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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목: 안녕, 나.
저자:Navla
작가의 말: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
license:
Summary: 오토바이 (였던 것)
Author: Optimal claim
License: CC BY-SA
Source Link: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kt_motorcycle-crash.jpgSummary: 소심나연의 폰트
Author: 마포 구청
License: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 조건
Source Link: https://www.mapo.go.kr/site/main/content/mapo04010201
일러두기
- 이것은 SCP 재단 21K기지 분석심리학부 소속 이나연 선임연구원의 일기이다.
- 수기는 아니며, 그녀의 개인 단말기의 일정 관리 어플리케이션에 기록된 내용이다.
- 이 테일은 두 목소리가 교차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원활한 구분을 위해 서로 다른 폰트로 이를 나타내었다.
<전략>
5월 4일 금요일
곽수일 박사의 심부름을 하느라 텔레킬 합금 싣고 기지 외곽까지 갔다 옴. 두돈반 말고 내 꺼 오픈카 타고 감. 뭐, 별 일 없었으니 됐지.
그래서 담탐도 좀 가지고, 시내 들러서 이것저것 쇼핑도 슬쩍하고 왔다. 시내 행인들이 텔레킬 합금 보든 말든 내 알바 아니지.
5월 5일 토요일
주문했던 오토바이인 AKT NKD-125 모델이 도착. 완전 쌔삥이라 기분 째진다. 한번 시동 걸어봤는데, 우렁찬 엔진과 진동이 간만에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드네.
내일 모래 중으로 21K기지 외곽에서 시험 운행을 해 볼 예정. 소음 공해는 좆까라 그래. 나는 달려야만 하고, 그건 기지 이사관이 와도 막을 순 없어.
5월 6일 일요일
천세윤 박사가 주말에 갑자기 나 부르더니 JUNG 아키텍쳐 기반 메멘토스 저장소에 박힌 정신에너지 콘덴서를 보수하자고 한다. 결국 끌려가서 깔짝깔짝 도왔고, 그 과정에서 천세윤 박사의 실수로 많은 양의 정신에너지에 노출되었다.
천세윤 박사는 내가 받아들인 만큼의 정신에너지를 방출해야 한다면서 날 억지로 밴드에 참여시킴. 베이스로 코드의 근음만 치다 왔다. 강다홍 이 친구는 또 마냥 좋다고 와서 드럼 치고 가더라. 이거 윤리위 신고 가능하나?
5월 7일 월요일
???
어… 누구세요? 누구신데 왜 제 이름으로 제 방에서 제 일기를 지금까지 써오신 건가요? 제 방도 그쪽 취향으로 꾸미신 거 같던데… 다시 원래대로 복귀시키려고요.
그리고, 왜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 안나는 거죠? 조금 혼란스러워서… 일단 이것저것 정리를 좀 했어요. 테이블도 그렇고, 왜인지 모르게 제가 주문한 물건들도 정리랑 반품처리도 했어요. 원래 제 방이지만, 그래도 전까지 쓰시던 분이니까 말씀 드려야 할 거 같아서…
5월 8일 화요일
???
누구냐니,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 아니, 그보다도 어제 하루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내 몸을 가지고?
나도 지금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 그리고 미뤄뒀던 업무도 어느새 다 끝나 있고, 내 담배는 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고, 오토바이는 반품 신청 되어 있고, 근무 들어가면 분심부 인원들이 날 보고 은근히 웃고 있어. 이거 얼마나 쪽팔린 건지 알아?
그리고 내가 오늘 아침에 받은 메일 보여줄까?
제목: 5252 수줍음 많은 풋풋한 이나연 양~
발신: 천세윤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ㅋㅋ 갑자기 왜 이렇게 얌전해졌냐? 뭐 잘못 먹었냐?
일은 열심히 해서 보기 좋다. 평소처럼 상급자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고 ㅋㅋ
제목: 언니 어제 진짜 대박이었어요!
발신: 강다홍 연구원 (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언니 그런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 처음 봤어요! 대박! 저 예전의 멋진 나연 언니보다 따뜻한 나연 언니가 더 좋은 거 같아요!
제목: 괜찮아?
발신: 곽수일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평소랑 너무 모습이 달라 보이는데, 뭔가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던 애가 어제 부쩍 더 많이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래도 일 열심히 하니까 난 좋다.
일단, 만일 네가 다시 내 몸을 탈취한다면…(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담배 물어내고, 니가 누구고 왜 내 몸을 탈취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마우스 오른쪽 클릭하면 이전 기록에다가 각주 달 수 있는 메뉴 나오거든? 알겠다면 여기다 각주로 달아. 알겠어?1
그리고 절대로. 절대 절대 절대로 오토바이 반품시키지 마. (내가 반품 취소시켰다.) 그건 니가 내 몸 탈취하기 한참 전인 작년부터 짬짬이 모은 돈으로 지른 거니까.
내일은 제발 평소의 나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5월 9일 수요일
죄송합니다… 저로 일어났어요…
일단 담배는 제가 기지 매점에서 다시 사왔어요.2 오토바이도 반품 안시킬게요…
그리고 혹시라도 궁금해 하실 까봐 오늘 아침에 받은 메일도 첨부할 게요.
제목: 5252 진짜 뭐 잘못 먹었던 거냐고 www
발신: 천세윤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갑자기 평소에 나 개 무시하던 이나연으로 돌아오니까 겁나 당황스럽네.
어, 반갑고, 오랜만이다. 오늘도 근무 뺑이 치고 21K기지 오도방구 타고 돌기만 해봐라. 어제는 내가 기타 연습한 거 레전드 뽑아서 용서해 준거다.P.S. 곽수일이 메인 보컬 하기로 했고, 윤금선 교수님이 세컨드 기타 하기로 했다. 너만 오면 돼! 빨리 와!!!!3
제목: 언니 어제도 진짜진짜 대박이었어요!
발신: 강다홍 연구원 (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언니 다시 그런 쿨한 모습 돌아와서 너무 반가워요! 대박! 저 어제의 따뜻한 나연 언니보다 멋진 나연 언니가 더 좋은 거 같아요! 레알루요!
제목: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발신: 곽수일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평소의 너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싶긴 한데, 어제는 평소보다 좀 격양된 느낌이 있는 거 같다. 그저께의 널 부정하려고 억지로 연기하는 느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의 평소의 모습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멋있든, 따뜻하든, 그냥 네가 편하게 있었으면 해. 굳이 멋진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일만 조금 열심히만 해줘라. 난 그거면 된다.푹 쉬고, 내일 보자.
그리고… 저에 대해서 약간 오해가 있는 거 같은 느낌이라, 조금 이야기를 덧붙여도 될까요…?
전 이나연 선임연구원입니다. 변칙개체가 아니에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나연이 아닌 적이 없었어요. 엄마 아빠 이름도 다 댈 수 있고요, 어릴 때 어떤 만화를 좋아했고,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도 다 댈 수 있어요.45 그런데 갑자기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전 그쪽이 변칙개체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업무 끝내고 와서 어제 자 일기를 보고 대충 상황 파악할 수 있었네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재단에 입사한 이후의 제 과거 기록을 찾아봤는데, 뭔가 안 맞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제겐 과거의 그 기억이 분명 존재하는데, 그 증거 자체는 아무래도 그쪽 성격에 좀더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과거에 촬영된 사진이나 녹음기록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소심…하고 걸리적 거리는 저보단… 멋지고 거침없는 그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 얼굴이 맞고, 제가 겪은 경험이었지만, 그 기록에서의 전 말투나 포즈나… 지금의 저보단 훨씬 멋있었어요… 그럼 사실 제가 변칙개체인데 이렇게 가짜 기억이 심긴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올바르려나요…? 하하 물론 그렇겠지요? 제가 맘대로 절 신고하고 그러면 그쪽이 곤란해질 까봐 일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업무 마치고 숙소로 퇴근했어요.
아무쪼록 생활에 불편이 없었으면 해요. 이래봬도 약간은 동거인? 같은 거라고 생각 해도 될까요…? 헤헤…
(P.S. 혹시 동거인이라고 말씀드린 게 불편했다면 사과드릴 게요…)
5월 10일 목요일
제발 그딴 사소한 거로 나한테 사과한다고 말하지 좀 마. 너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닐 거 눈에 선하니까. 그리고 신고는… 하, 괜히 내가 먼저 신고했다가 격리당하고 그러면 귀찮아 지고 내 애마도 못 탈 게 뻔하니까 신고는 조금 미루는 거로 하자.
일단 정리부터 좀 해보자.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67 나랑 너랑 내 몸을 격일로 나눠 가지게 되었고, 서로의 제어권을 가진 날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지? 일단 지금까지 봤을 땐 일반적인 해리성 정체감 장애랑 비슷한 증상으로 보이거든? 그러니까, 이중인격 말이야. 그런데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써 이름까지 다르게 있는 그런 이중인격이랑 다르게, 너도 이나연이라고 주장하고 있잖아?
아무래도 가능성은 둘 중 하나인 거 같다.
하나는 약간 당연한 건데, 너는 존나 악랄한 변칙적 아키타입 독립체이고 철판 깔고 내 의식에 들어와서 내 행세를 하는 것이라는 가능성. 뭐, 이전에 천세윤 박사 사칭사건도 있었잖아. 충분히 말 되지 암암.
다른 하나는 아닌 게 뻔하지만, 지금 현상을 제일 잘 설명해 주는 건데, 지금 이 현상은 SCP-963-KO와 접촉한 사람이 보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거든?8 그러니까… 저 SCP의 효과와 비슷한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어. 그렇다면 너는 내 정신의 일부고(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무스-아니마 집합체?) 그게 내 자아로 밀려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해 버린 거고, 그렇게 원래 인격이 떨어져 나가 담배도 못 피고 애마도 못 타고 있다는 거지.
두번째일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난 너 같은 나를 둔 적 없거든? 니가 설사 내 내면 속 숨겨진 어두운 모습인 '그림자'라 하더라도, 원래 그림자는 본능에 충실하다고. 근데 넌 본능에 충실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에게 몸 굽히면서 널 맞춰주고 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넌 내 그림자가 아니야. 이건 확실해.
아, 그래. 이제부터 그냥 넌 나한테 맞춰라. 너는 이제부터 이나연 선임연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9 세상 두려울 거 없고, 오픈카로 과속을 밥 먹듯이 하고, 절대 사과하지 않는 이나연이다. 알겠어? 너를 위해서 매뉴얼도 마련해 준다 내가.
- 해 질 때쯤 하루에 한번씩 오토바이를 타고 21K기지 외곽을 한바퀴 돌기.10
- 천세윤이나 곽수일이 뭐라고 하면 째려보면서 '그래서요?'라고 쏘아붙이기.
- 업무 완료의 기준은 할당량의 절반이다. 절반 채우면 헬멧 쓰고 1번 항목 하러 나가.
- 강다홍이 맨날 내가 어딜 가든 빈대처럼 따라다닐 텐데, 콧방귀 뀌어주고 따돌려. 걔랑 어울리면 만사가 귀찮아져.11
- 절대 그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마. 니가 실수한 거라도 말이야. 알겠어?
일단 이렇게 시간 좀 벌고, 난 지금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좀 확인을 해 봐야 할 거 같다.
제발 사고치지 말고, 이미지 좀 지켜줘라. ㅇㅋ?
5월 11일 금요일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매뉴얼 주신대로 행동하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운전하는지 잘 몰라서… 차고에서 나가려 다가 그만…12
5월 12일 토요일
허리가 뻐근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목: 돌아왔구나 이나연이!
발신: 천세윤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pcs.ygolohcysp-lacitylana|nuyes-yks)(대충 스타워즈 아나킨 짤)
돌아온 거… 맞지?
일단 넌 배우 하지 마라. 연기 진짜 못한다. 요새 계속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 같은데, 간만에 한번 면담이나 가져볼까? 특히 어제는 좀 많이 어색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평소의 너도, 뉴-나연도 아닌 느낌 ㅋㅋㅋ 웃기긴 웃겼다.암튼,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고, 오도방구 수리비는 내가 낸다. 몸조리 좀 하고, 주말동안 좀 쉬어라. 일요일에 밴드 부름.
P.S. 아니 사실 이 아래 게 본문이고, 위에 거가 ㄹㅇ 추신이지.
우리 밴드 곡 뭘로 할까? 난 무조건 핑크 플로이드의 Money 하자고 했는데, 곽수일은 인트로의 출납기 소리 어떻게 할 거냐고 쿠사리 주더라. 난 찐으로 출납기랑 영수증 뽑는 기계 주문할 각오가 되어있는데 말이지.
다홍이는 달의 하루의 너로 피어오라 하자는 데, 그건 우리한텐 너무 미치도록 어렵고,
윤금선 교수님은 김건모의 서울의 달 하자는 데 내 생각엔 너무 올드하고 분위기 다운될 거 같음.
대신 수일이가 실리카겔의 No Pain 하자고 하네. 니 생각은 어떰? 노래도 적당히 신나고 코드도 어렵지 않고 많이 반복돼서 너 하는데도 크게 힘들진 않을 거 같음.그리고 음향과 믹싱은 풍소경 박사님이 대충 봐주시기로 함. 예전 소싯적에 믹서랑 채널스트립 만져본 경험이 있다고 하네.
제목: 언니 어제 진짜 진짜 진짜로 대박!!!!
발신: 강다홍 연구원 (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pcs.ygolohcysp-lacitylana|gnik-ton-gnak-telracs)언니 그렇게 멋진 거 처음 봤어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경기장으로 향하는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아니면 에반게리온을 타러 가는 신지처럼 "타러 가야해… 오토바이 타러 가야해…" 라고 혼잣말 하면서 혼자서 헬멧 쓰고 그대로 앞 바퀴 들고 윌리를 하면서 나가시던데, 그때 끼아앗! 하고 소리치는 게 꼭 카우보이 같았어요…!!!!
차고 나가자 마자 바로 기지 물류부 자동차랑 부딪혔던 거 기억 나죠? 부딪히자 마자 벌떡 일어나시더니 저한테 따봉 날리셨잖아요. 되게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해서 마치 행위예술을 보는 듯했어요…!!1314저도 언니처럼 그런 영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그때 정말 강렬하게 느꼈어요!!!!
흑흑 언니 너무 좋아 ㅠㅠㅠ
제목: 어째 요새 항상 너에게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 같네.
발신: 곽수일 박사 (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pcs.ygolohcysp-lacitylana|kawk-acips)너 괜찮냐? 그래도 전과는 다르게 이번 질문은 신체적인 부분에 관한 질문이네.
가볍긴 해도 접촉사고는 접촉사고니까, 뼈에 잔금이 갔을 수도 있고, 근육이 놀랬을 수도 있으니까 의무부 한번 가봐라. 어제 분명 의무부 안 갔다 온 거로 기억하고 있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꼭 다녀와라.
난 이미 체면이란 게 남아 있나 싶다. 메일만 스무 개가 넘게 와 있는데, 이 아래로는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서 다 지웠다.1516
하, 넌 그냥 내 오토바이랑 자동차 절대 만지지 마. 타고 싶다면 니가 니돈 모아서 사. 아니다 그냥 넌 아무것도 하지마. 제발. 그게 날 도와주는 일이다. 매뉴얼은 잊어버려. 이제부터 새로운 매뉴얼을 하달하겠다.
- 사고치지 말기
끝이다. 넌 이것만 지켜주고, 수리비는 천세윤이 한 거를 취소시켜서 라도 니가 제대로 청구해.17
난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되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봐야겠다. 넌 그동안 어떻게든 천세윤 그 눈치 빠른 놈의 시선과 곽수일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
다행인 건, 내일은 일요일이라는 거고, 적어도 월요일 까지는 한시름 놓을 수 있다는 거지. 너도 내일 동안은 내가 부탁한 거 해결 좀 하고, 최대한 그 천곽강 트리오를 멀리 해라.
그리고 이제부터 이 일기장은 본래의 목적인 '오늘 뭐 했는지를 적는 곳'으로 다시 회귀한다. 이유는 바로, 니가 뭔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알기 위함임. ㅇㅋ?
5월 13일 일요일
오늘 한 일:
1. 쿨나연씨1819의 오토바이 수리 맡기고 왔다. 17일에 수리가 완료된다고 한다. 이미 천세윤 박사님께서 수리비를 지불하셔서 결재는 못했다. ㅠㅠ 다시 취소하는 건 쉽지 않아 보임…
2. 옷장에 꽉 끼는 바지 밖에 없어서 불편했던 차였는데, 홈쇼핑에서 편해 보이는 치마를 찾았다. 예쁜 꽃무늬도 있어서 그거로 바로 주문했다. 내일 바로 배송이 올 예정. (기대된다…!)
3. 베이스를 처음으로 제대로 쳐봤다. 일주일 전에 대충 만져는 봤었는데, 지금 제대로 배우려니 힘들다… 아직 많이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 (노트: 코드는 Db - Eb - Cm - Fm 반복) 근음만 4분음표 따라 치면 됨! 근음=코드 맨 앞에 붙은 계이름. (그러니까, 레플렛, 미플렛, 도, 파) 이렇게 연습 열심히 하면 합주 때 폐 끼치지 않겠지…2021
4. 기지 들른 김에 의무부 가서 간단히 CT 찍었는데, 다행히도 몸에 이상은 없다고 한다. 곽수일 박사님이 전화로 확인하시길래 답했더니 칭찬해 주셨다. 헤헤…22
5월 14일 월요일
너 제정신이야? 내가 그 셋이랑 엮이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아니 애초에 주말 근무 시간도 아닌데 왜 간 거임? 그거도 엄연히 추가 근무다. 추가 근무 수당 요구할 거 아니라면 그냥 거절을 해.2324
아무튼… 그래. 오늘 한 일. 나도 뭐 했는지 적어야지. 그래야 니가 내 모습을 참고라도 하는데 도움되지.
치마 시켰더라? 난 치마 안 입는데… 특히 꽃무늬 있는 건 더더욱. 그렇다고 버리긴 아까워서 일단 종이 상자 안에다 개 놨다. 굳이 입고 싶다면 나중에 주말에 혼자 있을 때만 입어.25
천세윤 박사가 이번엔 나한테 직접 찾아와서 같이 커피나 한잔 하자고 그러더라. 단칼에 거절함. 왜냐면 보통 천세윤이 커피 먹자고 하는 건, 내가 그 커피를 사야 한다는 걸 의미하거든. 게다가 같이 이야기 해 봤자 시시콜콜한 밴드 이야기나 할 거고, 또 실수나 엄청하는 누군가의 베이스 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지.
마지막으로, 애마가 없으니 너무 심심하다. 17일까지라고? 이번주 목요일? 겁나 오래 걸리네. 기분 전환 겸 21K기지 외곽을 오픈카 타고 달림. 이 맛이 아닌데… 너무 찝찝하다.
5월 15일 화요일
천세윤 박사랑 면담했어요. 천박사님께서 먼저 커피 사 놓으셨더라고요? 같이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아무튼, 천 박사님은 저희 상태를 전부터 알고 계셨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해결 방법을 알려주시더라고요. 바로 쿨나연씨도 밴드에 참여하는 거요!26 천세윤 박사님이 말씀하시길, 그때 밴드 활동을 열심히 참여를 안 해서 정신에너지가 온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내부에 남아있던 정신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한 아키타입에 들어가 팽창을 유발한 것이래요.27 그래서 일단 저라도 열심히 밴드 활동하기로 했어요. 하다 보니까 능숙해지고, 또 재미도 붙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후로 격일마다 연습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쿨나연씨는 밴드 신경 안써주셔도 돼요. (쿨나연씨가 연주하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힘들겠죠…)
추신: 치마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요.28
5월 16일 수요일
야, 소심나연. 이거 뭐냐?
너 업무량이 말도 안되게 많은데? 물론, 내가 일하는 거 아니라 그렇게 신경 쓸 건 아닌데, 그리고 내가 평소에 많이 업무를 미루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넌 거의 3인분 업무를 하고 있어. 지금 보면 너 텔레파시쪽이랑 JUNG 아키텍쳐 관리, 재정이랑 인사, 텔레킬 합금을 텔레파시 배출지까지 배송 하는 거랑 부서 행정 업무까지 다 하고 있잖아. 이게 말이 돼? 이거 다 누가 시킨 거야?29
너 다른 사람들이 부탁하는 거 거절 못하지? 다른 사람이 너한테 일감 미루는 거 멍청하게 다 받아주는 거지? 하아, 이제 내가 만만해지니까 다들 기어오르려고 하는 구만. 그나저나 이거, 내 이미지 관리랑 별개로 말하는 건데, 그거 되게 안 좋은 거다. 다른 사람들이 널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단박에 거절하고 선을 그어야 해. 안 그럼 너 계속 휘둘린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알겠지만, 나 어렸을 때 다 당해 본거라 존나 잘 알아.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 보이면 그대로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아, 월척이구나!' 그니까 내가 이렇게 이미지에 신경 쓰는 거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처세술이라고.
잘 생각해 봐라.
5월 17일 목요일
그런데… 그래야 사람들이 절 봐주고 좋아해 주잖아요…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도 해주고, 웃어주고, 그래야 제가 여기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관심과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쿨나연씨 처럼요.30
아무튼… 이야기 감사드려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게요.
그래도… 밴드는 정말 제가 좋아서 하는 거에요… 그리고 곧 21K기지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같이 공연 약속까지 잡혀서 지금 빠지기엔 힘들어요…31
추신: 그리고 오토바이 수리 완료돼서 저랑 천박사님이 끌고 왔어요. 차고 가 보시면 그대로 있을 거에요.
5월 18일 금요일
뭔가 느낌이 오고 있어.
너 처음 봤을 때 부터 맘에 안 들었거든? 그거 왜 인지 알아? 꼭 내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거 같았어. 뭣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만 했던 그 시절 말이야.
난 그 내 모습을 완전히 버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애써 외면해 왔던 거야.
내가 잘못 생각한 게 맞는 거 같다. 너는 내 일부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니야. 니가 진짜 나야.
쿨나연은 진짜 내가 아니고, 소심나연이 진짜 이나연이야.32
추신: 생각 좀 해야 하니 땡땡이 치고 오토바이 타고 집에 감. 역시 쩔드라.
5월 19일 토요일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쿨나연씨가 변칙개체라는 건가요?
아니면… 2번째 가정이 맞았다면, 쿨나연씨가 거꾸로 제 인격의 일부라는 것인가요?
아! 그렇다면 두번째 가정이 맞겠군요. 쿨나연씨, 당신이 틀렸어요. 제게 있어선 소심나연이 진짜 이나연이 아니고, 쿨나연이 진짜 이나연이에요. 아니, 둘 다 서로의 관점에서 맞는 말이 될 수 있겠네요.
저는 소심하지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고, 쿨나연씨는 멋지지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저희의 겉모습은 모두 억지로 만들어진, 저희의 진짜 내면과는 반대된 껍질에 불과 했던 거에요. 그리고 저희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 안과 밖이 뒤집히는 거에요.
추신: 드디어 치마를 입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저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너무 만족스럽네요. ㅎㅎ
그리고 오늘도 밴드 연습 갔다 오느라, 다음날 아침에 손가락에 물집이 있을 수 있어요.
5월 20일 일요일
제목: 쿨나연씨! 큰일났어요!
발신: 나에게 보내는 메일 (pcs.ygolohcysp-lacitylana|1ynori#pcs.ygolohcysp-lacitylana|1ynori)공연 당일 날 비가 온대요! 그래서 그 전날로 앞당겨 졌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공연을 쿨나연씨가 해야 할 거 같아요…… ㅠㅠㅠㅠ
이 멍청아!! 공연 날짜는 언제고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그걸 말해 줘야 지금이라도 연습하지!!!!!!
아니다 내가 천세윤한테 전화한다.
<기록 시작>
발신음
천세윤: 어쩐 일 이래? 이나연 네가 먼저 전화도 하고?
이나연: 어어어… 죄송하지만… 제가 공연 날짜를 까먹어서 그런데, 다시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악보도 함께? …요?
천세윤: (폭소를 터뜨림) 너 진짜 연기 못한다. 쿨나연씨. 오늘은 짝수 날. 소심나연은 홀수 날 출근이지롱. (키득거리며 웃음) 어째 쌍으로 연기를 못하네.
이나연: 하! 하나도 재미없어. 공연 날짜 앞당겨 졌다며.
천세윤: 니가 하려고? 그 차가운 이나연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이나연: 뭐 별 수 있나.
천세윤: 그래, 잘 생각했다. 베이스는 마스터가 어렵지, 입문은 쉬워서 조금만 해도 대충 감각 익힐 수 있어. 지금도 늦은 거 아니야.
이나연: 그래서 언제인데. 공연이.
천세윤: 내일 모래.
이나연: 뭐???? 존나 늦었잖아!
천세윤: 그러니까 지금부터 빨리 연습 해야지. 아 참고로 곡은 실리카겔의 No Pain이다. 들어 봤어?
이나연: 아니…
천세윤: 그럼 좀 빡세게 연습해야겠네. 그래도 지지난 주에 좀 해봤으니까 익숙해지는 덴 시간 그리 많이 걸리진 않을 거야.
이나연: (깊이 한숨을 쉰다.) 그… 그래.
천세윤: 수고링.
<기록 종료>
5월 21일 월요일
손가락에 흉터가 장난 아니네요… 물집을 터뜨린 흔적도 있고요.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그래도 좋은 소식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제가 오늘 처음으로 거절을 했어요. 생각보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래도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놀랐어요! 이제 조금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조언 고마워요!!
그리고 지금 카페테리아에 공연 설비를 하고 있어요. 풍소경 박사님의 주관으로 다른 부서들 악기 다룰 줄 아는 사람 모두 불러 모아서 한 다섯 팀 정도가 연주하게 될 거라고 해요! 존재학부, 정보부, 무속학부, 그리고 WoI연구과까지 밴드가 결성되어서 오늘 리허설까지 하고 갔어요! 다들 실력이 장난 아니에요 ㅠㅠㅠㅠㅠ
내일, 잘 하실 수 있을까요?
5월 22일 화요일
업무 째고 베이스 연습 줄창 함. 미치겠다. 손가락 조지게 아프고, 간주 때 코드 바뀌는 거 아직도 헷갈린다.
다른 팀들 보니까 맥북에 뭐 연결해서 이펙트 걸고 페달도 밟고 난리도 아니던데, 우리는 그런 거도 없더라. 항상 혼자 떨어져서 고독을 즐기곤 했는데, 60대 먹은 교수님이랑 맨날 나 쿠사리 먹이는 학부장이랑, 일 시키는 상사랑, 나 귀찮게 하는 후임이랑 같이 합을 맞춰야 한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내가 못해서 폐 끼치면 어쩌지.
너무나 오랜만에 드는 걱정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 외면해 왔는지. 그래. 나는 쿨 하니까 이런 것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자기 부정을 해왔지. 그걸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내가 모두의 앞에서 그 걱정을 털어 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눈을 딱 감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너무 자신이 없다. 아직도 코드는 헷갈리고 손가락은 욱신거리는데, 과연 이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지 너무나도 막막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 아니라 박수였다. 곽수일, 천세윤, 다홍이와 윤금선 교수님 모두 환하게 웃으며 나의 고해를 축하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연뿐이다.
풍소경: 자, 지금까지 존재학부 "통 속의 반항아" 팀의 <넬 - 지구가 태양을 네 번>이었습니다.
박수 갈채
풍소경 박사가 분석심리학부 팀에게 눈짓을 한다.
천세윤 박사와 윤금선 교수가 기타를 손에 들고 무대로 천천히 올라선다.
이나연: 후우… (마저 베이스를 들고 뒤따라 올라간다.)
강다홍: 언니! 할 수 있어요!
곽수일: 긴장 풀어. 별거 아니야.
이나연: 나한텐 진짜 별거 맞아.
나머지 인원이 모두 오르고 자리를 잡는 동안 풍소경이 마이크를 잡는다.
풍소경: 자, 다음 순서는 바로 분석심리학부 "페르소나" 팀의 <실리카겔 - No Pain>입니다. 분심부가 사실상 이 공연을 기획했죠. 그렇다 보니 많은 기대가 모여 있는데요. 이강수 이사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강수: 음. 글쎄요. 천세윤 박사가 망가뜨린 장비와 말아먹은 프로젝트의 수를 생각한다면, 이 공연이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는 게 기적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풍소경: 네, 뭐, 그렇긴 하죠. 그럼… 마저 준비되는 동안 팀 소개를 해 주실 수 있나요? 천세윤씨?
천세윤: 어, 네.
풍소경: 팀 이름이 페르소나인데요, 이게 무엇인가요?
천세윤: 우리 정신의 가장 바깥쪽을 감싸고 있는 아키타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용 마스크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죠.
풍소경: 좀 더 자세히 설명 가능할까요?
천세윤이 이나연을 바라보고는 슬쩍 웃는다.
천세윤: 나머지 설명은 여기 베이시스트 나연씨가 해 줄 겁니다.
이나연: 뭐?
풍소경 박사가 나연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이나연: (헛기침) 어… 페르소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꾸며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가면인 거죠. 우리 모두는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사랑스러운 연인, 때로는 용감한 영웅, 때로는 성실하게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 때로는 반항아, 때로는 거침없는 모습과 때로는 따뜻하고 친절한 모습도요.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쌓고 그 내부에서 살아가기 위해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그 가면을 쓰고는 합니다.
이나연: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그런 가면을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거꾸로 그 가면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그 가면이 나 자신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죠. 융 박사님께선 이렇게 페르소나가 팽창하여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이미지에 구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필요에 따라 가면을 쓰되, 때로는 벗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요. 그것이 건강한 페르소나를 가지는 비결인 겁니다.
천세윤: 그래서 오늘, 저희는 여러분의 가면을 조금 벗기고자 합니다. 모두 음악에 몸을 맡기고 즐기면서요. 평소에 쌓아두고만 살던 그런 에너지들을 오늘 밤 발산시켜 보는 거죠.
윤금선: 다들 준비되었나요?
관객들이 소리친다.
강다홍: 그럼 갑시다!
강다홍이 드럼 스틱을 박자에 맞추어 부딪힌다.
그리고 곧이어 드럼 스틱이 스네어를 향해 돌진한다. 신호였다.
전기기타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이나연의 베이스도 동시에 울린다.
드럼의 킥과 스네어가 울린다.
관객들이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친다.
곽수일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연다.
곽수일: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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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오늘 하얗게 불태웠어.
5월 23일 수요일
… 어?
소심나연?
5월 24일 목요일
뭐야. 어디간 거야.
장난하지 마. 너 보여주려고 공연한 거 다 녹화 해 뒀단 말이야. 진짜 개쩔었다고.
베이스 박자 칼 같았고, 실수 하나도 안했어. 진짜 그대로 음원 내도 될 정도였다 진짜.
5월 25일 금요일
설마 그때 내가 밴드를 해서? 천세윤 박사의 말 대로 이 상태가 완전히 나아진 거야?
내가 내 내면을 긍정하고 페르소나와 융화될 수 있어서, 진짜 나의 인격의 일부였던 네가 더이상 구분되지 않게 된 거야?
지랄하지마. 이거 끝나고 너 선물해줄 옷도 골라놨단 말이야. 같이 일기도 쓰고, 나름대로 서로 생활의 룰도 정하려고 했다고. 그래 진짜 동거인처럼. 이제 담배도 나가서 필 거고, 니꺼 일기장도 따로 분리하고, 옷장도 분리해서 쓸 생각이었어. 분심부에 이거 제대로 설명하고 모두에게 자랑스럽게 너를 소개시켜 줄 생각이었단 말이야. 내 친구를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떠나버리는 게 어딨어 이기적인 자식아.
5월 26일 토요일
옷 시킨 거 도착했다. 꽃무늬 왕창 있는 원피스랑 가디건.
근데 현타가 와서 더는 이거 못 볼 거 같아.
그냥 내일 아침 일어나는 대로 다 버릴 거야.
하, 그래. 몇 주간 재미 있었다.
5월 27일 일요일
아니, 난 아직 포기 못했어. 포기 안할거야.
지금부터 무모한 짓을 저지를 거야. 3주 전의 일요일에 했던 그것을 다시 할거야. 그래. 남아있는 텔레킬 회로에서 정신에너지를 뽑아 나한테 주입할거야.
야 소심나연, 니가 제대로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잘 들어. 그 정신에너지를 니가 가져가야 해. 다른 아키타입이 가져가게 두어선 안돼. 그림자, 아니무스-아니마, 또다른 페르소나와 쿨한 이미지 컴플렉스가 먹어 버리기 전에 니가 바로 그것을 흡수해야 해. 알겠어?
만일 듣고 있지 않다면… 그래서 다른 아키타입이 그것을 먹어버리고 팽창해 내 자아를 위협한다면…
하, 알빠임? 난 두렵지 않아. 내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아.
제발… 내일 아침은 지금의 나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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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월요일
오랜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