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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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 아슈비나 첸의 사건 기록


2019년 10월 2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명천구 이권동

앨리

누군가 따라붙고 있다.

앨리는 그걸 조금 전에야 알았다. 성별이나 차림새, 출신 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두 명임은 알 수가 있다. 행인 하나 없는 골목이라 방심한 탓인가,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자켓에 손을 푹 넣고는 걸음 속도를 올렸다.

때는 새벽 세 시로, 새 하나 울지 않고 쥐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대였다. 평소에는 취객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던 인도에도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단지 공허한 바람만 불어댈 뿐이었다. 마치 이 거리에 아주 작은 계엄령이라도 내린 듯이.

앨리는 그 새벽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긴급한 전언이 온 까닭이었다.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녀 본 앨리였지만 그녀로서도 명천구는 처음이었다. 앨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은 뭔가. 스리포츠도 있고, 뒷문소호도 있건만 왜 굳이 이곳인지. 그런 의문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출자는 집요하게 이곳, 서울시 명천구를 고집했고 결국 앨리가 한 수 물러줌으로써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이런 일을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스리포츠로 밀고 나갈 걸 그랬다고, 앨리는 고쳐 생각했다.

새벽에 이게 무슨 추격전인지.

앨리는 걸음을 빨리하면서 뒤에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뒤를 흘낏거렸다. 형체는 여전히 거리의 어둠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았다. 소리만 없었어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꽤 전문적인 작자들이거나, 이 동네 지리를 아주 잘 아는 작자들이 분명했다. 그녀는 가로등이 있는 거리를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쳤다.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나타나는 인간들은 제각기 무언가에 코를 박고 있었다. 도움을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잘못 걸렸구만.

앨리는 두 번째 블록에 다다를 때 즈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추격자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거세진 발걸음 소리의 세기 탓이었다. 그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고함도 없고, 비명도 없는 조용한 추격전인 셈이다.

상황이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 번째 골목이 나오자 앨리는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골목 안은 추웠고 바람이 불어댔다.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앨리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 여러 채는 버려진 것이든 집주인의 관리를 받지 못한 것이든 둘 중 하나같았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건물 주차장으로 뛰어들었다. 두 추적자는 갑자기 사라진 그녀를 찾는지 골목 입구에서 잠시 헤매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앨리는 재킷 주머니에서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꺼냈다.

잠시 뒤 두 인영이 골목으로 뛰어들어 왔다. 골목의 조명 덕에 앨리는 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초 예상했던 양복 입은 남자들이나 교전복을 껴입은 인간들이 아니라 유행하는 옷을 걸치고 문신을 한 예술가들이었다. 분명히 옥리나 분서꾼은 아니었다. 사람은 자기가 몸으로 배운 것을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아무리 억압자들이 예술가 흉내를 낸다고 한들 특유의 딱딱한 움직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앨리를 쫓아 온 예술가들은 군대식 훈련에 익숙한 인간들 같지는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보다는 술과 밤새움에 더 익숙하다고 하면 될까.

예술가 중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놓친 거야?"

"초 치는 소리 하지 마. 그 새끼 못 잡으면 우리도 모가지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런 계약하지 말자고 했잖아…"

"하, M C&D에서 준단 돈이 오천이야, 오천! 그년만 잡으면 오천이라고. 생각해봐…"

장사치라.

앨리는 피식 웃으면서 나이프를 돌렸다. 그러니까 장사치 짓이렷다. 아마 그녀가 이곳, 명천구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람을 매수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이가 없는 짓거리였다. 앨리는 실소를 흘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앨리는 천천히 주차장의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바람이 차갑게 몰려들었다. 두 예술가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정신을 차린 듯 각자 제 무기를 꺼내 들고 접근했다.

"야." 좀 더 배짱이 있어 보이는 예술가가 입을 열었다. "너 일루 와봐."

"한국어 못 알아들어."

앨리는 일부러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대꾸했다. 예술가들은 조금 더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 씨발 뭐하자는—"

붉은 밧줄을 손에 말아 쥐며 거칠게 말을 내뱉던 그 예술가의 뒷말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앨리의 주먹이 그의 입가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뚜둑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씨이…바.."

예술가는 신음을 흘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나 앨리가 더 재빨랐다. 그녀는 거리를 좁히며 날렵하게 예술가의 복부를 걷어찼다. 예술가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앨리 쪽으로 날렸다. 앨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자세히 보니 곰인형이었다.

이게 뭐야.

그런 생각도 잠시, 인형이 폭발했다. 앨리는 일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몸이 허공에 붕 떴다는 것을 직감했다. 몸은 속절 없이 날아가다가, 건물 입구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귀에서 이명이 일었다. 등은 너무나 아팠다.

앨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틀어 일어섰다. 두 예술가 중 유약해 보이는 남자는 거의 반쯤 내뺄 준비를 하는 것 같았고, 조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녀석은 배를 부여잡고 가로등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앨리는 여태까지 사용하지도 않은, 쥐고 있던 나이프의 날을 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면 어떡하나."

"너, 너…!"

앨리는 덤벼드는 남자의 주먹을 몸을 숙여 피하고 옆구리를 찔렀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또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지만, 앨리의 손이 더 빨랐다. 앨리는 남자의 목을 잡고 복부를 찔렀다. 그리고는 또다시, 또다시. 남자는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피로 물드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앨리는 침을 뱉고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동료는 벌써 골목 밖으로 몸을 내뺀 뒤였다. 그러니까 결국 비즈니스 상의 관계, 그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이 말이었다. 그녀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발짝즈음 옮기다 말고 앨리는 다시 몸을 틀었다. 비록 짜증은 났지만 녀석이 죽을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몸은 무겁고 이 명천구라는 동네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게 일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앨리는 하늘에다 대고 한숨을 푸욱 내쉬고, 짜증이 가득 어린 얼굴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네—"

"여기 서울시 명천구. 어… 이권동, 이라던데. 사람 하나 칼에 찔려서 죽어갑니다."

앨리는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아마 여기겠지.

앨리는 거닐던 골목의 한 귀퉁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가로등 하나만이 다른 장소들과 다름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켓에 손을 넣고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가로등은 더욱 낡아 보였다. 지지직거리는 불빛과 그 아래 모여든 날벌레들, 가로등 아래에 버려진 쓰레기들은 하나의 이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앨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로등의 갈라진 틈새를 어루어 만졌다. 손끝에 가로등의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공간의 무한한 비틀림과 교묘하고 동시에 조잡한 형태의 여분차원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재능은 있지만 정확한 교육을 받은 자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피식하게 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이었군.

앨리는 눈에 힘을 주고 건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이내 조용하게 주위의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어구를 외웠다. 말소리는 낮게 깔렸고 더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울림으로 허공에 떠돌았다.
곧 새벽의 바람이 짙게 깔리면서 흙먼지가 거세게 불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앨리는 명천구 지하상가에 있었다.

아무도 없는 명천구 지하상가의 복도에는 닫힌 가게들로 즐비했다. 차갑게 내려진 셔터와 맞물려, 긴 대리석 바닥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 저편에서는 아직 미약한 빛이 배어 나왔다. 조잡한 글씨체로 쓰인 간판 아래, 아직 문을 연 상점 하나.

“뭄섬 화구점”.

앨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붓, 스케치북, 팔레트 등의 미술용품이 일정한 규칙성을 띠고 정리되어 있는 가게 내부에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유일한 광원인 백열등의 희미한 빛에, 저편에서 다비드의 옆얼굴이 주홍색으로 드러났다. 인기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진열대의 그림자는 어딘가 기괴할 따름이었다. 마치 물건에 무언가가 깃든다는 괴담 속에 나올 법한 귀신처럼.

화구점 내에는 오로지 두 사람뿐이었다. 화구점의 주인, 그리고 날카로운 눈길로 화구점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는 어떤 여자. 여자는 파스텔 톤의 코트를, 안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앨리가 검은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로 중무장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앨리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입꼬리부터 올려 보였고, 여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늦었군."

"늦었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

"뻔뻔하기도 하지."

"거래자를 대접할망정 오라 가라 하는 탐정보다야 뻔뻔하겠어?"

"내가 자네에게 정보를 구한답시고 접근한 게 잘못이었지."

방문자는 팔짱을 끼고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화구점의 주인과 마주 보고 있었고, 어떤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자가 숨길 기색이 전혀 없는 듯해서, 앨리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주인이 당황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화구점의 주인은 구부정하고 뚱뚱한 초로의 사내였다. 자다가 깼는지 정신이 없고 졸려 보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혀 달가워하고 있지 않은 것도 분명해 보였다. 웬 여자가, 그것도 평소 봐오는 소위 '예술가'적 패션을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이런 한밤중에 불쑥 찾아오는 일이 어디 편하겠는가. 앨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쿡쿡 웃었다.

"미행?"

"빙고."

"교전도 했군, 두 명이고. 처음에는 느리게 따라붙다가 자네가 도망치니까 마음이 급해서 싸우게 되었어."

"아이고, 또 시작이군. 그래 아가씨, 셜록 홈즈 놀이는 재밌어?"

"어제 산 가죽 자켓을 버린 여자를 보는 것보다야 재미는 덜하지."

"잠깐 뭐—"

앨리는 잽싸게 자켓을 벗어 던졌다. 자켓의 뒤에는 심한 흉터가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 굴렀을 때 난 모양이었다. 앨리는 짜증이 어린 눈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자는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한 가지 오해할까 봐 말해주는 거지만, 그 작자들은 자넬 쫓아온 게 아니야. 나를 노린 거지. 솔직히 자네를 왜 노리겠나? 자네가 그 유명한 검—"

"아이고 참 고맙네 그래. 그러게 내가 스리포츠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따랐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

탐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다시피 중요한 거래 중이니 잠시만 저기서 혼자 우울해하며 기다려 주겠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여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꽤 중요한 일이기나 한 듯이. 앨리는 눈가를 찡그리며 한쪽 다리에서 다른 쪽 다리로 무게를 옮기고는,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나오는 투로 대꾸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탐정 나리."

앨리는 여자가 피식 웃으며 주인에게로 몸을 숙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또다시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하기사 아슈비나 첸이 그녀를 직접 만나자고 부르는 일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 페인트가 어느 회사 것인지 찾을 수 있나?"

앨리는 고개를 들어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고개를 숙여 여자가 내민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는 목을 쭉 빼서 계산대 위에 놓인 또 다른 사진을 보았다. 한데 엎어진 페인트를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이었지만 어딘가 욕지기가 나고 어지러운 것이, 정신재해 함유가 분명한 종류였다.

"어어… 이런 건, 아무래두 그람플 사에서 나온 것 같은데 말요."

"그럼 그 그람플 사의 페인트를 두 종류 가져다주게."

앨리는 가판대에 몸을 기대고, 사내가 탁자 안으로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인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양동이 두 개를 꺼내올 수 있었다.

"여기, '그람플 초록-777-4' 페인트와 '그람플 보라-902-6' 양동이요."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꺼냈다.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땀이 비오듯 흘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운동 부족이었다.

"무슨 일로 이걸 찾수?"

"말했잖나. 사건에 대한 협조를 부탁한다고."

"아니 아가씨, 그러니까 그 사건이 뭐냐는 이야기지."

"지금은 알 것 없네. 어차피 날이 밝으면 자네도 알게 될 테니까."

무엇에 겁을 먹은 건지, 사내의 얼굴이 파리해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앨리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거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 그럼 대금은 어떻게…?"

여자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검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사내의 표정은 명함을 들여다보기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는 어느새 팽팽히 당겨져 있었고, 구부정한 등가는 번듯한 목재처럼 펴졌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빛, 사내의 시선은 찌질한 중년 사내의 그것이라기엔, 더 상위의 존재가 보내는 시선처럼 변해갔다. 재빠른 변화였다. 마치 지금까지 멍청한 늙은 가게 주인을 연기하기라도 하고 있었던 마냥. 앨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조용히 대답했다.

"좋은 수사 되길 바라오, 첸 양."

아슈비나 첸은 페인트 통 두 개를 양손으로 번쩍 들고는 힘들지도 않은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팔길 바라네, 주인장."


□ □ □ □


"너희가 얼마나 많은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련하시겠어, 탐정."

"잘 비꼬는 걸 보니 자켓과의 이별은 잘 이겨낸 모양이군."

"재수 없기는."

탐정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면서 트렁크에 페인트 통을 실었다.

"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협회원은 없어. 애초에 자네 같은 부류를 제외하면 탐정 협회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인사들이 태반인데, 우리라고 더 알 길이 있을까."

"그럼 저 사내는 어떻게 알고 널 도와준 건데?"

탐정은 아까 꺼내 들었던 검은 명함을 들어 보였다. 명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정회원, 아슈비나 첸.'

"우리 쪽 사람이니까. 아까 그자 같은 경우는 본래 정회원이었지만 은퇴하고 원로로 지내는 중이라, 정회원에게 협력할 의무가 있거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삥 뜯는 거 아닌가?"

"그렇게 요점을 잘 짚는 성격인 줄은 몰랐군."

"내가 좀."

"잘난 체하는 성격인 줄은 알고 있었고."

"하." 앨리는 실소를 내뱉으며 차체에서 몸을 떼어냈다. "말장난할 시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슈비나 첸. 무슨 볼일이기에 날 이렇게 부른 거야?"

"일단 미안하다는 말은 해두지. 자네가 뱀의 손에서 할 일도 많은데 이렇게 오라 가라 하기는 조금,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다는 것은 확실히 하고 싶네."

탐정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운을 띄웠다.

"서론이 긴데."

"다 부탁이 있어서 그런 거지."

"속이 시꺼멓군."

"아무리 그래도 검은 여왕에게 견줄 수 있을까, 앨리슨 차오?"

앨리는 별명이 불리는 것을 듣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용건이나 말해."

"살인 사건이 하나 났네. 내키진 않지만 거기 휘말리게 될 것 같아. 시간이 꽤 걸릴 거고, 그래서 계획했던 활동은 취소해야 할 것 같네. 그러니… 내가 저번에 언급하고 넘어간 그 사람, 자네가 홀로 찾아야 할 것 같아."

"그 사람?" 검은 여왕은 실소를 흘렸다. "벌써 죽은 지 수십 년은 되었을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죽었다면 묫자리라도. 아니면 마지막까지 지냈던 곳이라도."

둘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잠시 뒤에 탐정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고, 한 개비를 앨리에게 건넸다. 둘은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는 제사상의 향처럼 길게 위로 올라갔다. 앨리는 멍하니 탐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기 사이에서, 탐정은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표정이었다. 앨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요한 사람인가 보네?"

"많이 중한 사람이지."

"어떤 관계인데?"

아슈비나 첸은 입을 조금 열어 연기를 흘려보내고, 말없이 앨리를 바라보았다. 깊은 회색빛 눈동자가 앨리의 시야와 맞붙었다. 앨리는 눈을 조금 깜빡이고, 헛기침을 했다. 탐정은 말을 고르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깊은 침묵, 오래된 침묵이 허공을 감싸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슈비나 첸이 입을 열었다.

"몰라도 되네."

"…진짜 이러기야?"

"찾으면 알려주지. 그 이상은 나도 곤란해."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고 이런 대응이냐."

"좋은 경험이었지 않나."

"공격당하는 게 좋은 경험이라…"

"그리 부루퉁하게 굴지 말고."

탐정은 앨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타게, 가는 길에 태워다 줄 테니."

앨리는 트렁크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탐정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넌 어디로 가는데?"

아슈비나 첸은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앨리는 탐정의 얼굴이 잠시 멍해지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걸 잊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 앨리는 입가를 오므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니.

탐정은 이내 한 쪽 입가를 올렸다.

"멀리, 무진으로."


다음 날 아침, 시체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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