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하고 짠맛이 텁텁한 입안에 감돌았다.
몸은 무겁고, 햇볕은 따가웠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은 제 말을 듣지 않았고, 입안에선 모래알이 씹혔다. 하지만 널브러진 내 팔다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볍고 시원했다.
내가 신음을 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칼 융 박사님과 흑인 소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도착… 도착 한 건가요? 박사님?"
내 물음에 그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여기는 아프리카 이집트 서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힘없이 웃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군요."
SCP 재단이라는 그늘에서, 그리고 사회와 문명의 그늘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나를 옭아매던 수많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고 나니, 나는 꽤 편안한 마음을 느끼고,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표류하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어디로든 굴러떨어질 수 있었다. 사람은 결국 이렇게 단단한 땅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 그와 동시에 다시 땅을 짚고자 한다. 인간은 결국 자유를 갈망하지만, 진정한 자유 속에선 결국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었다.
칼 융 박사님은 내게 명상을 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명상의 방법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과정은 꽤나 힘들었다. 제한된 식량과 물, 그리고 역동적으로 변하는 외부의 환경에서 장기간 집중을 이어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찾은 동굴의 안쪽에서 우리 셋은 둘러앉아 하루의 대부분을 명상하며 보냈고, 때로는 온종일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날도 있었다.
처음 며칠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웠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해 뻣뻣한 사지를 꼬아 가부좌를 틀고 서늘한 그늘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보내세요. 사막의 깨끗한 공기를 코로 받아들이고, 모든 잡념을 입으로 뱉어내는 겁니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문명이 닿지 않은 완전한 자연 한복판의 맑은 공기를 들이쉬었다. 폐포가 부풀며 신선한 산소를 받아들였고, 그 바람은 내 정신의 구석구석으로 보냈다. 곧이어 나는 후우 하고 뜨거운 바람을 내보냈다. 바람은 내 영혼 곳곳으로 들어찬 뒤, 그곳의 먼지를 털어내며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잘 가게 내 완성되지 못한 마지막 그림, 잘 가게 날 받아주던 시골 마을의 사람들, 잘 가게 내 못난 과거, 잘 가게 내 동생.
난 언제나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내 부모님은 나보다 내 여동생을 더 아끼셨다. 울퉁불퉁한 나보다도 훨씬 예쁘장하게 생겼고, 마음씨도 착했다. 그 아이가 거리를 다닐 때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항상 활기가 있었고,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물론, 나 또한 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다. 시기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밝음이 좋았고, 나의 못남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리 억울하지는 않았다.
내가 목탄으로 그린 첫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을 때 입가에 돌던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길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랑 화가를 어깨너머로 흘겨 보고는 삐뚤삐뚤하게 따라 해 본 못난 그림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칭찬해 주었고, 난 그때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아마 그때가 내가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한 때일 테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제야 많은 사람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사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그림을 그린 후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모두 이것을 위한 고난을 견디는 것일 테다.
어느날 나는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석 달 내내 그림 한 장을 그리는 데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끼니도 거르고, 잠도 줄여가며 나무 밑동에 서서 마을의 풍경을 지붕 하나하나, 골목 한땀한땀 그려내었다. 그 그림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그려져 갔고, 그림은 9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끝났기에, 왼쪽은 푸르른 나무를, 가운데는 붉게 물든 단풍을, 오른쪽은 포근하게 내린 눈이 그려져 있었고,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멈춰있는 그림 하나에서 역동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내가 만든 모든 그림보다도 컸고, 또, 정교했다. 지나가던 농부와 상인, 친구들과 마부들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이 그림에 빠져들 것처럼 바라보았다. 이 마을을 지나가던 이방인도 나에게 경의를 표하며 언젠가 대도시의 미술학원에서 만나뵐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 그림이 완성된 날, 나는 그 그림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그것을 보였지만, 그들은 창백한 얼굴을 한 동생의 곁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동생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도시에서 뒤늦게 도착한 의사는 질병이 내 동생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이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그 병의 환자라기엔 너무나 곱게 생을 마감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온몸이 썩어가는 병이었지만, 외형은 멀쩡했다고. 대부분의 썩은 부위는 그 안쪽에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큰 고통을 속으로 감내해왔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상냥한 그 미소 너머에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곧이어 동생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내 동생은 마치 편히 잠을 자듯, 석관에 누워 검고 네모난 땅속의 심연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그림을 바라보았다. 내가 벽에 걸어두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고, 모든 사람은 동생의 이야기를 하느라 내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막막했다. 난 슬펐다. 동시에 화가 났다. 동생이 그리웠다. 그리고 동생이 야속했다. 그리고 어떻게 내가 아끼던 동생의 죽음에 이렇게 생각하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죄악감에 차올랐다.
내 동생은 죽어서도 나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죽었기에 더욱 많은 이의 우상이 되었다.
"누구나 부모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특히 어릴 때는 더더욱이 말이죠. 어린아이는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죠."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칼 융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도 부모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이들은 꽤 쉽게 알아차리곤 합니다. 그리고 곧, 아이는 체념하지요."
칼 융 박사님은 인자한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저 또한 그런 아이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제 아버지는 목사셨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이 꽤나 달랐던 것 같아요. 전 어려서부터 스스로 나무를 깎아 만든 난쟁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데 익숙해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고대의 철학자와 신학자의 책을 탐독하며 시간을 보냈지요. 저에겐 아버지보다도 그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난 다락방에 올라 대들보에 밧줄을 넘겼다. 그 아래에는 단단한 의자, 그 앞 정면에는 내 최후의 걸작을 걸어두었다. 난 의자에 올라서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거무튀튀한 먼지를 먹은 채, 이리저리 손자국과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보관되지 못해 가장자리의 색이 바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이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날 스쳐 지나갔던 그 이방인이 기적처럼 이곳에 찾아와 문을 두들기지는 않을까 상상도 해 보았다. 물론 헛된 희망일 것이다. 나와 이 그림이 발견되기까지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난 무게중심을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곧이어 의자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밧줄이 끊어지며 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며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너무 아파 비명도 낼 수 없었다. 나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눈앞에 눈물이 고였다. 일렁이는 시야의 한구석에 나의 그림이 들어왔다. 그림의 형체는 천천히 일렁이며 춤을 추었고, 그렇게 서로 엉키다 풀어지고, 소용돌이치다 잠잠해졌다.
나는 헐떡이며 눈을 부릅떴다. 그 광경을 더 보고 싶었다. 내 그림 속 마을의 풍경은 점차 변해갔다. 정적인 그림에 그려넣은 시간이 살아 움직이며 마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나에게 보여주었다. 언제 이 마을이 생겨났고, 어디로 청교도인들이 숨어들었는지, 언제 처음으로 증기기관이 들어섰는지, 언제 마을의 교회가 완성되었고, 내 증조할아버지가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 내가 언제 태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그림을 언제 어떻게 그렸는지, 언제 동생이 마을의 곳곳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언제 강가로 떠내려온 토끼의 시체를 만졌는지, 그리고 그 시체의 병균이 어떻게 내 동생을 죽어가게 했는지. 곧이어 내가 집에서 끊어진 밧줄을 목에 감고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가 마을을 떠나는 것도 보였다. 마을에 전운이 감돌고, 젊은이들이 징집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환영의 한 가운데에서 저 먼 산맥 너머로 거대하고 붉은 태양 십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작열하며 빛나고,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 거대하고 뜨거운 폭풍이 마을, 산, 그리고 세계 모두를 뒤덮었다.
나는 공포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이것이 내가 공황장애와 발작을 얻게 된 계기이다.
그때부터 난 이 직감에 휘둘리게 되었다. 무언가에 계속해서 쫓기는 느낌, 무언가가 큰일이 곧 일어날 것이고 자신은 그 앞에서 속수무책하게 짓눌릴 것이라는 직감.
그 그림에서 보게 된 미래는 과연 찾아올까? 언젠가 그 붉은 태양이 떠올라 모두를 불태울까?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이곳의 해는 바람과 함께 떠오르고, 바람과 함께 지곤 했다.
매일 저녁, 융 박사님이 동굴 안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실 때쯤, 나와 소년은 거대한 사구의 꼭대기에 섰다. 바람이 소년의 마른 체구를 감싸 안으며 흘렀고, 그의 얇은 조끼가 흩날렸다. 처음 이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는 9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15살이나 되어 나름 큰 체구를 가진 소년이 되었다.
"논문은 잘 써가고 있니?"
"그럭저럭요."
"항상 밤마다 그것을 쓰고 있는 것 같던데. 거기에 정말 큰 애정이 생기지 않니?"
"… 맞아요."
"내가 그쪽은 잘 모르지만, 논문이란 것도 일종의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사소한 모든 것까지도 세심하게 조정하고 공을 들이니까 말이야. 처음 박사님과 면담 때 이후로 계속 쓰고 있는 거지?"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고 천천히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비가 내릴 거에요. 사막의 비는 거세니, 내일은 동굴에서 나오지 말아야 해요."
"너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니?"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뇨. 그저 계산하는 것이에요."
"그럼, 두 번째 세계대전이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어떻게 끝나게 될지 계산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내 물음에 소년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거는… 저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자 그는 터덜터덜 모래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전까지 볼 수 없던 혼란스러움이 비쳐 있었다.
"모르겠어요. 전 정말 많은 걸 예측할 수 있는데, 그 사건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윤곽을 잡을 수 없어요. 나치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 콧수염 달린 광인이 어떻게 총통이 되었는지도… 사실 하나도 예측하지 못했어요. 아마 그들이 두 번째 세계대전을 일으키겠죠? 아마도요?"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자신 없이 말했다.
"이렇게 불확실함을 앞둔 경험은 칼 융 박사님과 대면한 것 이후로 처음이에요. 다만, 융 박사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이것은… "
"그렇지. 이건 광기야. 광기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니."
난 그의 말을 대신 끝맺었다.
마지막 날. 나는 칼 융 박사님과 함께 모래언덕의 꼭대기에 올랐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싸늘한 사막의 표면을 천천히 데워갔다. 나는 능숙하게 태양을 등지고 가부좌를 틀었다.
"준비되었습니까?"
칼 융 박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린 정말 귀중한 상징을 보게 될 겁니다."
"앞으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게 우리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네, 당신은 그걸 보게 될 것이고, 보이는 모든 것을 제게 전달해 주면 됩니다. 직관을 통로로 하는 텔레파시를 통해서 말이죠."
칼 융 박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게 2번째 세계대전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나요?"
"익시온의 상징 말씀이신가요? 박사님?"
"네. 그 붉은 태양 십자요."
"어… 아무래도요."
"… 음. 아무래도 그렇겠죠. 현재 가장 그럴듯한 추론이죠. 첫 세계대전을 예견한 상징과도 닮아있으니 말이니까요."
"박사님은 뭔가 꺼림칙한 게 있나요?"
"음… 전 그 상징이 단순히 2차 세계대전의 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 조금 더… 더 넓고 멀리 바라봐야 한다고도 생각이 들고요. 그건 그냥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박사님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일단 당신이 먼저 직관을 얻어내는 게 중요하지요. 자, 시작합시다."
나는 박사님의 신호를 듣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며 명상을 시작했다.
나는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천천히 훑어내려 갔다. 나의 페르소나와 그림자, 나의 아니마, 나의 기억들과 컴플렉스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SCP 재단의 격리실과 그 이전에 피신해온 작은 시골 마을, 그리고 나의 고향을 떠올렸다.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고향에 있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이 보여요. 그 앞에 쓰러져 울고 있는 저도 보여요."
"그 그림은 어떻게 생겼지요?"
"아름다워요.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간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에요."
"당신은 그 그림을 사랑했나요?"
"네. 사랑해 마지않았어요."
"당신의 여동생보다?"
"… 네."
나는 내 여동생의 장례식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울고 있었지만 나는 묵묵히 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3달에 걸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지우고 있었다. 난 천천히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붓을 움직여갔고, 그림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백지가 되어갔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며 웃었다. 나는 부모의 품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나요?"
"요람에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나요?"
"네. 사랑해 마지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사랑했나요?"
"네. 사랑해 마지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증오했나요?"
"네. 증오해 마지않았어요."
나는 발가벗은 채 울고 있었다. 울음은 곧 잦아들었고, 천천히 양수를 뒤집어쓰고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어머니의 자궁 속입니다."
"그곳은 편안한가요?"
"네. 정말이지 포근합니다."
"당신은 이곳에 태어난 게 후회되나요?"
"전… 전… 네… 전 이곳에 이렇게 태어난 게 후회스럽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태어나 이렇게 고통받는 것에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나요?"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을 증오하나요?"
"… 네. 그가 저를 증오하시듯, 저도 그를 증오해 마지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나요?"
"… 네. 그가 저를 사랑하시듯, 저도 그를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나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울고 웃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나의 고통과 환희를 곱씹고 또, 토해내었다. 강렬하고 끈적이는 생각과 감정과 감각과 직감이 나를 꽉 조여왔다. 나의 눈에서 눈물과 피와 젖과 꿀과 진흙, 그리고 빛이 쏟아져나왔다.
"당신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가? 또, 증오하는가?"
"네… 아무래도요.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는가? 또, 증오하는가?"
"전… 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한번 물어보게."
나는 내 앞에 있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으며 한 손에는 스케치북을, 다른 한 손에는 물감이 묻은 붓을 들고 있었다.
"넌 날 증오하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날 사랑하니?"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난…"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난, 난… 나 자신을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난 절규하듯 목청껏 소리쳤다.
"난 그런 나를 받아주지 않는 이 세계가 원망스럽고 증오스럽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늘을 향해 내지르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주님, 어째서 저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어째서 저는 이렇게 불완전한 겁니까? 어떻게 해야 이 세계가 저를 받아들이고, 또, 제가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까?"
그러자 거대한 광휘가 내게 쏟아졌다.
찬 바람과 따가운 햇볕이 몸을 감싸 안았고, 거친 바람 소리와 바닥을 긁는 모래 소리가 내 주변에서 울려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없는 사막의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박사님…?"
"전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의 내면에 홀로 있죠. 어디에 있나요?"
"이곳에 있습니다. 이 세계에 있습니다. 이 세계에 제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보이나요?"
나는 멀리 보았다. 나의 몸은 천천히 떠올라 온 사막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 너머의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보였다. 평원의 동물들이 보였다. 거대한 폭포와 호수, 높이 솟은 산맥, 빌딩과 다리, 모든 생명과 모든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가 보입니다."
나는 더욱 높이 떠올라 지구를 바라본다. 또, 달과 태양, 수성과 금성, 화성과 목성, 토성을 바라보았다. 또, 그 너머의 별빛과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우주가 보입니다. 정말… 정말 아름다워요…"
나는 시선을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 지구를 바라보며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관찰하였다. 시간은 일직선이 아니었으며, 상대적이었다. 나는 고대의 지구에 있던 일을 볼 수 있었다. 지구가 얼음으로 뒤덮이고 녹고 다시 뒤덮이고 녹는 것을 수차례 볼 수 있었다. 위대한 파라오의 행차와 그의 거대한 돌무덤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다. 페르시아의 군인들과 그리스의 학자들과 로마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나섰다. 이슬람의 사람들이 들어와 사원들이 지어졌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국기가 휘날리다 다시 저물었다. 이제 난 현재의 지구에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나와 융 박사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오마르가 보였고, 지중해 너머에 제12기지와 그 속의 맥퀸, 미첼, 그리고 더 나아가 유럽 전역의 곳곳을 마치 돋보기로 확대하듯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라보았다.
많은 수의 군인이 쓰러진 누군가를 찾아 이곳 사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더 자세히 보고자 지구로 내려갔다. 군단병들이 쓰러진 세 사람을 찾아왔다. 이들은 각각 신탁을 전달하는 신관, 메데이아, 이아손이었다.
"더, 더 미래의 일을 보여줘."
나는 넓은 공터에 있었다. 내 앞으로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한다. 그러나 한 자리가 비어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 안에 있었다. 무언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게 보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힘찬 날갯짓을 하는 새였고, 육중한 비행기였으며, 사람들의 우상인 완전하고 선한 초월자이기도 했다.
나는 거대한 돌 바닥 위에 서 있었다. 군대들이 일제히 정렬하여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하늘의 구름 사이에서 애꾸눈의 왕, 혹은 신이 나타나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공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이 공장에서 찢겨 죽어나가고 있었다. 찢긴 시신은 그저 한쪽 구석에 켜켜이 쌓여 갔다. 그 공장은 무언가를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는 해안가에 있었다. 청년들의 시체가 물결치듯 해안가를 덮치며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붉은 태양 십자가 떠올랐다. 그 상징은 주변의 모든 것을 초토화 시켰고, 그 열기로 바위마저 녹여버렸다.
"언제 일어나는 일이지? 어디서 일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환영은 계속되었다. 비슷한 장면이 여러 번 더 반복되며 나의 몸을 수십 번도 더 바짝 타게 만들었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내 앞에 거대한 불로 이루어진 버섯이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신음했다.
하지만 나의 신음은 곧 영웅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소리에 뭍혔다. 이들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영웅을 찬미했고, 뮤즈들이 이들을 이끌며 그들의 악기에서 공포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달과 지구, 그리고 태양이 정렬하며 심판의 날을 알리는 금관악기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거대하고 신성한 아이가 지구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안돼! 너무, 너무 많아!"
두명의 남자가 달 위를 폴짝이며 뛰어다녔다. 한 남자는 달의 뒷면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왔고,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불태워 죽였다. 수많은 별들은 땅에 눌어붙어 모든 것을 불태웠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이름표를 붙이자, 사람들은 주저 없이 돌을 던져 죽인다. 그렇게 한 사람이 죽고 나면 다시 누군가 나타나 또 다른 이에게 붙인다. 그리고 다시 돌 세례가 시작된다.
금발의 영웅이 네 개의 날개를 가진 독수리를 타고 강철로 만들어진 달을 활로 쏴 떨어뜨린다.
"그만! 아니야!"
역병이 든 항아리가 폭발하며 주변을 더럽힌다.
거대한 여성이 영혼의 그릇을 들고 하늘로 솟아오른다.
독수리가 바벨탑에 부딪히고, 그 높은 탑의 잔해는 수많은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름표를 붙이고, 서로 주저 없이 돌을 던져 죽인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며 서로에게 떨어진 이름표를 붙이려 한다. 그리고 그게 누군가에게 붙으면 다시 돌 세례가 시작된다.
광신도들이 신성한 흰 신전에 침입하여 그곳을 더럽힌다.
수많은 사람이 신이 된 노란 개를 찬미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머니에서 로투스를 꺼내 먹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사탕을 먹듯이 말이다.
"이게 진정으로 인류의 미래란 말인가?"
나는 절규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서로를 물어 뜯는다. 모두가 모두를 향해 공격하고, 또 공격받는다. 그리고 공격받기에, 그리고 공격하기에 그 분노와 증오는 더욱 쌓여간다. 거대한 증오가 영혼을 잠식하고 더럽히고 타락시킨다.
"어쩌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건가?"
가짜 예언자가 십계명을 담은 석판을 들고 나타난다. 그 석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 서로 미워하라. 그리하여 너희는 서로 분열할 것이니라.
이러한 가르침 하에서, 사람들은 광기와 분노로 가득 차 서로를 물어뜯고 도륙 내 죽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나타난다. 길가메시는 정의의 이름으로 엔키두를 철창에 가둔다. 엔키두는 감옥에서 썩어가며 몸집을 불리고, 거대한 괴물이 된다.
"아니야, 아니야… 너희 둘은 서로 친구가 되었어야 한단 말이야…!!!"
모든 환영들이 나를 두렵게 했다. 너무 강렬하고 시끄럽고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발, 멈춰줘! 난 이 광기를 감당할 수 없어!!"
나는 비명 질렀다.
"이렇게는 모두가 죽고 말아!!!!!!"
"그만!!!! 날 살려줘!!!!!!"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있다!"
한 소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없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누워 헐떡였다.
"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없다!"
소년의 앞에 박사님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융 박사님…?"
그는 두꺼운 책 사이에서 나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있다!"
이렇게 말하며, 아이는 난쟁이 인형을 자신의 시야 앞에 두었다.
"없다!"
이렇게 말하며, 아이는 난쟁이 인형을 책들 뒤편에 두어 시야 밖으로 두었다.
"있다!"
이렇게 말하며, 아이는 난쟁이 인형을 도로 자신의 시야 앞에 두었다.
"넌 뭘 하고 있니?"
칼 융은 아이에게 질문했다.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찾고 있어요."
"… 그래서, 아버지는 찾았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누구니?"
아이는 철학책을 펼쳐 보였다. 아이의 뒤편에 인자한 얼굴을 한 칸트가 나타나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는 손을 잡고 칸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이는 신화서를 펼쳐 보였다. 아이의 뒤편에서 헤라클레스가 작은 공을 던졌다. 아이는 능숙하게 공을 잡아내었고, 다시 헤라클레스에게 공을 던졌다.
그리고 아이는 신학서를 펼쳐 보였다. 아이의 뒤편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타났다. 그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요셉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읽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는 낡은 책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 책의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꿈의 해석
—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아이가 책을 펼치자 그의 뒤편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나타났고…
그리고 칼 융은 소년의 목을 졸랐다.
"난… 난 그의 아들이 아니야… 난… 난 그를 증오해… 난…"
아이가 캑캑 거리며 책을 떨어뜨렸다.
칼 융의 등이 불규칙적으로 떨렸다.
아이의 눈이 뒤집혔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렇게 도망쳤었는데… 도대체 왜… 왜…"
그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손이 풀리고, 아이는 쓰러졌다.
칼 융은 낮게 흐느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는 수많은 군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O5 평의회의 직속 부대, 기동특무부대 알파-1 '붉은 오른손'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우리의 신변을 확인하고 난 뒤에 다시 12기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 1주일간의 납치극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자행된 중대한 수준의 격리파기 사태였다고 덧붙였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위치를 추적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환영을 볼 그때에, 전 세계에서 강렬한 사막의 환영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은 집단무의식에 가해진 어떠한 변칙적인 사건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고, 마침 그 환영과 일치하는 사하라 사막 부근에 O5-12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알파-1 '붉은 오른손'이 파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전 인류에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각인했다. 대개 이런 것은 문화와 예술을 통해 나타나기에, 누군가 이 환영을 토대로 사막에서 미래를 보는 내용의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SCP 재단은 이를 어떻게든 숨기고자 역정보 규약에 총력을 하다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말까지 듣고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