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상 랩소디

  • 평가: +7+x

옛날 옛날 어느 곳에 한 작은 시골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권력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적당한 때 비가 오고 적당할 때 해가 뜨는 것이 중요했죠.
돈은 부족하다며 아쉬워하고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비료며 농기구 값 때문이지, 벼락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가족들과 함께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걸 이룰 기술을 배우기에는 까막눈에 무지렁뱅이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곡식이 잘 여물기를, 소가 새끼를 많이 낳을 수 있기를, 뭐 이런 것을 말이지요.
신기하게도 그렇게 진실된 마음으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고는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벼락부자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마을 사람들이 풀 뿌리를 캐어먹을 때 그들은 잡곡밥이나마 먹을 수 있었지요.
그들은 그 신의 자비에 항상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신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래서 그는 유독 자신을 따르는 아이에게 힘의 일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앞으로 이 아이와 후손들을 자신 보듯 하라고 당부했지요.
사람들은 그 말 대로 아이에게 신의 이름을 붙이고는 애지중지했습니다.
아이도 그 사랑에 적극적으로 보답했고, 마치 신처럼 마을을 돌봤지요.
힘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들의 후손 역시 널리 사랑 받았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자기네들의 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들이 집을 잃고, 운이 없으면 나아가 이름까지 빼앗기고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상관 없었습니다.
그곳은 무지렁뱅이들의 깡촌이었고, 소문은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신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유난히 영특한 그 소년은 그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신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마을을 수호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잠깐 마을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들은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까지고 닫힌 사회에서 살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신의 영광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소년이 보는 세상은 그들과 달랐나 봅니다.


이박하 요원은 도통 신이란 것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무신론자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달콤한 말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이 있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의 가족이 신에게 기도 드리는 모습, 자신에게도 기도하라고 부추기는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런 거, 구시대적인 무식한 소리야, 라고 오랫동안 생각했건만 지금 일하는 곳에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일하는 곳 자체는 거기에서 한 걸음 멀어진 곳이지만 그에 대한 소식은 그런 물리적 거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밀하게 퍼져 있었다. 저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곤란한 일이지만, 적어도 내용은 그에게 있어서는 꽤 유용했다.

그러니까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런 거 왜 믿냐'가 아닌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에 가까웠다.
신이란 존재는,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분명 개자식일 것이었으니까.

얘야, 핫카야,

"그건 조금 너무 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꼭 이런 대답이 온다. 이제는 익숙하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는 조용히 전자 담배를 켰다.

신이 있어도 범죄는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로봇도 아니고 사람의 자유 의사는 신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그것을 법이며 도덕 교육으로 막는 것은 인간의 의무요, 그렇게 하더라도 죄를 저지를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단순한 악의든 안타까운 사유든 상관 없이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한 그건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러면 그에 대한 댓가는 치뤄야 하지 않겠는가.
신이란 것은 그가 내뿜은 전자 담배 연기보다도 해롭다.

수백억을 횡령한 사람보다 몇 천원을 횡령한 사람이 더 심한 벌을 받는 것은 이상했다.
범인의 미래가 피해자의 망가진 인생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이상했다.
신이 의도한 것이라면 그는 틀림 없는 악질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웃기지 않은가.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런 이유야. 변변찮은 이야기지."

그는 다시금 담배를 물고, 연기를 빨고 내뱉었다. 니코틴이 피에 짝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상념을 지우기에는 최적이었다. 신에 대한 얘기는, 담배 연기 없으면 하기가 힘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동료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넌 무슨 담탐에 철학책을 들고 오냐. 무슨 그 프랑스 과학쟁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니지. 그놈들은 무신론자잖아. 그리고 과학을 숭배하고. 미치광이인 시점에서는 그게 그거지. 것보다 사피르에 대해서 아네? 다른 애들은 모르던데."
"나도 그냥 소문으로 들은 거야. 우리가 재단처럼 거창한 놈도 아니고, 그 자식들이 한국에서 뭔 지랄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사피르에 대한 소문이라면 그 일본 아키하바라 한복판에서 사피르 건물이 홀랑 다 탄 사건 때문이겠지. 사건 자체는 (아무래도 재단이 개입해서)묻힌 모양이었지만 옛 말에 낮 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피르가 얼마나 미친 놈들인지 모르는 것을 보니 사건에 대한 정보도 진짜 말 그대로 수박 겉 핥기 수준일 것이다.

그는 적어도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이사나기 링고日奉林檎. 이사나기. 이사나기.
그는 담배를 다시 물었다. 기분이 엿 같아졌다.

"것보다 거기까지 따지는 거냐? 니가 무신론자가 아니면 넌 뭔데?"
"반신론자. 존재하는 신에게 중지손가락 날리는 사람."
“철학자 납셨네. 난 이과라고."
"알게 뭐야. 나도 학교에서 배운 거 그냥 막 던진 건데."

방재원의 신입 요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여기서 벌써부터 별명이 '철학자'니 '반신론자'니로 붙여지면 골치가 아팠다. 그는 가늘고 길게 은퇴까지 가고 싶었다. 솔직히 초상 사회를 알고 있으면서 재단이나 연합이 아닌 방재원에 온 사람의 60%는 그런 안전한 철밥통을 원해서일 것이다. 나머지 한 30%는 뭔 사명을 가지고 온 놈이고, 그런 놈은 보통 먼저 마음이 꺾인다. 결국 안전제일이 사회를 구하는 것이다.

"얘야, 절대 잊지 말거라. 우리는 언젠가 신에게 돌아가야 해."

“뭐. 그냥 그렇다고. 담배나 계속 피자."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본다는 말이 있었다. 신이란 것을 떠올리면 저절로 좋지 않은 기억도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뭐. 상대도 궐련을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퍼졌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용에게는 아홉 자식이 있다고 했다.
주홍빛 비늘이 사랑스러운 용에게는 세 자식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따 그는 자식에게 이름을 주었다.
키츠(橘), 분탄(文旦), 쿠엔(枸櫞)
그들에게도 신의 축복은 있었다고 했다.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그들의 축복은, 그 누구도 그들을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게 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연구를 위한다며 홀연히 떠난 이후로 그들은 오랫동안 마을에 머물렀다. 아버지를 대신해 마을을, 어머니를 지켜왔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름대로 나무였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들의 축복은 사라졌다.

어째서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징조도, 예고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머리 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맑은 기운이 사라지고 머리가 혼탁해졌을 뿐이었다. 얼핏 보면 그저 시대가 혼탁해 번뇌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신은 이들 형제를 버렸다는 것을.

그들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현인신으로 불려왔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천동부터 신관까지, 그들이 배워왔던 것은 오롯이 마을을 수호하기 위한 기술 뿐이었다. 그들은 제 아비처럼 영특하지도 교활하지도 못했기에, 그들의 삶은 그 방향으로만 줄곧 설계되어 왔었다. 그런 와중에 신은 그 자격을 빼앗아 갔고, 매정하게도 이를 대신할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금기를 어겼던 것인가, 그 누구도 이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 형제는 어미를 데리고 떠났다. 버림 받은 것은 그들 뿐, 마을 사람들은 죄가 없었기에.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둡다 할 지언정 그들은 어리석지는 않았다. 마을에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그들이 모든 것을 알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을의 균형이 일그러질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를 따르는 가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망치는 것이 최선 아닐까.

한 명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무엇이 신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은총을 주었고 또 빼앗았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도시로 갔다. 그곳에서는 옛 무녀와 신관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그저 지식과 과학을 숭배했다. 그는 그곳에서 이것저것을 배웠고, 후손들에게 이를 알렸다. 잃어버린 그들의 영광과, 도시에서 필요한 사고 방식과,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려면 해야 할 것들을 말했다.

한 명은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을 섬기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현인신 노릇하던 시절로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에게 빌어야 했고, 자신들이 지은 죄를 갚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제 아비가 간 길을 따라 갔다. 모국을 떠나 타국의 한 시골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행하였다. 한편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는 기도했다. 끝 없이 기도했다.

한 명은 그저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신이었던 자, 그리고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전혀 오지 않는 자를 원망했다. 어째서 그들은 비참하게 쫓겨나야 했는가, 또 어째서 그 아이의 후손은 다른 마을에 더 있는데도 자신들만 추방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그는 어미만을 데리고 오갈 곳 없이 헤매었다. 머문 곳에서 필요한 일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그리고 옛 추억을 그리워하는 어미를 보며 안타까워 했다.

그렇게 저주 받은 피는 마을을 떠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 모든 것이 동해 바다에 이 승천한 결과라는 것을 알 자는, 이제는 한 명 뿐이다.


기나긴 설 연휴도 끝나갔다. 올해는 마침 화요일이 설이어서 주말까지 낀 예쁜 모양이 나왔다. 다음 해는 설 연휴 하나가 손해 보는 구조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올해가 더 간절했을 것이다. 물론 초상 사회는 연휴라고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몰리면서 심해지면 심해졌지.

"이놈의 예술가들은 설날이 뭔지 모르나? 쉬엄쉬엄 하자고."
"이럴 때 보이는 풍경이 영감을 주는 거 아냐? 다들 귀성이니 휴가니 뭐니하면서 서울을 우르르르 빠져 나가잖아."
"어쩌면 날백수라 내려갈 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공무원 실격 발언인가?"
"너어는 진짜."

하지만 방재원도 어쨌든 국가 기관이다. 연휴 기간에 일하면 보너스는 넉넉히 챙겨준다. 그래서 이렇게 다들 억지로라도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야, 박하야."
얘, 핫카야.
"네?"
"너는 안 쉬냐? 적당히 좀 해. 몸 축나겠다."
"괜찮습니다. 이것만 하고 가겠습니다."
"짜식. 귀찮은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도 일은 또 잘 해요."
"승진하겠네. 승진하겠어. 나중에는 우리 상사 되는 거 아냐?"

글쎄요. 재단에게 워낙 한국의 인재를 많이 뺏겨서 못할 것은 없겠네요. 역사가 매정했다. 왜 잘못을 한 건 윗 세대인데 물려 받는 기술은 하나 없이 불이익만 방재원이 다 받는 것인가. 하다못해 개인이었으면 상속 거부라도 가능했을텐데.

"그건 그렇고 너는 고향 어디냐? 얘기 좀 해주라."
"…"
"왜. 명절이잖아. 얘기할 수도 있지."
"…"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해서란다. 절대, 절대 잊으면 안 된단다, 얘야…

이박하 요원은 고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산골짜기 한 구석에 쳐박혀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한국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빌딩 밭 아니면 산 아니겠는가. 그리고 산은 아무래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봄이든 가을이든 모습을 바꿔 가면서 마음을 달래주는 곳을 굳이 그가 싫어하지는 않았다.

부모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부모 모두로부터 그는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래서 비슷한 나이대인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시시때때로 연락하고 지냈다. 빨리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생각하는가. 공무원의 월급과 너무 차이 나는 서울의 집 값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가 고향이 싫은 것은 그저 지지리 궁상인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두들겨 맞았다던가 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신을 찾았고, 가족 모두가 죄인이라 했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기도를 올리거나 명절 때 뭔 요상한 걸 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게 하다못해 굿질이었다면, 적어도 한국 시골에 어울리는 것이었으면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일본 사람이었다. 대체 뭔 이유인지는 그도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광복 끝나고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바다 건너까지 와서 그 전쟁통에 휘말린 건지.

아무튼 할아버지는 시골로 향했고, 거기서 그럭저럭 섞여 들어갔다. 당시 마을에는 서글플 정도로 일손이 부족했고, 농토는 비참할 정도로 비옥했다. 동족을 괴롭혔던 쪽발이라며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공산당 빨갱이보다는 나았다. 그는 그곳에서 묵묵히 땅을 갈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신의 노래를 읇조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자식과 손자에게 식물 이름을 주었다. 그의 선조가 그랬듯이, 그들은, 용서 받지 못했을 지언정 신의 나무가 되어 그의 밭에 심겼다.

무슨 이 씨인가요.
일봉 이 씨입니다.

이박하 요원은 한국인이었다. 비록 그의 할아버지는 그를 꿋꿋하게 이사나기 핫카라 불렀지만, ¾ 한국인 피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그는 자랐다. 미소국보다는 된장찌개가 더 입에 맞고 하루에 한 번은 김치를 먹어야 했다. 일본어는 워낙 예전부터 들어서 익숙했지만 제2외국어 이상의 인상은 크게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사나기님은 너무 막연한 존재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의 인생을 좌우한 것은 성적과 돈과 실적이지 신은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애초에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니, 신이란 자가 자기 인생에 뭔가 크게 저지르긴 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처럼 장막 속의 일상을 즐기지 못하고 지금 여기서 뺑이쳐야 했다. 그의 과거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일본인 출신이라 생각했다. 그나마 정상 사회에서니까 일본인으로 끝났지, 이제는 성 단계에서 따져야 했다. 중정국이고 이사나기님이고 그게 그거다. 빚만 있는 대로 지우고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이 싫었고,
얘, 핫카야,
세상 돌아가는 꼴이 싫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단다.
이구연 할아버지가 싫었고,
세상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돌아간단다.
무엇보다도,
그러니 얘야, 나의 아이야,
모든 일의 원인인,
를 위해 희생해다오.
이사나기 코우지가 싫었다.


명천구는 컴컴하다. 괜히 명천구(鳴川區)가 명천구(冥天區)인 것이 아니라고 그는 그렇게 마음 먹은 지 오래였다. 물론 컴컴하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은 정말 구석구석까지 병들 정도로 밝았고 지정주시위치지만 다른 차원은 아닌 명천구도 이 점에서는 다를 것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 사는 예술가들이 보통내기겠는가. 저마다 자신의 예술품을 뽐내려고 작정했고, 적절하게 설치된 조명도 그런 장식 중 하나였다.

이곳의 미래가 어둡다 보기도 힘들었다. 어쨌든 여기 명천구는 정부가 정식으로 관리하는 곳이고, 그들도 그들의 방식으로 반성하고 있다. 방재원은 뭔 이상한 조약 때문에 권리가 막힌 거지 그 자체가 약해 빠진 것도 아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던 것 같은 대참사는 어지간하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두운 것인가? …모르겠다.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예술가들 간의 차별과 모순인가? 아니면 이곳이 일반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사실 그 자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자신의 혼탁한 눈으로 본 환각인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의 분위기는 텁텁하고 무겁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고인 듯한, 늪 속을 헤엄 치듯이.

그곳에서 그는 일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여기가 방재원이 관리하는 곳이었고 그가 지망하는 곳이 딱히 없어 여기 배정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 일이 싫지는 않았다. 일단 칙칙하면서도 떠들썩한 이곳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기서는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나지만, 무진에 비하면 적어도 목숨을 걸 일은 적기도 했다.

"오늘도 힘들었지요. 이거라도 드십쇼."
"아, 감사합니다."

뭣보다 사수 운이 꽤 괜찮았다. 그의 사수인 탁재헌 요원은 일도 성실히 했고, 자신도 그랬다며 후배들을 잘 챙겨주었다. 신입 시절부터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과 얽혔다던가, 웬 괴물 딱지에게 휘말렸다던가, 이런저런 경험담도 많았다. 덕분에 꽤 많은 생존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고.

"…선배님 것은요?"
"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저쪽 빵집에서 오늘도 수고한다며 주었습니다."
"거기 좋지요. 커피도 거기서만 마시고… 조만간 고맙다고 얘기해야겠습니다."
"정말 고맙지요. 요원이라며 이런 서비스도 주는 곳은 명천구에서는 거기가 유일하니까 말입니다."

다만 인상이 조금 희미하긴 했다.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그가 바로 옆에 있어도 눈치 채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 경험에 높으신 분들 눈에 거슬릴 행동도 하지 않는 이상 원래라면 진작 더 좋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오죽하면 아예 그런 성질 아니냐는 말도 농담 삼아 있을 정도니. 자신은 신참이라 잘 모르긴 하지만, 어쩌면 다른 요원들은 그 빵집 외에서도 이것저것 챙겨먹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요즘 상황 돌아가는 것이 조금 이상하단 말이지요."
"네. 원래는 이 시기에는 공모전 같은 것들이 적어서 작품도 잘 투고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군요."
"아니, 그 얘기가 아닙니다."

자료대로 말했지만 바로 반박당했다. 모두가 그걸 노리는 건 아닙니다. 다음 전시회에 낼 작품을 선행 공개하는 경우도 있고, 그냥 취미나 연습용 작품도 많이 나오죠. 그렇다면 그가 의도한 정답은 무엇일까. 확실히, 조금 거리를 두고 보자 그제야 눈에 띄였던 것이 있었다.

"소재…가 이상합니다. 요즘 들어 한 곳에 다들 꽂힌 느낌입니다."

생각해보니 신을 소재로 한 변칙 예술품이 너무 많았다. 물론 신화는 옛날부터 정상 초상을 가리지 않고 창작의 소재로 사랑 받곤 했다. 하지만 초상 종교의 신이 인기를 끈 적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뭐, 메카네처럼 워낙 유명한 신 정도면 이상할 것도 없고, 구오의 신도처럼 꾸준하게 선교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문제는 이걸 만든 작가들은 이전에는 그쪽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네. 여러 비주류 종교의 신들이 명천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죠. 음악에서 시작해서 이제 미술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곤란했다. 그는 까마귀 조각을 노려봤다. 구오, 라고 했나. 이대로 유입이 늘어나면 기존에 견제하고 있던 조요의 인도자가 날뛸 것이다. 아니, 그건 차라리 대비라도 할 수 있으니 양반이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이름 모르던 신들이 명천구에서 자신을 알리려고 손을 쓸 수도 있다.

갑자기 예술계에서 무허가 운동이 재유행이라도 한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적극적으로 이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은 최신유행을 잘 따르는 키치였다.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세력은 자기 개성을 살리기에 바빴다. 무허가 운동이 기존 질서를 반대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뭔가 이상했다.

"애초에 이게 처음 시작한 것부터가 쇼츠 영상이었고 말입니다."
"네? 유튜브 쇼츠, 틱톡 같은 것 말입니까?"

탁재헌 요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바로 삭제했지만 상황이 요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게 사수의 말이었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행이 그렇게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이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담담했다. 여기서 동요해도 좋은 거 없다는 것을 안 걸까. 하지만 사수와는 달리 이박하 요원은 그렇게 침착하게 넘길 수 없었다. 그는 신이 싫었다. 오만 신이 범람한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말한 신이 올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 도움 하나 안 되는 이사나기님이.

"알겠습니다. 경고 감사합니다."

알 게 뭐야. 그렇다고 그는 이제 와서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사나기 핫카가 아닌 이박하였으니. 만약 명천구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면, 그가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국가초상방재원 요원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모자 쓴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마치고 귀가한다. 화가 하나가 이를 대체하듯이 캔버스를 편다. 저들도 이런 숭상 랩소디에 휘말린 걸까? 지금의 그는 알 수 없었다. 특이한 외형을 제외하면 이런 피아니스트는 명천구에서는 흔했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따지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 예술 기조를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뿌연 느낌이 마냥 그는 싫지는 않았다. 그저 월급 타 먹는 것에 만족하던 반신론자는 처음으로 사명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운명 따위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

그 의지에 공명하듯이 사수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으음."

한 마리 용이 구슬을 돌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구슬은 돌릴 때마다 풍경을 바꿔가며 빛나고 있었다. 이게 원래 누구의 힘이었던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다 자신인 것을.

꽃기린을 지키는 아이가 있었다. 그를 자신으로 만들려던 것을 방해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구슬은 의욕 없던 아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특별하게 재미 있지 않았던 외국의 그 아이.

"오, 신들의 싸움이라…"

하지만 지금은 조금 얘기가 달랐다. 비주류 신들 사이의 경쟁전이라! 그는 명실상부 그 위치에 올랐고, 더 높은 곳을 보고 싶었다. 그 상태에서 새롭게 먹어 치울 신들을 찾을 수 있다는 이 말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숭배의 힘도 제법 탐이 났다. 용신과의 싸움으로 입었던 부상은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그에게 신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이름을 알리면 기력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슬슬 장기말을 쓸 때가 되었군."

주홍빛 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재미 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듯이.


⚠️: SCP 재단의 모든 콘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