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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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강윤상을 죽인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남경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목이 분질러진 채로 킹사이즈 침대와 벽 틈에 작달막한 몸을 집어넣은 기지이사관을 내려다보면서 경민은 중얼거렸다. 바람이 쌀쌀했다. 경민은 겉옷에 겨우 손을 뻗어 헐벗은 몸을 가렸음에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싸늘한 강윤상의 허연 눈깔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민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경민은 잠꼬대가 심한 편이었다. 하필 강윤상 기지이사관은 그 사실을 몰랐다. 얼마나 심하겠어, 하고 간과하는 족속들마다 공포 영화에서 시커먼 배를 내놓고 죽어나간다곤 하지만 애초에 몰랐던 윤상은 인생 마지막에 와서야 처음으로 피해자가 된 것이다. 경민의 풍차돌리기는 정밀했다. 그 어떤 짐승도 자면서 그토록 섬세한 동양의 무술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경민은 풍차킥에 맞아 올빼미처럼 목이 돌아간 강윤상을 지긋이 바라본다. 찬 바람이 하얀 몸을 때린다. 그제서야 경민은 정신을 차렸다. 끝이다. 인생 끝자락에 서 있다. 강윤상이 입을 벌리고 중얼거린다. 화들짝 놀란 남경민은 눈을 비빈다. 윤상의 움직임은 없다. 대다수의 시신처럼.

경민은 문을 잠근다. 그리고 시신의 머리맡에 앉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생각이란 놈들이 제멋대로 뇌에서 뛰쳐나가 두피를 사방팔방 뚫고 나가려 한다. 어지러운 것을 넘어서서 잘못된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때려죽여야 한다. 품을 뒤진다. 담배 한 개비가 있다. 미나리 연초를 넣은 값싼 것이다. 공손히 손으로 가리고 탁, 하고 라이터를 켜자 어둠 속에서 태양의 반딧불이 잠을 깬다.

탈옥하는 생각들이 다시 잠을 잔다. 경민은 다리를 꼬고 숨을 들이마쉰다. 내뱉는다. 기지 최고권력자께서는 그의 다리 바로 옆에서 눈을 까뒤집고 주무시고 계신다. 살인마는 계속 폐호흡을 하면서 사고를 정리한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누구도 방에 관심 없는 것 보면 강윤상 기지이사관이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것 같다.

없는 일로 할 수 없으니까 인간인 거야. 경민의 마음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남경민의 담배가 형편없이 연소하기 전, 유일한 방법이 생각났다. 치워야 한다. 치우고 달아나자. 이 기지를. 경민은 턱을 괸다. 그리고는 목을 긁는다. 욕지기가 확 치민다. 천천히 일어나서, 강윤상 이사관이었던 뻣뻣한 것의 주머니를 뒤진다. 다행히도 휴대용 단말기가 있다.

왜 나야.

경민 처음으로 소리 내서 혼잣말한다. 문득 그런 이야기가 왜인지 떠오른다. 저격수가 처음 사람을 죽이고 느끼는 게 죄책감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총의 반동이라고. 경민은 딱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야 만다. 반동이다. 덮쳐오는 것은 세계 자체의 반동으로서 미필 경민조차도 사격 자세 원위치 따위로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경민 조심스럽게 정신을 깬다. 이러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고요한 밤이다. 방 안은 온기가 없다. 온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남경민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말기 역시 차갑다. 손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남경민은 조용히, 한참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자시계로 새벽 네 시. 닭이 울기는 좀 멀었다. 그렇게 난초사마귀마냥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던 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통화 연결음이 조금 울리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를 반긴다. 경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보! 격리! 보호! 2.05등급 연구원 주현영입니다!

— 됐어요. 현영 선배. 나야.

잠시 침묵. 심란한 위화감이 전자파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경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체의 눈은 멍하니 천장만을 노려보고 있다. 경민에게 화도 내지 않고 말도 않고 봐주고 있는 셈이니 지금이라면 좋은 부모도 입헌군주제의 성군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재밌어졌던 것이다.

경민이니…..?

— 네.

네가 왜, 아니다. 이사관님은?

— 선배.

……응.

— 화 안 낼 거지? 부탁 하나 할 건데.

침묵이 왔다. 경민은 알고 있었다. 현영은 저 먼 밖에서 이미 떨기 시작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머뭇거리는 것이겠으나 그 누구보다도 경민은 이해할 수 있다. 현영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듣기 시작하자 그것은 고작 친한 후배였을 때 현영이 얼마나 놀랐을지. 번개신 포세이돈의 가면을 쓴 경민을 본대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 나, 강윤상 이사관님을 죽였어. 실수였어. 잠꼬대하다가.

다시 침묵이다. 남경민은 쓴웃음을 짓는다. 현영이 당장 끊어버린대도 그 누구도 감히 돌을 던질 수 없는 상황 속에 두 남자는 있다. 경민은 담배를 꺼 버린다. 손에 얕은 화상이 들러붙는대도 욕하기는 커녕 무감각했다. 현영의 회신이 돌아온 것은 삼 초 후였다.

농담… 거짓말 아니지.

— 응. 선배. 미안.

……어쩔 거야?

음성이 떨리고 있다. 경민은 다시 눈깔을 뜬 것을 힐끗 바라보면서 입술을 초조하게 깨물었다. 어쩔 거냐니,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참 미안해졌다. 이렇게 뻔뻔한 후배가 또 있을까. 경민은 일산화탄소 뒤섞인 입을 우물거리고는 되는 대로 내뱉었다..

— 시체를 버릴 거야.

너 미쳤구나. 나한테 도와달라 할 거지?

혀 차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경민은 침묵하면서 그 소리를 들었다. 반박할 말은 연구원 주현영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멍하니 서 있다. 형광등도 벽지도 바닥도 백색으로 반들반들한 어둠 그 가운데서 경민의 얼굴은 경련을 일으킨다.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표정은, 눈은 크게 뜨고 입은 얼간이마냥 멍하니 벌려서 꽤 이질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형체는 말이 없다. 행동도 없다. 다만 감지 않은 눈으로 현영을 퍽 당황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누워 있을 뿐이다.

— 응. 차 있는 건 선배 뿐이니까.

경민은 굳었다가 다시 정신을 회전시킨다. 분명하다. 이 꼬락서니는 분명해진다. 경민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 아래서 '당신의 마지막 주검'이 눈깔을 시허옇게 부라리고 있다. 그 자체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미안할 일도 아니다. 현영은 그럼에도, 무엇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제04K기지의 거대하고 어두우며 견고한 옥좌의 주인이 방금 죽었다는 것에 경민보다도 놀라 있을 것이다.

너…… 이사관을 죽여 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

— 선배.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래도.

……남경민.

— 어.

끊을 거야.

경민은 웃는다. 초조한 웃음이나 방어기제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현영이라는 것을 알듯이, 단지 냉소적일 뿐 무언가 답이 없어서 튀어 나오는 염증 반응 같은 것이 아니다. 경민은 정말로 미소를 지었다. 창백하게 새어 들어오는 쌍성 달빛을 맞으면서. 현영은 끊지 않는다.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대치가 삼십 초 계속되다 먼저 두 손을 든 쪽이 명백해진다.

미친 새끼.

침묵.

어서 양식장 출구로 들고 나와. 들키지 말고.

그제서야 현영은 맥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경민은 풀썩 주저앉는다. 힘이 빠져나간다. 가쁘게 숨을 쉬면서 그는 웃는다. 아하하하하, 하고, 시작될 때 모가지에 힘이 들어가서 '아'하는 시작점이 명백한, 냉소적인 웃음이다. 경민은 몇 초 후 다시 용수철처럼 일어난다. 근육에 힘을 주어야 한다. 현영의 결심을 헛되게 하면 안 되니까.

경민은 강윤상 이사관보였던 것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 순간 단순 양 손 힘으로 300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야수를 들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젠 명백해졌다. 경민은 시신을 들쳐 업고 어깨와 허리의 힘에 의존한다. 이사관 돌아간 머리통에서 푸른 혈액이 주르륵 흐른다. 경민의 손과 소매, 어깨 일대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젖는다. 마치 생전의 어느 순간처럼 경민은 여전히 죽어 있는 권력에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겉치레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재단 인원다운 모습으로. 현영은 겉옷을 끄집어 벗어서 양손부터 닦는다. 그리고 바닥을 수습한다. 옷을 깔아서 피 흐르는 바닥에 완벽하게 덮고 사람의 상반신을 그 위에 둔다. 꼭 보자기나 커피우유 꼴으로 액체를 수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치우는 것이다. 아래 스며드는 피는 옷감이 흡수하고 위로 흐르는 피야 옷을 걷어서 처리한대도 시체 자체는 어쩐다. 현영은 중얼거린다.

좀 더 낮은 인간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현영은 시절을 기억한다. 제04K기지는 거대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충돌이었다. 현영은 시신을 들춰 입으면서 꿈을 꾼다. 뜨겁고 끈끈한 혈액이 왼쪽 어깨로 와르르 쏟아진다. 제04K기지는 가혹했다고 생각한다. 생전 기지이사관과 이사관하(下) 여섯 이사관보는 인원들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하루이틀 밤이 지나면 치웠던 묘지에는 다시금 독버섯처럼 묘지가 피었다.

경민은 눈을 감는다. 차갑게 부는 바람이 볼을 발갛게 달구고 새카만 앞머리가 휘날린다. 손이 얼어붙을 듯 차갑다. 새하얀 눈에 덮인 채 웅크린, 거대한 제04K기지 바깥의 형상이 바로 앞에 선하다. 하늘에는 서리 까마귀 두어 마리가 울면서 맴을 돌고 눈앞에는 무수한 주검이 쓰러져 있다. 표면상 제04K기지 사망자는 일 년에 오천 명 정도였다. 대부분은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일부는 윤상모독죄 등을 물어 주살되었다. 몆은 탈영하다가 즉각 흙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

경민이 시신에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차가운 기운이 여전하다. 오천 명. 제04K기지의 의욕 없고 무지한 인사이사관보가 처리하기엔 과도한 그 수가 오천 명에서 오천 구가 되고 나면 으레 근처 툰드라 숲에 버려졌다. 이로 인하여 기지 안과 밖은 명백히 구분되었다. 기지 앞 울타리 안쪽은 산 자들의 영역. 밖은 눈과 들짐승과 얼음과 추위와 죽은 자들이 널브러진 곳. 그들 아래로 찬바람이 내려앉으면 누구도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누군가 죽어도 그 시체들 위에 던져 넣으면 끝이지. 바보 같은 인간아.

제04K기지의 눈 감은 사람들은 바깥에서 굳고 얼었고 녹으면 늑대나 고라니나 알타리무 따위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며 살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래서 누군가 피살당한 사람의 몸이 던져졌다 하더라도 시대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세월의 이름 하에 조용조용 처리당했다. 경민 시야에 들어온 것들처럼. 기지의 양변기가 조용히 물을 내리면 암암리에 주먹구구로 살인자의 죄목은 소멸했다.

경민의 몸에 소복히 눈이 쌓인다. 그때 1등급 인원으로서 언제나 2등급 3등급 정도의 존재들을 두려워하고 피살을 두려워했던 어느 온순한 짐승이 눈을 맞고 있다. 두 마리 봄동Brassica rapa이 끄는 두돈반에 올라타 땅끝까지 달리던 그때. 한창 따스해지던 경기도 북부에서 말을 달리며 봄바람을 맞던 그때. 그러나 다시금 눈을 뜨면 시신들도 눈도 서리도 늑대 울음도 사라진다. 시신은 딱 한 명 뿐이다. 어깨에 들쳐 업은 그 남자. 현영은 식은땀을 닦는다. 자세히 보니 그건 식은땀이 아니라 차가운 피다.

경민은 계단통 복도를 내려간다. 계단에 접어들면, 그보다 더 키 큰 시신의 발이 질질 끌리면서 단순명쾌한 소음을 만든다. 남자는 헙, 하고 겁을 집어먹는다. 제04K기지는 하나의 거대 백악 성이다. 제아무리 너무나 큰 공간이라고 하여도 누군가는 듣기 마련이다. 폐쇄회로 카메라는 죄 깨져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영원불멸한 사각지대 속 경민은 조용히 걷는다. 시신에게까지 강요하지는 못하겠으나.

덜컹이는 소음. 숨소리. 형광등 외피에서 춤을 추는 광자. 현영은 힘을 들인다. 숨을 죽인다. 제04K기지의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복도 위로 실처럼 가늘게 피가 떨어지고 조심스러운 남자의 움직임은 서서히 대범해질 기회를 엿본다. 경민은 입술을 깨문다. 부드럽게 시신의 손을 잡아당기며 왈츠를 춘다. 얼어죽을 놈이 그렇담 죽어서라도 춤이나 잘 추어야지. 푸념한다. 시신은 빠르게 굳을 것이다.

피가 식고 근육이 견고해지고 나면 통제되지 않는 하나의 바위처럼 골머리가 아파진다. 사실 알고 있다. 제04K기지의 선임들을 위한 시신 밭은 없다. 그러므로 현영이 돕지 않았더라면, 마치 집 나온 암탉마냥 뚜렷한 목적지가 없이 걷고만 있는 것이다. 안쪽은 진짜배기 툰드라에 비하면 덥다. 등에 땀이 맺힌다.

이쪽을 통과하면 선임 전용 구내식당이 나온다. 그렇다고 저쪽을 통과하면 로버트 스크랜턴 방목 농장이다. 한 쪽은 식사 중인 인원이 드글거릴 것이 뻔하다. 한쪽은 농부들이 불철주야 지킨다. 경민은 근무 당시의 자신을 다시 회고한다. 그 때 역시 구내식당에서 들리는 선임들의 만찬가에 오들오들 떨면서 죽임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제 영원히 구내식당을 두려워하여야 했구나. 실소하면서 자세를 고친다. 시신을 업는다.

바깥과 가까워질수록 복도에는 수없는 성에가 달라붙어 있다. 추운 환경을 선호하는 동사자 시체들이 하나 둘 발견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잡아먹는 커다란 말단잡이통풀도 벽 위에 덩굴과 포충낭을 뻗고 있다. 경민은 긴 입김을 그리면서 나아간다. 다른 사람 그러니까 남경민 주현영 같은 저급 인간의 시신이야 여기 있어도 누구도 모르지만 강윤상이 사라진 이상 여기서 주검이 발견된다 하면 티가 너무 날 것이 뻔하다.

— 현영 선배가 양식장에서 기다린댔지.

경민은 속삭인다. 마침내 시신과 통풀 덩굴로 가득 찬 58번 땅굴 복도에서 벗어나자 강원도의 너른 야산이 보인다. 야산 군데군데 땅메기를 기르는 양식장의 보이지 않는 철장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저편 샛길에서 스포트라이트처럼 밝은 빛이 남경민에게 직격한다. 커다란 녹색 밴이다. 경민은 습기 찬 눈을 깜빡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창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을 지은 주현영의 얼굴이 불쑥 마중을 나왔다.

— ……미안. 선배.

— 일부러는 아니랬지.

— 잠꼬대였어.

경민의 어깨 위에서 푸른 피를 뿜는 윤상의 앙증맞은 머리는 메트로놈의 추처럼 까딱였다. 경민은 발갛게 상기된 채로 입김을 뿜었다. 현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흔들었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밴의 안쪽이 이내 드러났다. 운전자인 주현영의 바로 뒤 좌석에는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타 있었다. 현영의 후배이자 경민의 후배인 구지혜였다. 소가죽과 짚으로 만든 핫팩을 꼭 쥔 구지혜는 입술을 깨문 채 현영과 경민의 눈치를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밧줄, 삽, 곡괭이 등이 나란히 타 있었다.

— 타. 가면서 얘기하자.

경민은 조심히 올라탔다. 먼저 시신을 가장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주검은 맥없이 앉았다. 아마도 그 어떤 안전벨트조차도 붙잡아두지 못할 정도로 힘없는 탑승이었다. 그리고 그 앞 좌석에 경민이 올라탔다. 문이 스르르 닫혔다. 현영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흐릿하고 흐릿한 58번 땅굴이 멀어졌다. 끝없는 침묵을 달려나온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영이었다.

— 춥겠다.

그 말에 경민은, 그제서야 순수하게 피식 웃는다. 기껏 입었던 겉옷을 피 닦는 데 써서 하늘하늘하고 얇은 붉은 옷 그대로였다. 피부가 발갛게 상기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현영을 힐끔거리면서 묵묵히 말했다.

— 고마워.

한편 둘, 심지어는 시신까지 도합 셋의 눈치를 보던 구지혜에게 남경민의 인식이 미쳤다. 둘과는 달리 지혜는 연락을 받은 적도 강윤상을 걷어찬 적도 없다. 그런 그에게 경민이 물으려던 찰나, 주현영이 그 기회를 도로 회수했다.

— 마주쳐서. 도와준다고 따라 온 거야.

— 복도에서?

— 어.

— ….왜?

그냥. 그것이 현영의 답이었다. 지혜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경민은 현영과 지혜를 번갈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었다. 혹은 이미 희망까지 바랄 정도로 교만한 과신이었다. 으레 모두가 만 오천원 정도의 급전은 빌려줄 사람이 있다고 믿듯이. 셋은 그런 정도의 관계였다.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깊고 어두우며, 밝고 차갑고, 달콤한 성탄절 밤조차도 지나 왔으니까. 검고 어둔 밤의 형체와도 함께 맞서 왔으니까.

— 지혜야.

— 네.

—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경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현영은 맨 뒷자리의 양철 같이 냉정한 시신의 푸른 피비린내를 외면하면서 페달을 더욱 밟는다. 브레이크가 떨어져 나가면서 엔진 배기음이 울부짖는다. 차는 쏜살같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간다. 주현영은 안다. 강윤상 기지이사관은 최고의 족속이라는 것을. 감히 그의 그림자만 밟더라도 산 채로 마흔 다섯 번을 접혀 달로 가는 계단으로 만드는 형벌을 받는다만 그를 진실로 죽인다면.

숲은 고요하다. 이따금 양식장의 땅메기가 우는 소리와 배기음만 울린다. 모든 것이 입을 닥치고 숨을 죽이기로 합의된 그 길고 긴 밤을 한 대의 차량은 궤뚫는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가해동조자이자 교수형— 아마도 어떤 상상할 수 없는 형벌당할 생물의 얼굴을 외면하고 싶었는지 현영은 라디오를 틀었다. 삐걱 하는 삿된 소음과 함께 소리가 공간을 불쾌하고 눅눅하게 채웠다.

658분 교통정보입니다. 제04K기지에 설치된 윤상-이민자 협곡으로 인해 고성 방면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량들이 859중 추돌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정체가 심해지고 있으며 간밤에 그리고 지금 내리는 폭설로 인해 대기하는 차량들 역시 이글루 현상이…

셋은 동시에 숨소리조차도 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영이었다. 현영은 다시 라디오 주파수를 잡아내서, 소리를 단순히 탤런트들이 나와 떠드는 것으로 현명히 바꾸고는 중얼거렸다.

— 고성은 못 나가겠는데.

지혜는 창문의 성에에다 그림을 그리다가 황급히 지우고는 대꾸했다.

— 어쩌죠.

— 글쎄.

둘의 비관적인 티키타카에 경민은 마른 세수를 했다. 안압이 높아지더니 투명한 혈액이 왈칵 쏟아졌다. 먹먹했다. 서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원통했을지도 모른다. 현영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 네 잘못 아니야.

현영으로서는 진심을 내뱉은 것이었다. 윤상이 경민을 자신의 품에 안고 잤을 때 최소한의 사전 지식도 없었던 잔혹하고 무감정한 공장 같은 물적 강박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그 손과 피부와 뼈대. 믿는 것의 압박하는 견고한 근골. 그것은 경민이 피해자의 얼굴임을 누가 보아도 믿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민은 잔혹하게도 살인자였다.

얼굴의 피. 분말. 푸른 피. 경민은 지금 너무나도 낮은 땅을 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네 잘못 아니라는 현영의 말조차도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호의로 가득한 두 남녀에게 너무나도 자명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저 땅을 길 뿐이다. 지혜는 그 남자를 곁눈질한다.

— 어디로 가죠? 고성 안에서라도……

지혜의 떨리는 목소리에 현영은 읊조린다.

— 시체… 버려야겠지.

— 그렇죠.

정적. 라디오 소음. 라디오 속 남녀는 여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 겨울 속에서 새로 태어난 이들은 그 이야기의 반절은 알아듣지 못한다. 현영만이 아주 일부의 역설적 개념을 알아들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다다. 바다 이야기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어떤 물이라고 들었다. 푸르고 검으며 뒤척이는 그 바다에 기지이사관을 던져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 한다. 누구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현영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맑아진다.

— 얘들아. 바다에 갈 거야. 너희… 작년에 가고 싶댔잖아.

참으로 기이하게도 이딴 상황 속에서도 둘은 눈을 반짝이면서 기상하듯 몸을 일으켰다. 바다. 그것은 1등급 인원들은 건초 더미와 얼음 언 슬러시 같은 하수처리장에서나 나오는 말라붙은 혹은 찌그러진 만화 잡지에서나 본 이름이었다. 지혜는 자연스럽게 시신의 눈을 피하면서 초조하게 웃는다.

— 저도 들었어요. 바다는 엄청 큰 물이라고.

뒤이어 경민이 덧붙인다.

— 맞아요. 그럼… 거기 이사관을 버리면 안 들킬지도 몰라요.

— 그럼. 가서,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

현영은 사람 좋은 인상을 지어 보이면서 커브를 돌았다. 차가 짐승처럼 으르렁대면서 바퀴를 굴렸다. 어두침침한 밤의 골짜기를 지나자 눈발이 가득 덮쳤다. 현영은 이를 악물고 차를 몬다. 지독히 굵은 싸라기눈과 불빛에 모이는 모기 떼를 차로 와이퍼로 받아내면서 달린다. 착하고 사람 좋은 후배를 둔 현영은 이 밤에만 사십 번 착한 선배 노릇하기 참 힘들다고 다짐한다.

— 경민이는 거기 캐리어에 이사관 좀 담아 줘.

— 아, 넵.

반사적으로 일어난 경민은 남색 캐리어를 연다. 지퍼가 매끄럽게 움직여 열린다. 경민은 흔들리는 차를 견디며 시신을 캐리어 안으로 밀어넣는다. 작은 남자다.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인 중년 남자다. 그 눈은 부릅뜨고 혀는 내밀었으며 얼굴은 검기까지 했다. 경민은 똑똑하게도 면상부터 캐리어에 집어넣어, 으레 비단뱀이 어린 왕자 따위의 먹이를 삼키듯이 안정적으로 그의 표정과 죄책감을 처단한다.

강윤상이 죽었다. 향년 590세.

셋은 혁명가가 아니다. 그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밤의 손에 이끌린 침상의 배갯머리로부터 돌아온 실수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의 손가락과 말이, 호르몬이, 눈이 돌아온 것이다. 제04K기지는 어떻게 될까. 경민은 생각한다. 이사관보 중 하나가 이사관에 오를 테니 이 세상 모두 놀랄 일 같은 변화야 생겨날 일 없겠으나 어쨌든 인간 하나하나에게는 변화가 생길 것이었다. 이사관 사무실의 혈액으로 작동하는 충무김밥 자판기는 꿈을 꿀까. 이제 강윤상이 응원하던 초상올림픽 내세족구팀은 신 같은 숨을 쉬지 않을까.

길고 어둔 숲을 지나친 차는 설원을 질주한다. 안나푸르나를 연상케 하는 흰 산들이 우뚝우뚝 서 있고 제04K기지 인근의 기후에 걸맞게 눈이 펑펑 내린다. 경민은 그 눈을 본다. 기지의 아이들은 눈에서 태어나서 눈에서 살고 눈에서 죽는데, 하얀 꿈을 꿨다가 하얗게 질려 하얀 백골으로 환원되는 것이 보통이기에 그렇다. 경민은 안경을 고쳐 썼다. 문 밖은 소름끼치리만큼 차가웠다. 강들은 얼어붙었다. 나무도 그러했다.

— ……선배. 고마워요.

너무 추워서일까 경민은 굳은 입술을 연다. 현영은 피식 웃는다.

— 어떻게 갚을래, 대체.

글쎄 이 질문에는 역시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 붓다나 예수를 다시 살려낸다고 해도 그럴 것이라는 게 가방끈 짧은 경민의 생각이었지만. 그래서 결국 무엇도 약속해주지 못하고 경민은 현영에게 마주 웃어줄 뿐이다. 세상에 고작 웃음으로 빚을 탕감하는 암금(暗金)술사가 어디 있을까. 현영은 그리고 지혜는 역시 그 누구보다도 부유한 존재인 것이다. 죽어 누워 있는 이사관보다도. 심지어는 밤보다도. 그런 부호는 가난한 미소를 띄며 묻는다.

— 너희, 바다 가서 시체 버리고 나면 뭐 할래?

— 그러게요. 술 한 잔 하고 '회' 먹고 싶은데.

호ー에? 그게 뭔데?

— 바다에서 먹는 음식이래요. 완전 맛있대요. 클로버풀, 뉴트랄로프보다 더요.

— 그래?

지혜와 현영은 웃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 경민은 미소를 띈 채 둘을 번갈아 보았다. 이 천진난만한 웃음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모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강원도의 산과 산을 넘어 셋은 아니 넷은 검푸른 바다가 기다리는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경민은 헐벗음에 가까운 옷의 트인 부분을 감싸면서 추위를 견딘다. 긴장이 풀리자 열도 체력도 형편없이 떨어진다. 현영의 차에서는 악마를 원료로 돌아가는 온돌이 작동하고 있어 서서히 자신을 감싼 얼음이 녹아가고 있다곤 하지만 그 온도 변화는 뇌하수체를 가라앉히기엔 충분하다. 경민의 머리가 꾸벅꾸벅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04K기지를 본다. 경민은 언젠가 스무 살 아이였는데, 수면변칙부에 내던져진 하찮은 독립체였다. 꿈결 속에서 마빡을 때리던 선배들과, 고라니 장내세균총을 먹도록 시키던 재미있는 고대 의례와, 사라진 회비의 꿈을 꾼다. 차가운 바람이 마치 돼지국밥을 배달하는 한 마리의 이탈리아 진돗개처럼 내달리는 기지 후문에 쓰러진 후배들의 얼굴을 본다. 잔인성. 야만성. 근대성. 밤. 새벽. 거대한 빙하. 그 아래 훌쩍이던 스무 살 아이를 기억한다. 하얀 피부에 새겨진 채찍과, 노예 낙인과, 라은희 박사의 상흔과, 그리고 어젯밤.

잔혹한 실수의 꿈을 꾼다. 놀랍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홉꼬리고양이 채찍과 밤과, 마빡에 느껴지는 깨질 듯한 통증과, 바지락 껍데기로 손톱 끝을 누르는 선배님들의 행위와, 추위와, 강윤상 이사관의 잔혹하고 뜨거운 기지이사관으로서의 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현영을 기억한다. 현영은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선배였고 특히나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나 남은 부식, 달걀 껍데기 같은 것들을 자기 몫 절반을 나눠 주면서 존재하던 인간이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었다.

지혜를 기억한다. 지혜는 똑똑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경민 이상의 위협에 당면하였을 적에, 현영은 경민에게서 내려온 가호를 받아 지혜를 챙겼다. 그리하여 세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계승되는 의지가 생겼다. 비록 현영에게 이를 전수해 주었다는 우리의 마지막 첫 선배라는 사람은 시대정신에 올라탔다가 윤상모독죄를 이유로, 그 누구보다도 역겨운 밤의 조적으로 불리우며 죽었지만. 그래. 셋은 살아 있잖아. 이렇게 살아 있잖아.

잠꼬대하는 경민은 길고 찬란한 밤 속에서는 드롭킥을 날리지 않는다. 어떠한 마음도 모르고 길고 긴 잠을 자는 아기의 옹알이 같은 소리만을 라디오 소리의 부록으로 붙이면서 잔다. 지혜는 그런 경민을 온도 높은 시선으로 곁눈질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 ……경민 선배가 자수 안 해서 다행이예요.

지혜는 몰래몰래 속삭인다. 현영은 라디오 소리를 낮추면서 마주 대답해 둔다.

— 자수했으면… 아냐. 안 돼.

— 그렇죠?

— 피해자는 얘니까.

시대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현영은 정면으로 그리 대답한다. 차량의 바퀴가 쌓인 눈을 날려버리고 싸라기눈을 흩어버리는 동안 공중의 차가운 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을 지혜와 현영은 안다. 피해자의 얼굴들은 저마다 뒷자리에서, 가방 속에서 겨울의 잠을 잔다. 진하고 농밀한 순간이다. 위대한 여행의 끝에 선다. 길고 긴 길의 끝이다. 지혜는 경민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깨운다. 경민이 번쩍 일어선다.

— 내려요, 선배! 바다래요!

지혜는 배시시 웃는다. 경민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세로로 연다. 문을 열자 그곳은 극점이었다. 짜디짠 겨울의 긴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짜릿하다. 현영 역시 이미 내린 채로 기지개를 켜면서 실없이 미소를 짓는 중이다. 경민은 힘을 주어 캐리어를 끌고 차 밖으로 몸을 던진다.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차가운 냄새가 난다.

겨울 바다는 그야말로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바다더러 물러나라 할 수 없는 그러한 공간을 통째로 어두운 물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물들은 몸을 땅으로 던지고, 또 차디찬 땅으로부터 후퇴하면서 회전하고 있다. 세 남녀로서는 그런 물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차가운 밤의 기후 속에서 고고히 존재하는 검은 바다를 그들은 경외했다. 절벽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저 멍하니 응시한다.

— 경민 선배. 그거 던지죠?

지혜의 말에 경민은 응, 하면서 대답하곤 끌고 있는 캐리어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밤. 바람은 캐리어의 외피를 덮치면서 마치 윤상의 심장 소리 같은 울림을 만든다. 경민은 눈을 내리감는다. 가라. 피해자. 밤. 망령. 그렇게 속삭이면서 고작 잠꼬대 하에 죽은 이 세상 최고의 독립체를 밀어내려 애쓴다. 밤. 윤상은 언젠가 그에게 자정 직전에 물었다. 그렇게 태어난 보람이 어떠느냐고.

경민은 손을 떤다. 그럼에도, 아주 천천히 다가온 현영의 힘이 더해져 간단하게도 윤상의 무기물 관은 떨어져 내린다. 밤. 2초 후 첨벙 하는 작은 소리가 윤상의 뜨거운 숨처럼 단말마처럼 들린다. 경민은 가볍게 몸을 떨며 눈을 비빈다. 왕이 죽는다. 우리가 모르는 과거와 아는 과거가 어둠 속에서 잔인하게 죽어나간다. 어머니 밤이 중년 남자를 품는다. 직전과는 반대로.

가라.

천천히.

저 어둠 속으로.

현영은 마음 속으로 읊으면서 경민을 토닥인다. 경민은 역시 밤에 어울리는 애가 아니였다.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살덩이를 죽인다면 그 단 한 번의 시간 동안의 밤의 어둠이 마음을 깨뜨려버리기에 적합한 수준이 아닐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후배가 제04K기지의 머리를 뜯어내 버렸으므로 어쩌면 남경민은 어두운 숲 속에서 유사 이래 최고의 공사케이기지의 혁명가가 된다. 된 거라고 속삭인다. 시해당한 자,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살덩이는 애당초 고작 이름 모를 물의 짐승들에게 뜯어먹힐 운명이었던 것이다.

— 울지 마요.

현영의 뒤에서 지혜는 속삭인다. 지혜는 품 속의 손수건을 꺼내 경민의 눈을 닦는다. 이렇게 잔인한 기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섣불리 흘린 눈물이 눈꺼풀도 얼굴도 얼려버리기 전에 감정을 추슬러야 할 것이다. 경민은 일어선다. 그리고 배시시 웃는다.

— 그럼 이제 어쩌죠.

현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경민의 등을 토닥인다.

제50K기지로 갈 거야. 바다 아래에 있는 재단 시설이래.

— 바다 아래요?

셋은 그 의미를 직감한다. 제04K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찬란한 형틀 아래에 열여덟 개의 식인 구더기들과 조우하는 형벌을 그 누구보다도 쉬이 상상할 수 있다. 경민은 눈을 비빈다. 울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현영조차도 습기 찬 숨을 삼켜야 해서, 경민은 파르르 입을 떤다.

— 선배. 왜 그러는 거예요? 나 때문에.

— 대비하고 온 거야.

현영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제04K기지의 지독한 겨울을 회고하면서. 현영은 선배랄 게 없었다. 경민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선한 후배가 없었다. 그래서 그 지옥 같은 연쇄작용을 막아내면서 살아냈다. 거기서 태어난 것이 경민이었다. 지혜였다. 그러니까 그 둘이 없어진다면, 최소한… 그 순간, 참으로 무례하게도 지혜가 현영의 뺨을 때린다.

— 무슨 소리예요! 둘이 같이 동반자살이라도 하려고요? 그럼 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둠을 밝힌다. 두 남자는 동시에 잔잔한 심중(心中) 속에서 꿈을 깬다. 지혜는 이를 악물면서 일갈한다.

— 왜 오자마자 이래요. 회도 먹고 놀 거라면서요. 그것도 안 해보고 죽는다고.

— 미안.

현영은 머리를 긁는다. 그리고는 뺨을 쓰다듬는다. 경민 역시 토해낼 듯한 기침을 한다. 마치 무언가 저승의 것을 토해내는 육지의 무엇처럼, 남경민은 눈을 뜬 것이다. 현실의 현실. 강윤상은 라포티아급 독립체가 우글거리는 바다 속에서 이미 죽어 있다. 셋은 이 차가운 툰드라 바다에 살아 있다. 날치 한 마리가 파도 속에서 솟아나더니, 어둔 밤을 넘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지혜는 날치를 낚아챘다. 움켜쥔 손아귀 속에서 서늘하고 미끌거리는 생물은 가련한 숨을 쉬면서 날개를 친다. 눈을 감은 지혜는 새의 목을 비튼다. 침묵. 그리고는 날개를 손쉽게 갈라 두 남자에게 각각 건넨다.

— 선배, 받아요. 이게 회래요.

— 이게 그거야?

경민은 조심스럽게 날갯살을 베어 문다. 차갑고 담백하며 살이 단단한 짐승이다. 몇 초 지나고 나니 뼈만 남는다. 셋은 차에 걸터앉는다. 입김이 난다. 서릿발 같은 바람이 내린다. 그리고는 웃어 버린다. 단순하게 앞날을 철저히 회피하는 인간으로서 웃었다. 혀에 남은 고기의 맛도 차가운 겨울도 셋은 함께 느낀다.

그날. 셋은 어디로 향할지 정하지 못한다. 눈이 내렸다. 너무나도 많은 눈이 삼라만상을 설원으로 만들고 자동차 위로 눈의 언덕이 생겨났다. 바다가 얼었다.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얼어붙은 빙하 위로 향하는 선배의 후배의 후배 일동은 동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제04K기지에서 셋을 다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 이쪽으로 계속 걸으면 일본이 나온대요.

— 일본이 멀어? 숙소에서 양식장보다 멀까?

— 그건 모르겠어요.

— 일본엔 온천이 유명하다며.

— 그러게요. 경민 선배 거기서 피부 치료하면 되겠다.

— …나을까요?

— 낫길 바래야지.

— 그렇죠?

밤.

내년 봄. 얼음이 녹은 해변에는 커다란 산갈치부터 멸치, SCP-682까지, 무수한 심해어가 떠오를 것이다. 윤상의 시신을 피해 자결을 택한 것. 그것이 대다수 재단 생선학자들의 견해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물고기처럼 죽지 않은 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은 전해져 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강윤상을 죽였다는 그 귀신에 대해 두려워 떨면서, 제04K기지의 냉정한 겨울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아주 길고 얇은 우정 유사한 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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