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소거제와 지난 날

통계예언학과, 제05K기지에 위치한 평화롭고 조용한 부서, 이곳에서의 일이라 하면 보통 여러 예언을 통계학적으로 연구하고 이산수학적 모델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부에 잘 알려진 빡빡한 업무만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aic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도 최종적으로 예언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뽑아낸 값이 전혀 상관 없어 보이고 무작위적인 값일지라도 사람이 일일히 해석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연구원끼리의 교류도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 건 아무래도 귀찮다는 듯이 다들 놀러나가는 연말에 혼자 개인휴게실에 먼지 쌓인 구형 연구장치마냥 처박혀서 반쯤 죽은, 그렇다고 해서 빛바랜 건 아닌 눈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인원들도 몇몇 있는 편이다.

오늘 내가 통계예언학과에서 상담하게 될 인원은 이런 부류 — 장막 바깥이면 결코 정상은 아닐 인간상이다. 2등급인 내 보안인가보다 하나 정도 높은 보안인가의 인원을 상대하는 건 차고 넘치게 해 왔다만. 상담 전에 주의받고 온 특이사항이 상당히 인상적이였는지라 주의를 더더욱 기울이고 있다.

서류상 인적사항에 따르면, 이람이라고 불리는 통계예언학과 연구원, 별다른 특이사항 따위 없을 거 같았지만 보고서가 유년기 시점부터 작성되어 있었기에 유심하게 보게 되었다. 내 보안상 인가로 접근할 수 있는 건 필수적인 주의 사항 정도가 한계이기에 어떤 과정으로 재단에 들어오게 된 건지는 파악하지 못했다만.

일반적으로 고려되는 시간보다 매우 긴 시간을 — 어쩌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 E계급1에서 지내왔기에 행동이나 어휘가 다소 부적절할 수 있다는 점, 과거의 임무 — 이 또한 보안 인가상 상세 내용은 알지 못했다. 다만 항밈적 인자가 서류 곳곳에 퍼져 있다는 점에서, 보안 인가가 높다 하더라도 직접적 접근 시 매우 치명적인 정보일 것임은 짐작 가능했다. — 에서의 치료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기억소거제를 다량 처방받았다는 것 외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이 정도면 할만하지.

서류를 전부 정리하고 깔끔하게 상담실과 테이블을 정리한 후, 몇십 분 뒤에 상담 예정자가 들어왔다. 인적 사항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주의사항과는 별계로, 그는 예의바르고 차분하며, 조금은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앳된 겉모습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그의 인상은 상담자 중에서는 좋은 편이였다.

"상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람 연구원, 기억소거제 후유증 때문에 신청 드렸다고 드렸는데, 의료부와는 상의된 문제인가요?"

차트에 적힌 내용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보통의 인원이라면 긴장하기 나름인데, 오히려 그는 한결 풀어진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몇 차례 상의해봤습니다. 기억소거제도 비변칙적 약물과 같이 지속적 투약 시 내성이 생기는 건 아닌지, 인지 저항성의 영향을 받는 종류가 있는지 말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좀 많아서요. 돌아온 답변은 심적 문제나 기억제 처방의 문제일 수 있다는 거였는데, 기억제를 처방받은 기억은 없거든요. 단순하게 제가 기억 못한 거라면 기록에도 없을 이유는 없죠."

"그래서 제 심적 문제가 아닌가 하여 상담드리러 왔습니다."

눈 앞의 남자는 자신의 업무 환경을 설명하고 처방 중인 변칙적, 비변칙적 약품의 리스트를 열거하면서 설명해줬다. 의료팀이 아니라서 이름까지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만, 고대예언팀이나 역사적 예언을 담당하는 부서의 경우에는 보여주는 예언2을 명확히 관찰하기 위해서 변칙적 환각제의 보조를 받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약들에 관하여 의료부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뭔가 자신이 잊고 있는 것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지 물어봤다. 상담자, 그것도 나보다 높은 인가에 있는 인원의 머릿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니, 기억소거제 처방 기록은 애초에 본인이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연말에 쉬고 싶은데 업무가 밀려서 처방전이나 받아 먹으려고 하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보이는 대로 둘러댔더니 돌연 그가 태도를 바꿔서 역으로 질문을 해 왔다.

"잊고 있기 마련이지만, 재단에서 제공하는 변칙성 노출 정기 검사나 건강검진만큼이나 심적 안정을 위한 상담 역시 중요한 요소죠. 여기에서 상담 대상자도 아닌 담당자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 될 거 같은데요? 저야 괜찮다만 윗분들이 들으면 일이 좀 커질 거 같네요. 감시 없이 자율적인 운영을 추구하는 기지에서 이런 업무적 해이가 용납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테니까요."

"…혹시 대답하기 어려우신가요?"

이건 그냥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위에다가 일러바친다는 말 아닌가. 그의 지적이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 역시 기분이 상했다. 그런 위치에 상관없이 상담실에서는 내가 판단하고 조언을 해주는 쪽 아닌가? 거기다가 그런 자율적 판단 들먹이면서 정작 본인은 그 권위로 나한테 태도 불량을 지적하는 것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싸가지 없기는.

"말씀 드린 내용은 건의사항이나 SCPINET 측 요청사항을 통하여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는 제가 상담자입니다. 상담 대상자가 기지 이사관이나 최고 등급 인원이라고 할지라도 대답을 하는 건 제 판단 하에 이루어집니다. 질문을 하신다면 최소한 예의는 갖춰서, 절차에 맞게 해 주세요. 방금 발언은 상담자에 대한 폭언으로 간주되어 최대 징계 절차까지 수립될 수 있습니다. 선례가 없었던 만큼 이번에는 경고로 끝내겠습니다."

이 정도로 으름장을 놓으면 보통은 아연실색해서 나간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의료부의 도움으로 완치되어서 아무 일 없이 일하게 되겠지. 왜냐면 보통 상담을 자진해서 오는 놈들은 적어도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 인지할 만큼 멀쩡하고, 그 정도야 의료부가 해결해줄 수 있다. 저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이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업무 태도를 들먹여준다면야 나도 공격적으로 나서주마. 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가지도 않고 말을 이어간다.

"방금 발언은 사과드립니다. 상담자라고 해서 모든 답변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걸 망각했습니다."

내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것 마냥 답변을 한다. 진심 어린 사과와는 별계로 이쯤 되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기억 소거제 부작용이 있을 정도로 많이 맞은 게 사실이 아닐까?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려면 그 부작용이 생기고 맞아야 확인할 수 있으니까, 자연히 기록 같은 걸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에 대해서 상담하러 온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것에 대해 정확히는 묘사할 수 없다. 제한된 정보 이상으로, 본능적으로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어 방이나 문장 생성형 프로그램하고 문답을 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 내용을 이해하고 내놓는 답변 같았다. 어떤 답을 해야 원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캐낼 수 있는지를 묻듯이, 초조해지는 나를 그의 큰 눈동자가 주시한다. 수백, 수천 번은 이런 일을 본 것마냥, 그의 눈에는 약간의 웃음기까지 있는 거 같았다.

"아, 딱히 독심술이나 변칙적 능력 같은 걸 가진 건 아니에요. 그저 남들이 못 보는 행동을 유심하게 보고 잡아낼 수 있는 거지. 그게 제 일에서도 도움이 되고요."

"주제로 돌아가서, 제가 잊고 있는 게 어떤 걸까요? 경솔한 질문일 수도 있겠다만, 답해 주실 수 있는 선에서 답하신다면 기억소거제의 투여로 잊게 되는 기억이 보통은 어떤 종류인가요? 그것도 아주 지속적이라면."

나는 자세한 건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또 대답을 재촉할까봐 아는 대로만 답변했다. 기억소거제는 보통 특정한 기억이나 기간을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고, 지속적으로 투약되는 경우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기록 자체가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는 경우거나 어떤 경우에라도 지워야 할 기억이기에 투약된다는 사실만 말해주었다.

그는 처음에 내가 상담 내용을 말해줄 때처럼 지그시 웃는다. 나는 그 미소가 아까처럼 해맑아 보이지 않았다. 온갖 것이 뒤섞인 찰나의 표정 끝에 그는 입을 연다.

"역시나 상투적인 대답인가요?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학과장님도, 동료들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내 기억이 과거로 갈수록 흐릿한지,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왜 거의 없는지, 어쩌다 통계예언학과에 오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거든요."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에서 얼핏 슬픔을 본 거 같다. 일순간이였는지 내 착각인지 그는 아까와는 달리 정말로 행복한 웃음으로 이제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어요. 저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좋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 또한 저를 반겨준다는 것 말이에요."

수많은 부서를 봐 왔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조차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였다. 그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망각을 위해 자신이 짜 놓은 망상 속에 갇힌 거지.

그는 예외로 보였다. 자신이 망각한 걸 찾고 싶어 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데, 아까 말한 태도 지적은 그냥 좀 심한 농담이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다만 사람하고 소통하는 게 조금 서툴러서… 되도 않는 농담이라 기분 나쁘시거나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여기 각설탕 가져가도 되나요?"

"커피는 괜찮아요, 바깥에도 많이 있고 따로 먹는 게 나아서요. 방에서 남은 데이터 좀 정리하고 시간 남으면 어제 조립하던 장난감이나 조립해야지. 아 방금 말은 그냥 혼잣말이에요. 근데 좀 졸려서… 각설탕만 받고 개인 휴게실로 돌아가봐도 되나요?"

어이가 없네, 그게 농담이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각설탕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할 말을 잃었다. 원래 내 커피에 타먹는 거지만 저렇게 바라보는데 안 주면 되게 나쁜 사람이 될 거 같다.

정말 정신없는 상담이였다만 이건 확실하다. 적어도 내가 만난 상담자 중에서는 원래부터 비틀린 건 아니라는 거랑, 단지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랑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잘 몰라서 일을 그르치는 것 같다는 거다. 커피부터 한 잔 하고 써야지.

요약해보면 정말 몇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밉다만, 그걸 본인이 자각하는 거 같지는 않다. 재단에서 구를 만큼 굴렀음에도 이렇게 순진무구한가 싶다가도 눈빛이 변하여 날카롭게 질문하기도 한다. 그때의 눈빛은 가벼운 질문 주고받을 때 보여주던 반짝거리는 눈하고 달랐다. 아까도 써 놨지만 근본적인 공포를 상기시키는 눈빛. 저 순둥이 같은 녀석이 어떻게 그런 심연이라도 본 듯한 눈을 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는 안 가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만일 그가 망각한 걸 되찾거나 망각해야 할 걸 잊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지금만큼이라도 순수했으면 한다. 사람 놀려먹는 듯한 말재간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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