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은 한반도에서 크기와 이상 현상, 양 측면에서 가장 큰 넥서스이다. 무진의 변칙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안개와 관련된 방식으로 나타나며 특히 고립이라는 면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 그에 따라 높은 변칙 활동량에도 불구하고 무진에서 발생하는 변칙 현상의 대부분은 장막 정책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남게 된다. 또한 이는 무진 내에서 발생하는 산발적인 국소적 흄 준위 급락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선우아난 박사, 『무진의 넥서스적 특성 연구』
—
10월 31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진
바닷가 도시에 해무가 닥쳐드는 일이야 드물지 않게 있는 것이나, 무진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안개가 박무로, 다시 안개로 바뀌며 그 농도를 달리할 뿐 무진에서 안개가 아주 떠난 적은 없었다. 이곳이 안개의 나룻터라고 불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방문객들은 만약 안개가 없었다면 무진의 관광이나 산업은 지금보다 훨씬 번창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건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진에선 그 어떤 멋진 풍경도 안개에 가리어 의미를 잃고, 그 어떤 멋진 아이디어도 안개 속에서 흐려지며, 그 어떤 대단한 열정도 안개에 뒤덮여 퇴색되고야 만다. 안개는 이 초라한 시골 도시를 외부와 단절시켰고, 무진은 그 안개에 휩싸인 채 막연히 안주하여 살아갈 뿐 어떤 역동성이나 진취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명작 문학에선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냄새"가 난다고 표현했을 만큼, 무진이란 그렇게 고여있는 공간이었다. 내가 어릴 적 학업을 위해 무진을 떠나면서 희열을 느꼈던 것도 이 지긋지긋한 촌락에서, 지긋지긋한 안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해방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고, 이제는 사회 시스템의 한 구성원이 된 지금의 나는 다시 무진에 있다. 재단 현장요원으로서 바라보는 무진은 과거의 내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르다. 한반도 최대의 변칙 지역인 이 지방 소도시는 겉보기엔 안개가 선사하는 나른함에 잠겨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개가 몰고 오는 비현실에 맞서 저마다의 현실을 부여잡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터전인 것이다. 그저 그 탓에 변화하고 나아갈 여력이 없을 뿐인 것이다. 내가 나고자란 이 고장에 본디 느끼던 혐오감은 이곳에서 일하며 거의 씻겨나갔다. 아니, 이제는 동정심을 넘어선 기묘한 애착마저 느끼고 있었다.
10월이 막을 내리던 어느 가을 날, 나는 늘상 하는 순찰길의 경로를 따라 자전거를 굴리고 있었다. Nx-64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이상 현상과 변칙 개체가 넘쳐나는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안개 너머, 장막 너머를 모르는 민간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린 정체를 숨겨야하고, 나도 현장요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위장 신분을 내세우는 것이다. 언젠가는 무진대학교의 늦깎이 복학생으로, 언젠가는 서면 파출소의 순경으로, 언젠가는 무진항의 항만 감시원으로… 어느 중소 보험사의 영업사원으로 행세하는 지금은 무진 남부 전역을 돌아다니며 변칙 징후를 찾아다니는 게 내 주요 업무라고 하겠다.
이미 안개가 일광을 가리우기 시작하고 가로등이 하나 둘 제 역할을 하려 기지개를 펴는 이른 오후였다. 나는 무진의 안갯길을 돌아다니는 이들에겐 필수 지참품인 LED 전조등을 밝힌 채 철제 프레임에 걸터앉아 헬멧을 쓰고 페달을 밟았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일하는 게 좋았다. 도보로 다니는 것보다 넓은 구역을 담당할 수 있으면서, 차를 몰고 다니는 것보다 밀도 높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진공항 근처에 우후죽순 생겨난 주택가와 상점가를 벗어나 해안을 따라 놓인 마을길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꼴에 21세기를 맞이하고 열 해를 두 번이나 넘겨간다고,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로 대충 덮여있던 마을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왕복 2차선 도로가 되어 있었다. 길 오른편으로는 광양만을 마주하고 눌러앉은 방파제가 길게 줄지어 있었다. 한동안 길을 따라가던 나는 방파제의 행렬에서 홀로 벗어나 바다로 내뻗은 제방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인근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이 제방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재단에서 SCP-521-KO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능적으로는 별 쓸모도 없는 제방에 불과한 SCP-521-KO는 올라선 사람이 안개에 갇혀 나가지 못하고 헤메도록 만든다. 무진에서 근무하는 재단 직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잘 알려진 변칙 대상이다. 하지만 무진에선,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은 안개 속에서 헤메게 되기 마련이다.
짙어져가고 있는 안개가 미처 해안을 뒤덮기 전인 지금, 제방은 드문드문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래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낡고 이끼 덮인 제방은 변칙성을 제하고 봐도 다소 기이한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속도를 줄여 제방 어귀에 자리잡은 조촐한 초소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간만에 이쪽 길이 동하셨던 모양입니다," 초소를 지키던 경비대원이 반갑게 농을 건넸다.
"예, 오늘은 기지 안 들르고 곧장 시내로 올라갈 생각이라서요. 믹스커피라도 한 잔 얻어먹을까 해서 왔죠."
나도 너스레를 떨며 자전거의 스탠드를 가볍게 차서 세웠다.
"며칠 만에 들러선 다방 취급이십니까? 오늘은 마침 커피가 다 떨어졌으니 이거라도 챙겨 가시죠."
"와, 사과에서 윤이 다 나네요."
"마누라가 청과상에서 알 굵은 것들로 골라 담아왔습디다. 요원님 오실 줄 알았으면 좀 깎아둘 걸 그랬는데 원 참…"
"아뇨, 아뇨. 오히려 얻어먹기 미안할 정도인데요."
"아들 같아서 그래요. 고생하시는데 먹고 힘 좀 내시구랴."
"그럼… 염치 불구하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경비원이 건네는 사과를 받아 한 입 깨물었다. 황록색이 드문드문 섞여있지만 전반적으로 붉게 잘 영글은 사과를 내 앞니가 서걱 소리를 내며 할퀴자 먹음직스러운 샛노란 속살이 드러났다. 누가 제철 아니랄까봐 사과는 달콤한 과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가에 넘쳐흐른 과즙을 소매로 훔치고 나서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넨 나는 사과를 한 손에 든 채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눅눅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계속 달리자 휑하던 주변 풍광에 나무와 건물이 하나 둘 쭈뼛쭈뼛 끼어들기 시작했다. 가로등들은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음에도 일제히 제 불을 밝혀 태양을 가리운 안개를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왼편으로 곧게 뻗은 여순로 큰길 위에 '무진읍' 표지판이 보였다.
무진읍은 십수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무진 안에서도 특히 중요한 장소이다. 예전부터 관아와 장터가 읍내에 있었고, 근대 들어 역과 항구가 들어서면서 일거리와 주거지를 찾아 모인 사람들이 많았기에 무진 읍내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항상 들르는 작은 슈퍼 앞에 자전거를 세우면서 사과를 한 입 더 베어물었다. 맛있게 으적거리다가 무심코 삼켜버린 두 입 째의 사과 덩어리가, 목구멍을 굴러넘어가 식도를 틀어막으며 전진하는 감각이 유난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콜록대며 헛구역질을 했다. 다행히 사과 조각은 심하게 걸리진 않았는지 금방 제 갈 길을 찾아 밑으로 내려갔고, 난 그제야 막혔던 숨을 터트릴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며 허리를 펴자, 꺼질랑 말랑 하며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읍성 마트"라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슈퍼마켓이라기보단 조금 큰 구멍가게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가게다. 이런 가게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한산해져 가는 건 흔한 일이지만, 지역의 노인들이 자주 찾는 이곳은 여전히 내겐 중요한 정보 수집처였다. 나는 자전거를 제대로 세워두고 가방과 헬멧을 안장 위에 올려둔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읍성 마트로 다가갔다. 두 짝으로 된 미닫이 유리문에는 옛적에 도로명 주소로 바뀔 때 붙였던 홍보 스티커부터 시작해서 오래된 맥주 광고, 소주 광고 따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잔뜩 붙어 있었다. 유리문을 옆으로 밀자 문 위에 연결된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었다. 계산대에 앉아 가게를 보고 있던 주인 할머니가 껄껄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워메~ 뭘 그리 급하게 먹어부러써야. 조심혀, 체하믄 약도 없응게."
"어허허,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요. 어르신도 별 일 없으셨죠?"
"아유, 뭐 별일이야 있을라꼬. 저번에 왔을 때랑 변한 것도 읎어야. 아. 사과 하믄 요 저짝에 사과 들여놨는디 요것도 먹어볼랑가? 대구서 떼온 건디, 맛도 좋고 눈에도 좋고…"
"에이, 곧 저녁 시간인데요 뭘. 이거 하나로 됐어요. 그리고 눈이 좋아져 봐야 볼 게 안개 밖에 더 있겠어요?"
"그려? 허기사 그두 글치. 그라면 딴 거라도 좀 구경하다 가랑께."
내가 능청스럽게 농담으로 흘리자 할머니가 웃으면서 얘기했다. 나는 알겠다며 싱긋 웃어보이고선 가게를 둘러보는 척 하며 진열대 뒤로 이동했다. 할머니는 내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나 말고 달리 손님은 올 낌새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허탕인 모양이다. 다음 코스는 어디로 갈 지 생각하며 나는 사과를 마저 먹으려 했다. 방금 목에 걸렸던 것 때문인지 사과를 입으로 가져가는 내 움직임은 조금 조심스러웠다.
앞선 두 입으로 잘 익은 과육이 드러난 곳을 골라 그 옆을 깨물자 세 번째 조각이 입 안에 들어와서 향긋한 사과맛을 퍼트렸다. 그 달콤함의 틈에 숨어있다가 돌연 날을 세우고 뛰쳐나온 시큼함이 내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나는 밀려오는 현기증에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들고 헛딛듯이 내민 발로 휘청이는 몸을 겨우 세워두었다.
눈을 비비고 흐릿해진 초점을 다시 맞추자 나는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명백히 느껴지는 어색하고 낯선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무진 어디서나 느껴지던, 이 변칙적인 지역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모두에게 납득시키던 미세한 불길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단칸방 가게를 밝히고 있는 조명도 아까와는 다른 색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칙칙하고 음울한 회색이 사라진 만큼, 화사하고 명료한 원색이 그 자리를 채웠다. 마치 20세기 필름 영화에서 현실로 튀어나온 것처럼.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베어먹은 자국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사과가, 힘이 빠져버린 내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똑, 데구르르 소리가 이상할 만큼 또렷이 귀를 맴돌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굴러가는 사과를 눈으로 쫓았다. 사과는 비틀거리며 굴러가다가 가게 문턱에 걸려 멈춰섰다. 나는 비척비척 문가로 걸어갔다. 사과를 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눈가가 빨개질 정도로 몇 번 씩이나 눈을 비볐다. 그만큼 지금 내 눈에 맺힌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개가 걷혀 있었다.
언제나 이 도시를 맴돌던 안개가 한 줌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용히 중얼대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무진이 재단의 감시 하에 놓이고 근 7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이정도로 완벽하게 안개가 걷힌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애초에 그 안개야말로 이 넥서스를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하늘은 안개는 커녕 구름 한 점도 없이 청명한, 무진 밖에선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가을 날씨의 모습이었다. 태양은 낮은 건물들 위로 아직 제법 높게 걸린 채 밝게 웃어보였고,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히 켜져 있던 가로등들도 이 시간에 무슨 볼일 있냐는 듯 조용히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떨어트린 사과를 주워 자켓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황급히 뒤를 돌아 계산대로 갔다. 졸고 있던 주인 할머니는 내가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인기척에 막 깬 모양이었다.
"어르신, 어르신!"
"나 귀 안 먹었어, 총각! 뭔 일인디 고로코롬 소리를 지르고 난리여?"
"밖에 좀 보세요. 안개가 걷혔어요!"
"아유, 거 날 좀 갰다고 뭐 그리 야단이여 글쎄."
"어르신은 놀랍지도 않으십니까? 무진에 안개가 없다니요!"
"무진이라니… 그게 뭔디야?"
"…예?"
내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굴러떨어졌다. 주인 할머니는 당췌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 하하, 어르신. 농담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총각이야말로 늘갱이가 잘 모른다고 놀리고 그러는 거 아녀!"
"어르신, 무진이요! 무진 토박이시잖아요. 전라남도 무진시를 모르신다니 말이 됩니까?"
"뭔 소리여 시방, 난 순천 사람인디."
"예? 아니, 순천서 나셨어도 여긴 무진이잖아요!"
"총각 진짜 뭐 잘못 먹었어야? 여기 광양이여, 광양!"
주인 할머니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역정을 내었다.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한참 정신을 못차리고 있자 할머니는 슬슬 화보단 걱정이 앞섰는지 내게 괜찮냐고 말을 걸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서 있었다. 내 머리는 과부하에 걸려 제대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주인 할머니가 무진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용수철마냥 문 밖으로 뛰쳐나가 허겁지겁 문에 붙은 광고지들을 뒤졌다. 난잡하게 붙어 있는 광고지 틈에는 10년도 더 전에 시청에서 붙여놨던 새 주소 홍보 스티커가 있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도로명 주소를 생활화합시다. 우리집 새 주소는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읍성1길 29'
나는 너덜너덜한 스티커를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광양시에 있다. 이 접착성 종이쪼가리가 내게 그렇게 단언하고 있다. 분명 나는 방금까지 무진시에 있었는데, 지금 나는 무진이 아닌 광양에 있다. 분명 할머니는 어제까지 무진 사람이었는데, 지금 할머니는 순천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무진시에 있지 않다. 나는 지금, 나는—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헬멧을 급하게 주워 머리에 걸치고 묶어놨던 자물쇠를 급하게 푼 뒤, 자전거를 거치대에서 빼내자마자 나는 안장에 몸을 날리듯 걸터앉고 페달을 밟았다. 안개가 없으니 전조등은 켤 필요조차 없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는 지금 내 재단 경력에서, 아니 일생을 통틀어서 가장 큰 변칙적 현실 개변 사태에 휘말려 있는지도 모른다. 일개 현장요원이 임의로 조치할 사안도 아니거니와 무엇을 어떻게 조치해야 할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상부에 보고하고 기지 차원에서 대응에 나서야 할 것이었다. 자전거를 남쪽으로 몰면서 나는 인이어와 연결된 통신 장치를 작동시키려 몇 번이고 연거푸 호출 버튼을 눌러댔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파도가 치는 것 같은 무전 잡음 소리 뿐이었다. 안개가 사라진 것이 이 근방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뭐가 됐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64K기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어떤 대체우주는 우리 우주와 아주 가까이에 존재하며, 그 현실성도 우리의 것과 아주 국소적인 차이만 나타난다. 우리는 이런 특이한 대체우주를 별도로 "다중현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 우주와 같은 중심을 공유하는 가지들이지만, 일부는 완전히 별개의 중심에서 발달했다. 이러한 우주들은 우리 우주와 상호작용하거나 연결, 또는 중첩될 수 있다. 지역의 국지적 현실성이 매우 낮을 경우, 인위적 개입 없이도 이러한 연결이 순간적으로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만약 XK급 시나리오의 저지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우주의 합의된 현실성이 붕괴할 경우 이런 다중현실은 좋은 도피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트리스탄 베일리 박사, 『탈출구: 대체 가능한 다중현실 연구』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시내를 벗어나 큰길을 달리고 있었다. '당신은 광양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나를 비웃으며 오른편으로 스쳐지나갔다. 다리가 풀리는 것 같은 탈력감에 휩싸였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억지로 억지로 발을 움직여 자전거를 계속 전진시켰다. 팽팽히 당겨진 체인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호두 삼거리에 다다라 인덕로에서 여순로로 진입한 나는 이제 여수반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원래라면 여기부터 넉넉히 8km는 더 무진시 행정구역이 남아있었을 테지만, '여수 Yeosu 1km'라 적힌 교통 표지판에서 무진의 흔적은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서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개가 가득하던 무진에선 이 노을이 안개를 타고 번져나가 온통 울긋불긋해진 하늘이 무진의 드문 절경으로 꼽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하늘은 제 서쪽이 불타든 말든 그저 검푸르게 어두워질 뿐이었다. 도로변의 가로등도 다시 점점이 불을 밝혔지만 반갑지는 않았다. 되찾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빛 아래 저 먼발치에 등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하루 종일 빛나고 있어야 할 등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는 지쳐가는 다리를 재촉하며 기지로 향하는 갈림길로 빠져나왔다. 나는 한 손으로 아이디 카드를 꺼내기 위해 품을 뒤지다가, 핸들을 잡은 나머지 손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자전거가 나자빠지면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찰과상을 입은 무릎과 손바닥이 쓰라려왔지만,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고통을 참고 일어나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 넘어진 걸로 앞바퀴의 휠이 구부러져서 더이상은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자전거를 도로 밖으로 치워두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지 입구가 보일 무렵 나는 차단봉과 무장 경비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좀 더 가까이 가보니 경비는 커녕 건물 전체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기지 둘레에 설치된 철망 담장과 사유지임을 알리는 출입금지 팻말은, 척 보기에 원래보다 더 낡아 있긴 했지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깨에 조금 못 미치는 철망의 한 구석에는 차량용과 인원용 출입구가 나 있고, 마찬가지로 철망으로 된 문은 쇠사슬과 자물쇠로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내가 오늘 기지를 나설 때만 해도 걸려있지 않던 것들인데도, 쇠사슬은 마치 수십 년은 그 자리에 걸린 채 관리받지 않은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녹슬어 있었다.
헬멧을 벗어들고 몇 차례 휘둘러 쇠사슬을 찍어보았지만, 녹만 잔뜩 떨어질 뿐 사슬은 부서지지 않았다. 젠장, 영화에선 이정도 낡은 쇠사슬은 금방 작살나던데… 나는 헬멧을 옆에 던져두고는 자전거로 돌아가 짐칸에 묶어둔 서류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열자 위장용 보험 서류 밑에 자전거 수리용으로 넣어둔 공구 세트를 찾을 수 있었다.
몽키 스패너로 쇠사슬을 꽉 붙들고 비틀자 쇠사슬은 심하게 삐걱거렸다. 좀 더 힘을 주니 그중 유독 녹이 많이 슬어있던 한 부분이 버티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좋았어."
쇠사슬을 치워버리고서 나는 조심스레 철망 담장의 문을 열었다. 지상 건물은 원체 등대에 딸린 창고로 위장했던 만큼 별 볼 게 없었고, 뭔가 변해버린 지금도 그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창문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간절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심경을 애써 달래며 S동 건물로 다가섰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떤 조명도 켜져 있지 않았기에 건물 안은 칠흑같이 어두컴컴했다. 나는 방금 공구를 챙길 때 자전거에서 겸사겸사 떼어온 전조등을 켜 건물 안을 비췄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게 무슨…?"
나는 하마터면 그대로 쓰러질 뻔 했다. 피로에 지친 몸뚱이를 지탱하며 끌고 왔던 의지가 한 순간에 폭삭 무너진 것 같았다. 제64K기지의 진입구였어야 할 이 공간은 역정보로 설정해둔 정체보다도 더 한심하고 쓸모없는 빈 창고인 채로 나를 맞이했다.
"이봐요.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넋이 나간 것마냥 빈 방 안을 헤집고 다니며 나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나 여기 있어요, 나에요…! 대답 좀 해봐요!"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신체나 공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공포가 엄습해온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텅 빈 폐창고 곳곳을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거대한 지하 단지는 커녕, 한 평 짜리 조그만 지하실조차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재단 직원 단 한 명도, 변칙 개체 단 하나도 이곳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제64K기지는, 재단은 이 장소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삼십 분 동안이나 건물 안에서 의미없는 탐색을 계속하며 방황하다가 진이 다 빠져버린 나는 끝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길을 잃고 부모와 헤어진 아이처럼 나는 서럽게 울었다. 감정은 형태를 가질 때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인지라, 일단 눈물의 모습으로 터져나온 슬픔은 한동안 주체할 길 없이 이어졌다.
서서히 눈물이 멈출 무렵이 되자 당황과 슬픔에 잠겨 있는 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만이 텅 빈 가슴팍에 침전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S동— 아니, 이제는 S동이라 부를 수도 없는 폐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노을이 스멀스멀 숨어들었다. 여광이 사그라들며 금세 깜깜해진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무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예쁜 밤하늘이었지만, 감탄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대체 무진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복잡한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요원 세미나에서 들었던 이런저런 강의 내용들을 생각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걸 느끼며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정도로 내가 무력하게 여겨진 건 처음이었다.
철망 담장 밖으로 나온 나는 여전히 고민에 빠진 채 걸음을 내딛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내키지도 않고 갈 곳도 잃어버린 걸음이었다. 나는 그러다가 무심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축축한 감촉에 흠칫 놀라 손을 꺼내자 거기엔 몇 시간 동안 주머니 속에 방치되어 말라가고 있던 먹다 만 사과가 있었다.
그 사과를 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떤 발상이 떠올랐다. 분명 이곳에는 안개도 재단도 변칙도 더이상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SCP-521-KO라면, 언제나 저 바닷가에 떡하니 눌러앉아 있는 그 제방이라면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여전히 안개가 낀 채 관람객을 비웃으려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인자한 경비 할아버지가 무슨 악몽이라도 꿨냐고 상냥하게 물어와주진 않을까?
SCP-521-KO는 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근거 없는 기대가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사과와 전조등을 꽉 움켜쥐고선 바닷가를 향해 힘껏 달음박질해 나갔다.
나는 또 망연자실해서 서 있었다. 낡고 이끼 덮인 그 제방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지만, 여기에서도 안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방 옆에는 경비원은 커녕 초소조차 없었다. 제방은 그냥 해안가에 널린 평범한, 관리받지 않는 제방일 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없던 나는 힘겹게 발을 떼어 비척비척 제방 위로 걸어갔다. 제방 끝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나를 방해하는 변칙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풍이 몰아치자 아까 자전거에서 넘어질 때 부딪혔던 무릎이 시려왔다. 이 고통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좆같은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너무나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제방 끝에 이르러, 그곳에 놓인 팻말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제방 위가 미끄러우니 낙상에 주의하세요.'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무했다. 이곳에 안개는, 변칙성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미친 현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재단도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변칙성이 없는데 재단이 왜 필요하겠는가?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으하하하학! 으아아악! 아악! 악!"
웃음은 한동안 힘 없이 이어지다가 점차 격앙된 괴성으로 바뀌어갔다. 억울했다. 난 인류와 정상성을 수호하기 위해 이름도 명예도 버리고 열심히 헌신한 죄 밖에 없는데, 왜 나만 이렇게 멀쩡한 세상에 아무 준비도 없이 버려져야 한단 말인가? 왜 내게 소중하던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악을 지르다가, 사과를 손에 꼬나쥐고 힘껏 던져버렸다. 정작 사과는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바다에 떨어졌지만, 나는 이끼 낀 바닥을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제방 밖으로 넘어져버렸다.
풍덩, 느닷없이 바다에 빠져버린 나는 미처 숨을 참지 못했고, 터져버린 숨에 뒤이어서 바닷물이 입과 코로 들이닥쳤다. 나는 꼼짝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가운 현실이 무겁게 내 몸을 짓누르고, 저항할 의지를 잃은 내 목구멍을 비집고 폐포 하나하나를 죽음으로 적셨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안개. 흐릿해지는 내 시야를 가리우러 안개가 찾아왔다. 뿌옇고 축축한, 기분 나쁘고 익숙한 안개가 번져와 조용히 나를 감쌌다.
그 너머로 수면에 일렁이는 빛도 보였다. 이 깜깜한 밤에 무슨 빛이 수면을 비추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음대로 그것이 등대의 빛이라고 결론지었다.
초점이 풀려가는 눈으로 그 빛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 무수한 사람의 형상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똑같이 혼란을 겪고 고통받은 것 같았다. 그들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안개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안개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