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2017년 10월 24일 오후 10시 57분. 앞으로 1시간 3분 후면 내 생일이다.
나는 근래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생일날을 특별히 기념한 적도 없다.
이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제57K연구개발기지에서, 게다가 특별히 더 처리할 업무가 많은 위치에 있는 나는 1년 365일 일 해야 하고, 그것은 생일에조차 예외는 아니다. 오늘 또한 새벽 3시까지 연구를 하다가, 연구실 반대쪽에 있는 내 침대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다. 어차피 생일이라고 축하해 줄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과 교류하기를 심하게 꺼리고, 또 쉽게 미움을 사는 성격인 나는 친한 사람이 전혀 없다. 얘기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업무를 주고받는 동료와 이따금 성과를 내면 방문해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을 건네는 상사뿐이다. 그런 나는 오늘도 57K의 지하 연구 시설에서 끊임없이 일한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알람이 울린다. "곧 당신의 생일입니다. 미리 HAPPY BIRTHDAY! 이제 1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내 손목시계이다. 값싼 시계 주제에 년, 월, 일, 요일까지 표시하고, 톡톡 두드리면 빛도 나고, 특정 날짜엔 알림을 보내는 기능 등 온갖 잡스러운 기능이 들어가 있어서, 내가 제57K기지에 입사하기 몇 년 전에 그만 충동 구매했던 물건이다. 지금의 내게 생일이란 그저 이 기지에서 1년 더 달려왔다는 것을 상기하는 의미이기에, 알림이 와도 별 감흥은 없다.
아, 졸리다. 카페인이 더 필요해. 커피가 어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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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그러곤 다시 떴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일하고 있었나? 아니면 자고 있었나? 지금이 몇 시지? 전혀 모르겠다. 감이 안 잡힌다. 몸이 너무 피로하면 잠을 설친 것이겠고, 수상할 정도로 몸이 가뿐하면 잠에 너무 푹 빠져 출근 시간 동안에도 곤히 잠든 채로 머물러서 지각했다는 뜻이겠지만, 그것조차도 모르겠다. 몸에 감각이 들지 않는다.
오늘이 출근하는 날이던가? 아닌가?
아니지, 내게 출근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
모르겠다.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는다. 다시 잠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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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당신의 생일입니다. 미리 HAPPY BIRTHDAY! 이제 …"
망할, 알람의 진동 때문에 다시 깼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끄며 한숨을 쉰다. 이제 잠은 다 잤군. 졸음이 죄다 달아났어. 하지만 잠을 안 자면 출근도 업무도 제대로 못 하고, 그럼 불같이 무서운 기지 이사관한테 잔뜩 혼날 텐데.
우리 기지 이사관이 누구더라?
내가 누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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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하다. 아니, 정정한다. 뭔가 아주 이상하다. 왜 이게 기억이 안 나지? 과로나 수면 부족 탓이라 하기엔 머리가 심각하게 안 돌아간다. 왜 이러는 거지? 여긴 어디지? 여긴 언제지?
질문이 너무 많다. 하나씩 답을 찾아봐야겠다.
일단 여긴 어디지? 다시 눈을 떠야겠다. 어둡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다. 어딘가의 구멍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눈이 암순응할 때까지 대기해야겠다. 그동안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보자.
음, 전혀 푹신하진 않다. 내 침대나 주변 공원은 확실히 아니다. 사방이 딱딱하다. 그렇다면… 내 연구실 책상인가? 하지만 그렇대도 의자나 목베개 등의 부드러운 물건은 있을 텐데. 아, 이제 주변이 좀 보인다. 눈이 어둠에 좀 익숙해졌다. 앞에 있는 건… 철근? 쇠 파이프? 내 앞에 왜 저런 게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 자신은 공사 현장이나 폐허에서 잠을 청할 만한 성격은 아니다. 연구실에 저런 물건이 있을 리도 없고.
상황이 심각하게 이상하다. 게다가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건… 기억소거제. 기억소거제 유출이다. 그렇지, 아마 내가 연구하던 프로젝트 중에 기억소거제를 동원했던 것이다. 주변 상태가 엉망인 것까지 보면 아마 어떤 사고가 있었는데, 그 여파로 기체형 기억소거제가 새어 나와, 부분 기억 상실을 유발했단 뜻이리라.
침착하자 침착. 아무리 기억소거제가 유출됐다 해도, 기본 안전장치 등이 있을 테니, 그렇게나 많은 양을 흡입했을 리는 없다. 지속시간이 길 수는 있어도, 강도가 그렇게 높진 않으리라. 어떤 계기로 기억을 일부 되찾으면, 마치 통상의 기억상실증처럼 나머지도 도미노처럼 다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어딨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다른 해답을 먼저 찾아야겠다. 지금은 언제지? 나는 뒷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으려 한다. 아직도 몸에 감각이 다 회복되지 않았기에 살짝 벅차지만, 결국엔 손에 넣었다.
망할, 배터리가 나갔다. 한탄도 잠시,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려 오른팔을 움직이다가, 왼쪽 손목에 뭔가 걸려있다는 걸 깨닫는다.나이스. 내 손목시계이다. 난 보통 잠들기 전 손목시계를 벗는 편인데, 맨 채로 잠이 들다니,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설마 내 책상이나 다른 작업실에서 곯아떨어진 건가? 제대로 일 안 하고 중간에 잠이 들어버린다니, 그 제57K기지 이사관이 용납할 리가 없는데.
잠깐, 제57K기지라고?
그렇지 그렇지, 난 제57K기지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다. 이제야 기억났다. 나는 제57K연구개발기지의 제1기밀프로젝트연구부 소속 선임 연구원이다. 잠시만 기억을 더듬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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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재단에 입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 2010년이었다. 젊은 나이에 열정이 넘치는 신입 연구직으로서 재단에 입사해, 상사의 인정을 받으려 온갖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며 실적을 쌓으려 했다. 주변에 보이는 일감이란 일감은 전부 손대려 했던 것 같다. 더 많이 일해, 더 높은 지위에 올라, 더 많은 힘을 얻으면 뭐라도 될 것 같았다. 입사 동기들과의 교류도 끊다시피 하며 일에 매진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홀로 실험만 하다 보니, 당연스레 고립되어갔다. 재단 직원으로서 맞이한 첫 생일 때 축하의 말을 건네준 것은 입사 동기 한두 명뿐이었다. 다음 해에는 그 둘조차 사라졌다. 매년 쓸쓸한 탄생일을 맞이하다 보니 어느새 그 의미조차 퇴색되었다. 점차 그날 또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에만 몰두하는 날이 되었다.
재단에서 일한 지 2년쯤 됐을 때, 첫 대형 성과를 냈다. 임의의 인공물에 바르면, 대상을 파괴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액체였다. 공간 변칙을 응용해 물체의 각 부분이 서로한테서 상대 좌표를 유지하게 하는 원리였다. 나는 대박 발견이라 생각했지만, 변칙성을 적극 활용해서인지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나를 보고 상사가 나한테 꼭 어울리는 기지가 있을 거라고 한 게, 내 제57K기지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곳, 제57K기지는 시골에 있는 어느 연구개발기지인데, 외딴곳에 자리 잡아 여러 위험하거나 비밀스러운 거대 프로젝트를 많이 담당한다고 그는 소개했다. 변칙성을 응용하든 뭘 하든 성과를 내는 것을 최고로 중시한다고, 비록 좀 위험해도 빠르게 실적을 쌓아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아주 드문 찬스가 내 앞에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나는 며칠 후, 수 명의 다른 신규 57K 직원과 함께 새 근무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미니 버스를 타고 기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이동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건물 창문 너머로 바라본 사람들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워 보였다. 사람들은 한두 명씩 정해진 건물에 내려 신입 안내를 받기 위해 이동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조금씩 초조해져 가며 난 언제쯤 내리는 거지 고민하다가, 나와 안내 담당자 두 명만 남은 버스는 어느 자그마한 창고 앞에 멈추었다. 여기가 아니라 옆에 있는 큰 건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는 물었다. 담당자는 이 곳이 맞다고, 안에 있는 비밀 통로를 타고 지하 시설로 이동한 후, 거기서 다른 사람이 마저 안내해 줄 거라고 답했다. 나는 어째서 나만 특별한 곳으로 가는 건지, 내가 뭔가 잘못해서인지 잘해서인지 의문을 품으며 기대 반 떨림 반으로 차에서 내렸다.
실내로 가는 문을 열기 전, 문득 뒤돌아봤다가 큰 건물 안의 어느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비록 57K의 인물상을 잘 알진 못했지만, 어딘가 어리바리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나는 그 또한 이곳에 온 지 오래되진 않았으리라 판단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지하로 내려가려는 나의 모습을 보고 동정하거나, 무서워하는 듯한 표정을 취했다. 지금까지 동행한 안내 담당자는 행운을 빈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굉장히 조마조마했지만, 그렇다고 문을 안 열고 밖에 죽치고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결국 잡생각을 뒤로하고 입실했다.
끼이이익.
허름해보이던 바깥에서의 모습과 달리, 건물 안쪽은 최신식이었다. 사방의 벽면과 천장, 바닥 모두가 강철로 이루어졌고, 지상층 맨 끝에는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어찌나 깊은지 내려다봤을 때 저 아래에 바닥은 없고 다만 소실점 너머로 에스컬레이터의 두 난간이 사라질 뿐이었다. 이번 역시 57K에 처음 온 신입인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아득한 저 아래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만 5, 10분쯤 타고 내려가다가 드디어 바닥에 도착하니, 기지 이사관 명찰을 단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이사관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던 때에,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자네가 그 새로 왔다는 신입인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지에서 수년 정도 연구직에서 일한 경험은 있습니다."
"아, 그건 알고 있네. 자네의 연구 결과에 눈길이 가 자네를 이 기지로 데려온 거야. 자네가 가장 최근에 쓴 연구 보고서가 파괴불가능한 중소형 개체 인공 제작에 관한 거였지?"
"맞습니다만, 그래서요…?"
"아, 우리 기지에서 최근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거기에 자네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이 프로젝트를 우리 기지에서 진행하고 핵심 기술을 개발하긴 하지만, 조립이랑 실제 가동은 다른 곳, 어느 극한의 환경에서 할 예정이거든. 그 환경에서도 발명품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할 방법이 필요해. 지금까지는 그저 튼튼한 소재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는데, 자네 보고서를 보자마자 딱 감이 왔지. 이게 해답이라고."
"어… 영광입니다?"
"아무튼, 자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자네가 연구하고 개발한 그 방법을 더욱더 오래 지속시킬 수단을 찾는 거야. 지금 수준으론 기껏해야 몇 개월, 몇 년이 한계였나? 그 정도론 아직 우리 최종 목표에는 어림도 없어. 시간 한계를 아예 없애는 걸 목표로 해야 해. 아, 목표 대상에 여러 비일반적 물질이 혼합됐을 때도 적용 가능하도록 만들고. 우리 프로젝트에 특이한 구성물이 이것저것 들어갈 예정이거든. 자세한 것은 지금 알 필요는 없고. 일단 저기 왼쪽 통로로 쭉 가다 보면 자네 새 사무실이 있을 테니, 거기서 세부 지시 사항을 읽고 작업하면 되네. 한 층 내려가면 실험실이 있고, 한 층 더 아래로 가면 주 작업실이 있어. 주 작업실은 여기 일에 더 익숙해지면 소개해주지."
나는 업무를 받자마자 밤을 새가며 몰두했다. 전 기지에서도 일벌레로서 익히 알려진 나였지만, 이곳에선 그보다 더 심하게 일했다. 57K에 오기 전의 나는 몰랐지만, 이곳은 살인적인 업무량과 일 강도로 암암리에 소문이 난 곳이었다. 조금만 쉬려 하면 상관이 나타나 압박을 주었으며, 휴일이나 주말은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이 게으름을 피우려다 발각돼 호된 징계를 받는 모습을 수 차례 보고 난 후, 나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알아서 엄청나게 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희망을 버린 듯한 57K에서 나는 악착같이 버티고자 했다. 전 기지에서 좀처럼 인정을 받지 못하던 나에게, 철저한 실적지상주의 사회인 이곳은 이상적인 사회와도 같았다. 이곳에서마저 미움을 사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은 내 업무 중독 태도에 박차를 가했다. 주변과의 교류는 여전히 없었지만, 실적을 낼 때마다 찾아와 격려하고 더 열심히 일하라 지시하는 상사와, 갈수록 길어지는 직함과 커지는 영향력이 내 원동력이었다.
다른 동료는 이곳의 생활이 지옥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나는 계속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내 능력을 진정으로 인정해주고, 내 연구가 기여를 하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속할 수 있는, 내가 속해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곳을 부정함이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일해서 얻은 게 과연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저 잘하고 있다고 주기적으로 칭찬을 받을 때마다 기뻐하고, 얼마 안 가 다시 공허한 느낌만 남아 다시 쾌락을 좇아 칭찬을 위해 일하고, 그것만을 반복했다. 아, 물론, 전근 몇 년 후 이사관이 나를 주 작업실로 초대해서 프로젝트의 전체 내용을 알려주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무려 O5 중 한 명한테 비밀리에 지시를 받아 시행 중이라 밝혔다. 그 O5는 이 프로젝트가 상당히 민감한지라 다른 평의회원과의 마찰을 우려해 이사관을 특별히 불러 명령했다고, 제57K기지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가장 적격이라 판단해 콕 집어서 맡겼다고,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봐 준 이 O5야말로 진정한 평의회원이라고 내게 말했다. 난 그가 말하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 예 거렸다. 이 프로젝트의 자세한 내용과, 이로써 추구하는 대의를 알게 됐을 때, 그때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大)를 위한, 인류를 위한 거대 프로젝트에 내가 이바지한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왜 다른 평의회원은 반대했을지나,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 프로젝트의 내용이 뭐였냐면… 뭐였지…? 젠장, 잘만 계속 기억이 떠오르다가 막혔다. 뭐, 이 정도나 떠올렸으면 상당한 수확이다. 정보를 더 모으다 보면 자연스레 더 떠오르겠지.
회상을 잠시 그만두고 주변을 살펴본다. 아까보다 눈이 더 어둠에 적응했다. 주변을 바라보니… 아수라장이다. 완전히 엉망이다. 내가 알던 사무실도, 실험실도, 작업실도, 아무것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주변에 사람 또한 안 보인다. 동료 연구원도, 보안 요원도, 이사관도 안 보인다. 대체 이 기지에 얼마나 큰 사고가 있던 거지?
잠깐, 커다란 사고라면… 내 프로젝트. 내 프로젝트는 무사할까? 설마 작업물이 사고 때문에 손상을 입었거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장 났으면 어떡하지? 안 돼, 안 돼, 내가 이 프로젝트에 내 삶을 얼마나 많이 쏟아부었는데. 그게 사라지면, 난…
아냐, 이번에도 역시 침착해야해. 당황해서 좋을 일 하나 없어. 개발지 자체는 57K지만, 조립은 다른 곳에서 한댔어. 비록 여기 57K의 연구실은 박살이 났대도, 제정신이 박혔다면 반대쪽에도 자료를 백업해놓았을 거야. 계란을 한바구니에 담는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는 없지.
어? 그렇다면 반대쪽 작업소는 어디에 있는 거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사관은 이 프로젝트는 57K 독립 작업이랬어. 혼자 맡는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57K이 아닌 다른 재단 기지나 구역에 둘째 작업소를 만드는 것도 확률이 높진 않아. 생각해보면 최종 자재를 옆 연구실에서 생산했는데, 지하 시설 밖으로 운반한 기억도, 그럴 경로도 없어. 상당한 양의 재료가 들어갔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사실 그 극한의 환경이 이 지하 시설 내에 있거나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운반 수단이 있다는 건데… 첫째 가설은 내가 생각해냈지만 별로군. 기각이다.
그렇다면 운반 수단은 뭐가 있지? 정황을 보면 평범한 교통수단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공간이동? 이곳에서 부품을 만든 후, 포탈 같은 것으로 운반해 외딴곳에서 조립한다. 그래, 설득력 있는 말이야. 공간이동에 쓴 수단만 찾으면 바로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면 아마 기억도 바로 돌아오겠지.
음 좋아, 기억도 웬만큼 돌아왔으니, 이제 내 현 상태를 더 파악하자. 아 참, 그러고 보니 막상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기억이 마구 돌아오니 들떠서 참. 어디 보자, 저녁 11시 41분… 다행이다, 눈 좀 붙이고 내일 바로 출근할 수도 있겠네. 잠깐, 오늘이 몇 월 며칠이더라? 그렇지, 날짜도 표기되는 시계였지. 10월… 24일… 2025년? 2025년이라고? 2017년이 아니라? 내, 내가 정확히 8년을 기절해 있었다고? 이 폐허 아래에 파묻혀?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지?
문득, 나는 고개를 내 몸쪽으로 돌려, 내 상황을 살펴봤다. 가만히 보니 주변에 온갖 위험한 잔해가 산재한데, 몸에 통증은 없다. 깨어난 지 이제 한참이 됐는데, 아직도 몸에 감각이 안 든다. 마치 몸이 변화한 것처럼.
내가 기억소거제를 흡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연구실 내지는 주 작업실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각종 약품이 모인 곳이었겠지. 같은 분류에 묶여있던 약품 중 유력한 원인은… 알았다. 내가 제작한 파괴불가능 약품이다.
대략 전말을 알겠다. 나는 여느 날처럼 기지 지하 시설에 출근해 이것저것 실험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이 시설에 발생한 사고에 휘말렸다. 그 과정에서 기억소거제와 파괴불가능 약물 등의 물질에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기억을 일부 잃었지만, 위험한 사고 현장에서도 8년간 기절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작업하던 프로젝트에 대해선 차차 기억이 더 나겠지. 일단은 여기서 나갈 길을 찾자. 파괴불가능성 덕분에 다칠 일도 없고, 주변이 완전히 어둡지 않은 것을 보아 하면 외부가 그렇게 멀지도 않을 거야. 아니,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봐선 의외로 거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있을 가능성도 있어.
일어설 만한 공간이 있을까? 어깨를 회전해 엎드린 상태에서 팔을 최대한 위로 뻗는다. 뭐가 만져지진 않는다. 아마 일어서도 문제는 없겠지. 8년 동안 쓰지 않은 뻣뻣한 관절을 굽힌다면 아마 통증이 밀려와야 할 테지만, 파괴불가능 약물의 부가 효과인지 그런 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나가면, 다시 출근하고 일해 사람들한테 다시 인정을 받고 말 테다. 빛이 새어나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후 손을 뻗어, 파편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한다. 봐, 출구가 얼마 남지 않았어. 나가는 게 코앞이야. 여기서 나가면, 사람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힘들진 않았냐고, 우리 프로젝트엔 꼭 네가 필요하다고, 어서 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끝마치자고,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나를 환영해줄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없는 동안,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갔을 리가 없어. 내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았으니까, 모두가 내 중요성을 알 것이다. 모두가 나를 알고자 할 것이다. 외로운 나날은 이제 끝이야.
10분 정도 지났을까? 계속해서 파내다 보니 바깥세상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운 무채색의 잔해만 보다가, 푸른 풀밭이 눈앞에 나타나니 기적과도 같았다. 물론 한밤중이라 여기 또한 밝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대수랴. 그때, 바깥에서 터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선 두세 명쯤 돼 보이는 것 같았다. 시야 안으로 걸어온 그들은 재단 복장을 했고, 가슴엔 "제57K기지 순찰대"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 했으나, 그들의 대화를 바로 엿듣고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었다.
"하암… 이 늦은 밤에 웬일로 구 시설에 와야 한대요?"
"넌 신입이라 잘 모르겠지만, 여기가 개편되기 전에는 여러 거대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는 곳이었거든. 별 보는 기지로 바뀐 게 8년 전인데, 그때 지하 시설에 엄청난 사고가 있었대. 거기에 혼재한 온갖 변칙 물품과 장비가 뒤섞이면서 저 아래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가 된 거지. 이따금 변칙 존재가 알 수 없는 작용을 일으키거나 탈출할 때가 있는데, 시설부 쪽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때까진 일일이 사례 별로 대응해야지. 조금 전에 여기서 뭔 움직임이 감지됐다는 신고가 들어왔으니 우리가 출동한 거고."
"8년전 생겨난 미지의 변칙 개체가 저 아래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니, 어우, 그것 참 무섭네요."
변칙 개체? 무서워? 내가? 그래, 물론, 파괴불가능성을 얻고, 지하 아래에서 8년간 아무런 영양소도 없이 생존한 나는 누가봐도 변칙적이다. 하지만 난 그것 빼면 아주 멀쩡한, 두려워할 것 전혀 없는 무해한 인간인데…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기억소거제랑, 파괴불가능 약품에 노출됐다면, 다른 변칙 약품에 추가로 노출됐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정신을 차린 뒤 내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핸드폰은 방전됐고, 시계가 내뿜는 자그마한 빛으로 뭘 관찰하기엔 역부족이다. 물 등의 반사면 또한 본 적이 없다. 지금 나 자신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흉측한 괴물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안심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난 내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격리실에 처박힌다. 다시 혼자가 된다. 내 프로젝트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안 돼. 안 돼. 그건 안 돼.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머리에 어떤 생각도 거치지 않고 일단 뛰었다. 잡히면 끝장이야. 달려. 달려. 뜀박질 소리를 듣고 순찰대가 쫓아올까 봐 전속력으로 달아난다. 어둠 속으로, 잔해 속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는 달아난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모르게 됐을 때, 숨이 가빠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 정도 뛰어왔으면 못 잡겠지. 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새로운 신체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땅이나 벽을 만져도 별 느낌이 없다. 근데 그럼 손목시계 알람 진동은 어떻게 느낀 거지? 아마 옷가지랑 시계째로 약품을 뒤집어쓴 탓에, 통째로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계속 기절해 있다가, 왠지 모르겠지만, 시계에 알람이 와서 깨어난 모양이다. 알람이 올 만한 일이 뭐가 있으려나?
잡생각은 뒤로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벽에 등을 기댄다. 별로 힘들진 않지만, 단순히 느껴지지만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쉬자.
쿵!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살짝 무너진다. 벽이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던 모양이다. 게다가, 새로 난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지하시설 잔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달려온 모양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달아날 준비를 하나, 틈이 작아 발각되기 쉬워 보이지도 않고, 주변에 인기척 또한 없기에 가만히 있기를 택한다.
문득, 나는 쉬다가 바깥쪽에 무엇이 있을 채 궁금해졌다. 한쪽 눈을 틈에 바짝 갖다 대고 바깥 상황을 엿본다. 바깥에는… 어느 건물이 있다. 왠지 친숙한 건물이다. 우리 기지 건물이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든 건물이 파괴되진 않은 모양이다. 내가 보는 방향에 창문이 나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할 수 있다. 안에 있는 것은… 케이크? 촛불? 식탁 위에 새하얀 케이크가 준비되었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둘러쌓았다. 누구 생일이지?
그때, 내 손목시계가 화려한 색깔로 바뀌며 진동한다. 기념일 알람 기능인가? 벌써 내일이 된 모양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나는 손목시계의 날짜와 문구를 확인한다. "10월 25일 2024년. Happy Birthday."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하, 전부 몰래카메라였던 거지? 전부 장난친 거지? 거봐,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참 정교하게도 했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깜짝 생일 장난을 무슨 일로 이번에 했대? 그것도 내가 모르는 사람까지 와서.
에이, 장난이 너무 심했다. 이런 게 어딨어. 얘들아, 내가 간다. 조금만 기다려.
잔해를 하나씩 치우면서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를 만든다. 마침내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생기자,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건물에 다가간다.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더 또렷하게 보인다. 케이크 위에는 딸기 토핑이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는 아니지만, 뭐 어때. 선물도 여기저기 쌓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선물은 안 보이지만, 뭐 어때. 위에 있는 현수막의 글을 읽는다. "제57K천체관측기지 유성한 연구원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내 이름은 유성한이 아닌데.
뭐지.
나는 가운데의 사람에 주목한다. 모르는 얼굴이다. 표정이 매우 밝다. 혼자 고깔모자를 썼다. 아하, 저 사람이 주인공이구나. 관심을 받는 건 저 사람이구나. 다 내 망상이었구나.
나는 망연자실해 있다가, 현수막을 다시 읽는다. 천체관측기지? 천문학과는 별 인연 없는 우리 기지에 왜 저런 게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순찰대원 중 한 명이 개편 어쩌고라고 했었나? 우리 기지가 바뀐 건가? 전에 하던 일들, 전에 하던 프로젝트, 전에 있던 직원들을 버리고, 새단장을 한 것인가?
안 돼, 이럴 순 없어. 왜 우릴 버린 거야? 우리가 이룬 성과는 어쩌고? 내… 내 프로젝트는 어쩌고? 버려진 거야? 사라진 거야?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달아난다. 이것저것 파편을 옮기며 소란을 피웠으니 분명 존재를 들켰을 것이다. 잡히긴 싫다. 정신없이 달아난다. 안으로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오래 달아나며, 잔뜩 헤매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대략 파악한 것 같다. 이곳은 전에 그 에스컬레이터가 있던 곳. 이곳은 이사관실로 향하는 통로. 이곳은 내 동료가 일하던 작업실. 잠깐, 그렇다면 내 프로젝트 작업실로 향하는 통로도 있을까?
그래, 잊혔다 해도, 보수하지 않았다 해도, 적극 파괴하지 않은 한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거야. 아직 재기의 길은 남아 있어. 이런 사람을 새 프로젝트에 같이 끼워주진 않겠지만, 내가 관여하던, 이젠 나밖에 존재를 모를 이 프로젝트라면 여전히 작업하는 게 가능해. 저런 위대한 프로젝트를 혼자서 마무리하고 돌아온다면, 분명 나를 인정해 줄 거야. 나, 나를 버린 걸 후회할 거야.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기지 구조를 머리에 떠올리려고 한다. 비록 기억이 완전하진 않다고 하더라도, 시설이 파괴되며 여기저기 달라졌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을 몇 번을 들락날락했는데 당연히 어딘지 알지.
문을 열고, 계단 통을 내려가고, 잔해를 피해 창문을 통해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중간에 잠금장치가 있어서 막힐 뻔했으나, 파괴불가능한 몸으로 몇 번 강하게 내려치니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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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헉. 한참을 달려온 후, 드디어 주 작업실에 도착한다. 그래, 그래, 기억이 천천히 되돌아온다.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해왔는지, 조금씩 조금씩 기억이 제자리를 되찾는다. 온통 폐허이고, 작업물은 전부 못 쓰게 됐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내 주 작업실이다.
하지만 반대쪽 두 번째 작업실로 통하는 통로는 어디 있지? 첫 번째 작업실에서 그렇게 멀리 두진 않았을 텐데. 기억을 조금씩 더듬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찰나, 어떤 원형 고리 같이 생긴 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고리 안에 불투명한, 부정형의 알록달록한 액체가 헤엄치고 있다. 빙고, 포탈이다. 내 예상이 맞았어. 이곳에서 개발한 후 포탈을 통해 어딘가로 자재를 보내 조립한 거야. 그렇다면 이 포탈을 타면… 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보러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조심스레 포탈에 한쪽 팔을 넣는다. 뭔가 얼얼한 기분이다. 파괴불가능한 몸으로도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었구나. 혹시 공간 변칙의 영향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일까? 몸통, 반대쪽 팔, 두 다리까지 포탈에 마저 집어넣는다. 새로 튀어나온 이곳에서 나는…
전부 기억났다. 프로젝트의 개요부터 목적까지, 자그마한 부품 하나까지의 원리도 전부 기억났다. 왜 이사관이 시간제한을 없애라 했는지, 왜 특이한 물질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하라고 했는지, 파괴불가능성을 원한 이유는 무엇인지, 동료의 작업물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해도, 나는 이해한다.
나는 포탈이 있는 건물을 떠나, 둘째 작업소가 있는 건물 쪽으로 이동한다. 이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특수 복장을 하고 이동해야 했을 테지만, 지금은 파괴불가능한 신체 덕에 그럴 필요 없다. 잠시 숨을 참으며 뛰어갈 뿐이다. 여기저기 먼지가 많이 탄 것으로 봐 그동안 쭉 방치된 모양이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랑 똑같이 생겼다. 기지 이사관도 이 프로젝트를 버린 걸까? 기지에 대형 사고가 일어난 후 처벌을 받고, 다른 곳으로 옮겨간 걸까? 상관없다. 이젠 내가 관리하면 되니까.
나는 건물에 오자마자 문을 제껴 열고 들어선다. 찾았다. 전원 버튼이다. 8년 전, 일단 프로젝트의 1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걸 확인한 후 명령한 O5에게 보고를 하고 나서 2단계도 진행하자고 했었지. 비록 답변을 받기 전에 사고가 나 프로젝트가 중지됐지만 말이야. 이젠 다시 시작이다.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시설에 전원이 들어온다. 전구가 켜지면서, 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생일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시설이 나와 함께한다. 이 시설이 나를 바라본다.
프로젝트명은 레아 프로젝트.
담당 인원은 오직 나.
계획 재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