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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높으신 분들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자: dododom본 작품은 c_bonefish does not match any existing user name님의 릴레이 연작 참여작입니다.
사용된 원테마: http://1nu.wikidot.com/nightmare
방안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둘은 꽤나 공통점이 많은 자들이었는데, 꼽아 보자면 우선 나이가 꽤 있다는 점. 그리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라는 점, 둘 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라는 점이 있다. 하지만 둘을 한데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는 바로 뒤집힌 세상과 삶의 이면 속에서 무수히 겪어야 했던 갖은 죄악과 선택 때문에 풍화되어 버린 이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방안의 두 남자는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른편의 남자는 왼쪽 다리를 오른 다리 위에 건 채 왼발을 까딱까딱 흔들고 있었다. 그의 팔과 손을 한시가 아깝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수염을 더듬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며 착실히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남자의 눈은 건너편 남자의 얼굴,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입을 조준하고 있었다. 오른편의 남자의 상체가 갈수록 점점 앞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마치 튀어 오르기 직전의 용수철과 같은 자세를 연상케 했다. 실제로도 남자는 상대의 입을 노려보며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내가 어퍼컷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그 입을 열어버리겠다.'라는 확고한 의지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왼편의 남자는 상대의 노골적이면서 위협적인 의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남자는 비교적 다소곳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와 상대 사이의 바닥에 못을 박고 있었고 상대의 그런 작태에 오른편의 남자는 주의라도 끌어볼량 왼발을 더욱 세게 까딱거렸다. 곧이어 아무 쓸모도 없는 행동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오른편의 남자는 초조함을 넘어선 분노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마침내 O5-1의 입이 열렸다. "관리자는.." 하지만 그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1의 혀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며 O5-5도 그의 인내심도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말하라고, 1! 관리자가 뭐?" 다행스럽게도 5는 이번에도 차악을 선택할 수 있었다. 분명 어퍼컷을 날리는 것 보단 그냥 고함을 지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
"..미안하네, 관리자를 설명하는 게 조금 어려운 일이라서. 생각을 잇는 것에 시간을 좀 투자해야 했네."
"내 성심성의껏 이해하려 노력할 테니 부디 말을 이어서 해주게. 부탁이야."
1은 5의 말에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 동안만 이었고 1은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자의 첫 번째 능력은 자신을 감추는 능력이네. 아니, 항밈은 아니야." 1은 5가 입을 여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항밈에 가까운 특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관리자가 항밈적인 존재인 것은 아니야. 생각해봐, 만약 관리자가 항밈적인 존재였다면 그가 재단을 관리할 수 있었을까? 물론 관리자 혼자서 뒷공작을 벌일 순 있겠지. 하지만 효율성을 생각해보면 그자 혼자서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보단 그냥 간간이 지시사항을 하달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5는 1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는 자신에 대한 고찰을 방해할 수 있네. 방해공작이라기보단 그냥 그게 관리자의 특성이야. 관리자를 떠올리려고 하면 생각은 분산되고 집중력은 와해되네. 기억은 퇴색되고 간단한 논리를 도출하는 것조차 힘들어지지. 하지만 떠올리려고 한다면 결국 떠올린 순 있어. 그래서 관리자가 항밈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거네."
5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네. 지금은 말이야. 그렇다면 두 번째 능력은 무엇인가?"
"두 번째는.." 1이 다시 말을 끌었다. 5는 그 내부의 압력솥이 다시금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엔 부드럽게 1을 불렀다.
"1."
"미안하네, 그러니까.. 그래, 자네가 관리자를 만난다면 자네는 그가 관리자임을 알 수 있을 거네."
"그게 무슨..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건가? 누가 관리자인지?"
"그것보다는 알 게 해준다는 것이 더 옳지. 관리자는 누구든지 될 수 있고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어. 그래서 관리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야. 그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니까. 자네가 관리자를 알아차린다면 그건 관리자가 자네에게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한 것에 불과하네." 1은 자신의 설명을 들으면서 5의 얼굴에서 당황과 초조함, 그리고 갈 길을 잃은 분노가 흘러나오는 것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자네는 마치 관리자를 신처럼 묘사하는군." 1은 재빨리 입꼬리를 내렸고 다행스럽게도 5는 1의 냉소적인 미소를 놓쳤다.
"전술신학부 따위를 생각한다면 한참 빗나갔어. 관리자는 신이 아니네. 신성하지도 않지. 그는 인간이야. 다만 전지에 가까울 뿐이네." 1은 그가 만났던 관리자의 여러 가지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시간의 저편 속에서 난잡하게 얽히고 오염된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몇 조각의 단서를 파내는 행위는 그로 하여금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끼게 하였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다.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는 게 자연스러운 기억.
"전지에 가깝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5가 재차 물었다. 그는 소파의 양 팔걸이를 손으로 움켜쥔 채 몸을 앞으로 격하게 숙이고 있었다. 마치 치솟는 산맥 같이, 튀어 오르는 파도 같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거센 기세와 고급스럽게 재단된 양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굵고 듬직한 체구는 그에게서 돌격하고자 하는 바위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O5-5에게서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이끌어낸 O5-1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위. O5-5는 바위와도 같은 남자였다.
"이미 말했지만 관리자는 누구든지 될 수 있어. 이게 바로 그가 전지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자라는 거지."
5는 가만히 1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그는 차가운 고드름이 그를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드름이 그의 정수리를 꿰뚫어 척수를 얼어붙게 만들면서 그의 척추를 따라 자라났다. 경악스러움에 5의 사고가 잠시 느려진 탓에 온몸의 소름이 그가 완벽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온몸에 퍼졌다.
"관리자가 자네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리고 나도?"
"누구든지. 정말 말 그대로 누구든지."
"그게 어떻게.. 아니, 그런 게 가능하니 관리자라고 할 수 있겠군. 그렇지?"
"관리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능력이지. 그가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야. 그는 이전 세상들의 수조에 달하는 선조들도, 앞으로도 미래가 있다면 태어날 수천억의 후손들도 갖지 못할 능력을 가진 유일무이한 자야.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통찰이라는 능력 말이지. 관리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어 대상의 모든 걸 알아낼 수가 있어. 상대의 기억, 성향, 계획, 목적까지 모든 걸 말일세. 하지만 동시에 관리자는 이전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또한 가지고 있어. 그래서 그 대상이 된다고 해서 그에 동화되지는 않지."
"그래서 관리자 또한 O5-8을 감시하는 역을 맡고 있었던 거군. 8의 동태를 살피는 데 이만한 방법도 없었을 테니."
"사실 관리자는 감독관들을 가리지 않았어. 예외는 없었지."
5는 다시 한번 소름이 쫙 돌았다. 사실 당연한 소리다. 그가 관리자와 같은 능력 앞에서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소리임에도 5는 소름이 돋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리자는 자네와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라는 걸 예측할 수도 있겠군."
"분명히 예측했겠지. 틀림없어."
"그렇다면.." 5는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두 남자의 대화에 잠시 공백이 찾아왔다.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과는 사뭇 다른 공백이었다. 더 무거웠고, 더 차가워졌다. 그러나 공백은 짧았다.
"그렇다면," 5가 다시 말을 반복했다. "관리자는 8을 감시하는 것에 어째서 실패한 거지? 아니, 애초에 실패한 적이 있긴 한 것인가?"
잠시간의 공백은 헛되지 않았다. 끊어진 생각은 이어졌고 기억은 파헤쳐졌다. 집중력이 회생하며 끊긴 논리가 젇붙여 졌다. O5-1과 O5-5는 막간의 공백을 통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공장장이 8이 아니라 관리자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음, 그러니까 존스. 내가 지금 드는 의문은 바로 이거야. ϟK급 총력전 시나리오. 재단이 장막 정책을 비롯한 모든 규약들을 무시하고, 세계 멸망의 주체가 되는 SCP를 무력화시킨다는 내용의 K급 멸망 시나리오. 근데 여기서 의구심이 든단 말이지. 왜 지금일까? 왜 재단은 자신들이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걸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너 같은 재단의 거물이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걸까?
그냥 마리아라고 불러, 캘빈. 동업자 관계가 될 사이인데 편하게 하자고.
하하, 동업자?
그래, 동업자. 내가 너에 대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거든. 너만한 적임자가 없더라고.
어떤 일의 적임자를 말하는 거지?
재단의 모든 감독관을 죽여버리는 일. 이번엔 11명뿐이니 좀 쉬울 거야.
O5-9는 곰방대의 매끈한 설대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희멀건 연기가 피어올랐고 9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9는 자신의 태도가 O5-4에게 분노를 넘어선 증오까지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에 통달한 듯이 굴면서도 정작 현실의 위기와는 한 발짝, 아니, 두 발짝씩 거리를 두는 자신의 태도가 납득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4의 증오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9는 4를 동정했다. 그리고 모두를 동정했다. 그저 자신의 굴레에 매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가 죽어가는 모두를. 세상이 몰락해가는 와중조차 자신의 굴레를 넘어선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모두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 모두에는 9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도 9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9가 10을 어디로 보냈는지 말하는 것을 거부하자,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아 버렸다. 5는 이런 식으로 굴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며 1을 끌고 가버렸고 나머지 감독관들은 9를 비난했다. 특히나 4가.
'아마 지금쯤이면 누가 공장장인지 고민하고 있겠지.' 9는 잠시 5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이든지 끝장을 보려는 남자. 심지어 그 끝장에 그 자신까지도 포함될지라도 끝까지 밀어 붙이는 남자. 5는 어떤 일이든 돌격해 맞부딪히며 누가 먼저 부서지나 내기를 거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부서지고 깨지고 마모되었지만 여전히 무겁고 위협적인 바위 같은 남자였다. 5는 아내의 죽음으로 많은 동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9는 5를 동정하지 않았다. 5는 9가 동정하지 않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9가 동정하지 않는 사람 중 또 하나는 O5-10이었다. 공장장에게 그가 보낸 전령. 계약이 전달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10에게는 사과할 일이었지만 계약은 이중의 함정이었다. 바로 공장장이 과연 O5-8인지, 아니면 실종된 관리자인지 판가름을 할 함정.
1과 5가 돌아왔다. 4를 포함한 몇몇 감독관이 그들에게 항의했다. 1은 침묵했고 5는 사과를 했다. 비록 진심이라곤 단 한 방울도 첨가되지 않은 사과였지만 모든 항의를 잠재우는 데는 충분한 사과였다.
"두 분 다 돌아왔네요, 그렇게 떠나버리시면 물음에 답한 게 많이 민망해지잖아요."
"그걸 대답이라고 친다면 말이지." 4가 끼어들었다. 무례한 행동임이 틀림없지만 제지가 들어오진 않았다. 민망하다면 민망할 비난의 동조가 형성되었다. 9는 한숨을 쉬었다.
"말했잖아요. 결과 값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위치와 계약 내용은 말할 수 없어요."
4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이때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7이 그를 제지했다. 침묵의 값은 비싸다. 그리고 침묵을 깨는 주체가 7이라면, 그것은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이다.
"9, 당신이 우리 모르게 10을 조종해 8에게 보낸 걸 인정하면서도 그 의도를 밝히지 않겠다면 우리에게 당신과 10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판돈을 얹어야 하는 게 최선 아닐까요? 아무런 보장도 없이 그저 당신을 믿어 달라고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감독관들을 매우 무시하는 행위이라고 보입니다."
"좋은 지적이에요, 7. 하지만 제게 어떤 판돈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뭘 원하나요? 이 곰방대?"
"당신이 재단에서 가지는 모든 권한, 그리고 당신의 모든 지식, 그리고 끝으로 당신의 목숨."
"많이 비싸네요." 9는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7이 차갑게 받아쳤다.
"좋아요. 기꺼이 걸어드리죠." 9가 콜을 부르자 7을 제외한 나머지 감독관 모두가 놀랐다. 특히나 4가. 7은 그의 노트를 꺼내 조건과 판돈, 그리고 대상자를 적었다. 그러고는 노트의 해당 페이지를 노트에서 찢어내 4에게 건넸다.
"4, 이걸 보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기록보관자니까요." 확실히 7 다운 짓이었다. 9의 보증을 확실히 하면서도 4의 불평으로 시간을 날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아주 분명한 본보기였다. 4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받았고 7이란 숫자를 가진 추수꾼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또 누구 불만 있는 사람 있나? 없어? 좋아, 그러면 이제 향후 대책을 세울 차례군." 2가 입을 열었다.
9는 벌써부터 지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나 자선재단은 세계의 평화와 안정, 화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했답니다. ORIA는 봉쇄가 오직 현 재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목적의 행동일뿐 재단을 비롯한 세계 초상단체들을 겨냥한 적대 행위가 아님을 밝히고 향후 재난 극복에 협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이란의 독자 행동에..
그들에게 알려줘요. 협조하겠다고. 돈 벌려면 별 수 있나. 그건 그렇고 공장이 뭔지 알아봤어요?
"세계 오컬트 연합과 연합을 맺을 것을 제안합니다." 3이 입을 열었다.
"가장무도회가 끝장나기 직전인 지금, 재단은 확실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향후 위기 극복과 수습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선 독자 노선을 고집해 고립을 자초하기 보단 적극적인 협력을 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임이사국에서도 그걸 원하는 눈치고요."
"잠시만요, 3. 우선 현 상황에서 세계 오컬트 연합과 협력을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한 당신의 제안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굳이 우리 쪽에서 먼저 그들에게 요청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제 생각에는 상임이사국의 중개 하에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방법이 더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6이 이의를 제기했다. 3은 그의 이의를 곧바로 받아쳤다.
"6, 현재 재단과 세계 오컬트 연합은 세계 멸망 위기라는 공통된 재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도 예측된 적도, 대비해본 적도 없는 멸망 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5분 안에 사상자 숫자 단위 뒤에 0이 하나 더 붙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빨리 우호적인 파트너와 공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서로 기다리면서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 누가 압니까?"
"좋은 말을 해주셨군요, 3. 맞습니다, 우리가 토의하는 한 순간순간이 세상 사람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세계 오컬트 연합은 뭘하고 있죠? 3, 당신의 직원들에게 프시케 분과 사람들이 연락을 했나요?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질문은 하지 않던가요? 5, 연합의 타격조와 교전한 사례가 보고된 적 있습니까?"
5는 3과 6의 설전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이 호명되자 5는 놀란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6은 그런 5를 바라보며 마치 '무슨 생각하고 계시나요?'라고 묻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보고된 적 없습니다. 연합의 청산 작전 수행이 통상적인 경우보다 급격하게 증가했고 활동 범위 또한 넥서스와 아현실을 가리지 않고 넓어졌지만 교전 사례는 지금까지 보고된 적 없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계 멸망 시나리오가 발발했습니다! 세계가 멸망해가고 있다고 하기에는 연합의 태도가 너무 평온한 거 같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는 세계 오컬트 연합을 의심할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하지요, 6." 1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1의 이의는 반박 보다는 더 많은 근거를 제시해보라는 격려에 가까웠다. 6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 위성들을 통해 수집된 정보들이 있습니다. 1시간 20분 전에 대서양에서 간지르가 부상했고 같은 시각 헤세드급 구축함 2척과 킬급 대형수송함 1척이 세바스토폴을 경유해서 러시아 흑해 함대와 합류했습니다. 키리바시, 프로비데니야, 레카다이브에서도 동일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상임이사국을 비롯한 유엔 대다수 회원국 수도에는 연합 병력들이 배치되고 있는 중이고요."
3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는 겁니까, 6? 그게 바로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일 텐데요?"
"네, 정확합니다. 연합이 해야 하는 일이고 또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죠. 그러니까, 지금의 위기와 비교했을 때 그들의 활동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6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6은 지팡이에 체중을 실으며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아무도 6의 말에 이의를 걸지 않았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지금 연합이 벌이고 있는 모든 군사적인 행동은 겉보기 식입니다. 겁에 질린 후원자들을 달래려고 시늉이나 하고 있는 중이죠. 정작 중요한 프시케 분과나 108 평의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108 평의회 소집은 커녕 가맹 단체들간의 연락도 줄어들었습니다. 간지르가 부상했는데도 민간인 소개가 안 이루어지고 있는건 덤이죠. 겉보기에는 그저 할 일을 하면서 인류를 수호하는 것처럼 굴고 있지만 아뇨, 연합은 지금 재단을 포함한 전세계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관망하고만 있어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 것처럼. 세계 오컬트 연합과 협력? 좋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됩니다. 지금은 저들의 의중부터 알아내야 할 차례입니다."
황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침묵이 흘러갔다. 1이 입을 열었다. "제안할 사항이 있다면 지금 말해주게, 6."
"먼저, 상임이사국이 직접 나서게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히 권유만을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정략결혼이라도 맺어주듯이 상임이사국이 반드시 밀어붙이는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돼야지 연합의 프시케 분과를 끌어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6이 다시 5를 향해 돌아봤다. 5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5, 윤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카틴 숲을 생각해보십시오. 겨울 전쟁을 떠올려 보십시오. 크림 타타르인들과 발트 3국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소련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전후에는 또 어땠습니까? 얄타와 베를린에서 스탈린이 얼마나 욕심을 부렸습니까? 그런 스탈린이, 세계 오컬트 연합이라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점령지 내의 변칙자산들을 합법적으로 쓸어가 버릴 수 있는 초국가적인 단체를 만드는 것을 찬성했겠습니까? 조금 더 자세한 예를 들어주지요.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황립독일변칙문제검사청에 맞서 제정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견자단이, 영국에서는 왕립진기명기재단이, 프랑스에서는 오컬트부가 결집했습니다. 그 다음 대전도 마찬가지였지요. 파시스트 마법사들을 막기 위해 서방의 나라들은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벨라루스 등지에서도 초상단체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연합군 오컬트 구상 소속 단체들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스탈린이 과연 그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봤겠습니까? 세계 오컬트 연합이 창설된다면 그 단체들이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저항할지는 뻔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왜 스탈린은 세계 오컬트 연합의 창설을 찬성했을까요?
스탈린도 멕시코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탐욕의 한계를 일깨울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까요. 스탈린도 같은 이상성이 연방 내에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창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겨난 연합의 첫업무는 바로 그 이상성들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처리요?
그걸 처리라고 할 수 있다면, 예. 처리했습니다. 연합의 기술력이 어디로부터 나왔겠어요?
잠시만요,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연합은―
인류의 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대전 이후 100여년 동안 그 이상성들은 전세계의 비호 하에 증식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은 그동안 이상성에 잠식되었고 지금은 믿어서도 의지해서도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연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라면 그들을 집에 초대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반장님께 지금 제보를 드리는 거고요.
재단도, 연합도 둘 다 못 믿는 상황이 오다니, 이런 말세가 다 오는군요. 알겠습니다, 로스토프 박사님. 대통령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윤회까지 투입시킨다는 계획을 보면 확실히 자네와 6은 죽이 잘 맞는 느낌이야."
1이 5에게 말을 건넸다. 5는 대답하지 않았다. 5는 깊은 고민 속에 빠진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1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관리자가 누구든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자신을 뺀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관리자가 자신도 될 수 있다면 자기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던 순간, 5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고 1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5가 입을 열었다.
"1, 세상이 공장화 된다면 수호자가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가?"
1은 더 크게 놀랐다. 5는 그의 아내가 죽은 이후로 문의 수호자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뭐? 수호자? 수호자라면..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이이제이를 바라기엔 가능성이 너무.."
"수호자가 행동에 나선다면 문이 열릴 수밖에 없고. 그렇지?"
"잠깐만, 자네 설마 방주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나? 자네가 왜 6의 계획에 찬성한다는 건지 알겠군. 그건 실패한 계획이라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알지―"
"당연히 내가 제일 잘 알지. 1, 그러니까 자네에게 더 나은 계획이 있지 않다면 왈가왈부하지 말아 주게. 내게는 이게 최선이니까."
1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5는 회의실을 떠났다.
씨발, 저게 뭐야!
뛰어, 뛰라고!
야, 박준연! 정신차려, 이 띨빡새끼야! 튀라고!
1도 회의실을 떠나면서 O5-11은 홀로 회의실에 남았다. 아까 회의에서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었는데도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질 않았다. 사실 이게 11의 장기였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존재감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피곤할 때 나름 잘 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일 때도.
추수꾼, 변신술사, 기록보관자, 바위, 외교관, 정보수집가, 기타 등등, 그리고 그까지 처형인.
평의회의 숨은 단검으로서, 그는 이제까지 너무 많이 죽여왔다. 이젠 너무 피곤해서 멈추고 싶었지만 모든 감독관이 잘 알듯이,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11도 5가 그의 아내, 베로니카와 문의 수호자를 언급하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랐었다. 5는 나가면서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11은 그를 경외하는 눈빛을 보냈다. 베로니카의 유산과도 같은 방주 계획을 입에 담다니. 5가 11과 다른 점이라면 5는 멈출 방법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점이었다. 11은 그런 그를 경이롭게 봄과 동시에 반면교사로서 세웠다.
11의 단말기로 연락이 들어왔다. 그가 찾고 있었던 쥐새끼였다. 11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리아, 당신까지 진짜 왜 그래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야."
이 너머의 땅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죄인의 자손들아. 세상의 죄악이 만연하니 너희에게는 다가올 새 세상을 맞이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너희가 앞에서는 선을 동경하며 추종하나 뒤에서는 악을 탐하여 죄를 속삭이는구나. 너희가 문을 목전에 둘 것이나 문은 굳게 닫힐 것이요 사망의 음부가 너희를 맞이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울며 영원히 잊힐 것이다. 죄인의 삯은 사망이니 너희는 반드시 필멸하리라. 그것이 죄악의 도래 이후 부여된 너희의 운명이다.
5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바위 같은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겁고, 굵직하며, 깨지고 금이 가고 마모될지라도 여전히 파괴적이며 위협적인 것. 돌진하기 시작한다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그런 무시무시한 인간이라고 소문이 도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5는 다른 사람들이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위가 돌진하는 때는 오직 그것이 산등성이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할 때 뿐이라는 걸. 바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추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방주 계획. 사상 최대의 재단과 연합의 협력 프로젝트이자 최악의 참사로 끝난 대실패작. 문 너머의 이주를 시도한 오만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었다.
방주는 간지르가 되었고 그렇게 베로니카의 유산은 손을 영영 떠나버린 줄만 알았었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베로니카의 과업을 마무리할 기회가, 모두를 엿먹일 수 있는 기회가 끝내 돌아왔다.
5는 이 기회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베로니카의 죽음 이후로 그는 늘 준비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