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제21K기지의 취조실, 무거운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두 사람이 방 안에서 들어와 앉았다. 남자는 볼펜으로 메모지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곧 휴대용 녹음기를 틀었다. 남자는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었지만, 형식적인 절차를 지키고자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정보부 소속 김진섭 요원입니다. 슬슬 심문을 시작하게 될 텐데, 그 전에 질문 있습니까?”

요원 김진섭은 반대편에 앉아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는 남자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남자는 검은색 후드같이 생긴 얼굴 가리개를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 행색은 제21K기지, 아니 어떤 기지에서도 보기 힘든 행색일 테다. 남자의 가슴팍에 부착된 하얀 재단 심볼만이 남자가 본래는 재단 소속이었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질문은 없습니까?”

“…맘대로.”

“뭐라고 했습니까?”

김진섭의 물음에 남자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맘대로 하라고.”

남자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김진섭은 남자가 얼굴에 방독면을 쓴 걸 보았다. 방독면의 정화통에선 김 같은 하얀 기체가 뿜어져 나왔고, 렌즈는 빛을 내고 있었다. 김진섭은 그 모습에 놀랐지만, 겉으로는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없는 거로 알겠습니다. 그럼 심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일호.”

그는 검지에 침을 살짝 묻히곤 심문 이전에 제공 받았던 파일들을 차차 넘겨나갔다. 이 파일에는 남자의 인적 사항을 비롯한 여러 정보가 담겨 있었다.

“배일호, 당신의 가장 최근의 기록을 보아하니 제10K기지 이사관이었다고 나오네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기지 이사관이 되고, 뛰어난 성과를 자주 보여왔고, 동료 직원들과도 두터운 연이 있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김진섭은 배일호의 정보를 당사자에게 차차 설명했다. 심문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그럼, 뭐. 상부에서 제공한 기록이 틀렸다고 생각하냐?”

"아뇨. 그저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배일호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김진섭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표정은 온화했지만, 김진섭은 속으로 그를 욕하고 있었다. 배일호는 지금까지 자신이 심문한 사람들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이런 자들은 캐려고 할수록 더욱 거칠게 나오는 면이 있었다.

김진섭은 문서에 기재된 정보를 보고는 읊었다.

“이거 최근 일이네요. 제10K기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기지 내 상주하던 전체 인력 178명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시체는 당일 전부 회수했고, 실종자는 한 명뿐이었죠. 시체 중에는 신원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신체가 훼손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배일호, 당신은 그나마 온건히 장례를 치를 정도로 깨끗한 편이었죠.”

김진섭은 한 문서의 내용을 전부 읽어 말한 뒤, 페이지를 쓱 넘겼다. 곧 새로운 정보들이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 그는 그 정보들을 머릿속에 나열한 뒤, 정리했다.

“그 사건이 지나고 3일 뒤쯤에, 시체 안치실에 안치된 시체 한 구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실종이 아니고, 완전한 소실이요. 그 안치실은 안에서는 절대 나갈 수 없게 방범 처리가 되어 있었거든요. 그 시체가 누구냐 하면, 바로 당신이에요.”

"넌 네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문서의 글자를 더욱 신용하냐? 소실? 웃기고 앉았네. 내가 지금 어딨는지 보이긴 하냐?”

배일호가 움찔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김진섭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곤 어떻게 말을 이을지 생각했다.

단어가 정해지자,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소실하고, 5일 뒤. 제10K기지 지하층에서 이상 신호가 잡혀 현장팀을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하층 A동에는 배일호, 당신이 있었죠. 그것도 아주 이상한 꼴을 한 채로요. 지금 당신처럼.”

김진섭은 다음으로 말할 거리를 생각했다. 심문 이전에 상부에서 요구해둔 질문 사항이 있었다.

“그 5일간,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해주시죠.”

“…노코멘트.”

“…네?”

“노코멘트하겠다고. 영어도 못 알아듣는 건가. 참나…”

“이유가 뭡니까?”

“불리한 진술은 회피하겠다고. 원칙에 따라 침묵하는 거잖아 지금. 댁들이 알면 큰일 날 게 분명할걸.”

그 말을 끝으로, 배일호는 더 이상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김진섭은 한숨을 푹 내쉬곤, 입을 열었다.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배일호, 지금 많이 심심한 것 같으니 옛날얘기를 하나 해볼까요?”

“들어는 주지.”

김진섭은 배일호가 몸을 약간 떠는 걸 보았다.

"제가 정보부에서 일한 진 어언 12년 정도가 됐습니다. 저의 주 업무는 구속된 요주의 인물과 재단의 내부 인물을 심문하고 정보를 캐는 일이죠. 전 이 일에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절 거쳐 간 사람이 500명은 족히 넘겠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10년 전 정보부가 어떤 곳이었는지 아십니까?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그 당시 정보부는 이름만 정보부지, 심문 같은 건 하지 않았거든요. 대신 공구를 지금 받았어요. 뭔 얘긴지 아세요?”

"그래서, 1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거야?”

"아뇨. 그건 옛날 일이니까요. 그 방법은 이제 너무 구식이죠. 지금은 변칙의약학부에서 제조한 특수 약물을 제공 받아요. 그걸 주사하기만 하면, 아무거나 다 실토하게 만드는 효능이 있죠. 자백제 비스무리하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요.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개조해서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인형으로 만들거든요.”

짧은 정적. 허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윤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약물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했지만, 겉으로만 그래요. 지금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을 금하지만, 그 약물은 잘 쓰이고 있죠. 효과가 직방인데, 굳이 안 쓸 이유야 없지 않겠습니까?”

"…결론이 뭔데.”

"왜 이전보다 자주 쓰이지 않는지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심문을 받는 사람들은 대개 안 좋은 사건에 휘말린 자들이 대부분이라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여요. 그런 걸 PTSD, 외상 후 스트레스라 하죠? 상부는 대상자가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할수록 부작용이 심해진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용을 줄인 거죠. 근데 당신은 그런 부류가 아니잖습니까. 그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천차만별인데.”

김진섭의 몸이 굽어졌다. 그는 배일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들고 있던 펜을 배일호를 향해 들이밀었다. 그 몸짓은 대단히 노골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처신 잘하세요, 배일호. 예? 당신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다는 걸 안 이상, 저흰 언제든지 그 약물을 제공 받을 수 있고, 당신에게 투여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부작용의 정확한 발생 원인은 의약학부조차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상부가 멋대로 기준을 짓고는 제공할지 말지만 결정하는 거죠. 당신에게 부작용이 생길지 아닐지조차 운이라는 거에요. 평생을 그렇게 살기는 싫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정보부에서 그런 약물을 제공 받는단 얘긴 듣도보도 못했거든? 지랄염병도 적당히…”

김진섭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배일호. 원래 당신은 변칙개체로 이송될 예정이었던 거 아십니까?”

“…뭐? 변칙?”

김진섭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사람다운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남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다.

“당신의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주 가관이더군요. 뇌와 심장, 그리고 폐를 제외하면 다른 장기들은 모두 소실된 상탭니다. 원래 장기가 위치한 공간에는 변칙적인 성분의 가스가 가득하고요. 그뿐입니까. 온갖 벌레들이 당신의 몸속에 기생 중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나비와 나방, 거미, 지네, 사마귀, 메뚜기… 곤충 테마파크가 따로 없어요 이게.”

김진섭은 배일호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는 남자가 쓴 방독면의 렌즈 너머로 무언가 꿈틀거리던 걸 보았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질끔 감고 다시 떠보니, 그건 사라져 있었다. 단순한 허상이었다.

“그만, 그만해 이 씨발! 지랄도 정도껏 해!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지금 사람 몸이 어쩌고 저째? 벌레? 변칙개체? 씨이이발, 가당찮은 소리—”

울부짖듯이 소리치는 배일호를 보며, 김진섭은 돌연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의 꼴이 멀쩡한 사람처럼 보입니까? 방독면을 쓰고, 가스나 뿜어대는 그 모습이요? 참나, 그럼 말씀해주십쇼. 적당히 심문에 응하시면 될 거 아닙니까. 지금이게 설득 같아 보여요? 원래라면 당신은 바로 격리되었을 겁니다. 이딴 심문도 필요 없었겠고요.”

“그게, 씨발.”

배일호는 욕지거리만 내뱉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김진섭은 엇나간 감정을 추스르곤, 다시 심문을 재개했다. 그는 다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배일호, 당신은 말하면 됩니다. 그냥 말하세요. 지금처럼 계속 입 다물고 버팅긴다면, 저흰 당신이 사람인지 벌레인지 뭘 보고 판단합니까?”

한순간 들끓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김진섭은 자신의 어깨에 지독히도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는 걸 느꼈다. 배일호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배일호, 이 자리는 단지 당신을 심문하기 위해 마련해둔 자리가 아닙니다. 재단이 당신을 아직 신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김진섭은 착용 중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초침은 4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 드리죠. 그때까지 결정하세요. 그리고 말하세요. 자신에 대해.”

그리 덧붙이며 김진섭은 말을 끝냈다.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지독할 정도로 냉혹했다.


3분의 시간. 김진섭이 착용한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울려댔다. 매우 작은 소리이나,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어코 시간이 날 잡아먹는구나.'

배일호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시간에 엄격한 면이 있었다. 내일까지 해야 하는 업무를 받았을 땐, 그날 밤새 처리했고, 약속 시각에는 세 시간 일찍 나오는 면이 있었다. 그는 시간이란 개념에 지나친 강박 증세가 있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기에, 특히 더 그랬다. 그의 이러한 점은 가정에선 단점으로 작용했지만, 일터에선 장점이 되어주었다. 그가 이사관이 된 것 역시도, 이러한 강박증 덕이 컸다.

째깍째깍. 생각할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지금 도대체 몇 초가 흐른 건지. 아마 1분은 훌쩍 넘기지 않았을까.

어쩌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배일호는 알지 못했다. 배일호는 자신이 했던 모든 과오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땐 그저 작은 연구였다. 새로운 외부차원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때의 나를 말렸어야 했다. 죽여서라도 막아야 했다. 후회가 가슴을 후벼팠다. 이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랬다.

그걸 알아내서는 안 됐다. 알아내더라도 더 깊이 바라보려 하면 안 되었다.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1분이 1초 같았다.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도 전에,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사건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내일까지 내야 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연구원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을 땐, 그는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기동특무부대를 불렀으나, 그들은 이미 전멸한 상태였다.

직원의 절반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는 무릎을 꿇고 절망했다. 더 이상 달릴 힘이 나지 않았다.

뒤이어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을 땐,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은 죽었다.

하지만 지금.

그때 죽었어야 할 자신이, 지금 이 땅에 서 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자각했지만, 배일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기억을 되뇌고 되뇌어도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이 없었다. 죽기 직전과 다시 깨어난 후의 상황. 두 기억을 이어주는 한 마디가 깔끔히 잘려나갔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괜한 꺼림칙함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라진 기억은 희미하긴 하지만, 단편적으론 존재했다.

기억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뿌연 안개처럼 흐릿하며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 평생 본 것 중에 가장 두렵고 괴리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존재가 무엇인지 완벽히 떠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두꺼운 벽이 그와 그것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존재는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배일호는 그 때문에 혼란스럽고 미칠 지경이었다.

“1분 남았습니다.”

김진섭의 말이 생각을 끊었다. 배일호는 김진섭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의 표정은 무표정하고 공허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볼 땐 어딘가 추악한 것을 들춰내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는 그 모습이 싫었다.

어째서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짓는지, 나와 너는 똑같은 인간이지 아니한가. 그는 어째서 자신이 변칙개체 취급을 받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두뇌는 이해했으나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가 소용돌이치고, 혼란이 더욱 가중될 때.

그때였다.

[알고 싶은가?]

누군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배일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도, 불투명 유리창 뒤에서 지켜보는 자들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니, 정말로 시간이 멈췄다. 김진섭은 몇 초가 지나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가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았다. 볼을 꼬집어도,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싶어 배일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묻는다, 알고 싶은가?]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를 평가하자면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그 속에는 내재된 장난기가 느껴졌으며, 동시에 무언가 스멀거리는 불길함이 존재했다.

그래, 이 목소리는 마치 도려낸 기억을 떠올릴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야.”

[너의 오랜 친구지, 작은 벌레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귀에 익은 목소리다. 하지만 누군진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배일호는 고개를 돌려 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난 바로 네 앞에 있단다. 이렇게 거대한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니, 시력이 안 좋은가 보구나? 내가 네게 준 것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나?]

그의 시선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멈췄다. 원래 김진섭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더는 김진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 배일호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천들이 나풀거렸다.

[이런, 크기를 줄여야겠는데.]

그것이 말을 했다.

그 거대한 짐승의 몸이 한 차례 바뀌었다. 그것의 크기가 아이 수준으로 작아졌다. 그와 동시에 몸이 꺾이고 접히더니 인간과 같은 형태로 변했다. 주변에 나풀거리던 천들이 움직여 그것을 감쌌다. 그러자, 그것의 형상이 더 구체적으로 변화했다. 이내 그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미소지었다. 그렇다고 느꼈다. 그것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지만,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마치 커다란 베일이 그것의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또 말이야.]

소년, 혹은 소녀의 모습을 한 짐승이 그리 답했다. 모습은 바뀌었더라도 그 상냥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뭐요?”

배일호는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퍽 당황스러워 무심코 말을 흘렸다.

[왜, 믿지 못하겠는가?]

“아니. 잠깐. 웬 놈이 시간을 멈추고 자길 믿으라고 다짜고짜 들이대면, 믿을 수 있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이거 좀 섭섭한데. 분명 네 입으로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낱 초파리들도 은혜를 입으면 갚는다. 검은 숲 외부의 존재는 이토록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가? 안타깝구나.]

눈앞의 존재는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배일호는 저것의 몸짓이 그저 시늉이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그 모습이 굉장히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인사가 늦었네요. 그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뭐,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너를 도와주러 왔지.]

그것은 배일호의 질문을 무시하곤 저 혼자 딴소리를 했다. 배일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 같아선 한 마디 더하고 싶었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 보자. 너는 이제 곧 처분될 상황이더군.]

“처분이요? 저 격리 당할 예정인데요.”

[기만과 속임수로 연명한 것들을 믿는가?]

배일호의 말에 그것이 조소를 내비친다. 그것의 입과 동공에서 무지갯빛을 내는 검은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왔다. 그는 그 속에서 거대한 아귀의 모습을 보았다. 아귀는 몸의 체액을 분출하면서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너는 곧 처분될 거야. 저들이 준 3분을 네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너의 무고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저들은 너에게 차가운 탄환을 머리에 박을 거란다.]

“씨발.”

배일호는 웃는 낯짝의 그것에게 보란 듯이 반박하고 싶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는 재단이라면 진짜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리되더라도 내가 알아서 처리해줄 수는 있지. 가령 저들 모두가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게 만들 수도 있어. 하지만 그리한다면 다른 놈들이 곧 쫓아올 터. 여기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

“하지만 전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딱히 말할 게 없는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아, 내가 그리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정녕 누군지 궁금하다면, 그냥 너의 오랜 친구라고 해두지. 우린 분명 연이 깊은 것들이야. 더 단순히 말하자면, 넌 내 관심을 받았지.]

그것이 말을 끝냈다. 배일호는 어느 순간 방 안이 어두워지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감싸던 베일이 휘광을 내뿜었다. 오색찬란한 조명들이 칠흑 같은 방안을 밝혔다.

이내, 장소가 바뀐다. 그것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그것의 웃는 모습이 퍽 아름다우나 동시에 불쾌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만 제대로 따른다면 멀쩡히 나갈 수 있게 해주지. 내가 질문한다면, 너는 거짓 없이 답하라.]

그것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위압감이 넘쳤다. 말을 내뱉을수록, 배일호는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몸이 떨려왔다.

인정하긴 싫지만, 자신은 변했다. 눈을 뜬 직후부터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요원들이 총기로 위협할 때도, 신체검사를 하면서 보인 의료진들의 강압적이고 냉랭한 태도에도, 김진섭의 협박에도. 그 모든 상황을 겪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두렵다기보다는 황당했다.

그렇기에, 그는 점차 변해갔다. 이제는 예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내뱉는 말들은 점점 조심성 없어지고, 경박해져 갔다. 뒷일을 두려워하는 과거의 자신과 달리, 이제는 그런 자각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재미없는 장난이나 쳐댔다.

사라졌던 두려움이 다시 느껴지는 순간은, 저것과 대면하면서부터였다.

그건 본능과도 같았다. 벌레가 지니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엇을 답하면… 됩니까?”

배일호가 말했다. 조금 전부터 정중하게. 그것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그것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너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 말했다.


“좋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김진섭은 녹음기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일호는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김진섭은 그 모습을 쓱 쳐다보고는, 그대로 취조실을 나갔다.

“후 씨발.”

배일호는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미치겠다.”

지금 상태를 표현하자면, 감히 제정신이라곤 할 수 없을 테다. 정말 폭풍이 지나갔다.

그는 그것, 혹은 소녀의 질문에 모조리 답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답했다. 세세한 것부터, 쓸데없는 것까지 각양각색의 질문이 있었다. 그는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면서도 가장 최적의 답을 내놓았다.

그리하니 심문이 끝나 있었다.

이게 당최 뭔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모든 질문이 끝날 때, 그것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당시 일호는 질문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기 때문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나를 부르는 이름은 아주 많지.]

그 후 그것은 긴 시간을 고민하고는 말을 꺼냈다.

[이 주변의 것들은 나를 혜성 구름, 오르트라고 부르지. 또는 수집가라던가.]

‘아, 그래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대단한 거라도 수집하는 모양이죠?’

[그래. 아주 멋진 수집품들을 진열창에 세워 놓았지.]

그것은, 이내 희미한 잔상으로 남았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땐 더 오래 남아 있을 거다. 기다리거라, 수집품아.]

그것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냐 이제.”

심문은 잘 마무리된 듯했으나, 앞으로 할 일이 문제였다. 살긴 산 것 같은데, 좀 많이 불안정했다. 상부에게 단단히 찍힌 것만큼 두려운 게 또 있을까?

게다가, 자신을 보호해 줄 막강한 권력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이제 한낱 변칙개체였다.

그렇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잘만 호소하면 뭐 어떻게 되지 않을까?

퍽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지금도 재단에 충성합니까?]

[…저는 재단에 충성합니다.]

딸깍-

불을 전혀 켜지 않아 어두운 사무실 안. 방 안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여자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여자 앞에 구부정하게 선 채로 있었다.

“하아.”

여자는 녹음된 파일을 계속해서 재생해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원본은 맞는 거죠?”

“예. 심문 내내 구시렁대다가, 갑자기 또박또박 잘도 대답하더군요. 아무래도 박사님께서 주신 정보가 통했나 봅니다.”

“시간 강박 어쩌고요? 그게 통할 줄은 몰랐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연기 잘하시는데요? 10년 전 정보부를 웬 깡패 집단으로 만들고, 있지도 않은 약물도 쉽게 지어내시고. 상대를 구슬릴 줄 아시네요.”

클라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예. 어릴 적 꿈이 소설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심문을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네요.”

“왜요? 잘한 것 같더만.”

클라라의 대꾸에 김진섭은 멋쩍게 웃었다.

“그게… 그는 왠지 저랑 말한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절 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그 모습이 꼭 저 말고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 같았거든요.”

"뭐, 그건 이해해요. 전 아직도 선임이랑 얘기할 땐 눈도 못 마주치고 대화하는걸요.”

클라라는 허리를 펼 겸 기지개를 켰다. 관절이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어땠나요? 김진섭 담당관님이 보기엔.”

“전 역시 처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자는 더는 인간이 아닙니다. 뭔갈 하기 전에 없애야 해요.”

“와, 방금 그 말 세계 오컬트 연합 같은 거 아세요?”

클라라가 킥킥거리며 웃자, 김진섭 역시 따라 웃었다.

“아무튼, 제 생각은 그러합니다. 박사님은요?”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처분은 미루자는 쪽?”

“어째섭니까?”

“음, 감이에요.”

클라라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그렇게 말했다.

“제가 워낙 이상한 사람하고만 엮이니깐, 그런 쪽엔 통달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요.”

“이상한 사람이 제가 포함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하하. 제가 말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클라라가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고, 업무를 이어나갔다. 클라라는 어떻게 말을 이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이상한 게 정감 가고 좋더라고요. 단순 평범한 것보다. 저도 이상해진 걸까요?”

“뭐, 박사님이 원체 그런 면이 있죠.”

김진섭은 농담으로 그리 말했다. 그는 일할 때가 아니면, 꽤 성격 좋고 털털한 면이 있었다.

클라라는 그의 농담을 듣고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일단 배일호의 처분은 미루도록 하자고 건의해봅시다. 담당관님은 그자를 계속 주시해주시고요. 배일호가 재단에 여전히 충실하고, 그 어떤 위협도 없다고 판단될 때까지요. 그를 처분하기엔 여러모로 아깝거든요.”

“예. 그리하도록 하죠.”

보고를 마친 김진섭은 자신의 위치로 복귀하기로 했다. 그 전에, 그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박사님은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좀 전에 SCP-529-KO에게 따로 연락이 왔어요. 수신 위치는 지리산. 그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워낙 중구난방 해서 좀체 읽을 수가 없어요. 일단 그 친구와 연락하면서 이 메시지에 관해 물어봐야겠어요.”

"고생하십니다.”

"아녜요. 그럼 슬슬.”

클라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이미 업무를 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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