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파랑 너머로 데려가세요.

나를 파랑 너머로 데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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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왔는데. 극장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형상을 발견한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쾌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불쾌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날로 정했다. 무대에 올라야하는 날이니까. 굳이 여자가 겉으로 소리내어 혼잣말하지 않은 것은 이 장소가 극장, 무대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오늘은 극이 오르지 않는 날이었으나, 여자는 프로였다. 프로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일터에서 하던 버릇대로 사는 것이다. 지금의 여자처럼.

여자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자에게는 그래야 할 공간이었다. 여자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최근 마지막 공연을 끝낸 극에서 등장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떠올렸다. 그 대사와 춤, 그리고 연기. 혹시라도 주연으로 발탁된 여배우가 공백이 있을까봐 여자는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고,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연습을 했었다. 무대에 오를 수 있던 기회는 결국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아쉬움이 남아서 여자는 휴일에도 굳이 이 곳을 찾았다.

무대. 휴일이 아니라면 혼자서 독점할 기회가 없는 곳. 여자는 이 곳이 무대 위라는 것을 의식하며 행동했다. 누군가가 들어와 있으니, 관객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배우의 연기는 움직임부터 시작 된다. 여자는 무대의 중앙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귀한 시간이었다. 이런 순간이 아니라면 여자는 무대를 장악할만한 할 기회가 아주 적은 배우였다. 여자는 무대 위에서 관객의 눈에 어색하게 보이지 않도록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외우고 있던 극의 대본을 떠올렸다. 소심하고 얌전한 성격이었기에 끝내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사라져버린 여주인공. 그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여주인공이지만 움직임은 결코 당당하지 않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후부터 여자는 여주인공 외에는 없는 극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그 것은 여자의 행동 범위를 제한하며, 곧 '라주라이트'라는 이름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이 곳은, 나의 무대다.
그리고 나의 무대 아래에는 관객이 있다.

그 몰입은 길지 않았다. 여자가 관객의 얼굴을 확인 한 순간 깨져버렸다. 여전히 여주인공의 대사를 속으로 외우며, 그가 극에서 했었던 몸짓과 행동을 연기하였으나 그 행동 중에도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이안 마일스'. 왜 이 곳에 있을까?

무대 위의 여자는 이제 객석을 꽤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극이 올라가지 않는 휴무인 오늘, 관객석에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는 목격했다. 그 곳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여자가 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안 마일스'라는, 이름만 아는 남자다. 전부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여배우는 아주 돈이 많은 VIP, 혹은 불법이지만 개인적으로 맺은 스폰서 혹은 연인에 준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관객과 개인적으로 거의 교류하지 않는다. 라주라이트는 이런 극장의 무명 여배우에게 순수한 의미에서 응원하는 개인적인 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최소한, 여자가 아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런 자신이 팬의 이름을 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점에서 '이안 마일스'는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무척 특별한 남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배우가 개인적으로 이름만 알고 있는 팬이라니. '이안 마일스'와 자신, 둘은 얘기를 섞어보기는 커녕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겨우 다른 직원에게 물어서 알게 된 것이다. 여자가 무대에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연기를 하는 것을 '이안 마일스'가 보고 있었다.

무대의 조명은 켜지지 않았으나 여자는 극장의 내부 자체를 밝히는 조명에 기대어, 그 곳에 있는 유일한 사람의 형상을 더 자세히 살폈다. 이안 마일스. 화려하지는 않은 외모에 드레스코드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 모습을 갖춘 정장. 여자의 눈에도 익은 옷이었다. 새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낡아빠진 구닥다리인 것도 아니다. 이 극장의 수준에 간신히 맞추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차려입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복장이다.

그런 느낌의 흔해빠진 남자.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제법 시간이 흘러버린 여자는 이 극장에 오는 남자들이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수준 높은 고전이나,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극장이다. 그냥 예쁜 여자들이 꽤 나오는 극을 방영하는 극장. 손님들은 여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배우를 본다. 그들의 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든 여자를 보았다. 적당한 외모에 괜찮은 노래 실력, 보기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춤과 연기를 갖춘 그들을 손님의 대다수인 남자들은 사랑했고 그 것에 기꺼이 돈을 썼다. 하지만 무엇하나 일류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다.

라주라이트는 자신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몇 년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여자가 푸른 빛을 몸에 걸치고 라주라이트라는 예명을 쓰며 수 년째 일하는, 일해야하는, 일할 수 밖에 없는 이 곳은 일류 극장이 아니었다. 여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자는 무척 인상적인 벽안을 가지고 있었고, 흑발의 머리카락에 새파란 벽안은 이 지역에서는 드물어서 잠시 주목을 받았던 적도 있다. 그래서, 그 것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키워나갔다. 파랑. 파랑이 데려가 줄 자신의 더 큰 무대에 대해서 생각했다. 신인 시절, 여자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그 시절에는 이 것보다 더 큰 무대가 선명히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여자는 신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지 않는다. 이 것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무대의 상상. 하지만 최근에는…

-여자는 남자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남자가 보고 있는 무대에 어울릴만한 모습인지를 마음 속으로 점검했다.

여자는 검정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그 것보다 조금 더 어두운 색상의 레이스가 장식된 스커트의 폭이 좁은 푸른 원피스를 입었다. 특별히 극이 올라가는 날이 아니라 무대 의상은 착용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무슨 옷을 입어도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여자의 옷장 안에 있는 것은 푸른 색의 옷들 뿐이었다. 그 것은 여자에게 잘 어울린다는 이유 말고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다소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다. 깊은 수심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푸른 빛의 드레스.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한 색조의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여자가 살아가는 무채색의 현실 사이에서 여자의 복장은 제법 괴리가 있어 보인다.

여자의 화장은 오늘도 변하지 않았다. 푸른 원피스의 색보다 조금 더 톤이 밝았던 푸른 립스틱. 그 립스틱은 여자의 일상적인 화장법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거울 앞에서, 푸른 립스틱을 바르며 생각했다. 한 때 나도 붉은 계열의 립스틱을 바르고 싶었던 때가 이었는데. 묘하게도, 여자가 매치한 옷과 화장의 색상 하나 하나는 여자가 고수하고 있는 보브컷과 무척 잘 어울렸다. 파랑색, 희귀한 색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여자. 그런 여자가 혼자 무대 위에 있으니, 극장에 온 관객의 시선이 그곳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점검을 마치자 라주라이트는 조금은 유쾌한 기분이 들었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서 자신이 이안 마일스의시선 끝에 머무른다는 것과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이 더는 불쾌하지 않아졌다.





2. 남자의 발걸음은 의도가 다분했다. 오늘은 공연이 없는 날. 티켓 오피스에서 남자는 표를 발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혹은 몇 년째 소리소문 없이 그 곳을 자주 드나들던 단골인 남자를 직원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또 왔구나, 저 사람. 그냥 그 정도의 반응이 끝이었다. 불순한 이야기를 퍼뜨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직원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던 인물이 되지 못한다. 그럴만한 돈이나 명예 따위가 없었으니까. 있는 것은 무대 위의 누군가를 향한 어떤 감정이다. 남자는 자신이 익히 아는 그 감정이 발걸음에 담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극장의 문을 열었다. 그 곳은 잠겨 있지 않았다. 평범한 발걸음이었고 자연스러웠다. 그 발걸음 덕분인지 남자에게 아무도 말 걸지 않았지만 남자는 스스로가 제법 불순한 의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무대에 서있던 여자를 본 바로 그 순간 이후부터.

처음 그 곳에 들어올 때부터 남자는 무대 위의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있는 공간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공간인 무대였지만, 최소한 이 상황은 그를 노골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남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극이 오르는 날이 아니다. 무대 조명은 켜지 않았다. 여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배우도, 극장의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마음먹었다. 관객의 시선을 즐기고 있지 않다면, 남자는 그 여자가 무대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란 그런 사람들이고, 남자가 아는 여자는 탁월한 배우였다. 그렇다면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리 실례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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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무대를 채운 강한 무대 조명은 없었지만,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빛을 남자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굳이 그 빛의 색깔을 이름짓자면, 푸른 빛이다. 푸른 빛의 여자는 바다를 닮았다.

남자가 위치한 관객석은 무대를 올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느 위치에서도, 시야의 차이는 있었지만 무대를 관람할 수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관객석에,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좌우를 오갔다. 평소라면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중앙의 좌석에서, 그렇게나 아름다운 여자를 홀로 감상할 수 있는 이 감각을 뭐라 정의해야 할지.

어떤 공간에서 남자가 시선을 던져도 변함 없이 그 무대 위에 있는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뭐였지? 푸른 색을 닮은 그 여자. 아, 라주라이트. 온통 푸른 색으로 감싸인 여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 한 번도 소리내어 불러본 적은 없지만 남자가 극장 근처를 서성이며, 혹은 극을 보며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었던 그 이름. 라주라이트의 본명은 뭘까? 하지만 나에게는 라주라이트라면 충분할 것이다. 그 것은 현실 속에서 괴리되었으나 남자에게는 보석이었고, 희귀했다. 본명은 그 것보다 더 평범할 터였다. 남자의 마음 속에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이름으로는 라주라이트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남자는 마음 속에 고요하게 이는 호기심을 참아내었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대신 무대 조명을 받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남자에게 여자는 특별한 존재였지만, 대체로 남자가 본 여자는 무대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조연을 주로 했으며, 메인 여배우가 사정상 출현하지 못할 때에만 주역으로 활약했다. 3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티켓의 가격으로 볼 때나 극장의 규모를 따졌을 때, 잘 쳐봐야 2류쯤 되는 이 극장에서 여자는 주변을 맴돌았다. 무대의 중앙에 서는 것이 드문 여자였다. 완벽한 보석이 되지 못한, 여자의 이름과도 같다.

그 것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몸짓으로, 여자는 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번에는 그 무대 위에 혼자서만 있는 여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완전한 독무대. 극의 장치나 조명, 혹은 시나리오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라주라이트가 무대에 서서 천천히, 그리고 우아한 발걸음을 옮긴다. 어떤 무언극을 올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남자는 관객석 사이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다가, 이내 시야에 방해가 없는 최적의 자리에 서서 인공적인 무대 조명이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조명을 받고 있는 그 푸른 아가씨를 보았다. 평소에는 앉지 못했던 그 자리에, 서서. 어떤 관객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아름다운 여자였다. 푸른 색조로 치장한 옷과 화장이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 최소한 짧다고 할 수 없었던 남자의 인생에서 그런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남자가 고향의 억양을 아직까지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사골 출신의 촌뜨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남자가 그 어떤 미래도 설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자도 그 자신을 몰랐지만, 이 모든 이유들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여자의 대화 상대로 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신감 부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라보던 도중 남자와 여자는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것으로는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공연을 보러 오셨을까요?"

그 도중 말을 먼저 걸어온 쪽은 여자였다.
남자는 당황했다.





3. 그 남자의 이름을 알았지만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확실히 여자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관객이 배우의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고 배우가 관객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건. 계속해서 이런 시선 놀이를 즐기는 것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이 시간들은 그와 자신 모두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않음을 알았다. 여자는 말을 이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의 의미였지만,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함의가 숨겨져 있었다.

"오늘은 공연을 하는 날이 아니에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마일스는 라주라이트의 말에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해졌다. 라주라이트의 말에 이안 마일스가 당황했다면, 아마 편하게 말을 잇지 못했을 것 같았다.

배우가 극의 대사가 아닌, 관객을 향한 교감과 대사를 던지게 되는 순간은 커튼콜 때 뿐이다.

아주 극적이지 않지만 여자 혼자만이 모든 역할을 맡았던 극은 끝이 났고, 이제 그 공간은 관객과의 커튼콜 타임에 들어갔다.

여자는 텅 빈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런 식으로 오래간만에 가지게 된 독무대를 종료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쉽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만… 단 둘만의 커튼콜 시간에, 배우와의 질의응답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던가. 여자는 천천히 남자의 근처로 갔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 궐련 한 개 피를 입에 물었다. 여자가 내려온 무대는 이제 텅 비어있었다. 깨끗하게. 그 곳에는 아까의 여자의 존재감이 거짓말같이 느껴지듯, 그 어떤 무대 장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막이 내린다. 무대가 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채우던 라주라이트는 이제 관객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극장 내에서의 흡연이 금지되어 있지도 않았고, 담배는 이 곳에서 특별히 별난 기호식품의 취급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연 중이 아닌 지금은 이 행동을 아무도 저지할 이유가 없다. 라주라이트는 '블루레이디'라고 적힌 담배를 입에 문 채 담배곽을 이안 마일스에게 내밀 수 있었다.

"드려요?"
"예."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성냥이 오갔고, 이안 마일스는 말 없이 타 들어가는 궐련 끝을 바라보았다. 휴대용 재떨이가 어느 순간 팔걸이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라주라이트는 '블루레이디'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로 옆의 이안 마일스를 대신해서 바라보며 말했다.

"블루레이디 담배."
"……"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죠. 담배는 그냥 담배지. 브랜드가 별로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이 건 내가 선택한… 이미지 메이킹의 일부였죠. 배우는 이미지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됐던 거에요. 선택이라는 단어가 적절한가? 글쎄. 어쨌든 난 나는 '파랑'을 맡았어요."
"네."

이안 마일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긴 설명을 끝낸 라주라이트는 조용히 다른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당신, 여기서 들은 건 잊도록 해요. 원래 여자의 말은 반 정도는 믿고, 반 정도는 믿지 않는 게 좋아요. 아셨죠?"

남자는 바로 옆의 여자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은 지금이 아니라면 절대 들을 수 없을 이야기일테니까. 여자가 반 정도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곧 손을 앞으로 모으고, 천천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말은 서서히 자기 자신에게 하는 호소처럼 변해갔다.

"나는 파랗지 않아요. 까맣죠, 오히려. 그래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일단 눈에 띄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계약할 때 파랑을 이미지로 잡자고 했어요. '블루레이디' 담배, '라주라이트'라는 예명. 그리고 이 파란 색 일색의 옷과, 푸른 립스틱까지. 나는 그렇게 파란 상태로 여기서 몇 년이고 있었어요. '라주라이트'… 웃기지 않아요? 난 값진 보석이 되지 못한 그대로에요."
"……"
"기왕에 이미지로 파랑을 잡고 파랗게 될 거라면 바다로 가서, 이 곳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서… 뭐, 할리우드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최소한 이 동네에서만 벗어나도 좋으니까 파랑波浪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지도요. 나는 물결이 되고 싶었어요. 멀리 퍼지고 싶었어요. 내 이미지처럼 그렇게 파랗게, 세상을 물들일 수 있었다면… 세상이 파랗게 되는 것이 더 아름다웠을텐데. 그럼 내가 그 속에 묻혀서… 편안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블루레이디 담배 궐련이 끝까지 타버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옆에 있는,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도 우아했고 상냥했던 배우인 라주라이트는 전혀 파랗지 않은 눈물을 살짝 흘리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것은 우울한 Blue 아가씨 Lady, 라주라이트.

"좋습니다.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의 얼굴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건 배우 실격인 모습인데도요."
"정정하지요, 아가씨. 바다에 이는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싶다던 당신의 이야기 정도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자가 잠시 말을 중단했고, 여자의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대 위의 당신을 무척 오랫동안 봐왔어요. 내가 이 극장에 다니는 것도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매혹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의 당신이 조명을 받건 말건, 그런 건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 시간과 돈을 들여서 보았던 당신의 모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니. 바꾸어 말하자면, 그 건 당신이 내가 바라본 당신의 모습들 중 가장 최상의 상태일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지금의 당신이 아닌 무대 위의 모습 만을 기억할 겁니다."
"……"
"하지만 파랑을 일으킬 수 있는 파란 아가씨. 당신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저도 흥미가 있습니다. 전속 계약으로 묶여있으신 상태죠? 자유롭게 풀어드리려면, 그러려면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흔하지 않은 푸른 립스틱을 바른, 라주라이트는 극장의 객석 자리에서 말 없이 일어났다. 라주라이트는 슬픈 미소를 보였다. 라주라이트는 이안 마일스의 귓가에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푸른 입술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파랑 너머로 데려가줘요. 언젠가의 당신이, 그 시선으로 무대의 구석에 쳐박혀 있던 나를 발견해 주었듯이.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걸로 내가… 잠시나마 우울한 Blue 아가씨 Lady가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이안 마일스."

푸른 빛을 띤 여자가 꺼내어둔, 결코 푸르지 않은 분홍 빛의 고백이었다.
라주라이트는 그 날, 극장을 나서며 푸른 립스틱을 대신해 품 속에 들고 다니던 분홍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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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이 비록, 어두움 밖에 있지 않은 새카만 공간이라도.
파랑 너머에 있는 것이 화려한 일류 극장의 조명이 아니라도.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그 날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해요.
그 날 나는 파란색이 아닌 립스틱을 발랐었죠.
기억하지 않으면 잊어버릴지 몰라요. 나는 그 날 당신에게…
그렇지,
이렇게,

쪼개지면서도…
그렇죠, 쪼개진다면 나는 또, 어디론가… 내가 품었던 바람대로 퍼져나갈테니까.
음, 그게 이런 식으로 실현 되었다는 게 솔직히- 네.

당신, 이안 마일스.
나를 파랑 너머로 데려가주기로 한 그 약속, 잊은 거 아니죠?

기억해요. 나를 잊으면 안돼요. 날 잊지 말아요.
저 파도의 너머, 파랑의 너머에 먼저 갈게요. 기억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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