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 - 1

2032년 8월 30일: 길잡이

세상이 멸망했을 때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능력 중 하나는, 잠결에도 주위의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치명적인 기습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면에서 길잡이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잠귀가 밝았으니까.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문가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길잡이는 습관처럼 “누구세요”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흘러나오는 숨소리에 자신이 말하는 법을 잊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떠날 시간이야.

누군가가 오른손을 휘휘 내저어서 말했다. 그 손에는 족히 20cm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가시가 돋아 있었다.

알겠어요. 길잡이 역시 가시가 돋아난 손을 양옆으로 움직여 대답했다.

방문자는 사라졌고, 길잡이는 다시 침실에 홀로 남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마지막 남은 양말을 탁자에서 꺼내 발에 신겼다.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창문 틈으로 옅은 햇빛이 길잡이와 탁자를 비추었다. 탁자 위에는 권총, 밧줄, 케이블 타이, 망치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낡은 등산용 백팩이 걸려 있었다.

최대 10kg까지 들고 움직일 수 있는 튼튼한 놈으로, 모두 길잡이가 식량을 털어올 때 쓰이는 물건이었다.

한편 탁자 반대편에는 길잡이가 특별히 선별한 물건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뜯지 않은 AA 건전지 4개들이 통, 손전등, 마스크 몇 개, 500mL 생수병 두 통, 에너지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구역 지도. 이것들은 내일의 여정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손목시계를 흘긋 보니 벌써 8시 27분이었다. 길잡이는 혹시라도 사라진 물건은 없는지 눈으로 하나씩 확인한 후, 탁자 위의 물건들을 백팩에 쓸어담고(권총은 오른허리에 매달았다) 방을 나섰다.

거실에서는 누군가가 책상에서 목조 조각상을 깎고 있었다. 손에 들어올 법한 크기의 조각상은 긴 머리의 여인이 바윗가에 앉아 있는 형상을 묘사한 듯했다. 여인의 얼굴과 머리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그가 조각칼을 들고 섬세한 손짓으로 한 번 쓰다듬자, 조각상의 머리에 빗결치는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이어 여인의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과 오묘한 미소가 모습을 보였다.

길잡이는 혀를 한 번 차서 자신이 나왔음을 알렸다.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잘 잤어’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들어올렸다. 길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는 누군가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실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엄청나게 커다란 놈이라, 둘 사이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 공간은 다양한 크기의 종이조각들과 서울시의 지도 하나, 가시 달린 사람들의 스케치가 그려진 이면지 뭉치가 채우고 있었다.

길잡이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도록 탑 하나를 조금 왼쪽으로 치웠다. 누군가가 다른 탑 끝자락에서 아직 깨끗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둘 사이에 놓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엄숙히 고개를 숙임으로써, 오늘로 1년 6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제21K기지 출신 생존자들의 일일 회의가 시작했음을 알렸다. 회의의 전통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새 조각상인가 봐요. 어젠 못 봤는데. 길잡이가 먼저 펜을 들었다.

그냥 손풀이용이지. 마음먹고 만든 건 아냐.

누군가가 대답하며 거의 완성된 조각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인의 얼굴에서 조각되지 않은 곳은 코가 들어 있을 뭉툭하게 튀어나온 부분밖에 없었다.

가질래?

아직 완성 안 된 거 아니에요?

귀찮아졌어. 어차피 저건 진짜 작품도 아닌데 뭐. 네가 가진다고 하면 코까지 완성시켜 줄게.

길잡이는 잠시 조각상을 쳐다보았다. 코 대신 덩어리가 튀어나온 여인의 조각상도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가 가질게요.

누군가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는 오른손으로 고마움의 손짓을 표했다.

이제 일 얘기 해야지. 길잡이가 조각상을 챙기는 동안 누군가가 종이에 적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서초구에서 세 곳, 성남시에서 한 곳, 아마도 동작구에 한 곳. 식량이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들로만 꾸렸어.

그가 이면지 밑바닥에 적고 길잡이에게 돌려서 보여주었다. 그 옆에 누군가가 그려 놓은 간단한 약도가 그려진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서초구부터 먼저 가 보죠. 시계 방향으로.

길잡이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넣으며 답장했다. 누군가가 내용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상황은 좀 어때? 뾰족이들이랑 투명이들. 누군가가 물었다. 길잡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뾰족이는 그와 누군가처럼 손에 가시가 돋아난 사람을, 투명이는 사람을 가시로 찔러 죽이고 투명해진 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둘은 길잡이와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은신처에서 연명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원래 그들에게는 각각 SCP-755-KO-A와 SCP-755-KO-B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난 후 누군가가 그에게 더 짧고 간결한 이름을 그들에게 붙였고, 길잡이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뾰족이와 투명이가 되었다.

길잡이는 책상 위의 더미에서 종이 묶음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곳에는 재단의 안전가옥을 중앙으로 그 주변의 건물들과 산, 강이 그려진 임시 지도가 여러 장 겹쳐져 그려져 있었다. 길잡이가 가장 위에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큰 차이는 없지만, 꾸준히 나빠지고 있어요. 여기 보면… 그가 지도 좌하단에 동그라미를 쳤다.

투명이들이 배회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살인을 즐기는 부류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놈들에게 밀려나서 이 근처에 정착한 뾰족이들도 덩달아 많아지고 있고요. 어제 여기서도 뾰족이 하나가 보였어요.

그가 안전가옥에서 약 200m 떨어진 지점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여기도 발각되겠군. 미리 탈출 계획을 짜 둔 게 다행이지.

오늘이 여기를 쓰는 마지막 날이죠? 길잡이가 적었다.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씨는 앞으로 어디로 간다고요?

일단은 전북. 그때 기지 이사관이 그쪽으로 피난 간다고 했으니까. 전북에서 볼 장 다 본 뒤에는 경남 가고… 뭐, 이 지랄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길잡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펜을 들었다. 누구 씨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풍소경 씨 말이에요.

글쎄. 아직 내 가면이 놈을 못 찾고 있긴 해. 그래도 재단 소속이니까 웬만하면 뒈지진 않았겠지. 그리고 언젠가 찾아낸다면…

누군가는 펜을 멈추고 종이를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내가 나한테 누구 씨라고 적지 말라고 했지. 그게 뭐냐? 사람 이름 같지도 않고.

진짜 이름도 안 알려주고, 풍소경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고,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길잡이가 입을 삐죽이며 답장했다.

그냥 아저씨라고 쓰면 되잖아. 너도 그게 편할 텐데?

그건 안 돼요. 설명은 못하겠는데, 저한테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는 놈이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생각해 내요. 너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자연스럽게 다 기억나는 거 아니냐?

모르죠. 아무튼 지금은 이래요.

누군가는 글을 쓰려다 짜증이 난 듯 펜을 딱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길잡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 밑에 이어서 썼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누구 씨 식량은 어느 정도 필요해요? 전 하루치만 더 있으면 돼요.

네 가방에 많이 넣지도 않았잖아. 나보다는 너한테 더 필요하지 않아? 누군가가 반문했다.

전 많이는 필요없어요. 여기서 21K기지까지 3시간도 안 걸리니까. 거기서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죠. 길잡이가 답했다.

누군가가 길잡이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기지에 침입한 다음’에는 그냥 죽을 생각이야? 기억을 되찾던 어쨌건, 일단 식량은 모아 놔야지.

지금은 아무 계획이 없네요. 혹시 모르죠, 여기 같은 재단용 안전가옥을 또 발견하게 될지도.

가끔은 너처럼 무계획적인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참 신기하다니까.

전 누구 씨가 더 신기한데요. 길잡이가 적자, 누군가가 피식 웃었다.

길잡이가 막 펜을 들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9시 5분 전이었다.

슬슬 가죠.

길잡이가 왼손의 가시를 위아래로 까딱여서 말했다. 누군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책상 위에 놓인 가면을 얼굴에 썼다. 길잡이는 물건을 흘리지 않도록 백팩을 단단히 고쳐매고, 가시가 돋히지 않은 손으로 누군가의 왼손을 잡았다. 누군가는 하품을 했다. 길잡이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일과였으므로, 둘은 출발한다는 신호 없이 바로 한순간에 안전가옥에서 사라졌다.

사람 두 명분의 진공을 메우느라 갑작스러운 바람이 일어나면서 책상 위의 종이들을 어지러이 흩뜨렸다.

***

누군가의 순간이동은 두 명이서 함께할 경우 최대 200m를 넘지 못했고, 누군가는 순간이동 다섯 번을 할 때마다 쉬어야 했다. 때에 따라 길잡이가 미리 안전한 곳을 확보해 놓지 못한 경우에는 더 짧은 거리로 이동해야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안전가옥에서 이번 목적지까지 순간이동으로 가는 데는 약 한 시간 45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길잡이는 혹시나 손을 놓쳐서 누군가가 그를 데리러 되돌아오는 사태를 만들지 않도록(실제로 세 번 정도 벌어졌던 일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서초구 외곽의 한 편의점에 도달하자, 누군가는 길잡이의 손을 뿌리치듯 놓고 숨을 헐떡였다.

길잡이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숨을 골랐다.

좀 진정됐죠?

길잡이가 오른손으로 등을 두드려 주며 눈짓으로 물었다. 누군가는 끙 소리와 함께 카운터 의자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못할 짓이라니까. 누군가가 왼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죽는 시늉을 했다.

길잡이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누군가의 등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편의점 문 쪽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왼편에 아지렁이가 몇 개 섞여 있었고, 그 건너편에는 한 노인이 검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고 있었다. 편의점과 반대 방향이라 그를 눈치채지는 못할 듯 싶었다.

다른 뾰족이(또는 투명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다녀올게요.

길잡이가 고갯짓으로 말했다.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는 그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편의점을 나섰다.

미리 현관종을 제거했으므로 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길잡이는 빠르게 벽에 붙어서 걸어가며 투명이들의 정확한 수를 파악했다.

정면에서 보니 총 네 개 정도의 아지랑이가 구분되어 보였다. 그 정도면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길잡이는 투명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지랑이들이 일렁이고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무턱대고 가시를 찔러대는 놈들은 아니었다. 아니면 그를 찔러 죽이기에는 너무 귀찮았거나.

어쨌든 포스트잇의 약도는 편의점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죽 가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그는 투명이들을 뚫고 지나가기로 했다. 아지랑이들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는 뒤편의 노인이 아직 똑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은 어느새 모퉁이를 꺾어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길잡이는 안심하고는 직진했다.

길잡이는 약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약도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꺾어 직진한 뒤, ?의 거리만큼을 지나—누군가는 혼자 답사할 때도 주로 순간이동을 썼으므로 정확한 거리에는 약한 경우가 많았다— 커다란 건물 지하에 있는 대형 마트를 찾으라고 적혀 있었다.

길잡이는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길게 빼 정면을 바라보았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로 크게 돌아서 달려온 탓인지 호흡이 거칠었다.

입에서는 침이 흘러 옷깃을 적시고 있었고, 왼손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그의 가슴과 배 사이를 오가며 두드리고 있었다. 며칠을 굶은 사람의 특성이었다.

그러나 길잡이를 가장 경계하게 만든 건 그의 오른손이었다. 노인의 오른손에는 길잡이의 것과 같은,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있었다.

길잡이는 물러서며 가시가 돋힌 손을 내밀었다. 노인도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뾰족이들, 즉 손에 가시가 돋아난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은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저리 꺼져. 길잡이가 가시를 위로 90도 올려서 말했다.

이리 내. 노인이 가시를 90도 아래로 내러서 화답했다. 시선을 보아하니 그의 백팩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귀찮게 굴지 마. 길잡이가 다시 시도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노인이 가시를 그에게 정면으로 내밀었다. 뾰족이들 간의 가장 보편적인 의사소통이자, 가장 치명적인 말. ‘뒤져’라는 뜻이었다.

노인이 길잡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길잡이는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른쪽에 벽돌담, 왼쪽에 탁 트인 길. 승산은 충분했다. 길잡이는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그를 덮치는 노인의 옷깃을 오른손으로 잡고 확 틀었다.

노인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며 둘은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길잡이가 아래, 노인이 위 포지션을 잡았다. 길잡이는 머리를 힘껏 왼쪽으로 움직였다.

날카로운 가시가 길잡이의 이마를 스치며 길바닥에 꽂히자, 길잡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왼손의 가시 밑동으로 노인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발작하듯이 왼손으로 길잡이의 가슴을 할퀴었다.

길잡이는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노인의 정강이를 가시로 찔렀다. 예상보다 가벼웠다.

그가 고통 때문에 힘을 빼자, 길잡이는 노인을 무릎으로 걷어차서 밀치고 일어섰다. 노인은 꿈틀대며 바닥에 온통 침을 튀겨댔다.

길잡이는 그를 포박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놔둬도 노인이 그에게 다시 덤빌 일은 없을 것이다.

길잡이가 도망가기 위해 돌아선 순간 노인이 꾸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액체가 바닥에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노인이 혹시 토했나 싶어서 뒤돌아보았다.

노인의 가슴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틈새로 붉은 물이 고동치며 뿜어져 나왔다.

노인은 어떻게든 상처를 메우려고 가시가 돋히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꼭 붙들고 있었고, 그의 죽어가는 몸뚱이 위로 아지랑이가 하나 피어나 있었다.

길잡이는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골목길에 서 있던 다른 아지랑이들도 노인에게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노인의 몸에 구멍이 세 개 더 뚫렸다. 노인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핏자국이 아스팔트 사이로 스며들다가, 물줄기를 이루어서 길잡이의 운동화 밑창까지 닿았다. 그는 아지랑이들을 바라보았다.

'살인을 꺼리는 부류가 아니었나?'

길잡이는 달아날 준비를 하며 천천히 물러섰지만, 아지랑이들은 그의 행동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길잡이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도 무고하지 않다고, 이 살인에 너도 가담한 거라고.

길잡이는 입술을 깨물고는 뒤돌아서 뛰어갔다. 투명이들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2014년 4월 2일: 동오

담임 선생님이 앞으로 걸어나오자, 그 뒤로 누군가가 따라왔다. 동오가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자, 주목!”

담임 선생님이 외치자, 뒤에서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던 소리가 가라앉았다. 선생님은 교실을 눈으로 한 바퀴 훑고는 교실이 만족할 만큼 조용해지자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지원이고, 아직 많이 어색할 테니 서로 많이 도와주고 얘기해. 알겠지?”

군데군게 변성기가 와서 갈라진 목소리들이 떼를 지어 “네”라고 합창했다. 선생님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편의 아이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한눈에 봐도 수척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얼굴은 살이 없어 밑턱이 뾰족했고, 가냘픈 팔에 키도 작았다. 머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사춘기 남자애 특유의 덕수룩한 바가지 머리였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꽤나 잘생겨 보였다.

“한 마디 하겠니?”

선생님이 자기딴엔 자상한 목소리를 내느라 평소보다 반 옥타브 음을 높이자, 뒤편의 아이들 몇 명이 키득거렸다. 선생님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 모두를 한순간에 제압했다.

“안녕. 난 지원이야.” 지원이 뜸을 들이다가 마땅찮은 듯 말했다.

아이들은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지원은 뭘 보냐는 듯 그들을 향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 기묘한 대치는 보다 못한 담임 선생님이 “지원아, 이제 들어가렴. 네 자리는 저기야”라고 지정해 준 뒤에야 끝났다.

지원은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고, 선생님의 몇 가지 전달 사항이 이어진 후에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즉시 반 아이들의 약 절반은 집중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딴짓 모드에 돌입했다. 동오는 옆에 앉은 기현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쟤 존나 마르지 않았냐?” 기현이 속삭였다.

동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와 ‘어쩌라고’의 의미가 반반씩 혼합된 몸짓이었다. 기현이 말을 이었다.

“아니, 꼭 못 먹고 자란 거 같은데. 팔 좀 봐봐. 저게 16살짜리 팔이냐?”

“어쩌라고 병신아, 그냥 마른 걸 수도 있지.” 동오가 말했다. 관심 없단 뜻이었다.

기현은 샐쭉한 얼굴로 그의 팔을 살짝 때렸고, 둘은 이내 수업 시간에 자주 하던 숫자 야구를 시작했다.

수업 중간중간 담임 선생님의 기습적인 지문 읽게 시키기 공격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둘 모두 걸리지 않았다. 지원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수업을 끝까지 들었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끝나자, 담임 선생님은 “나 갈 테니까 떠들지 말고 잘 쉬고 있어라”는 상투적인 경고와 함께 퇴장했다. 물론 이 지시에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기들끼리만 남게 되자, 나머지 아이들은 새로 온 외부인을 평가하는 표준적인 대형으로, 즉 지원의 자리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앉아서 질문 폭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곧 들뜬 목소리들 여러 개와 난감해하는 목소리 하나가 뒤섞이며 열기 어린 현장을 만들어냈다.

"어디서 왔어?"

"아, 나는 저기 진주 쪽에서-"

"형이나 누나 있어? 동생은?"

"너 혹시 게임 잘해? 잘하게 생겼는데."

"그건-"

"어디로 이사 온 거야? 엄마 아빠 무슨 일 하셔?"

"내가 아까 창문으로 봤는데 차 엄청 좋은 거 타던데! 너 부자야?"

왁자지껄, 시끌벅적. 아이들은 지원을 바싹 둘러싸고 자기네들끼리 떠들었고, 지원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오와 기현은 그 광기의 발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윤도 그들에게 합류한 상태였다.

세 명은 책상 하나를 두고 둘러앉아 어떻게 하면 오늘 저녁 학원을 째고 피시방에 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중이었다.

“아주 쉬워.” 기현이 주장했다.

“일단 학원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오늘 반장들 회의가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얘기하는 거지. 그리고 5시쯤에 다시 전화해서, 회의가 늦게 끝난 바람에 숙제를 못했으니 다음에 학원에 갈 때 이번에 못한 숙제까지 전부 다 해서 가겠다고 하는 거야. 이거 백퍼 통한다, 진짜.”

“일단 첫 번째로,” 윤이 입을 뗐다. “한 명이라면 몰라도 우리 세 명 전부 그 핑계를 대는 건 불가능하고, 두 번째로, 학원 쌤이 호구냐? 그렇게 말하면 학원에 와서 숙제라도 하고 가라고 할 걸.”

“선택지가 없어, 이번에 가야 해.” 동오가 말했다.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대비 기간이라 째는 게 더 어려워진단 말이야. 그때 째면 부모님한테 전화 돌린다고 쌤이 말했다고.”

“아, 근데 방법이 없다 이 말이요.”

기현이 볼펜을 한 손으로 돌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짜증나게, 그냥 학원 끊어 버릴까? 어차피 공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하는 김에 우리 부모님도 좀 설득해 주라. 내가 학원 끊는다고 하면 내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실걸.” 동오가 우울하게 말을 받았다.

“왜냐면 네가 싹수가 보이니까, 동오야. 넌 진짜 조금만 공부하면 잘할 텐데, 왜 굳이-”

"그, 좀 그만해 주면 안 될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날을 세워 말하자, 동오와 기현, 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아이들 사이에서 지원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피곤하거든. 오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좀 쉬고 싶은데, 괜찮아?"

어쩔 줄 모르는 시선들이 서로를 오갔다. 아이들은 할 말을 잃은 채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라든지 '그래, 알겠어' 같은 대답과 함께 하나둘 지원의 자리에서 멀어졌다. 지원은 책상 위에 양팔을 올리고 엎어져서 자는 자세를 취했다.

"성깔이 장난 아니네." 윤이 중얼거렸다.

“야. 내 생각 말해도 돼냐?” 기현이 물었다. 동오와 윤이 시선을 교환했다.

“뭔데?” 윤이 말했다. 기현이 애매하게 머리를 긁었다.

“쟤 말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좀 호모 같지 않냐?”

"글쎄, 별로 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윤이 무감정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기현을 보았다.

“야, 근데 네가 생긴 걸로 판단할 입장이냐? 넌 생김새로만 보면 빼박 조폭인데.”

“아? 멸치 새끼가 뭐라는 거고.”

“내가 멸치냐 네가 돼지지. 너 어제도 족발 대자 혼자서 다 처먹었잖아.”

"아니 기껏 시켰는데 네가 안 먹는다매! 그럼 버리냐?"

윤이 한창 기현과 말다툼을 할 동안 동오는 자기도 모르게 지원을 훔쳐보았다. 책상에서 자고 있는 지원의 모습은 아까랑 다름없이 말랐고, 피곤했고, 수척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이제 각자의 무리로 돌아가 지원을 흘긋 보면서 속삭이고 있었다. 소문과는 거리가 먼 동오조차도 곧 지원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이 퍼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선택인데, 뭐.'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윤과 기현의 대화 속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별로 관심 없었다.


2029년 7월 25일: D-3203

D-3203이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의료인 두 명이 그에게 달라붙어서 그의 동공과 홍채의 움직임, 안압을 면밀하게 측정했다. 넓적한 기구가 그의 눈동자를 찌르자 D-3203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아파도 참아. 곧 끝나니까." 의료인 중 한 명이 무감정하게 말했다.

"별로 관심 없는데요." D-3203이 대꾸했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D-3203은 눈을 굴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별로 긴 실험이 아니었는데도 유난히 몸이 피곤했다.

"양쪽 눈 모두 기존의 동공 바깥쪽에 추가적인 동공이 생겼습니다. 동공 반사에 반응하는 걸 보니 뇌신경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요… 홍채가 없어 선명한 상을 맺을 수는 없어 보이는데, 주변시(周邊視)의 확장에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것 말고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그게 별다른 이상인 것 같은데. D-3203은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언제쯤 원래대로 돌아오지?" 의료진들 옆에 서 있던 박사가 짧게 물었다. 의료진이 차트를 확인했다.

"기존 실험대로라면 이틀쯤 후입니다."

박사가 대답을 듣고서는 태블릿에 뭔가를 부지런히 입력했다. 상부에 올릴 보고서인 모양이었다.

"SCP-███-KO, 3번째 실험 완료… 쟤는 변칙성 없어질 때까지 단독 격리실에 넣어 둬. 그 다음에 바로 다음 실험 시작할 거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경호 요원 두 명이 D-3203의 어깨를 잡고 그를 일으켜세웠다. D-3203은 얌전히 손을 내밀고 D계급용 수갑을 찼다.

그는 시험삼아 눈동자를 최대한 옆으로 돌려보았다. 뒤쪽의 흐릿한 시야로 박사와 의료진들이 검진 기구를 정리하고 실험을 마무리하는 것이 보였다.

주변시가 향상되었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D-3203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눈깔이 두 개든 네 개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2일쯤 뒤에는 다시 사라질 물건이기도 하고.

"수고하십시오."

"수고해라."

D-3203을 끌고 가는 경호 요원 두 명이 실험실 문 앞에 서 있던 경비원과 인사했다. D-3203도 문을 지나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경비원은 가볍게 무시했다.

문을 나서자,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여름의 시원한 저녁바람이 D-3203의 입술을 간질였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바람에 실린 거미줄이 그의 입술에 달라붙었다는 뜻이었다. 그 바람에 D-3203은 잠시 멈춰서 헛기침을 해야 했다.

"꾸물대지 마라."

그의 왼어깨를 붙들고 있던 경호 요원이 D-3203의 동작을 오해하고 말했다.

D-3203은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다시 침묵 속에 걸음을 옮겼다.

지금 D-3203이 있는 곳은 제21K기지의 연구2동이었고, 그가 내심 간절히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D계급 인원의 숙소는 강을 건너서 있는 어딘가의 건물이었다.

물론, 오늘은 그곳으로 갈 수 없으니 연구2동 지하에 있는 임시 격리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제21K기지에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의 리스트를 편안함 순으로 작성한다면, 임시 격리실은 '그나마 살 만함'과 '인간 이하의 삶' 사이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갈 것이다. 그것도 꽤나 낙관적인 측도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격리실 안의 시설은 콘크리트 바닥과 먼지, 철창이 있었고 그게 끝이었다. 식사는 경호 요원들이 주었고, 화장실은 요강과 (경호 요원의 동행 하에) 재래식 변기로 해결해야 했다. 세면 같은 건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비록 낡아빠졌을지언정 층마다 정수기와 개수대, 수세식 변기가 설치된 D계급 숙소가 3성급 호텔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실험에 뽑힐 위험을 예감한 D-3203은 오늘 아침에 샤워와 큰일을 전부 마친 터였다. 그는 첫 실험 때 한밤중에 경호 요원을 깨워서 변을 눠야 했었던 사태 이후 이 습관을 빠르게 터득했다.

"들어가." 경호 요원 하나가 딴생각에 빠져 있던 D-3203을 밀었다. 어느새 그들은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D-3203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경호 요원이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가 지하 4층 버튼을 눌렀다.

"고기 냄새가 나는데. 짜장면인가?" 경호 요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디 부서에서 회식하나 보지." 다른 경호 요원이 답했다. 그의 시야는 D-3203에게로 고정된 채였다.

"그럴 수도 있고. 젠장, 맥주가 땡기는군."

"빨리 인수인계하고 퇴근하자고. 난 내일 당직 근무까지 있어."

"내일 금요일 아냐? 불쌍하구만."

"그러게. 넌 다음 당직 언제였더라?"

"일요일."

"운 좋은 자식."

"하지만 유클리드 격리동 쪽 당직이지. 너도 알잖아, 차라리 여기가 낫다니까…"

두런두런 이어지던 대화는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달하며 뚝 끊겼다. 문이 열리자, D-3203의 목을 손가락 세 개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근육질의 노부인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D-3203은 왠지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느꼈다. 경호 요원들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D-3203은 그들의 상체가 살짝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건은?" 그녀가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변칙성에 노출된 D계급 후송입니다." 왼쪽의 경호 요원이 말했다.

노부인의 품에서 마술처럼 격리실 출입대장이 나타났다. 오른쪽의 경호 요원이 펜을 꺼내서 그들의 이름을 적었고, 왼쪽 경호 요원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D-3203의 왼팔을 꼭 껴안고 있었다.

노부인이 출입대장을 확인하고는 그들에게 손짓했고, 경호 요원들은 그녀에게 목례하고 D-3203을 끌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노부인은 그동안 D-3203을 맹렬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D-3203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지나쳤다.

그들은 L자형으로 꺾인 복도를 지나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는 입구 쪽의 격리실에 갇혔었기에 D-3203으로써도 여기는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멀어지는 동안,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D-3203은 살짝 몸을 떨었다. 한 발자국씩 걸어갈수록 한기가 짙어졌다.

"춥네." 그가 중얼거렸다.

"춥지." 놀랍게도 오른쪽에 서 있던 경호 요원이 대답을 해 주었다. D-3203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 왔다."

왼쪽의 경호 요원이 감히 D계급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동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D-3203을 반쯤 걷어차며 말했다.

D-3203은 철창 앞에 섰고, 경호 요원이 자신의 키카드로 문을 열었다. D-3203은 한 번 더 차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식사는 오전 8시고, 네 약도 그때 준다. 요강은 안에 있고. 기타 사항은 야간 근무 경호 요원한테 부탁해라. 내일 이 시간대에 간단한 검사를 한다니까 준비하고 있어. 알겠냐?" 왼쪽의 경호 요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때까지 제가 얼어 죽지 않으면요."

D-3203이 이를 딱딱거리며 대답했다. 왼쪽 경호 요원은 그에게 어떻게 쏘아붙여줄까 고민하는 듯하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돌아섰다. 오른쪽의 경호 요원도 따라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D-3203은 최대한 온기를 보존할 수 있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매캐한 공기 때문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난 따뜻해, 난 따뜻해, 난 따뜻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마음가짐에 따라서 몸의 온도를 0.5도 정도 바꿀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D-3203은 집중해서 주문을 외웠다.

난 따뜻해, 난 따뜻해, 난 따뜻…

위잉.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D-3203은 눈을 떴다.

소리의 근원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바깥쪽 어딘가에서 더운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전기 난로라도 켠 모양이었다.

"딱 봐도 그 노부인이군." 그는 중얼거렸다.

D-3203은 온기의 미풍이라도 얻기 위해 철창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굴을 철창 사이에 넣고, 손을 밖으로 내밀자 몸이 조금이나마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단, 앞쪽만.

그 상태로 5분쯤 있자, 엉덩이와 등을 포함한 뒤쪽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졌다. D-3203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등을 철창에 기댄 자세로 바꾸었다.

D-3203은 다시 눈을 감고, '나는 따뜻하다'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정수리를 스치는 따뜻한 기운이 포근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몸 앞쪽이 차가웠다. 손가락과 발가락들이 묘하게 가려웠다.

D-3203은 눈을 감은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잠에 들기까지, D-3203은 약 4시간 동안 앞과 뒤를 바꾸어 가며 철창에 붙어 있었다.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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