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뵙겠습니다 형님!"
더벅머리를 한 청년 백태양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짧은 머리를 한 중년 정철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형님이라고 부르지는 마시고."
"아, 호칭에 민감하시구나. 그쪽 분들 특징이신가? 사장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곧 취임하실 테니까요."
정철민은 백태양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회장이 예뻐하는 아이라더니 무식하게 키운 몸뚱이나 친근한 척 하면서 분노를 자아내는 말투나 회장과 닮은 애송이였다.
"…목표에 대한 브리핑을 부탁하지요."
마찬가지로, 백태양은 정철민의 얼굴에 있는 거대한 흉터를 바라보았다. 몸뚱아리는 강해 보이지 않지만, 역대 삼대천 스포츠 사장 중 약한 자는 없었다. 정철민이란 자 역시 뭔가가 있을 것이다.
"예, 아시다시피 저희 삼대천이 예전에만 해도 초상 능력을 지닌 여러 도장이나 체육관 관장들의 모임이었잖아요. 그 당시 멤버였던 분께서 탈퇴하시고 작은 체육관을 하나 차렸습니다. 그게 1980년대 중반 때 일이니까 대강 30년 전이네요."
"조치를 안 취했습니까."
"지금이야 삼대천이 사장님 같은 분들 덕에 나날이 번창해서 나가기 무서운 곳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문제는 그분의 초상기술이죠. 그분이 발견하신 근전이 현상이 전신의 근육을 넘어서 몸 전체에 트레이닝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건데…"
"원리나 이유까지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든지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그분이 호락호락한 분은 아니에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아시죠?"
정철민의 미간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그가 느끼기에 눈앞의 핏덩이는 사람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직접 본 적 있는 사람입니까?"
"예. 제가 아주 어릴 때 부터 같이 있던 분이니까요. 그분께 무술도 많이 배웠고요."
"친했겠습니다."
"20년도 전에 삼대천을 떠난 분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제 와서 그렇게 잡아야 하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이쪽 방식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백태양의 안색이 굳었다. 방식이라. 방금 전 자신이 살짝 비꼰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
"그쪽 방식이 뭡니까."
"제일 상책은 죽이는 거죠. 고문 후 입막음이란 방법도 있지만 하책이고."
백태양은 당혹감을 지우지 못했다. 핵심은 초상기술이다. 아무리 깡패새끼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야 하나?
"무슨, 기억을 지운다던가 하는 방법이."
백태양의 말을 들은 정철민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태양씨가 돈 내줄 겁니까? 기억소거제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기억 소거제를 쓴다 해도, 인지부조화는 어떻게 할까요. 또 기억이 되돌아 오면 어쩔까요. 우리 직원 하나가 그 영감 하루 종일 감시해야 합니까?"
"회유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돈 대주겠다면 검토하지요. 삼대천 피트니스 사정상 어렵겠습니다만."
정철민은 백태양과 눈을 마주쳤다. 분명 백태양이 한뼘 정도는 큰 키인지라 올려다 보는 모양새였으나 그 기세는 반대였다.
"다시 묻죠. 이쪽 방식대로 할까요?"
정철민의 태연한 물음에 백태양은 순간 말문을 잃었다. 백태양의 마음 같아서는 양아치 같은 깡패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임 회장이 직접 부탁한 명령이다. 이 또한 회장의 시험일 수 있다.
"상관없습니다."
"그럼."
"잠깐만요. 그건 회장님 의견입니다. 제 말도 들어 주세요."
백태양은 우락부락한 몸에 걸맞지 않게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는 원칙이란 것이 있었다. 아무리 욕심이 앞서더라도 인간 이하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겠지?"
백태양은 입술을 씹었다. 이젠 그냥 반말인가. 확실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군. 자존심은 상하지만, 아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
"……부탁합니다."
"참고하지."
정철민은 마음 속에서 백태양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회장의 측근에서 덩치만 큰 멍청이로.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어디서 착한 척인가? 가증스럽게.
정철민은 피투성이가 된 허름한 아파트 벽에 손을 집어넣었다. 벽은 꿀렁거리더니 정철민의 팔을 잡아먹을 듯 조였다. 정철민이 손을 빼자 벽은 다시 잠잠해졌다.
"재밌는 방법이야. 벽은 그대로인데 안의 구조는 확 바뀌어 버리니까. 이런 시공을 해주는 데가 우리나라에 몇 없는데…"
"……"
"변칙적 건축물 공사를 맡기는 놈들치고 깨끗한 놈을 본 적이 없어. 조금이라도 망한 척, 가난한 척. 돈 몇푼 떼어먹으려고 지랄을 해 놔서."
정철민은 입에 문 담배를 버리고 다리가 묶인 관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시겠지만 손톱이 없으면 좋아하시는 운동도 못 하십니다 어르신. 수저도 못 드십니다. 똥도 지린 채로 질질 묻히고 다녀야 하고. 삼대천을 탈퇴하실때 삼대천의 사유재산을 무단으로 횡령하신 부분이 있더군요. 나머지는 벽 속에 잘 숨겨 놓셨는데 목록 중에 하나가 비네요? 어디 놔두셨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아마 정리 과정에서 누락된 거 같은데, 20년 전 일을 어찌 기억합니까?"
"정말 모릅니까."
정철민은 관장의 엄지 손가락을 뜯어냈다. 관장은 고통스러워했으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철민은 고통을 주는 방법을 알았다.
"끝내 말하지 않는군요."
"그대에게 해 줄 말이 정말 없는 걸 어떡합니까."
"정훈승. 1981년생. 전라북도 정읍 출생. 슬하에 딸이 하나 있고 아내와 사별 후 딸과 둘이 사네요."
그제서야 관장의 두 눈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정훈승씨와 무슨 관계라도 있으십니까?"
"알고 있었나."
"주어를 똑바로 말해야지. 내가 뭘 얼마나 알고 있을 줄 알고요?"
"그럼 대체 왜 이런 짓을."
관장의 절망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정철민은 웃었다.
"그냥. 영감이 몇번째 손가락에 진심을 말하려나 궁금해서. 거참, 영감님 끈기 하나는 인정하겠습니다. 꽤 재밌었어요."
서울 강남의 한 고깃집에서 정철민과 한 여성이 서로 소주잔을 부딪혔다.
"축하한다. 이제 사장이군."
"덕분에 과분한 자리에 올랐지. 고맙네."
"별 말씀을. 현실조정자도 아니고 반인반수 하나 조지는게 뭐 얼마나 어렵다고."
여자의 대수롭지 않은 말 속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철민은 사냥꾼의 총에 머리가 터진 전 사장을 떠올렸다. 소주 맛이 더 쓰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축하할 일이 아닌거 같네. 삼대천 스포츠 사장 평균 근속기한이 겁나게 짧잖여."
맞는 말이었다. 삼대천 스포츠 사장은 평균 재임 기간이 2년이 채 안될 거다. 게다가 여태 삼대천 스포츠의 사장에 오른 사람 중 몸 성히 은퇴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정철민은 자신이 있었다.
"앞으론 길어질 거다. 그리고 네 걱정이나 해. 마스터가 추근덕대면 내게 말하고."
정철민은 그러면서 사냥꾼의 손을 만졌고 사냥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을 때렸다.
"흥. 나한테 가장 추근덕대는 건 당신인걸?"
"손이 맵네."
"아무튼,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바로 사장이 된 거야?"
"회장 따까리 짓 한번 했지."
"보통 따까리 짓은 아니었을 것 같네."
정철민은-미인이 따라 준 술에 취한 남자가 으레 그러하듯-허세를 섞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채무자들이 재산을 숨기는 전형적인 패턴이 어쨌고, 손바닥 안에 있는 상대를 유린하는 게 어떻고…재미없는 이야기였지만 사냥꾼은 모든 말에 하나하나 반응해 주었다.
"그런데 결국 횡령한 물건은 회수 못한거네?"
"어차피 그건 회수 못하는 거였어. 재단이 엮였는데 어떻게 회수하나. 중요한 건 관장을 잡아넣는 건데, 재밌는 게 제자일 뿐인 정훈승이를 사실상 아들로 여기고 있더라."
"흠. 그 영감도 고자야?"
정철민은 사냥꾼의 사고방식에 움찔했다. 이 여자도 나만큼이나 정상은 아니다. 하긴 저 외모에 그런 사냥 실력을 가진 여자가 정상이면 그게 이상하다.
"글쎄, 육체개조 흔적은 없더군."
"하긴. 세상에 회장 정도로 몸에 미친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귀찮은 일은 재단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정상성의 보호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가진 재단의 고지식함은,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이용하기 좋은 힘이다.
정훈승이 있는 한, 이제 관장은 다시 삼대천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 엄밀히 말하면, 정철민의 노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