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이 세상이 아무리 자동화되더라도 편의점에서는 누군가 우두커니 서서 싸구려 담배 두 개를 놓고 뭘 사갈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오늘밤엔 그 사람이 바로 나다. 두 가지 선택지를 우유부단한 메트로놈처럼 오가본다. 두 담뱃갑 모두 똑같은 스크린을 달고 똑같은 광고를 거듭해서 보여준다. 사실 뭘 골라도 상관없다. 쿠바 시가나 평범한 담배나 나한텐 맛이 다 똑같다. 내가 태우는 담배가 말보로든 뉴포트든 신경써본 적은 없다. 그저 두 이름 중에 하나를 고르는, 단지 그뿐이다.
편의점에 술 냄새와 과자 냄새가 자욱하다. 저 길 건너 나이트클럽에서 쿵쿵대는 소리 때문에 여전히 벽이 슬슬 떨리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재미삼아 집에서 나오는 일은 별로 없다. 누구든지 VR 헤드셋이나 감각몰입 장치나 해서 집에서 혼자 잘 논다. 우리 동생도 그렇다. 저녁에는 방문 잠가놓고 방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한다. 진짜 이름도 진짜 얼굴도 진짜 몸도 모르는 사람하고. 그저 아바타와 닉네임일 뿐이다.
말보로를 홱 집어들고 출입구로 걸어간다. 어디 걸거치지 않게 양손을 주머니에 푹 꽂아둔다. 출입구 앞의 커다란 콘솔 두 대는 고객을 스캔해서 과자값과 술값을 자동으로 결제해준다. 가게에 직원은 따로 없다. 뭐 사실, 가게로 굳이 찾아가는 사람도 없다. 외출은 술 마시거나 파티 갈 때만 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저 답답한 아파트에서 빠져나올 핑계가 있으면 싶었다. 창밖에 떡하니 놓인 네온 광고에서 잠시만 벗어나고 싶었다. 저 바깥에 멋지고 침침한 골목이 있다. 거기서 가만히 앉아 담배 연기 한 줄 피우는 게 낙이다. 나만 있는 천국이랄까.
"정지! 정지!"
걷는 중에 딱 멈췄다. 콘솔이 시뻘건 빛을 뿜고, 중앙 스크린에서 느낌표가 깜빡인다.
"유효하지 않은 개인 신상 이식체 발견. 미등록 시민."
내 이식체? 아니 오늘 내내 멀쩡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움직이지 마십시오. 시 당국에 경보를 전달했습니다."
시민은 모두 등록자다. 미등록자는 도망자 아니면 인신매매 피해자뿐이다. 살면서 미등록자는 한 번도 못 만나봤다. 하지만 무단횡단자나 소매치기한테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는 잘 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도망친다. 도망칠 수밖에 없다. 제일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지만 어쨌든 도망쳐 버렸다. 문 닫은 가게들과 불 꺼진 키오스크들을 지나친다. 흰 정장 입은 남자를 밀쳐 넘어뜨릴 뻔했다가 지나친다. 도로 표지판과 현상수배 가상 포스터를 켠 건물들을 지나친다. 모퉁이를 돈다. 갑자기, 여기는 이 블록의 유일하게 어두운 곳이다. 나만의 그 골목. 쓰레기함에 쾅 부딪혀 바닥에 나가떨어진다. 왠지 체력이 평소 같지 않다. 그냥 시가를 피우느라 폐가 맛이 가서 그럴까.
도망치면서 본 표지판들 모두 표시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내 인상착의를, 내… 잠깐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63
7:42 PM
ㅎㅇ
ㅇㅇ
많이 안더워?
너무 더웠지 오늘 아빠랑 온종일 정원일 했는데 완전 다 탄듯
헐 힘들엇겟다 나 오늘 쭉 집안에 잇엇는데 에어컨 고장나서 아직도 겁내 덥고 찝찝함 울엄마도 스트레스 만땅인듯 지금 더위 잊는다고 벌써 시가 반갑은 피우고잇을걸
유감이네 가뜩이나 불편한데 연기 빽빽하면 더 불편할텐데
뭐 이제는 익숙함 그래도 낼은 집에서 나가고싶다 와엠씨에이에 실내아이스링크 있는데 같이가실?
ㅇㅇ 괜찮을듯! 친구들한테도 연락해봐야겠다 다른애들 답장 받으면 알려줄게
침대에 누워서 메시지를 네 번째로 다시 읽어본다. 이 자식 나를 이렇게나 기다리게 하다니. 카일Kyle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지 몇 시간째다. 하지만 이걸로 뭐라 할 순 없지. 집착한다고 보일 테니까. 그래도 답장이 안 오니까 잠도 안 오려고 한다. 방 안은 찝찝하고, 냄새는 퀴퀴하고, 나는 좋아하는 남자애 답장을 기다리고. 내 인생도 참 불쌍하다.
일어나서 내 방을 서성거려 본다. 참 많이도 덕지덕지 꾸며놓았다. 벽에는 포스터며 스티커며 듬뿍 붙여놨고 책상에는 갖은 잡동사니가 널렸다. 가끔 엄마는 나한테 수집병 걸렸냐고 말했다. 담배 연기를 자욱히 피우면서. 집안 온 구석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 한번은 엄마가 아빠랑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두 분은 내가 자는 줄 알았겠지만 정말 시끄럽게들 싸웠다. 엄마가 앞으로는 스트레스 받을 때만 담배 피우겠다고 약속하면서 싸움이 끝났다. 안타깝게도 아빠가 떠난 뒤로 엄마는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무래도 그때 내가 방에다 오만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던 듯하다. 아빠를 잃으면서 한 가지를 배웠다. 나한테 중요한 것을 유심히 살펴봐 주지 않으면 떠나 버리기 십상이라고.
그런 말 하니까 카일 생각난다. 이 자식 지금 데이트를 빼려는 생각은 아닐지.
핸드폰을 다시 집어든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11:04 PM
친구들 답장 아직이심?
잠시 후, 왼편에서 점 세 개가 꿈틀거렸다. 이제야 답장하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저… 번호 잘못 보내신 것 같은데요
먼소리야 오늘 아침에도 문자했구만
제 폰이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성함 말씀해주시면 연락처에 다시 추가하겠습니다
아무도 아님
네?
아 ㅈㅅ 아무도 아니다
아니 아무도 아니야
아무도 아니라고
아무도 아니라니까
핸드폰을 떨군다. 왜 이것 말고 문자가 안 쳐지지? 손가락이 왠지- 왠지 말을 안 듣는다. 이름이 안 쳐져! 문자가- 가만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무도 아님.
어질어질하다. 정신을 못 차리겠다. 계단을 후다닥 내려간다. 다급한 발걸음에 계단이 삐걱인다. 내 이름이 어디 갔지? 잃어버렸다. 사라졌어. 더위 먹었나 보다. 탈수 때문인가 보다. 아니 진짜인가 보다. 어안이 벙벙하다. 엄마처럼 스트레스를 풀어볼까? 그러면 도움이 될지도. 부엌 서랍을 뒤적거려서 엄마의 마지막 담뱃갑을 찾아낸다. 라이터를 든 손이 떨린다. 찰칵, 찰칵… 불이 붙는다.
담뱃불을 붙이고 깊게 후욱 들이쉰다. 연기가 폐로 밀려온다. 쿨럭쿨럭, 기침이 나온다. 이러면 엄마는 진정되는 걸까? 이렇게 가슴이 불타오르는데? 또 한 모금 빤다. 또 한 모금. 그리고 다음 한 개비. 또 한 번 마구 쿨럭쿨럭, 하다 보니 계단에 엄마가 서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계셨지? 담배 연기가 어느 정도 걷히자 엄마의 복잡미묘한 표정이 얼핏 보인다. 아니 엄마 표정이 아니다. 잘 살펴보니 어떤 남자다. 아빠인가? 흰 정장을 입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하나, 언뜻 떠오른다.
담배를 챙겨서 뛰쳐나간다.
#29
그 남자가 더는 쫓아오지 않는다고 확신이 들고서야 속도를 늦춘다. 그렇게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이 그토록 빨리 달리는 건 처음 봤다. 은행 영업 시간은 분명 아니었는데. 출입구 밑에서 잠 좀 잔다고 뭐가 문제였을까? 어차피 아무도 안 들어올 거. 혹시나 문제였다 그래도 이렇게 쫓아올 필요도 없었는데. 평소처럼 공원이나 가서 자야겠다.
늘 공원에서 자기를 좋아했다. 물론 비가 오면 나무로는 빗줄기를 막기에 택도 없지만, 공원에서는 풀이 더 부드럽고, 또 도로에서 더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으니까. 자동차 소리는 항상 크다. 아빠가 나 어릴 때 해준 이야기인데, 옛날에는 도로는 말이 다니는 곳이었댔다. 말이 냄새는 더 고약하지만 그래도 엔진은 없으니까. 하지만 자동차가 참기에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출근할 일자리나 퇴근할 집이 있다면야.
몇 년째 이렇게 지내니까 노숙자 신세라고 별 감정은 없다. 중요한 건 자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닐까? 거기다 이렇게 변두리 삶을 지내다 보니 누구한테 기대를 받을 일도 없다. 나한테 어디서 왔냐거나 어디로 가냐거나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딱히 그때 대답할 말은 없다. 쓰레기통에 피운 불 같이 쬐는 사람끼리도 별로 말을 나누지 않는다. 다시 안 볼 사람한테 내가 누구냐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냐 말이지.
이제야 숨을 고르면서, 방금 막 도착한 이 길목을 주욱 살펴본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이곳에 있는 게 어색하다. 내가 어디 속하는 사람이야 아니지만, 평소에 이런 기분은 나한테 3피트 이하로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이 동정을 던지거나 역겨워할 때나 느껴봤다. 그런데 이번 기분은, 이곳에 내가 속하지 않아서라기보단… 다른 곳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다른 무엇에게.
이상하다. 또 다른 길이 자석처럼 나를 잡아끈다. 아니 다른 동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 내가 있어야 할 곳인 줄은 알겠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무언가, 어디선가 내게 기대를 걸어주고 있다. 어떤 면에선 무섭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목적지를 머릿속에 품고 길을 나선다.
#8
지친 채로, 두려움에 떨며, 인식표도 없이 참호 속을 터덜터덜 걷는다. 시체 썩는 냄새와 화약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힌다. 이름 없는 사상자 사이에서 죽기는 싫다. 지난 36시간을 갖은 짓을 해가면서 살아남았다. 그러느라 겁쟁이가 되었다. 겁쟁이는 참호에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나는 것이라면 겁쟁이라는 것뿐이다. 독일 군복을 입고 독일 참호에 있지만 내가 정말 독일인인지도 모르겠다. 군인인지조차 모르겠다.
전선으로 몰려가는 군인들 사이를 뚫고 거슬러 걸어간다. 오늘 아침에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릴 남자들이 떼거지로 나를 밀치고 지나간다. 물고기가 되어서 상류 쪽으로 헤엄치는 기분이다.
"거기 이병!"
계속 움직인다.
"정지! 명령이다."
멈춰선다. 뒤를 돌아보진 않는다. 무슨 하사가 시가와 커피가 묻어나는 목쉰 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 어깨를 잡고 몸을 뒤로 돌려놓는다.
"자네 내가 지금 말하는데 나 쳐다봐야지."
"예." 대답한다. 경례도 한다. 움직임도 말도 모두 저절로 나온다.
"자네 어디 가나?"
"탄약 가지러 갑니다."
"돌격하기 전에 다 챙길 텐데."
"방금 돌아왔습니다."
"방금? 어디서?"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아닙니다. 지난 하루 반 일진이 나빴습니다."
"이병, 자네 이름이 뭔가?"
"솔직히 상사님도 기억 못하실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실 테니까요."
상사가 또 날 죽 훑어본다. 그제서야 찢어진 바지, 목에 줄줄 흐르는 피, 금 간 헬멧이 보였나 보다. 나한테는 연대도 대대도 중대도 없다. 그저 전선을 떠나야 할 뿐이다. 누가 날 기다린다. 내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적어도 지금은.
대신에, 베를린에 초대받지 않은 약속이 있다. 아파트에 날 기다리는, 빈 페이지만 가득한 공책이 있다. 내가 지켜봐야 할 공원 벤치가 있다. 주문해야 할 술이 있다.
"총에 총알이 없으면 되나. 얼른 갔다오게."
고개를 끄떡이고 다시 걸어간다. 둘 다 잘 안다.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0
변화 과정은 저마다 다 다르지만, 모두들 항상 처음에는 당황한다. 그러다 당황하는 마음이 잦아들면, 아무도 아닌 자는 항상 발판을 찾아낸다. 발판은 골목길일 수도 공원일 수도 구호 천막일 수도 있다. 항상 숨 돌릴 시간이 있다. 그때 담배를 태울 수도 있다.
그러고 나서 아무도 아닌 자는 이 세상에서 새로 내려온 운명과 목적을 깨닫고, 이 세상의 상호작동 원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 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도구를 얻고 나면…
흰색 양복 입은 사나이가 항상 가까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신경 쓰이지 않는 곳에, 자신한테 욕을 내뱉으면서. 왜냐하면, 이번에도 그 사나이는 늦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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