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 전에…
능구렁이 손 요주의 단체 문서나 조선 카논, 그리고 각종 역사적인 일을 다루는 글에서 빠지면 섭한 것이 바로 한시라고 할 수 있다. 한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글자 수에 맞추어 적는 일은 많지만 정작 실제로 그것을 고증에 완전히 맞추어 적는 사례는 자주 보기 힘들다.
본 글은 한시를 SCP 재단에 조금이라도 더 고증에 맞추어 적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규칙과 운율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다.
또한, 여기 있는 정보들은 적어도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며,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 직접 정보를 검색하기를 권장한다. 본 글은 그것을 어떻게 찾아봐야 하는지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이곳에 있는 규칙을 모두 따른다고 해서 좋은 시가 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또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시인 것도 아니다. 시는 감정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소설을 창작하는 여러분들은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본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한자와 한문의 기초적인 문법, 그리고 중국어 성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외부에서 따로 숙지해두는 것이 편하다.
1. 한시
한시(漢詩)란, 한문으로 적힌 정형시를 일컬으며, 위진남북조 이후로 사성(四聲) 체계가 확립되어 규칙을 정립해 온 중문학의 주요 운문 문학이다.
한시는 크게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로 나뉘는데, 고체시는 기원전 8세기 한나라 때부터, 근체시는 7세기 당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유행한 것으로, 고체시는 의미를 중시해 비교적 규칙이 자유로운 반면, 근체시는 엄격한 운문 규칙을 가지고 있다. 본 페이지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근체시이다.
2. 사성에 대해
한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로, 글자 수와 운만 제대로 맞추면 된다는 것이 있는데, 한시는 그 외에도 한국인이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성조"에 대한 엄격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사성이란 현재의 중국어가 아닌 당대의 중고한어 성조 4가지를 말한다. 4개를 각각 평성, 상성, 거성, 입성(平, 上, 去, 入)이라고 하며, 그 중에서도 평성이 아닌 나머지 3가지를 측성(仄)이라고 한다. 한시에서는 이 평성과 측성 사이의 대비를 중시하기에 주로 성조에 대한 규칙은 평측(平仄)으로 불린다.
현재의 우리는 당시의 발음을 알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사전을 찾거나 지금의 중국어 성조와 발음으로 대강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2.1. 사성을 추측하는 빠른 방법
일일이 사전으로 찾는 것이 버겁다면 현재의 중국과 한국 발음으로 대강 때려 맞추는 것도 가능하다.
- 현재의 한국식 발음으로 종성에 'ㄱ', 'ㄹ', 'ㅂ'이 들어가는 한자는 입성이다.
- ex) 國(국), 學(학), 一(일), 室(실), 法(법), 習(습)
- 입성이 아닌데, 표준중국어로 1성 혹은 2성인 한자는 평성이다.
- ex) 金(jīn), 東(dōng), 南(nán), 年(nián)
- 입성이 아닌데, 표준중국어로 3성인 한자는 상성이다.
- ex) 好(hǎo), 九(jiǔ), 母(mǔ), 小(xiǎo)
- 입성이 아닌데, 표준중국어로 4성인 한자는 상성, 혹은 거성이다.
- ex) 萬(wàn), 外(wài), 寸(cùn), 太(tài)
우리는 평성과 평성이 아닌 것(측성)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평성을 판별하는 방법을 잘 숙지하고 있으면 된다.
3.압운에 대해
압운(押韻)이란, 유럽권의 라임(rhyme)과 일맥상통하는 단어이다. 가령 東(동)은 紅(홍)이랑 모음과 종성의 발음이 비슷한데, 이것이 압운이 맞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발음이 비슷하다고 압운자로 사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이, 당대의 발음에 맞게 압운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等(등)과 承(승)은 발음이 지금에야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달랐으므로 다른 압운이다. 이 또한 우리는 사전을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는 현대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인 실정이므로 압운과 사성을 정리해둔 운서를 들고 다니거나 검색하는 것은 똑같다. 시인이 아무리 어휘력이 좋아도 사전을 곁에 두는 것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평수운(平水韻)이라는 체계에 따르면 압운자는 총 106가지가 존재한다. 처음 시를 쓸 때는 당연히 운서에 적힌 대로 맞추어 시를 써야 하므로 인터넷 운서를 찾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아래 사이트는 중국어 기반이므로 중국어에 지식이 있다면 좋다.
4. 절구와 율시
근체시의 구조는 크게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로 나뉜다. 구(句)는 한 행을 의미하는 글귀 단위인데, 시의 구가 4구라면 절구, 8구라면 율시라 한다.1 또한 한 구당 들어가는 글자 수에 따라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으로 다시 나뉜다.
○○○○○,
○○○○○。
○○○○○,
○○○○○。
이를테면 위와 같은 형식은 구가 4개이니 절구이고, 한 구마다 글자가 5개 들어가므로 오언이다. 따라서 위의 형식은 '오언절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절구의 각 4개의 구는 기구, 승구, 전구, 결구라고 한다.
○○○○○○○,
○○○○○○○。
○○○○○○○,
○○○○○○○。
○○○○○○○,
○○○○○○○。
○○○○○○○,
○○○○○○○。
만일 구조가 이렇다면 '칠언율시'인 것이다. 율시는 2구씩 수련, 함련, 경련, 미련이라고 한다.
3.1. 평측을 넣어보자
3.1.1. 이사부동이륙동, 일사오불론
평측은 각 구의 2번째자와 4번째자가 서로 겹쳐서는 안된다. 즉, 2번째자가 평성이라면, 4번째자는 측성이어야 한다.
1. ○平○仄○ 가능
2. ○仄○平○ 가능
3. ○仄○仄○ 불가능
또한 칠언일 때 6번째 글자는 2번째자와 평측이 같아야 한다.
○平○仄○平○
또는
○仄○平○仄○
그 이외의 나머지 홀수 번째자들은 평측 선정이 비교적 자유롭다.
3.1.2. 반염
절구에서 제1구와 제2구의 2, 4번째자는 서로 평측이 반대여야 하며, 제2구와 제3구는 같고, 제3구와 제4구는 또다시 반대여야 한다. 이렇게 서로 평측이 반대인 것은 반(反)이라 하고, 같은 것은 염(黏)이라 한다.2
오언절구의 예시
○平○仄○,
○仄○平○。
○仄○平○,
○平○仄○。
또는
○仄○平○,
○平○仄○。
○平○仄○,
○仄○平○。
율시에서도 이에 맞게, 반과 염을 번갈아 맞추면서 쓰면 된다.
참고로, 시에서 2번째자가 평성으로 시작한다면 평기식(平起式), 측성으로 시작한다면 측기식(仄起式)이라고 한다.
3.1.3. 금기사항
- 고평은 금하고, 고측은 되도록 피하자
고평(孤平)이란, 평성이 두 측성 사이에 혼자 고립된 것을 말한다.
仄平仄仄平 불가능
여기의 2번째 자는 두 측성 사이에 외롭게 있다. 이를 범한다면 한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반대로 측성이 고립된 경우는 일단 가능하지만, 이 또한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
- 구 끝자락은 성조가 3연속 이어져선 안된다
平平仄仄平平平 불가능
仄仄平平仄仄仄 불가능
구의 앞부분이나 중간 부분에서 평측이 3연속인 것은 괜찮지만, 뒷부분이 3연속이라면 금기이다. 이것을 하삼련(下三連)이라 한다.
3.1.4. 따라서
한시의 모든 구조는 오언에서
仄仄平平仄
平平仄仄平
平平平仄仄
仄仄仄平平
칠언에서는
平平仄仄平平仄
仄仄平平仄仄平
仄仄平平平仄仄
平平仄仄仄平平
이 4가지가 정형시의 기본 구조들이다.
물론, 글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이 4가지 외에도 규칙에 맞게 더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정형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금기만 범하지 않았다면 변형의 일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4. 압운을 넣어보자
압운은 쉽게말해, 짝수 번째 구의 마지막 자가 모두 압운에 맞아야 하며, 홀수 번째에서는 반드시 압운이 맞지 않아야 한다. 이를 일운도저(一韻到底)라 한다. 예시를 보이자면 다음과 같다.
칠언절구
○○○○○○韻, ← 상황에 따라 다름
○○○○○○韻。
○○○○○○○,
○○○○○○韻。오언율시
○○○○韻, ← 상황에 따라 다름
○○○○韻。
○○○○○,
○○○○韻。
○○○○○,
○○○○韻。
○○○○○,
○○○○韻。
이때, 맨 첫 구에서는 압운이 맞춰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맨 첫구에 압운을 넣은 것을 수구용운(首句用韻), 그렇지 않은 것을 수구불용운(首句不用韻)이라 한다. 기본적으로 오언은 수구불용운, 칠언은 수구용운으로 창작한다.
5. 어법 구조와 시상 전개
5.1. 대우
율시에서, 함련과 경련, 즉 2번째 연과 3번째 연은 각 연에 있는 두 구가 서로 문법적으로 같은 문장 구조와 품사를 취해야 한다. 이번엔 실제 시의 예시를 보자.
白日放歌需縱酒백일방가수종주
靑春作伴好還鄕청춘작반호환향대낮에 맘껏 노래하고 마냥 술 마시며
푸른 봄날 짝하여 기쁘게 고향으로 돌아가리- 두보 《문관군수하남하북》의 일부
이해를 돕기 위해 색을 칠해 각 파트별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 白日(백일)은 '하얀 해3'라는 뜻이니 白은 형용사, 日은 명사이다. 이에 대응하는 靑春(청춘)도 '푸른 봄날'로써, 靑은 형용사, 春은 명사이다.
- 放歌(방가)는 '노래를 놓다(부르다)'라는 뜻이니 放은 동사, 歌는 명사이다. 이에 대응하는 作伴(작반)은 '짝을 짓다'라는 뜻으로서 作은 동사, 伴은 명사이다.
- 需縱酒(수종주)는 '모름지기 멋대로 술을 마신다'라는 뜻으로, 需는 동사4, 縱은 동사, 酒는 명사이다. 또 好還鄕(호환향)은 '고향에 돌아가길 좋아한다'는 뜻으로, 好는 동사, 還은 동사, 鄕은 명사이다.
각 단어들의 품사와 문장 성분이 정확히 대응해, 같은 문장 구조를 띄고 있다. 한국어에 비유하자면, 조사가 전부 같은 두 문장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대우(對偶)라 하며, 이 대우라는 체계는 한문 문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함과 동시에, 두 구는 연속되어 있으므로 평측은 완전히 반대여야 하니 처음 시도하면 꽤나 까다로울 것이다.
5.2. 문자부동
한 시에서는 같은 한자가 두번 쓰여서는 안 된다. 다만 오언에서 皎皎(교교, 휘영청)나 滔滔(도도, 넘실넘실), 처럼 의성어, 의태어 역할을 하는 첩어(疊語)는 사용이 가능하다. 다만 칠언에서는 첩어를 쓰지 않는다.
번외: 예시작품
國仄破仄山平河平在仄국파산하재
城平春平草仄木仄深平성춘초목심
感平時平花平淺仄淚仄감시화천루
恨仄別仄鳥仄驚平心平한별조경심
烽仄火仄連平三平月仄봉화련삼월
家平書平抵仄萬仄金平가서저만금
白平頭平搔平更仄短仄백두소갱단
渾仄欲仄不仄勝平簪平혼욕불승잠- 두보 《춘망》
위 시는 오언율시, 측기식이며, 수구불용운이다. 읽어보면 느껴지듯이, 압운이 맞추어진 深(심), 心(심), 金(금), 簪(잠)은 신기하게도 한국식 발음으로도 라임이 잘 살아있다.
참고로 두보는 율시를 가장 많이 지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白仄日仄依平山平盡仄백일의산진
黃平河平入仄海仄流平황하입해류
欲仄窮平千平里仄目仄욕궁천리목
更仄上仄一平層平樓平갱상일층루- 왕지환 《등관작루》
오언절구, 측기식, 수구불용운 작품이다. 일반적인 절구의 시상 전개에 맞게, 기구와 승구는 자연이나 외부를 관찰하고, 전구와 결구는 화자 자신으로 시상이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지환은 당 현종 시기의 인물로, 단 6수의 절구만이 남아 있다.
霜平凝平朏仄魄仄析平幽平語仄상응비백석류어
隨平露仄斜平飛平驚平腐仄鼠仄수로사비경부서
剪仄破仄北仄林平身平殞仄夢仄전파북림신운몽
似仄蟲平連平片仄溶平荒平楚仄사충련편용황초-
Etinjat 《시초——연천행》
칠언절구, 평기식, 수구용운 작품이다. 실제 CN위키 운문 작품 诗钞——宴天行의 일부를 발췌했다. 운문 특성상 분량이 짧으므로 한시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CN위키의 작품은 배율이거나 시를 여러개 지어 이은 장편시가 대부분이다.
위 작품의 특징으로는, 승구와 결구에서 고측(孤仄)을 범했다는 것이다. 다만 고평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고전에서도 자주 사용된 예가 많으므로 엄격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