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단위의 상처

2024년 12월 11일

서울 어딘가, 심야클럽 인사부장 사무실

심야클럽 인사부장, 자명하고도 유명한 90년 먹은 유령 윤성재가 인생을 회고하고 일어나보니, 자신의 실존적인 옛 가쿠란 교복 위에 새카만 망토가 드리우고 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한창 유령으로서 진이 빠질 시간이 된 새벽 6시 정도의 암실 같은 캄캄한 사무실에서 그 변화는 돌연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Yun

윤성재
심야클럽 인사부장

"음?"

살아생전 함흥공립중학교 재학 시절에 이런 망토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혹은 이를 명확히 추억하지 못함)을 감안하면 그 변화는 90년 인생 동안 처음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의자를 박차고 기립한 그는 몸을 이곳저곳 더듬은 끝에 망토를 벗어 던져보려 했지만 벗겨지지 않았다. 마치 유령으로서의 본질이 변한 듯.

하지만 감안하고는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심야클럽의 이런저런 변동과 윤성재 본인의 경험들이 분명 그를 어떤 식으로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했으므로. 그러니 별 일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가장 무섭다 그뿐이지.

성재는 다시 조용히 앉았다. 작은 쏙독새처럼 날개 같은 망토를 늘어뜨리고 탁자에 엎드려서 아침을 등지고 있었다. 방 안은 몇 년 사이 잡동사니가 부쩍 증가한 편이었다. 숲이 천이하듯이 새로운 물건이 이곳저곳에 새로이 내려앉았다. 탁자 위 한 소녀의 흑백사진을 넣은 액자 옆에는 잎을 늘어뜨린 살구꽃 꽃병이 불온하게도 오래 피어 있다.

앨범 몇 권 위에는 오사카에서 샀던 풍경(風磬)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고, 늙은 회색 시계 곁엔 이런저런 그림도 늘었다. 모두 심야클럽의 누군가가 취미삼아 한 것을 걸어둔 것이다. 유령이라고 해도 결국 어떻게든 흑백의 영역에서 이렇게 나오게 되는 걸까 하고서 윤성재는 이불처럼 덮은 검은 망토를 꼭 쥐면서 회색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으레 그렇듯이 그런 부류의 감상은, 누군가가 노크하면서 끝이 났다.

"인사부장—"

Syoko

히가 쇼코
심야클럽 인사부장 비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갈색 양갈래의 소녀로, 얼굴만 보면 윤성재와 또래뻘이나 분홍색과 흑백의 특이한 의상 덕에 어려보이기를 넘어 '현대의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중반기부터 지금껏 존재한 바 없는 반쯤 자칭 비서직을 꿰찬 히가 쇼코比嘉 翔子는 최소한 윤성재보다도 연상인 역귀였다.

오사카에서 벌어진 일대사건 끝에, 히가 쇼코에게 주박(呪縛)을 내려 부하로 두었던 역병신은 신이 되어 군림하지 못한 채 윤성재 일당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그럼에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성재와 조우한 쇼코가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짓을 되돌리려고 마음먹었기에, 저주가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윤성재가 마귀를 없앴으니 히가 쇼코는 자신이 사후 가장 의존하던 모든 것을 그 손으로 죽이게 되었다.

이런 고로 자연스레 윤성재 아래에서 비서를 자처하고 있는 쇼코는 자연스레 성재의 탁자 위에 걸터앉더니, 놀랐다는 듯이 새카만 망토를 만지면서 그를 불렀다.

"인사부장. 이건 언제 입었어?"

"오늘 새로… 생겼어요. 그냥."

손끝으로 천자락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쇼코는 어쩌면 이런 일에는 익숙했다. 쇼코 본인이 "지뢰계" 패션을 취하게 된 것은 당연히 1930년대부터가 아니다. 이자메아의 붕괴와 일본의 패전 속의 혼탁한 거리를 자의식도 희미한 채 방랑하던 히가 쇼코라는 존재의 옷차림이야 수 번은 변했었으니까. 아마도 가장 어두운 형태의 색으로.

"너도 변하는구나."

"……그렇겠죠. 20년대는… 왜인지 몰라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심지어 둘의 대화조차도 어떤 섭리에 위반되어 있다. 윤성재도 히가 쇼코도 각각 일본어나 한국어를 이 정도로 유창하게 하지 못하고 있기에, 서울에 머무르는 히가 쇼코와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것은 어쩌면 윤성재 자신에게 어떤 변형이 찾아왔다는 증빙이 된다. 성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인사부장. 오늘 밤중에 시간 비어?"

"아시잖아요. 제 일정 정도는."

"그래도 비는 시간이란 게 있을 거 아니…… 아."

쇼코는 잠시 입을 닫고는 입을 삐죽거렸다. 불행히도 비는 한두 시간이라는 것이 다가올 오늘 땅거미 진 후에는 존재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역시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별 말을 얹지 못한 쇼코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나 윤성재나 변함없이 유사 백년이다. 그럼에도 한쪽은 여전하게 이렇게 바쁘다니.

"…없으면 됐어. 있으면 어디 놀러갈까 싶었지. 작년 네가 일본에 왔을 때처럼."

"그땐 재밌었죠. 딱 한 번만 휴가 더 내고 싶네."

"넌 참 애가… 그때가 40년 첫 휴가였다며?"

"그래도 중간중간 쉬기는 했죠. 주말이나… 그래도 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네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냐, 결국."

그를 답답하게 바라보던 히가 쇼코는, 이내 그림자 속 어딘가에 손을 집어넣더니 그 안에서 마치 물 속에서 무엇을 집어올리듯이 몇 장의 서류를 더 꺼냈다. 윤성재는 일어나 서류를 받아들었다. 인사부서 업무에 연관된 이런저런 서류들이었다. 어떤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어떤 것은 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수없는 것들은, 윤성재가 보낼 한 때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쇼코는 그렇게 속삭였다.

일대사건이 있었다.

쇼코를 부하로 두고 있던, 쇼코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그 역병신은 결국 그해 흐린 여름 윤성재와 심야클럽 일본출장소 측의 분투 끝에 영영 사라졌다. 히가 쇼코는 그 끝에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등을 찌른 것도 완전히 패배시킨 것도 본질적으로 자신이나, 후회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결정한 것이니까.

그럼에도 그 선택의 근간에는 이해타산적인 상처가 있었다.

만약 신이 죽고 인생 최악의 공백이 생겼을 그때 아무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다면 쇼코는 절대로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윤성재와의 조우에서 히가 쇼코는 또 다른 선택지를 보았다. 살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을. 무섭도록 짧은 순간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두려울 정도의 판단력이었다. 그를 인하여 그를 등 뒤에서 찌른 것일 뿐. 새로이 살아갈 수 있다 믿었기에 하였던 것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남을 앓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가야 했다.

하지만 윤성재는?

쇼코는 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윤성재가 자신의 선택에서 이정표가 된 것과 달리 윤성재의 선택에서 이정표가 된 존재가 누구인지, 설령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게다가 둘 모두 서로에 대해서 캐물을 심산은 아니다. 별이 서로 아득하니 멀듯이 둘 모두가 서로의 내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타인의 무게였다.

허나 피상적으로 그의 곁을 관찰하기로는 역시 답답한 인간이라 요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쇼코와 정반대의 구석이었다. 심야클럽, 즉 유령의 권익을 주장하는 그 집단을 몇십 년간 어떤 식으로든 떠받들어오면서 생긴 일종의 나이테 같은 관습이 그에겐 배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나이테는 무언가 허(虛)같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공백과도 같은 문양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마치 노거수와도 유사한 그런 쓸쓸함.

윤성재가 말라붙은 고목이라면 쇼코는 어떤 늙은 나무 등걸의 독버섯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둘은 반대였다. 물론 그 등걸을 걷어찬 히가 쇼코가 지금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둘에게는 무언가를 위하여 움직여야 한다는 관성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대상이 명백하게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면 쇼코와 같은 행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윤성재에게 있어 심야클럽은 자신의 선이었다. 그 차이로 인하여 쇼코는 그의 의식을 이해하면서도 동감하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요하게 윤성재를 관찰하며 그와 자신의 동등과 다름을 판단하여 본다. 그것은 분명히 마치 소년소녀가 그러하듯이 자기네 나름의 비교와 대조에 기조를 두고 있는 것일 게다.

사람이 서로 닿게 되면 결론적으로 그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 공백에는 여러 다양한 것이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서로가 없었던 인생의 역사를 의미한다. 20세에 만난 두 사람이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해보자. 둘은 서로가 없었던 19년에 대해 듣고 말한다. 그렇게 지식과 회화를 주고받으며 공백을 메우게 될 것이다.

로맨스 소설 작가 나영민은 이야기했다. 그것이 비록 사랑을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맥락이라고 하여도 그 정도로 국소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성재는 이제 와서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워하고는 했다. 인생 약 90년, 그것은 어떠한 결별과 잔혹함이 묻어 최소한 설명해주기로는 부적합한 이야기일 것이다. 불행하다 떠벌리는 일은 역시 인사부장에게는 맞지 않다.

하지만 히가 쇼코 쪽에서는 그럴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표정을 곁눈질하면서 딱 두 가지의 과거 이야기를 던졌다. 그 두 가지 모두 자신의 근원과 나아가야 할 방향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상 인사부장과의 상담에 가까운 형식으로 업무 도중의 이야기를 나눈다. 쇼코는 속눈썹이 드러나는 눈을 내리감으며 조용히 물었다.

"난 역시… 그 전의 기억은 아직도 없지만."

사실상 최초의 기억인, 대일본제국 이상사례조사국의 실험을 떠올리며 입을 뗀다. 그 실험의 결과로 참살당하여 역병신으로 화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깨닫고 있지만 그 이전의 자신은 누구였는지에 대해선 모른다. 윤성재와의 조우 끝에 자신이 어느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소녀였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과 성씨 외에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쇼코는 알 수 있다는 듯이 짐작한다.

"히가比嘉란 성씨는 오키나와에 많다는 것 같으니까. 나도 그랬겠지."

"……저희도 우선은, 그렇다고 판단하곤 있지만요."

쇼코는 턱을 괴며, 쓸쓸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지금은 류쿠어나 오키나와어도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아…"

모든 과거를 잃은 이방인과도 같이, 말끝을 흐리는 히가 쇼코.

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오키나와는 본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지만 19세기 말엽 일본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로 인함인지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전쟁에서 소위 '옥쇄'를 강요받았고 전쟁 도중 수없는 사상자를 냈다. 그들을 어쩌면 자국민으로 대우하지 않았을 것이며 설령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그 광기는 억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쇼코 역시 그 도중 희생된 일원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다. 그 만행을 정면으로 받은 자신이, 어쩌면 또 다른 광기를 휘두르려 했던 자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저주와도 같은 감정이 일렁였다.

"인사부장 너는, 분명 북한 출신이라고 했지?"

"네. 오래 전이지만…"

윤성재의 경우, 마찬가지 전쟁의 희생자로 학도병으로서 등이 떠밀리게 되었다. 남하한 끝에 인민군이 아닌 국군으로써 죽기는 했지만 그 결론은 같았던 것이다. 죽는다는 것과 고향을 잃는다는 그 결론이 바로 전쟁의 본질일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지금에 와서도 '살아있는' 그들에게 그 상흔은 그대로였다. 과거의 충격이 삶을 뒤틀어 현재로 몰아넣은 것이다.

"으음… 그렇지."

웅얼거린 쇼코는, 수심이 어린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데… 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역병신은 생각한다. "선생님"을 따라 그를 신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수없는 이들을 앓게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사건 이후 쇼코의 손에 다시 병이 낫기는 했지만 그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고, 분명 그동안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갔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쇼코에 의해 몇 번이나 죽을 뻔 하였던 일본출장소 책임자 사토 나나, 혹은 협력자 츠키시마 켄지는 쇼코의 사과를 대담하게 받아주었지만.

현재 쇼코가 모든 병자였던 이들에게 사과를 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했다가는 눈을 부릅뜬 세계 오컬트 연합이나 오행결사가 단숨에 눈치를 채고 쇼코 본인을 쓸어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뒤에서 베여 소멸하는 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천벌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도저히, 죽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리는 하지 못했다.

"한심하지."

"……저는, 역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만…"

성재는 생각했다. 역시 용서를 해 줄 수는 없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행동이야 별 것 아니라 생각하고 있지만 환자들을 대표하여 사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러니 단지 최선에 대해 생각하며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에 히가 쇼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 인사-2024-89

요약: 일본출장소를 통해 입단한 신규 회원에 대함.

상세: 해당 회원, 성명 히가 쇼코 씨는 구어적으로 역병신이라 불리는 존재로 여겨진다. 즉 '저주'로 여겨지는 능력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에게 병을 앓게 할 수 있다. 구체적 기작을 규명한 바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 능력의 범위는 알려진 바 사람을 중태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 명백하다. 이러한 위협적 능력을 고려해 밀접한 케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해당 회원은 여러 조치를 일체 미루고, 윤성재 인사부장의 대리 내지 비서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 인사부서 토의에서 인사부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를 승낙했다.

  • 히가 쇼코 씨의 내부 조사를 위하여 일부나마 면식이 있는 윤성재 인사부장 본인이 가장 적합.
  • 클럽 규모 증가를 고려하여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심야클럽 인사부장 비서 안건 충족.
  • 최악의 경우 해당 회원이 통제불능한 방식으로 행동할 시 제압할 수 있는 인원으로서 인사부장 본인이 적합.

위와 같은 이유로 심야클럽 인사부장 임시 비서직으로 히가 쇼코 씨를 3개월간 고용한다. 이에 대한 내력 보고는 인사부장 본인이 맡도록 한다.

사무부서 파일


몇 시간이 흐른 밤.

둘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실은 번화가에서 얼마 떨어지지는 않아 번쩍이는 불야성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곳이었다. 인사부 업무의 일환으로 구석구석에 숨어 사는 회원들의 현황을 조사하고서 돌아오는 참이었다. 그들에겐 낯선 인물이었을 히가 쇼코를 경계하는 이들도 많아 소녀는 풀이 죽어 있었다.

"역시 내가 부담스러운가…?"

"아니겠죠. 조금 다들 눈에 익으면 금방 살갑게 대해주세요."

"너처럼 몇십 년 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은 쇼코가 기지개를 켰다. 그것은 단지 관절과 근육이 있던 생전 감각의 재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지만, 흔들리는 옷의 프릴만큼은 꼭 팔랑이는 나비와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윤성재의 옷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비록 나비보다는 밤의 장막을 닮아 있었지만.

"역시 클럽의 사람들은 다양하구나. 이나…"

"그렇죠."

유령의 종류는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다양했다. 그러니 성재가 아는 한 심야클럽에 속하는 존재들의 폭도 넓어졌던 것이다. 아마도 쇼코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역병신인 쇼코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성재와 같은 보통의 유령과는 상이했다. '선생님'과 같은 아득한 존재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심야클럽에 속해 있다.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조차도 안심시켰던 윤성재의 옆모습을 보며 쇼코는 눈을 깜빡거렸다.

"인사부장은…… 친구 같은 거 있어?"

"친구요?"

성재는 무언가를 답하려다가 멈추어 섰다. 동료는 있다. 그 동료란 분명 믿고 맡기거나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상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허나, 친구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친구의 기준이란— 아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인물을 이를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분명 훨씬 가까운 무엇을 이르는 것은 분명하다. 성재는 생각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장 마지막의 친구는 아마, 생전의 이금희였을 것이다.

부산에서 자신을 노린 적과 맞서, 끝내 사람을 죽였던 과거를 직면했을 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대상은 떠올렸던 금희의 환상 뿐이었다. 오사카 사건 당시에도, 나라시를 도와 최악의 적수와 맞섰을 때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이해시키겠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은 인사부장직답지 않게 아픔이나 괴로움을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의 표정을 본 쇼코는, 약간 그늘이 진 얼굴을 하고서 말한다.

"남아있지 않은 거지?"

"……네.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럼 말이야…"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뒷짐을 지며 이야기한다.

"……애초에 친구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자신도, 상대도, 하나도 친구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둘 모두 대화 주제가 서툴어졌노라고 그들은 알아챘다. 히가 쇼코는 웅얼거린다.

"난 역시 기억이 안 나."

"저도요. 그럴 마음도 안 들었고……"

"인사부장."

"네?"

"난 지금, 너한테 반말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렇죠…?"

쇼코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럼 너도, 나한테 반말을 해 봐."

"네?"

"불공평하잖아? 기분 나쁘지 않아?"

성재는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말대로 성재에게 반말을 하는 회원들은 많았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죽은 자들도 있었고 그냥 무례한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부장이라는 위치의 윤성재는 딱히 아무렇지 않게 모두에게 공손하게 존대했다. 그러니 이 상황도 대단히 특이한 건은 아니었다. 이를 알아챘는지 눈을 치켜뜬 쇼코는 투덜거렸다.

"그 인사부장이라는 거 진짜 골치아프겠네….."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반말은 영 입에 안 붙어서요."

"지금 반말하는 다른 사람 없어?"

"아이들한테는 아무래도…"

사실, 그조차도 가끔이지만. 성재는 그 말은 삼켰다. 쇼코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앞서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반말은 못 하시겠다?"

"…저한테 반말해보라고 한 분도 히가 씨가 처음이세요."

"저런. 부끄럼을 타는구나."

쇼코는 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해 보자면… 뭐부터 해야 할까…"

"야."

"네? 아니, 응?"

어색한 목소리에 소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즐거웠다. 마치 어떤 퍼즐이 맞추어지는 듯한 음성이었으므로. 둘의 나이는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에 신경을 쓰고 있는 상태였더라면 단지 누나 동생 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쇼코는 생각한다. 이것이 맞다고.

기억이 시작된 이래 쇼코 역시 성재와 유사한 존재였다. '선생님'만이 유일한 주요 관계였기 때문에 항상 존대를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붕괴되는 순간 소녀는 모든 존대의 개념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쇼코는 그리하여 성재의 대화를 무너뜨린 후 대등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좋네."

웃음을 터뜨린 쇼코가 성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게 나아."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쇼코가 웃었다. 성재 역시 그 웃음을 보고,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오래 전 죽은 누군가를 상상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옷이 망토로 변화하였던 것과 같이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어두운 밤을 걸어나가면서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생각을 했다.

한 무리의 대학생이 왁자하게 떠들며 둘을 스쳐지나갔다. 둘은 거의 동시에 그들을 보았다. 시대가 10대에서 멈추었던 유령들은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곳에서 성재는 청춘을 보았다. 그들이 빼앗겼던 시대의 공백을 생각했다. 쇼코는 두려움을 보았다. 자신이 앗아갈 뻔 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삶 속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붉은 이 청년은 심한 기침을 하면서, 약간 비틀거리고 있었다. 쇼코는 소리 없이 반짝이는 손톱을 위로 들었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일렁이다가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불온한 색이 흘렀다. 그리고 그 색을 뒤로 던졌다.

"독감이야."

쇼코는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색을 맞은 남자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새 점차 기침이 멎기 시작했다. 둘은 점점 그들과 멀어졌다. 성재는 웃음을 지으면서 어둠 속을 걸었다. 역병신으로 태어난 존재의 반항과도 같은 순간을 보았다. 심야클럽의 이념 그 자체와도 같이 쇼코는 나아가고 있었다.

이상사례조사국은 쇼코가 적진의 지뢰가 되기를 바랐다. 역신은 쇼코가 자신의 진화를 도울 첨병이 되기를 바랐다. 허나 마침내 히가 쇼코가 선택한 것은 지뢰도 병사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이었던 것이다. 윤성재도 마찬가지, 모든 클럽의 귀신들이 그러했다.

"히가 씨."

"존대잖아. 그냥 이름으로 불러."

"그래도 될까?"

"그게 뭐라고."

성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코, 모르긴 몰라도 저— 나는 원하는 만큼 친밀한 사람은 아닐 거야."

"알고 있어."

쇼코는 말했다. 그들은 인생 단위의 상처를 겪고서 다시 태어났으므로. 둘의 맞물리는 상태는 단지 친구라고는 요약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안다. 윤성재와 히가 쇼코는 이 세상의 밤 속에서 살아가며 클럽의 이상을 이끌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마치 윤성재와 쇼코의 옷차림을 이루는 심령질이 변형되듯이.

"하지만 네가 말했던 그대로…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하는지라고. 그러니까 너도 나도 미래가 더 중요할지도 몰라."

"미래…"

"심야클럽의 미래가 끝이 아니야. 우리 둘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런 미래 말이야."

성재는 웃었다. 아마도 90년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니까. 단지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어떤 식으로 나아가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길 앞으로 나아가면서 미래에 비가 내린다고 해도, 바람이 분다고 해도.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이 쇼코와 성재가 선택한 것이었으므로.

분명, 심야를 궤뚫는 방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친구는 만들 거야?"

"글쎄…"

"안 될 것 같음 내가 친구 해 줄 수 있어."

밤이 깊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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