렸다. 그의 뒤로 다른 아이들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넌 무슨 피시방까지 와서 학습지를 푸냐. 흥 떨어지게."

"난 내일 수행평간데도 태연한 너희가 더 무섭다 야. 그러다가 담임쌤한테 엎드려뻗쳐 당해도 난 몰라?"

윤이 받아쳤다. 기현의 표정이 즉시 비굴해졌다.

"에이, 또 농담한 거에 너무 삐지신다. 그래도 나중에 정답 보여줄 거지?"

"봐서."

동오도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 걸쳐 놓았던 교복을 다시 입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늦게까지 PC방에 남아 있던 걸 아버지에게 한 번 더 걸리면 이번에는 호통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수고했다." 동오와 기현 너머로 다른 아이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정민은 인사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기현은 그에게 꿀밤을 한 대 먹여주었다.

"야, 담엔 물리지 마라."

"네네."

정민이 투덜거리고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 PC방을 나갔다. 이제 자리에는 윤과 기현, 동오만 남아 있었다. 윤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가자. 저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담배 냄새 배인 거 같아."

"너 담배 피잖아." 기현이 대꾸했다. 윤이 발끈했다.

"뭐래, 안 피거든? 너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 줄래?"

기현은 대답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윤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곧 윤이 그때 한 번만 핀 거라느니, 바로 끊었다느니 하는 변명을 시작했고, 기현은 계속 실실 웃으며 윤의 성질을 돋웠다.

동오는 둘의 투닥거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못 본 체하며 다른 좌석을 둘러보았다. 무심하게 주변을 훌던 그의 눈에 같은 중학교 교복이 하나 스쳤다.

"어?"

"왜 그래?" 기현이 물었다. 윤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쟤 우리 학교 애 아냐? 교복이 보이는데."

"보자? 이 시간까지 남아 있을 밑바닥 인생이 얼마 없는데, 누구려나-"

동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큰 기현이 목을 쭉 빼서 그쪽을 바라보았다가,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윽. 쟤 그 새끼다. 지원."

"전학생? 뭐야. 우리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땐 거절하지 않았냐?"

동오와 키가 거의 같은 윤이 마찬가지로 목을 쭉 빼서 보려다가 실패하고 기현에게 물었다. 기현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냅둬, 혼자 다니고 싶나 보지. 꼭 찐따 새끼들이 괜히 저렇게 가오 잡아댄다니까, 그게 보기 더 좆같은지도 모르고."

"저번에 은영이 카톡 다 씹은 건 너무하긴 했어. 그때 은영이 엄청 상처받고 쟤랑 말 한 마디도 안 하잖아, 짝꿍인데도. 뭔 생각으로 저런대?" 윤이 중얼거렸다.

"몰라, 저런 새끼들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뭐,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가자." 윤이 말하며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동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야, 기현아, 너 먼저 가 봐."

"왜?" 기현과 윤이 동시에 물었다.

"뭐, 그냥 한 번 물어보려고… 같이 가자고? 어쨌든 여기 있는 거 보니까 집도 근천 거 같은데, 길동무 하나 늘면 좋지." 동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기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넌 가끔씩 되도 않는 오지랖을 부린다니까. 그럼 우린 먼저 간다."

"학교에서 보자."

윤이 말하며 먼저 올라갔다. 기현도 뒤따라 갔고, 한적한 PC방에는 성인들을 제외하면 이제 동오와 지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지원의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원은 바쁘게 손가락들을 놀리고 있었다. 동오는 그 모습을 보고 그가 게임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모니터는 게임이 아니라 어떤 사이트를 표시하고 있었다. 좌측 상단의 익숙한 로고가 동오의 눈길을 끌었다.

"오메글?"

그가 중얼거렸다. 그도 몇 번 사용해 본 적 있는 랜덤채팅 사이트였다. 질 나쁜 이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절로 멀리하게 되었지만. 동오가 밑의 채팅 내역을 슬쩍 보려던 순간—

"뭐야?" 지원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왼쪽 손가락들이 Alt 키와 F4키를 동시에 눌렀고, 모니터는 난잡한 PC방 배경화면으로 돌아가 각종 광고들을 띄웠다.

지원의 시선이 순식간에 동오의 당황한 얼굴과 교복, 갈 곳 잃은 손을 훑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뭐하는 거야? 염탐?" 지원이 쏘아붙였다.

"아, 난 그냥, 혹시, 만약 집 가는 길이 같으면—" 동오가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지원이 바로 말을 끊었다.

"아니면 꺼져. 귀찮게 굴지 말라고. 내가 너랑 같이 집 가고 싶다고 했어? 왜 가만히 있는데 건드리는데?"

동오는 마지막 말에 조금 마음이 상했다. 그가 헛기침을 했다.

"어… 알았어. 안 건드릴게."

그는 두 손을 들고 뒷걸음질쳐서 지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현이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냅둬, 혼자 다니고 싶나 보지.'

그러게, 그냥 너네랑 같이 갈 걸. 동오는 후회하면서 지원에게 멀리 떨어졌다. 그가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던 지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돌리고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동오는 자기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겼다. 손목시계를 보니 9시 56분이었다. 4분 뒤에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올 것이고, 그 전에 PC방을 나오지 않으면 그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놓일 것이었다. 동오가 걸음을 재촉했다.

"야." 뒤에서 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쯤 달려가던 동오가 우뚝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니 지원이 의자를 돌려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는 아직 배경화면 상태였고, 지원의 귀끝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 지원이 망설이듯 말을 꺼냈다. "미안. 방금은 내가 너무 날 세워서 말했어."

"아냐. 내가 미안하지."

이미 지원은 뒷전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동오는 대충 대답했다. 지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동오는 고개를 돌려서 PC방을 빠져나왔다.

그가 막 계단을 전부 올라가서 도로가에 도착한 순간 휴대폰이 10시가 되었음을 알렸고,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동오는 잔뜩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아들, 어디니?" 아버지는 첫 대화를 항상 자상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동오의 근처에 누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학원 끝나고 돌아가는 중이에요. 지금 장우상가 앞이에요."

"그래? 너 혼자니?"

"네. 다른 애들은 먼저 갔어요."

동오가 말하자 그제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 날카롭고 매서운, 채찍 같은 음성이었다.

"그럼 빨리 와라. 네가 오늘까지 끝내야 할 학습지가 산더미 같으니까. 저번에 수학은 3장까지는 다 풀어 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냐? 아비 말이 우스워?"

"아뇨, 그게…"

"변명이나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다 풀기 전까진 잠 못 잘 줄 알아. 답지는 내 사무실에 있으니까 베낄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알겠냐?"

"…네." 동오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가 뭐라고 말한들 이 상황에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지금 다니는 학원 말고 새 학원에 가라. 결제는 다 끝냈으니까 넌 그냥 가면 돼. 네 엄마랑 대화해 봤는데, 지금 학원은 네 성적을 올리기에 영 신통찮은 것 같구나. 너도 느끼지?"

"네."

내일부터는 학원 땡땡이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동오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고, 아버지는 별다른 안부인사 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동오는 휴대폰을 귓가에서 늘어뜨리고 잠시 도로를 쳐다보았다.

"엄하신 분인가 보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동오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지원이 그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오가 할 말을 잃고 지원을 쳐다보는 동안, 그가 자기가 메고 있던 가방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너 풀고 있는 학습지, 혹시 이거야? 난 답지 있거든. 원하면 가져가도 돼."

"아니, 잠깐만… 너 내 전화 엿들은 거야?"

동오는 이제 당황을 넘어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자기 모니터 잠깐 쳐다본 걸로는 난리를 치면서, 내 전화 내용은 아무렇지도 않게 엿들었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냐." 지원이 얼굴을 붉히며 주장했다.

"네가 PC방에서 나가는 길을 서서 막고 있었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동오는 지원과 말을 더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학습지의 답지는 탐이 났다. 저것만 있으면 오늘 새벽 세 시까지 머리를 싸매며 수학문제들과 씨름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는 고민하다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지원의 답지를 받았다. 지원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동오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답지를 배낭에 쑤셔넣었다.

"아냐." 지원이 답했다. "내일 보자."

그는 동오를 지나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동오의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처음부터 같이 가지는 못했겠네."

동오가 중얼거렸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말로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밤의 도시는 낮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이었다. 학원이 끝나고 편의점에서 요기거리를 찾는 학생들과,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술집을 항해 걸어가는 직장인들이 서로 섞이며 다소 시끄럽고 활기찬 공기를 만들어냈다. 동오는 그 분위기에서 한 발 물러서 어둑한 골목길로 모습을 숨겼다.

중학교 3학년. 수능까지는 아직 3년하고도 8개월 넘게 남아 있었지만, 그는 이미 에너지가 방전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의 일탈 뒤에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처벌이었고, 그가 풀어야 할 문제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의 의지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띠링. 기현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 새끼(지원)과 같이 가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동오는 솔직하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히 꾸며내서 지원이 정중하게 요청을 거절했고 대신 그에게 학습지 답지를 선물했다고 답장했다.

기현의 따봉 이모티콘이 3연속 올라왔다. 지원의 의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성싶었다. 동오는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어둑한 밤하늘 위로 동오의 긴 숨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또다른 날이 저물었고, 동오는 앞으로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므로.


2029년 7월 27일: D-3203

모든 게 잘 풀리는 듯했다. 그러니까, 아침에 노부인이 D-3203을 깨워서 오늘 아침은 없다고 통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아니 왜요? 지금 뱃가죽이 등짝에 들러붙었는데!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요?”

D-3203은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D계급의 제1원칙, ‘상급자에게 대들지 말 것’을 정면으로 어긴 행위였지만, 지금 그는 허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험 계획자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노부인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 실험에 정신오염적 요소가 포함될 텐데, 아침을 먹으면 실험 결과가 교란될 수 있기 때문에 금식해야 한다더군. 그러니까 나한테 따져도 소용없어.”

D-3203은 순간 노부인에게 당장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자기 옷이라도 뜯어먹겠다고 협박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봤자 그를 구속한 다음 약을 먹여서 다시 토해 내게 만들 테니까.

D-3203은 반항을 포기하고 철창 앞에 축 늘어졌다.

"곧 끝날 거야. 그리 긴 실험은 아니…"

노부인이 안쓰러운 듯 말했다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D-3203은 노부인에게 D계급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면 알레르기라도 돋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그럼 그 빌어먹을 실험은 언제 하는데요?"

"지금." 노부인의 말과 함께 그녀의 뒤에서 경호 요원 두 명이 걸어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한 요원은 완전히 삭발한 머리에 근육질이었고, 다른 요원은 커다란 키에 스포츠머리, 수북한 턱수염이 나 있었다.

둘의 공통점으로는 분노가 가득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을 꼽을 수 있었다. D-3203은 즉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와." 스포츠머리 요원이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D-3203은, 적어도 점심은 제시간에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서, 얌전히 D계급용 수갑을 차고 철창 밖으로 걸어나왔다. 사람은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하는 법이니까.

"수고하십시오." 까까머리 요원이 노부인에게 인사했다.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D-3203은 그런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스포츠머리가 D-3203의 정수리를 후려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D-3203은 끙 소리를 냈다. 노부인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D-3203 양옆의 경호 요원들은 엘리베이터를 거쳐 연구2동의 복도로 돌아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D-3203도 눈치를 보며 입을 닫고 있었지만, 그들이 3일 전에 갔던 곳과는 다른 연구실로 가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 우리 지금 SCP-███-KO 실험하러 가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까까머리가 짧게 대답했다. D-3203은 그가 자신을 걷어차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조금 더 말해 보기로 했다.

"그럼 다른 SCP 실험에 투입된 건가요? ███-KO는요?"

"그 SCP의 실험은 미뤄졌다." 스포츠머리가 대신 대답했다.

"왜죠?"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경호 요원들은 입을 꾹 닫았고, D-3203은 더 물어보았다가 진짜로 얻어맞을까 봐 추가적인 질문을 포기했다. 그의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알기로, 한 SCP의 실험이 미뤄지는 데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높으신 분들—이름이 윤리 뭐시기였는데—의 감찰로 인해 부적절한 실험 방식이 적발되었을 경우, 개선안이 발제되기 전까지 실험이 강제 중지되는 것이었다.

D-3203이 이전에도 몇 번 겪어 본 일이긴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SCP 실험은 딱히 위험하거나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건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예산 부족으로 더 중요한 SCP에게 가용 자원이 집중되며 다른 실험들이 연기되는 것이 있었다. 이건 새 SCP가 확 몰려드는 14-16일 즈음에 벌어지는 일이었기에(동료 D계급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해당 SCP에게 예상치 못한 변칙성이 추가로 발견되며 재연구가 이뤄지는 경우. 이때 '추가적인 변칙성'은 대부분 인명 사고를 동반했다. D-3203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사가 죽었나요?" 그가 기습적으로 경호 요원들에게 물었다.

둘 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D-3203은 까까머리가 눈 밑 근육을 움찔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 정도면 대답으로 충분했다.

"잡담하지 마라." 스포츠머리가 매섭게 말했다.

"예." D-3203도 짧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속으로 이름 모를 박사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복도가 끝나고, 처음 보는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D-3203은 경호 요원들에게 반쯤 끌려가는 자세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처음 보는 박사와 의료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트에 무언가를 입력하던 박사가 고개를 들고 D-3203을 보았다.

"늦었잖아." 그가 경호 요원들에게 쏘아붙였다.

"죄송합니다." 경호 요원이 손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D-3203은 마른침을 삼켰다.

"의자에 앉히고 수갑 채우고 대기해. 카트 위에 하나씩 가져가고."

박사가 실험대 옆에 있는 카트를 가리켰다. 카트에는 D-3203의 가장 끔찍한 악몽들—대부분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에 나올 법한 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고, 가장 위에는 포장된 알약 봉지가 두 개 있었다. 경호 요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실례지만, 저게 뭔지 물어봐도?"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경구투여형 항-정보재해 백신. 두 시간짜리. 저것도 몰라? 신참인가 보네."

박사가 대꾸하자, D-3203은 경호 요원들의 속에서 말 그대로 열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살짝 걱정스러워졌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미-"

"알아, 경호 요원들이 먹는 거 따로 있다는 거. 근데 그건 통합형이고 저건 C-형 전용이니까 저걸 먹으라고. 실험 한두 번 해 봐? 왤케 물어봐, 그냥 하라면 할 것이지."

경호 요원이 D-3203의 팔을 고통스럽게 조였다. D-3203은 화풀이가 있을 것에 대비해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그들은 별 말 하지 않고 D-3203을 의자에 구속시킨 다음 알약을 먹었다.

D-3203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박사를 보았다. 이제 그는 거대한 팩에 주홍색 액체를 주입하고 있었다. 박사의 라텍스 장갑이 능수능란한 손짓으로 액체의 정량을 측정하고 주사기 바늘을 뜯어 끼워넣었다.

"ACF-155. 그래. 완벽해. 환각과… 혼동 현상 방지. Rh+는 실힘적인데… 효과 좀 볼까."

박사가 계속 중얼거렸다. 경호 요원들은 당장 퇴근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었다. 그 심정은 D-3203도 마찬가지였지만, 차이점이라면 그는 수갑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준비됐나, D계급?" 박사가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재단 박사들의 태반이 그렇듯 그도 인체 실험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인 모양이었다. D-3203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네, 박사님. 준비됐습니다."

D계급의 제 2원칙, '미친놈한테 대들지 말 것'.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는지 박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 좋아. 아주 예의가 바르군. 저번 D계급은 소리를 떽떽 질러대서 영 별로였어. 안 닥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해야 했다니까. 물론 실제로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랬다간 윤리위원회가 날 산 채로 뜯어먹을 테니까. 참, 예전이 좋았는데 말야."

박사는 횡설수설하며 혈관용 카테터를 들고 D-3203의 소매를 걷었다. 의료진 중 하나가 그의 왼팔을 소독하고 주사바늘을 꽂았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주홍색 액체가 그의 팔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라." 박사가 D-3203에게 경고했다. 곧이어 팔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그의 머리로 올라왔다.

의료진들이 D-3203의 주사바늘이 꽂히지 않은 팔에 뇌파 측정기와 호흡 안정기, 그 외 정체 모를 여러 기구들을 설치했다. 차가운 쇠가 닿자 D-3203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몸 상태가 빠르게 나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어지러웠다. D-3203은 끙끙거리며 의료진에게 물 한 컵을 요청했다.

"버티라고 해."

박사가 단칼에 그의 요청을 끊고, 작은 강화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와서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고무끈이 달린 나무 가면이 들어 있었다.

"D계급, 이제 내 말 똑바로 들어라." 그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가면을 들어올렸다. 성인 남성의 얼굴에 딱 맞을 듯한 크기의 가면은 수수했지만 왠지 모르게 섬뜩해 보였다.

"너한테 설명할 의무는 없지만, 네가 예의 바르니까 알려주는 거란다. 그 가면의 원주인에게는 순간이동과 원하는 변칙예술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둘 다 재단에게는 탐이 날 만한 능력이지. 물론 가면에는 잠금장치 같은 게 걸려 있고, 난 널 실험체로 써서 그 잠금을 어떻게든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할 거다. 걱정하지 마라, 이 실험은 기대치가 낮으니까. 한 다섯 번 정도 실험하면 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변칙으로 처리하고 어디 표준 격리실에 처박아놓겠지."

박사가 말을 너무 빨리 해 대서 D-3203은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가 주기적으로 정신과적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사실 네가 불려 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약물에 길들여진 사람일수록 내성이 크니까 발작할 위험이 줄어들거든. 그러니까, D계급, 넌 정신줄 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라. 네가 한 번 만에 성공하면, 나머지 네 번의 고통스러운 실험은 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알겠나?"

"네… 에."

D-3203의 입에서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나왔다. 의식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저번 SCP 실험이 그리워졌다. 그 실험은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는데. 박사도 이런 수다쟁이가 아니었고. 그리고 경호 요원들도…

갑자기 그를 걷어차던 왼쪽 경호 요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 경호 요원은 지금이 더 나았다.

"그래, 그래."

주홍색 액체의 주입이 끝나자 박사가 눈빛을 번뜩였다. 의료진이 주사바늘을 제거하고 상처 부위를 잠시 지혈한 다음, 박사가 D-3203의 얼굴에 가면을 대고 고무끈으로 고정시켰다. D-3203이 숨을 헐떡였다.

"흄 준위는?" 박사가 의료진에게 물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1.2에서 1.27, 1.54, 2.05, 2.26… 2.27. 안정되었습니다."

"심박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의료진이 보고했다.

"근전도 감소, 알파파 감지됩니다. SCP가 강제적인 수면 상태를 유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의 방어 기제인가 보군. 계속 관찰하고, 안구 운동 정지하면 흥분제를 추가로 투입해. "

"속이 안 좋아요." D-3203이 애원했다. "토할 것 같아요. 머리가… 제발 이것 좀…"

"흄 준위가 미세하게 요동칩니다. 국소적 현실 조작의 발생 가능성…"

"연구실에 아직 스크랜턴 닻 있나? 있지? 그거 가동시켜. D계급 상태는?"

"일단 노르에피네프린 투입했고, 얕은 수면 상태와 강제적인 긴장 상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지속될 경우 뇌에 비가역적인 피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끄윽…" D-3203이 크게 트림했다. 이렇게 몽롱한 상태에서도 트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D-3203, 보고해라. 아직 제정신인가?" 박사가 그에게 몸을 바싹 붙이며 물었다. "일단 환각은 예방한 것 같은데."

박사의 모습이 두 개로 나뉘어 보였다. D-3203은 몽롱함을 꾹 참고 괜찮다고 대답하려다, 순간 찾아온 강렬한 통증에 눈깔을 뒤집었다.

"D-3203? 괜찮-"

D-3203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팠다. 뇌가 안팎으로 뒤집힐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그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고, 두 팔은 족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아아아아아악!" D-3203이 울부짖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쳤다.

박사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경호 요원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D-3203은 계속 비명을 지르며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를 긁어 댔다.

아들, 밥 먹었어? "살려 줘! 제발!"

"의료진, 상태 보고해!"

1등이야? 하, 그래야 내 자식이지. "씨발 나 뒤질 것 같다고!"

"신경성 쇼크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진정제를-"

야, 오늘 수업 끝나고 같이 PC방 갈래? …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너 이름이 뭐야? "흐… 악…!"

"그거 놓으면 칵테일 효과 일어나는 거 몰라?! 일단 심장부터 안정시키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네 아빠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웁. 우웁. 우웩-"

"구역질 반사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뇌가 완전히 망가집니다!"

내 생각은 어떠냐고? 알잖아, 넌 네 갈 길을 갈 자격이 있어. 다른 누구나 그렇듯이. "……."

"호흡 곤란 발생. 박사님, 당장 가면 빼고 산소마스크 씌워야 합니다."

이건 왜 틀린 거냐?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였잖아. "……"

쓸모없는 놈.

"…쯧. 가면 벗기고 산소마스크 씌워."

너 풀고 있는 학습지, 혹시 이거야?

꿈인지 환각인지 모를 어딘가의 공간에서, 누군가가 D-3203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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