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디트
이미지 라이선스
파일명: itabashi-station.png, pangyo-station.png
원저작자:Langston77
라이선스: CC BY-SA 3.0
출처: SCP 재단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또래보다 몇 살은 더 먹은 듯 초췌한 얼굴로 볶은 땅콩을 힘없이 집어 먹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때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그 빛나는 젊음을 잃고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였다.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평일 저녁의 술집 한가운데에서 난데없이 적막이 맴돌았다. 남자는 시계를 틈틈이 보며 자신의 건너편에 앉을 상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생맥주 2잔에 매운 오뎅과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해 두었지만, 그 행색을 보노라면 아직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은 민폐 손님처럼 느껴질 만큼 긴장하여 있었다.
술집 문을 거세게 열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짧게 깎은 머리와 우직한 덩치 때문에 사나운 인상을 풍겼지만, 자리 잡은 옛 친구를 알아보자 반갑게 웃으며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형섭과 민승은 중학교 친구였다. 그 시절부터 성적으로는 전교권에 이르던 형섭과 축구부의 말썽쟁이였던 민승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과 같았다. 그러나 둘은 의외로 말이 통하는 친구였고, 그 관계는 같은 동네의 고등학교에 함께 진학한 후에도 이어졌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민승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형섭도 따라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야, 오랜만이다. 내가 너무 정황 없이 만나자고 했나?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 줘서 고맙다. 다른 고등학교 애들은 연락이 안 닿더라."
"나도 놀랐어. 우리 때는 지금처럼 애들도 스마트폰 들고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누가 이사라도 가면 서로 연락하기 어렵잖아. 처음에는 너를 사칭한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어."
"보이스피싱이라니, 하하하. 그래, 그럴 만하지. 내가 대뜸 이야기를 먼저 걸었으니까…"
점원이 커다란 잔에 담긴 생맥주를 가져오자 형섭과 민승은 잔을 경쾌하게 부딪히고 맥주를 들이켰다. 잔을 테이블에 동시에 내려놓으면서 다시 둘이서 웃었다. 말하고, 웃고, 말하고, 웃고. 그렇게 대화의 양상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다만, 형섭은 민승이 계속 어떤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멈칫하더니 결국 그만두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자리는 처음부터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오랫동안 관계가 끊겨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애초에 살아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친구가 갑자기 만남을 기약하면 그 의도는 분명할 수밖에 없다. 상대에게 다소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기 위함이다.
"… 맞아, 맞아. 그때 네가 밖에서 축구하는 선배들이 3학년인 줄 모르고 소리쳤다가 교실에서 싸움 벌어질 뻔했었지. 기개 하나는 대단해, 너."
"기개는 무슨. 그놈들이 3학년인 줄 몰라서 그런 거야. 알았으면 그냥 참았어. 나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니야. 너, 우리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거 알아?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오고 외국계 연구소에서 일한다며. 그 정도 배짱은 나한테 없어."
"뭣도 모르던 시절의 쓸데없는 패기였지.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그런… 아, 그런데 내가 연구소 다닌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경석이가 알려 주던데. 무슨 정신과학 연구하는 데 들어갔다고… 아무튼 그렇게 말했어. 거기서 무슨 일 하는 거야? 벌이는 괜찮아?"
'최경석, 이 개새끼. 은행 다니는 새끼가 돈 몇 푼도 못 주고 나한테 이놈을 떠넘긴 거였구먼. 씨발…'
지금의 상황이 점점 이해되기 시작한 형섭은 맥주를 홀로 쭉 들이킬 뿐이었다. 민승은 대답 없는 형섭의 눈치를 보고 다시 우물쭈물했다. 큰 덩치에 비하여 형섭의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형섭의 화만 돋우었다. 뜬금없이 '벌이'를 언급하였으니 민승도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이해하였다.
형섭은 진작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결국 축구를 그만둔 민승은 어영부영 어느 이름 모를 대학에 들어가서는 주색에 빠져 살았다. 학사 경고를 받은 그는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갔지만,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두었던 전문 하사도 포기하였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에 종사하며 살다가 최근에 사이버 불법 도박에 빠져 주변에서 돈이나 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고등학교 동창 사이에서 돌았다. 2주 전에는 대학 병원 의사로 일하는 창수를 만났고, 지난주에는 은행을 다니는 경석을 만난 것이었다.
돌고 돌아 민승은 경석의 도움을 받아 형섭에게 한번 만나자고 말하게 되었다. 이미 사실을 아는 형섭은 당연히 탐탁지 않은 자리였지만, 민승의 부정적인 예상과 달리 그는 주저 없이 만남에 동의하였다. 듣기로는 주말에도 회사에 붙박이 신세로 일해야 하여 무척 바쁘다고 하니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다름 아닌 평일에 민승이 사는 곳 근처에서 서로 보기로 한 것이었다.
"미안,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 진짜 미안. 그런데… 우리 예전에 진짜 자주 만나고 놀았잖아? 그렇지? 혹시 옛정을 생각해서… 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진짜 사소한 거야. 진-짜로."
민승은 두 눈을 굳게 닫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자존심을 또 한 번 옛 친구 앞에서 굽혔다. '미친 개' 소리를 듣던 중학교 수학 선생 앞에서도 눈을 깔지 않던 그가 나이를 먹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낮추었다. 한때 그의 기개에 놀라고 때로는 동경했던 형섭은 도리어 그에게 "기개가 있다."라는 아첨 섞인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그때 형섭의 말은 사실이었다. 뭣도 모르던 시절의 패기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 이르고 나니 어쩐지 그 패기가 다시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고개 숙인 민승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 시절의 기개가 아직 있을지도 몰랐다. 형섭은 민승의 두 손을 붙잡았다.
"너 말고 내가… 내가 너한테 사소한 부탁 하나 해도 되냐?"
"뭐, 뭔데? 갑자기 왜…"
"나랑… 일 하나 같이 해 볼래? 너랑 내가 하면 100% 성공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오후 7시 24분
환갑을 일주일 앞둔 주인은 아까부터 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귀를 크게 다쳐 본 적이 없고 중이염이나 난청을 앓은 적도 없었다. 또래에 비하면 귀가 밝은 편이었다. 그런데 가게 문을 닫을 시각에 임박하면서 어디에서인가 기분 나쁘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종종 나타나는 이명인 줄 알았는데, 가벼운 두통이 일어날 만큼 그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하였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소리가 날 만한 물건은 가게 안에 없었다. 컴퓨터는 이미 꺼 두었고, CCTV나 전자자물쇠처럼 평소에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장치만 작동되고 있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주인은 다 사용한 빗자루를 작은 창고에 넣으면서 그 안에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허탕이었다.
지금 이비인후과에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계속 울리는 귀를 부여잡고 어쩔 수 없이 가게 불을 끄고 귀가하려고 하던 찰나, 예상치 못한 두 남자 손님이 불쑥 나타났다.
"가게 문 곧 닫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와 주시겠어요?"
"아니요, 물건을 보려고 온 건 아니에요. 잠깐만요."
"이봐요, 말했잖아요. 가게 문 닫는다니까요?"
실실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간 안경잡이 남자는 이상한 걸음걸이로 가게의 한구석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주인이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이어 그 손님의 일행인 다른 남자가 주인 앞에 섰다.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짧은 머리의 남자는 주머니에서 순식간에 짧고 예리한 과도를 꺼내어 주인의 목을 향하여 내밀었다. 주인은 크게 놀라 숨이 잠시 멈추더니 겨우 상황을 판단하고는 가게 안으로 뒷걸음하였다. 그들은 강도였다. 20년 넘게 금은방을 운영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지금 이 순간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금이고 은이고 뭐고 전부 내놔. 되도록 가볍고 비싼 물건이면 좋고."
"왜… 왜 이러십니까. 알겠어요. 일단 이 칼만 내려놓고…"
"댁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됐어. 저기 진열장 문이나 열어. 챙기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한다."
"신고할 거면 우리가 나가고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잠시만 참아 주세요. 저희 말만 들어 주시면 다칠 일은 없습니다."
어느새 일행과 같은 마스크를 쓴 안경잡이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손에 든 조그마한 우퍼를 꺼냈다. 우퍼에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방금 전부터 들린 이상한 소리가 저 우퍼에서 울려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강도의 귀에 귀마개가 꽂혀 있었다.
"얼른 열라고! 귀 멀었어?"
"예, 예…"
처음 느끼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주인은 머릿속이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하얘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겨우 진열장 문의 자물쇠에 꽂고 천천히 돌렸다. 강도는 CCTV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당당하게 움직였다. 건물 내부에 입점한 금은방 문을 닫기 직전에 강도가 쳐들어온 탓에 지나가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짧은 머리 강도는 가방에서 꺼낸 커다란 자루에 목걸이, 반지, 금두꺼비, 보석 등 비싸 보이는 액세서리를 쓸어 담았다. 주인은 어째서인지 정신을 차린 후에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안경잡이 강도는 금괴를 작은 캐리어에 서둘러 담고 무게를 확인하였다. 주인이 보기에 꽤나 치밀하면서도 어딘가 어설픈 강도였다. 물건을 챙기느라 자신에게 내밀었던 칼은 바닥에 내버려 놓고 CCTV를 확인한 보안 업체 직원이 들이닥칠 경우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체감하기에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금은방 주변은 조용하였다. 주인은 또다시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됐어. 그 정도면 몇 억어치는 될 거야. 얼른 챙겨."
"진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우리가 나가면 저기 주인이 경찰에 바로 신고할 텐데."
"내가 그걸 계산 안 했겠냐? 내 계획만 따르면 완전범죄도 가능해. 닥치고 가방이나 매."
안경잡이 강도는 짧은 머리 강도에게 상당히 고압적으로 명령하며 범죄 현장을 뜨고자 하였다. 바닥에 내버려 놓은 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스크로 가리지 않은 매서운 눈빛에서 안경잡이의 냉철한 면모가 엿보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저씨. 마음 같아서는 기억도 지워 드리고 싶은데, 제 형편상 그것까지는 어려워서요. 오늘 욕보셨습니다."
"당신들… 대체 뭐 하려고…"
"댁이 알 바 아냐. 나중에 효과 풀리면 그때 경찰이나 부르라고. 좀 늦어도 어쩔 수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주절댄 둘은 짐을 챙기고 금은방 밖을 나섰다. 시계의 분침은 8과 9 사이를 가리켰다. 겨우 굳은 몸이 풀린 주인은 혼비백산하며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찾았다. 그것을 들고 키패드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한참을 서 있던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했는지 잊어 버리고 말았다.
강도에게 당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0여 분 동안 전화기를 들고 그저 가만히 있다가 머릿속을 울리던 기이한 잡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112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오후 8시 4분
"도주 차량 확인이 아직도 안 됐어? 번호판만 보지 말고 그냥 그놈의 회색 싼타페만 쫓으라니까!"
"강남대로에서 양재역 방면으로 향하던 싼타페 1대가 좌회전하는 중에 하필이면 다른 싼타페랑 엇갈려 지나쳤습니다. 하나는 경부고속도로로 가는 것 같고, 다른 하나는 대치동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럼 둘 다 쫓아! 생각해 봐. 저 강도 2인조는 밈적 인자랑 인식재해를 자기 멋대로 악용하여 금은방 주인의 정신을 조종하고 CCTV에 찍힌 자기 얼굴은 가뜩이나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었어. 그만큼 우리를 따돌리려고 작정한 미친 놈들이라는 거지. 큰맘 먹지 않고서 이딴 짓을 벌이겠냐? 저대로 해외로 달아나서 범죄인 인도 조약도 체결되지 않은 어디 뭐, 대만이나 싱가포르로 튀면 손가락이나 빨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어떻게든 잡아내야 해!"
국가초상방재원 초동개입국 경찰합동대응팀은 최근 급증한 국내 초상 범죄에 이골이 났다. 2010년대 초반부터 여러 주시 단체가 활보하더니, 명천구 같은 변칙 차원을 아지트로 삼고 범죄를 일삼는 일당이 족족 붙잡히고 있었다. 특히 경찰이 먼저 처리하던 사건을 뒤늦게 방재원이 담당하려고 하면 이런저런 절차와 서류가 필요하여 대응팀 팀원은 휴일도 없이 과로에 시달렸다.
대응팀을 이끄는 노선하 팀장은 가끔 과격한 언사를 퍼부으면서도 사건 대처 면에서는 침착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런 사람이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에 빠진 까닭은 다름 아닌 현대 대한민국에 버젓이 강도가 수억 원의 귀중품을 훔치고 아무런 흔적 없이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강도 2인조 중 안경을 쓴 녀석의 얼굴이 CCTV 영상에서 아주 잠깐 왜곡 없이 드러나서 인식재해 전문가가 총출동하여 그의 얼굴을 분석하고 있었다.
자신의 팀원을 봄철 이불 터는 것처럼 갈구던 노 팀장은 한숨을 쉬고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일부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 새끼 얼굴만 알아내면 신원 파악은 시간 문제야. 아마 그 안경잡이는 밈 공학에 무척 밝았을 거야. 특정 주파수를 적절한 조건에서 동시에 재생하면 이에 노출된 사람이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뛰어난 실력을 범죄에 쓰고 자빠졌으니, 제기랄."
"팀장님, 얼굴 분석 완료했습니다. 왜곡된 이미지에서 추출한 패턴을 범인의 실제 얼굴과 비교하여 역분석하니 원래 이미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상황실로 달려온 분석가가 강도의 얼굴을 재현한 사진을 팀장에게 보여 주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서울에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여 사진을 전문가에게 돌려주고는 주민등록증 사진에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찾아내라고 지시하였다.
"팀장님!"
"뭐야, 왜?"
"여기 좀 보십시오."
방금 전에 꾸중을 들은 팀원이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싼타페에서 수상한 점을 포착하였다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차량은 이제 막 금토JC를 지나고 있었다. 슬슬 고속도로에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노 팀장은 팀원이 정지된 도로 CCTV 화면에서 가리킨 차량 내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창은 짙게 검은 필름을 붙여 내부를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위치를 중심으로 하여 왜곡된 상이 차 바깥까지 퍼져 있었다.
싼타페를 운전하는 강도가 현명하게도 얼굴을 끝까지 감추려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어리석게도 그로 인한 왜곡 현상이 이 차 안에 자신들이 있음을 알리는 꼴이 된 것이었다.
"이제 곧 판교IC인데, 차로를 바꿨습니다. 목적지는 판교신도시인 듯한데, 그 근처의 초상 자산을 이용하려는 것 아닐까요?"
"역시 그렇겠지. 우선 기동대응팀 인력을 판교에 배치해. 내가 강도고 해외를 뜰 준비를 해야 한다면 대도시에서 브로커를 만나든 하겠지. 그런데 판교에 밀입국을 돕는 업체가 있던가…?"
"어쩌면 그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귀신 지하철' 말입니다. 처음 발견된 계기도 마약 유통 경로를 추적하다가 거기를 몰래 이용하던 공급책을 현장에서 체포한 거였잖아요? 범죄자가 하는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니 그놈들도 지하철을 타고 일본이나 중국으로 도망가려고 할 겁니다."
"귀신 지하철이라면… 911-KO?"
노 팀장은 팀원의 기막힌 눈썰미가 잠시 감탄하였다. 그 직후에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에게 돌았다. 숨을 헐떡이며 어떤 서류를 쥐고 있던 그는 아까 대화한 인식재해 분석가였다. 수사본부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동료들이 벌써 범인의 신원을 알아내고 자신에게 이 서류를 건네주었다고 말했다. 당혹스러움이 드러난 표정으로 팀장을 마주한 그는 조심스럽게 정보를 알렸다.
"범인 중 한 명의 이름은 김형섭입니다. 43세 남성으로, 뉴로카Neuroka 서울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뉴로카라는 기업, 저희 기록에 따르면 재단의 위장 기업 중 하나라고 합니다."
경기도 성남시
오후 11시 13분
롯데마트 판교점이 문을 닫는 오후 11시 정각이 되자, 여전히 마스크를 쓴 형섭과 민승은 일행처럼 보이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오로지 눈짓으로만 소통하며 마트를 빠져나오고 같은 목적지로 걸어갔다. 추운 겨울 날씨와 다시 유행하는 전염병 덕분에 거리에는 둘 말고도 마스크를 쓴 행인이 몇몇 있었다. 형섭과 민승은 평일 밤에도 북적이는 판교의 거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형섭이 챙겨 준 깔끔한 옷을 입으니 성질 더러운 깡패처럼 보였던 민승도 덩치가 조금 큰 직장인으로 여겨질 만했다. 수많은 마천루가 거리를 밝게 비추는 불야성 아래 두 강도는 잠시 동안 일상에 뒤섞였다. 형섭은 그 느낌이 무척 오랜만에 들었다. 그러나 경계심을 잃지 않으면서 판교역 1번 출구를 지나치고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주위를 유난히 살피던 민승이 불안해 보인 형섭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들어서자 등을 두들기고 길을 직접 안내하기로 하였다.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민승에게 이미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혹시 모를 중간 이탈을 막고자 가장 중요한 정보는 자신만 알아 두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치킨집 옆에 있는 공실이 하나 보일 거야. 정문은 잠겨 있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 직원용 문으로 들어가면 돼."
"거기도 CCTV가 있을 텐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을까?"
"등신 같은 소리 하지 마. 내가 그 옷까지 줬잖아. 카드도 겨우 따라 만들어 줬고. 여기 직원인 것처럼 굴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형섭과 달리 민승은 계속 망설임이 컸다. 몇 시간 전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범행에 나섰더니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온 것이었다. 예상보다 겁이 많은 민승의 모습을 보고도 형섭은 놀라워하지 않았다. 누구나 처음 대형 범죄를 저지르면 죄책감이 결여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불안에 떨기 마련이었다.
몇 달 전의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마음을 잘 알았다.
"그나저나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녔던 거야? 국정원? 어디 다른 나라 가서 스파이로 일하다가 쫓겨나서 앙갚음이라도 하는 거야?"
"그만 좀 물어봐! 국정원 같은 거 아니야. 나 연구원이었어. 다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을 연구하는 그런 거였는데… 이제 와서 알아봐야 무슨 상관이겠어? 오히려 잘 됐지. 유용한 밀입국 루트를 졸지에 알게 된 셈이니까. 직장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을 쓸 적격의 타이밍이라고."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1층이 텅 비어 있는 어느 상가 건물에 도착하였다. 얼룩진 커다란 유리창에는 '임대 문의'라고 커다랗게 적힌 포스터가 녹색 테이프로 조잡하게 붙어 있었다. 형섭이 어두컴컴한 안쪽을 들여다보자 타일도 깔지 않은 흉한 콘크리트 바닥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섭의 말대로 공실의 정문은 자전거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그 옆의 다른 문은 열려 있었다. 문에서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으며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지나치니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이 붙은 두꺼운 문이 복도 오른쪽 벽에 나타났다. 전자자물쇠에 카드 키를 대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CCTV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카드 키를 저기에 대."
민승은 문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붉은빛을 애써 무시하고 카드 키를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그 후로는 순조로웠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수상한 계단이 눈앞에 있었다. 이번에는 형섭이 앞장섰다. 민승이 뒤에서 문을 닫으니 계단 안은 칠흑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두 번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후에 나타난 문은 형섭이 처리하였다. 문을 열자 나타난 광경은 평범한 지하실이 아니었다. 천장의 조명은 다소 어두웠지만, 네모난 타일이 깔끔하게 깔린 바닥과 화사한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된 그곳은 지하철역 대합실을 방불케 하였다. 원 모양의 공간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기괴한 분위기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뜬금없는 공간에 익숙한 장소가 나타나니 민승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합실의 저편에는 승강장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옆의 벽에 '전기를 아낍시다'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형섭은 에스컬레이터 아래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민승에게 다가갔다. 민승은 그가 들고 있는 캐리어에 금괴와 장신구를 가득 담은 자루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쩐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형섭을 보고 분위기를 환기할 겸 마음속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정말 생각지 못한 곳이네… 나는 네가 '지하철'을 탄다고 하길래, 진짜 지하철을 타나 싶다가도 네가 은어를 말한 줄 알았거든. 〈황해〉 같은 영화에서 브로커가 돈 받고 배 태워 주고 그러잖아."
"밀항? 그 방법은 요즈음 위험해. 서해나 남해의 해경 단속이 심해져서 어선에 몸을 숨겨도 금방 들통날 거야. 지금쯤 경찰은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으로 튄 줄 알고 해안 지역이나 샅샅이 뒤지고 있겠지."
"그렇긴 하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이렇게도 많구나. 형섭아, 너 생각보다 재밌는 삶을 살고 있었다?"
'재밌는 삶… 그래, 재밌긴 하지. 이런 경험을 다른 누가 해 보겠어?'
민승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에 피식 웃고 넘긴 형섭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승강장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자고 말하였다. 그 지하철은 동아시아에서 한자로 '판교(板橋)'라고 적는 지하철역에 멈춘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민승은 그 어떤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런 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다는 판단하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형섭은 그렇게 쉽게 넘어가 주는 그가 고마웠다. 마법의 지하철이 실존하는 이유와 이동 방법을 지금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유치원생에게 밈공학개론을 가르치는 것보다 수백 배는 어려웠다.
와이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고 여유롭게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형섭과 민승은 심야 근무에 투입된 평범한 재단 직원처럼 영락없이 보였다. 둘을 뒤쫓아 오고 있을 방재원 및 재단 요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오늘 그들이 벌인 짓과 남긴 행적을 근거로 하여 SCP-911-KO를 이용하리라는 것은 언젠가 추측해 내겠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들이 해외로 도피한 후라고 형섭은 자신만만하게 추리하였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는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일종의 투명한 노이즈가 새겨졌다. 이를 직접 인식한 사람의 뇌에서는 아무런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지만, CCTV를 비롯한 매체를 통하여 이 마스크를 쓴 얼굴을 간접적으로 본 사람은 뇌에 전달된 얼굴의 이미지가 심하게 뒤틀려 이목구비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밈적 인자를 이용한 기초적인 적대적 공격(Adversarial Attack)이었다. 어차피 불쌍한 그 금은방 주인은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낯선 이들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CCTV 기록을 열람할 경찰과 방재원의 추적만 회피하면 그만이라는 점을 작전 수립 과정에서 고려하였다.
깊고 깊은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저 아래에서 열차가 도착할 즈음에 재생되는 노래가 어렴풋이 들렸다. 상행인지 하행인지는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원하는 목적지로 가려면 어느 열차를 타야 할지 형섭도 헷갈리던 참이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 타면 돼?"
민승이 물었다.
"음, 아직 시간 있으니까 내려가고 확인해 보자. 사실 뭐를 타든 상관없기는 한데, 쫓아오는 놈들이 있으면 곤란하니—"
"뭐가 곤란하고 어째?"
그 순간, 에스컬레이터의 위에서는 큰 소리로 호통치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형섭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자 대합실 쪽에서 익숙한 복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단 요원이 착용하는 둥근 배지가 멀리서도 조그맣게 빛나 보였다.
"김형섭 이 개새끼가…"
형섭은 험악한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더니, 형섭이 예산 횡령 혐의로 정직 처분을 받았을 때 제01K기지에서 친히 파견되어 강도 높은 심문을 진행했던 내부재판부의 소다영 행정관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비트코인 올인 사건에 관한 조사의 총 지휘를 담당하였을 만큼 재정 분야에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직접 발로 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씨발, 뛰어! 뛰라고!"
"뭐야? 왜 경찰이 벌써 와?"
"저거 경찰 아냐, 씨발!"
형섭과 민승이 허둥지둥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소 행정관과 기동특무부대 일행도 둘을 서둘러 뒤쫓았다. 지금 어떤 열차를 탈지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형섭은 당장 도착한 열차에 몸을 싣기로 했다.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검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역이 위치한 국가의 초상 기관이 재단과 함께 탑승객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 곳이었지만, 그딴 건 강도가 된 둘에게 신경 쓰지도 않을 문제였다.
"뛰지 마시고 모든 짐을 검사대에— 악!"
"비켜!"
"코드 레드! 코드 레드! 침입자 발생!"
사이렌을 시끄럽게 울리는 게이트를 무시하고 뛰어가는 형섭과 민승을 세우지 못한 보안 인력은 무전기로 기지에 상황을 알렸지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마땅히 없었다. 뒤이어 기동특무부대도 보안 절차 따위 무시하고 강도들을 추적하여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는 있었다.
"으아아아! 개씨바아알!"

"며칠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안전하게 이 물건을 일본으로 이송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무속학부에서 또 한 번 애써 준 덕분이죠. 지난 일 덕분에 오히려 속전속결로 수습이 마무리된 것 같아요."
외선 순환 열차가 도착하고 승강장에서는 막 작별 인사가 이루어졌다. 한국 지부와 일본 지부에서 공동으로 연구한 변칙 개체의 이송을 위하여 무속학부의 장윤현 연구원과 윤덕희 요원, 일본 지부의 유라즈키 토모메 요원과 요네다 카즈오 연구원, 제21K기지 보안부의 유희성 요원과 성준 요원이 대동하여 열차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도쿄의 이타바시역이었다. 열차로 그곳까지 물체를 운반한 후 인근 기지로 이송하여 추가적인 연구를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장윤현 연구원은 부적과 금줄로 단단하게 봉인된 상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최근 잇따른 신격 존재 출몰 사태로 인한 혼란이 겨우 잦아들고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전국의 무속 기담과 소문을 추적하던 중에 강원도 벽지에서 발견한 푸른색 항아리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이자메아인지, 음양료인지, 하여튼 일본의 어느 음양사가 한반도로 남몰래 가져온 것으로 여겨졌다.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는데도 그 아름다운 자태와 색깔은 마치 항아리를 엊그제 빚은 듯 빛나고 있어 영롱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런데 이런 물건을 열차에 실어도 됩니까? 망자 칸에 탑승한 영혼들이 이 항아리에 이끌려 생자 칸으로 넘어오지는 않을지 걱정돼서 말이죠."
유희성 요원이 팔짱을 끼고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장 연구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충분히 고려할 만한 사항이었다. 아직까지 망자 칸과 생자 칸 사이를 오간 사례는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늘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이 지하철을 운영하는 측에서 재단과 잘 합의하여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아는데요? 그쪽에서 조치를 취해 주지는 않을까요?"
어쩌다가 열차를 함께 타게 된 중국 지부의 리자양 연구원이 쭈뼛쭈뼛 나서 장 연구원 대신에 대답하였다. 그의 목적지는 우한의 반차오역이었지만, 판교역에서 열차를 탑승하면 어느 방향으로 가든 가는 시간이 비슷하였기에 먼저 오는 이타바시행 열차에 타기로 한 것이었다. 희성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더 이상 걱정을 빙자한 불만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안내 방송과 함께 열차가 승강장에 막 도착하였다. 첫차인지라 승강장에 사람은 이들 일행밖에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는.
"하아… 하아… 늦지 않았네. 살았다."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 옆의 안경 쓴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희성은 그의 등에 매달린 묵직한 가방의 내용물이 무척 궁금하였다. 반면에 준은 자신들에게 보란 듯이 목에 걸린 ID 카드가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이름은 앞서 살펴본 승객 명단에 실려 있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승객이었다.
준은 선배인 희성에 가까이 서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 두 사람, 명단에 없습니다. 신원 확인부터 해 봐야지 않을까요?"
"신원 확인? 뭐, 보안 검색까지 통과한 거면 수상한 인물은 아닐 텐—
"거기 다 들려. 그리고 우리 수상한 인물 맞아."
"뭐, 뭐야? 이거 놔— 으앗!"
안경 쓴 남자가 품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내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토모메의 목을 팔로 감싸고는 나이프를 턱 아래에 가져다 대었다. 나이프의 예리한 칼날이 조명에 반사되어 흉측하게 빛나고 있었다. 토모메는 지금 이 상황을 곧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말을 이어가지도 못하였다. 나중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들 열차에 타. 그 상자도 같이."
"토, 토모메!"
"요네다 씨, 진정하세요!"
카즈오가 소리 지르며 형섭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준이 급하게 그를 제지하였다. 그제서야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니, 형섭과 민승을 뒤쫓은 기동특무부대 대원들이었다. 토모메와 그 일행이 인질로 붙잡힌 광경을 목도하고 대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미 재단과 방재원의 제거 대상이 된 형섭이 무턱대고 접근하는 그들 앞에서 마지막 발악을 저질렀다가는 최악의 결말이 실현되기 때문이었다.
"씨발, 모두 저 염병할 열차에 타라고! 상자도 같이 실어!"
"야, 이 열차 중국으로 가는 거 맞아?"
"몰라. 어차피 이거 순환선이라서 좀 돌아가도 중국에 가게 되어 있어. 광저우에서 내리고 태국이나 베트남으로 건너간다. 알겠어?"
"아, 알겠어…"
"괜히 영웅이 되려고 나서기만 해 봐. 이걸로 목의 동맥만 그여도 치명상이니까."
"이 개자식…"
덕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형섭을 노려보자 형섭은 혐오와 분노가 섞인 시선을 무시하려고 하였다. 윤현은 기동특무부대가 어떤 조치를 취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총구를 인질범에게 겨누었을 뿐,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하였다. 승강장 내부라 인질범만 제압하는 데 적격인 저격수나 드론을 배치하기도 어려웠다.
"빨리 움직여!"
어느덧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리기만 하는 범죄자로 전락한 형섭은 토모메 일행에게 윽박질렀다. 어쩔 수 없이 윤현과 희성은 상자를 들고 열차의 생자 칸에 실었다. 망자 칸은 요지부동하였다. 첫차다 보니 타거나 내리는 망자 승객은 없는 듯하였다. 민승도 품에서 망치를 꺼내고 인질들에게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준은 소다영 행정관에게 도와 달라는 눈치를 보였지만, 상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고뇌하고 있었다.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인질들은 결국 모두 열차에 강제로 탑승하였다. 승강장에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형섭과 토모메였다.
대원에게서 확성기를 건네받은 다영이 열차 내부의 사람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형섭에게 말하였다.
"김형섭, 네가 여기에서 도주해 보았자 다음 역에서 대기하고 있을 무장 인력에게 제압당할 거다! 그 전에 얼른 항복해! 인질을 풀어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는 데 20분밖에 안 걸리는데, 그 사이에 뭘 하겠다고? 내가 아무런 술수도 안 부리고 이런 짓을 감행했겠냐?"
"미친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나중에 친히 연락하지! 너도 얼른 타!"
토모메를 열차 안으로 세게 떠밀고 형섭도 열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스크린도어와 열차 문이 저절로 닫혔다. 열차를 운영하는 의령수철도공사 측은 아직 이 사건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기동특무부대원이 급하게 승강장 안쪽으로 진입하였지만, 열차는 이미 빠른 속도로 떠난 후였다.
승강장 안은 음울한 적막에 잠겼다. 머리를 쥐어뜯던 다영은 상부에 직접 중요한 사실을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횡령 혐의로 벼랑 끝에 놓인 어느 머저리의 광기 때문에 체면이 구겨졌지만, 인명피해만큼은 결단코 없어야 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인질들을 위해서라도, 초상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열차는 이제 이타바시역에 도착하기까지 20분 남짓 남았다.
판교역 → 이타바시역
오후 11시 36분
열차가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며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조용한 생자 칸 안에서 울려 퍼졌다. 이 열차의 칸은 8개. 그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탈 수 있는 이른바 '생자 칸'은 4량으로, 열차 앞뒤에 2량씩 이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는 죽은 자의 영혼만 탈 수 있는 이른바 '망자 칸'의 자리였다. 망자 칸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 형섭과 민승은 인질들을 한 칸에 몰아넣고 철저히 감시하기만 하면 되었다.
윤현은 불안한 생각이 문득 들어 또 다른 생자 칸으로 이어지는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안에는 이 일본 지부 출장의 목적이었던 항아리가 담긴 상자가 방치되어 있었다. 혹여나 봉인을 풀고 험한 것이 뛰쳐나오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민승은 그런 윤현이 신경에 거슬렸다.
"거기, 아까부터 왜 계속 저쪽을 힐끔거려?"
"아, 아닙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오해를 살 짓은 하지 말라고. 알았어?"
영화 속 삼류 악당처럼 허세 섞인 말투로 민승은 윤현을 비롯한 인질들에게 나름의 으름장을 던졌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민승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말없이 자신들을 응시하면서 손에서 칼을 떼어놓지 않는 형섭이 유난히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 그가 칼날을 목 끝에 대었던 토모메는 별 탈 없이 열차에 올라탔지만, 자신이 무방비한 탓에 인질극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열차는 멈출 기미 없이 이대로 이타바시역에 도착할 것 같았다. 명색이 보안부 요원인 희성과 준은 상황이 범인들 마음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각자 생각하였다. 그들이 탑승한 칸의 출입문은 양쪽에 각각 3개. 그중에서 형섭과 민승은 오른쪽 문 2개 앞에 흉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인질은 8명, 범인은 2명. 하나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 나머지 하나는 크게 불리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인질들에게 마땅한 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요원들이 지참하는 테이저 건이나 삼단봉은 열차가 막 출발하였을 때 범인들이 수거하여 가방 안에 넣어 버렸다. 범인들의 무기가 칼과 망치이니 숙련된 요원들이라면 맨손으로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인질을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흉기를 휘두르면 이야기가 곤란해진다.
애초에 사각지대라고는 전무한 열차 안에서 "나는 이놈을 맡고, 너는 저놈을 맡아라." 같은 말을 함부로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나마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은 희성과 준은 그동안 함께 일한 경험을 이용하여 눈짓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바로 1:1 싸움에 나서는 것은 도박수였다.
'열차가 출발한 지 7분 정도 지났다. 남은 13분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나? 아니야. 멋대로 움직여서는 안 돼. 일본에 도착하면 분명 미리 연락을 받은 현지 TF가 협상에 나서든, 진압에 나서든 하겠지. 그때까지는 저 자식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되도록 자제해야—'
"요, 요네다 씨?"
카즈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잠시 멍때리고 있던 민승에게 다가갔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하자 상념에 빠졌던 준이 자리로 돌아오라고 손짓했지만, 무시당했다. 토모메와 자양도 자리에서 일어서 카즈오를 말리려고 시도하였다. 그 전에 민승이 정신을 차리고 망치를 들어 카즈오에게 향하였다.
"그, 마실 물은 없습니까? 몇 시간 넘게 물도 못 마시고 저기 있는 상자를 옮기느라 바빴거든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마실 게 있으면…"
"야, 자리에 안 앉아? 앉으라고! 못 알아듣겠어?"
"… 알아요, 알아. 다 알아듣는다고…"
'저 인간,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망할, 돌발 상황 발생이다!'
카즈오를 향하여 망치를 계속 겨누던 민승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형섭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민승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생수를 꺼내려고 하였고—
카즈오가 민승의 손에서 망치를 뽑아 저 멀리 내던지고 그의 배를 걷어찼다. 당황한 민승은 출입문에 부딪히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카즈오가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런 미친 짓은 그만둬! 어차피 너희 다음 역에서 체포될 거라고!"
"케헥… 씨발, 세게도 걷어찼네."
형섭이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카즈오는 여전히 그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이며 윽박질렀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인질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졸지에 입장이 뒤바뀐 형섭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고, 카즈오의 눈빛은 절박함으로 가득하였다.
"저거 나만 불안해 보여?"
"너만이겠냐. 하아, 나라도 나서야 하나."
"안 되겠다. 네가 요네다 씨에게 다가가 시선을 끌면 내가 슬그머니 저 새끼 뒤에 가서…"
덕희와 윤현이 상황 파악에 나선 사이, 형섭이 천천히 카즈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겁을 먹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이고 모든 인질의 석방을 단도직입으로 요구하였다.
"다음 역에 도착하면 인질들을 풀어 줘! 그러면 너희 형량도 좀 깎일 거 아냐?"
"형량? 난 그런 거 생각한 적 없는데."
"뭐?"
기고만장한 태도로 나온 형섭의 반응에 카즈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분명 인질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술책을 부리고 있었다. 형섭이 어느새 가방에서 꺼낸 파일철을 직접 보지도 않고 손끝으로 만지며 원하는 페이지를 찾는 모습을 보고 준이 그 술책의 실체를 알아내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여길 봐."
"그게 무— 아아아악!"
카즈오가 목이 터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었다. 토모메와 준이 곧바로 달려 나가 이상 현상을 보이는 카즈오의 상태를 살폈다. 멍청하게 자리에 서 있는 민승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형섭의 기세에 풀이 죽은 듯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형섭은 깊은 한숨으로 말을 대신하였다.
"요네다 씨, 요네다 씨! 도대체 뭘 본 겁니까?"
"머리가… 깨질 것같이… 모르겠어… 뒤죽박죽 섞인 정보가… 한 데 밀려 들어와서…"
"정신 차려 보세요! 요네다 씨! 어떡하죠? 아무래도 인식재해에 당한 것 같아요."
"약화된 베리먼-랭포드 밈적 인자의 일종일 겁니다. 우리가 상대를 얕봤어요. 망할, 하필이면 이딴 거에 밝은 인간이 이런 짓이나 저지르고…"
우선 둘은 증세가 조금 잦아든 카즈오를 자리에 앉히었다. 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고열에 시달리는 독감 환자 같았다. 조금 전의 대치 때문에 잔뜩 흥분한 희성과 덕희는 아무렇지 않게 파일철을 또 보지도 않고 정리하는 형섭에게 항의하였다. 그의 손에는 칼이 사라져 있었다. 앞서 선보인 무기라면 여럿이 달려들어도 문제 될 것 없기 때문이었다.
"야!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어? 이러면 강도죄 및 체포와 감금의 죄에다가 살인미수까지 포함된다고! 그 똘똘한 대가리로 그런 것도 몰랐냐?"
"저해제 없어요? 이대로 인질이 쇼크로 생명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협상이고 뭐고 그런 것 없이 진압당할걸요? 더 큰 문제 생기기 전에 얼른 내놔요!"
"하아. 말이 안 통하네. 가만히 좀 있으시죠? 어차피 곧 다음 역에 도착할 텐데. 그때 내리게 해 줄 겁니다. 물론 저 친구만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무슨 수로 우리를 막아 세우겠다고?"
"이게 있잖아요."
"… 개새끼가…"
"요원님, 일단 진정하세요. 맞는 말이긴 해요. 저걸 안 보겠다고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리만 불리해질 뿐이니, 아직은… 아직은 아니에요."
형섭은 비열하게 웃으며 파일철을 가리켰다. 희성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덕희가 귓속말로 말린 대로 자칫 그를 자극하여 인질 전원이 인식재해에 휘말리는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카즈오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기도 하였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그가 바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모두가 일련의 소동에 집중하며 각자 고뇌와 걱정에 빠졌을 때, 윤현은 칸과 칸을 잇는 문의 유리창을 통하여 상자가 담긴 칸 내부를 보았다. 상자는 멀쩡했다. 그 소란에도 항아리가 다행히 반응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안심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 순간, 아까 본 모습에서 어딘가 새로운 점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상자를 감싸고 있던 금줄이 모조리 풀려 있었다.
이타바시역
오후 11시 49분

"열차가 진입합니다!"
"간만에 일찍 퇴근하나 했는데. 타 지부에서 일이나 떠넘겨 받다니."
기동특무부대 に-8("동네 고양이"(地域猫)")의 이시쿠라 대장은 하품을 연신 하며 잘 정렬한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야간 호출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짙게 나타나 있었다. 퇴근을 앞두고 난데없이 불려 나간 사람 중에 그 누가 이런 상황을 반갑게 여길까? 대장은 잇몸에 낀 육포 조각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되도 않는 짓을 무턱대고 저지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인질극을 여러 번 제압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장한 기동특무부대 팀과 방검복을 정장 아래에 입은 협상가 몇 명이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주시하였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망자 칸에서 흐릿한 영혼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어느 신참 대원은 그 모습을 쳐다보며 소름이 돋았지만, 대부분은 죽은 사람보다 두렵다는 산 사람의 흉계에 대비하느라 바빴다. 총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시쿠라 대장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재단 일본 지부와 경시청 공안부 특사과가 협력하여 급하게 설립한 협상 팀은 열차에 다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자 칸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나온 것은 모두의 예상대로 형섭이었다. 무뚝뚝한 눈빛으로 승강장의 사람들을 쓱 훑어보더니 거의 일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지금 열차 안에 인질 한 명이 상태가 좋지 못해. 밈적 인자에 노출되었거든.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게 맞겠지만, 그 전에 산수는 마쳐야지."
"밈적 인자?"
"이래 봐도 밈공학 하나만 10년 넘게 전공해 온 인간이야. 마음만 먹으면 사람 잡는 물건은 조잡하게라도 만들 수 있어. 굳이 살인죄가 추가되기는 싫어서 약하게 만들었을 뿐이야. 어쨌든 이 인질 하나를 풀어주면 그만큼 새로운 인질이 필요해. 거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열차 안으로 들어와라. 그러면 바로 석방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투항할 생각은 없나?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당신을 기다리는 기동특무부대를 맞닥뜨릴 텐데, 피 보는 일 없이 여기에서 끝내자고."
"엿이나 먹으라 그래. 이 지경까지 왔는데 투항은 무슨."
노련한 특사과 측의 협상가 카이에 마키노리 요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물러설 추호를 보이지 않았다. 범인과 협상 팀 중에서 유리한 것은 전적으로 협상 팀이었다. 범인들의 흉기는 망치와 칼에 불과하고, 인질과 범인의 쪽수를 고려하면 집단으로 싸움을 벌이며 인질들에게 승산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모든 협상이 실패하였을 최악의 경우를 산정한 것이고, 가장 좋은 결말은 저들이 방심한 틈을 타 기동특무부대가 열차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놈들은 머리 좋게도 망자 칸과 인접한 생자 칸에 탑승해 있어. 아직 망자 칸에 살아있는 사람이 개입한 사례는 없지만, 부득이한 상황에 범인들이 인질들과 함께 동귀어진할지도 모른다. 자칫 다른 칸에서 옮기고 있는 변칙 개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이시쿠라 대장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생자 칸 중 범인과 인질이 없는 칸을 점거하고 대치 상태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범인을 지나치게 자극할 필요는 없었거니와 그가 알기로는 봉인된 의문의 항아리 때문에 괜스레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무전으로 마키노리에게 상태가 나쁜 인질의 석방이 먼저라고 의견을 전하였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인질로서 열차 안에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사람이 누구일까? 마키노리는 찰나 동안 고심하였다. 물리적으로 저항하면 범인은 그 밈적 인자를 다시 꺼내 들 것이다. 이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는 방법이 있지만, 자신만 불리해지는 자충수였다. 그는 일단 두 범인을 따로 떨어뜨려 놓아야 인질이 범인에게 새로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좋아. 그 제안은 받아들이겠다. 그 대신에 부상당한 인질을 얼른 석방해라."
"누가 나설지는 고르고 말하는 거냐?"
"내가 가겠다."
"뭐라고?"
이시쿠라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의 눈이 순간 둥그레졌다. 요원과 함께한 협상가들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키노리는 흔들림이 전혀 없어 보였다. 형섭은 대책 없이 당당하게 나오는 듯한 그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러더니 열차 안의 민승에게 뭐라고 말하고는 반죽음 상태인 카즈오를 부축해 왔다.
"요네다 씨, 괜찮습니까?"
"……"
"이봐, 얼른 올라타. 그때 인질을 넘길게."
"… 몸조심하십시오, 카이에 씨."
"그래, 뒤를 부탁한다."
언뜻 보아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즈오의 식은땀이 그의 셔츠를 잔뜩 적셨다. 민승은 그가 굳이 영웅이 되려고 하여 괜한 봉변을 당한 데 한심하고도 안쓰럽다고 느꼈다. 앞선 제안대로 마키노리는 품속의 권총을 옆 사람에게 건네고 열차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카즈오는 쓰러지다시피 마키노리의 동료들에게 인계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의무 팀이 카즈오에게 달려가 응급 처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야마베, 연락관 통해서 중국 지부에 연락 넣어. 아무래도 우리는 여기까지인 듯하다."
"예? 예, 대장님. 그런데 저대로 인질범을 보내 줘도 되는 겁니까?"
"카이에, 저 녀석은 나름 배짱과 잔머리로 가득한 사람이야. 오랫동안 같이 일해 봐서 알아. 스스로 인질이 되어서라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뜻이겠지."
"음…"
문이 저절로 닫히고 열차는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불투명한 스크린도어 너머로 보이는 두 인질범은 예민한 표정으로 인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열차가 한 역에 정차하는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이마저도 재단과 합의하여 늘린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인질 협상과 범인 체포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이룰 수 있을지 に-8 대원들과 협상 팀은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열차 안은 한겨울 날씨처럼 싸늘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좌석에 앉아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는 인질들은 많이 지쳐 보였다. 유독 윤현만 다리를 떨며 생자 칸 너머를 강박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키노리는 열차가 출발하는 대로 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하였다. 토모메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무릎 위에 두 손을 꽉 쥐고 있었고, 준과 희성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자양은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고마워요."
범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빈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있는 덕희가 말을 걸어왔다. 붙임성이 좋은 덕희는 카즈오를 대신하여 인질이 되기를 자처한 마키노리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범인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수를 써야 하였다. 어떡하면 좋겠는가? 범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의 위력을 감안하면 왜 건너편의 보안부 요원들이 움직이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다들 힘들어 보이는군요."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요. 저도 무척 당황스러운걸요."
"죄송합니다. 분명 다음 역에서는 상황이 저희에게 유리해질 겁니다."
"음… 카이에 씨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좋은 방법을 떠올려 내리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덕희는 다시 고심에 잠긴 마키노리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윤현은 덕희에게서 어딘가 이상한 점이 보였다. 무어라 설명하지 못할 기운의 차이였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변수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봉인이 풀린 항아리에 잠들어 있던 존재가 아직도 이 열차 안에 머물고 있으리라 직감하였다.
이타바시역 → 반차오역
오전 12시 2분
아까보다 열차 안이 더욱 조용해졌다. 범인이고 인질이고 할 것 없이 움직임이 크게 줄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특히 카즈오에게 역으로 협박을 당한 민승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댄 채 저 너머에 있는 형섭의 안색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질로 자원한 협상 전문가를 새 인질로 받아들이고 말았으니 민승은 형섭에게 또다시 빚을 진 셈이었다.
윤현은 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형섭이 갑이고 민승은 을이었다. 겉으로는 대등한 동료처럼 행동하지만, 아마 형섭이 항상 위에 있었을 것이다. 범행 수법도 분명 그가 고안하였으리라 예상하였다. 이런저런 분석 끝에 윤현은 위험한 발상을 품었다.
내분을 조장한다면 빈틈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노려 범인들을 제압하자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는 하나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다른 하나가 밈적 인자를 들고 나왔지만, 손발을 맞추지 못하게 된다면 상황은 인질들에게 유리해진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를 다른 인질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였다.
"윤현 씨, 괜찮아요? 걱정이 많아 보여서."
어느새 자신의 옆에 다가온 덕희가 넌지시 말을 꺼내었다. 조금 전에 열차에 새로 올라탄 일본인 요원 옆에 있었던 것 같았지만, 생각이 많아져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두 인질범은 윤현과 덕희의 조용한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였다.
"덕희 씨, 잘 들어요.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냐면…"
자신의 구상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나자 덕희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도 함께할게."라는 의미였으리라. 하지만 두 사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왕이면 재빠르게 움직여 건장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사람, 가령 자신들과 동행한 보안부 요원들 같은 이들이 필요하였다. 그들에게 의견을 곧바로 전하기에는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우선은 내분부터 일으켜야 할까? 아니면 작전을 파죽지세로 진행해야 할까?
"제가 말해 볼게요."
"예? 뭐를요?"
"맡겨만 주세요."
아직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덕희는 윤현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윤현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벌떡 일어선 덕희는 민승에게 다가갔다.
'설마 자기가 미끼가 되려는 거야? 환장하겠네!'
윤현이 속으로 경악하는 사이에 민승이 불현듯 자신 옆에 선 덕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벽에 바싹 붙더니 상대가 인질 중 하나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희는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저기 옆 칸에 있는 물건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요. 저걸 여기 칸으로 옮기고 우리는 저 칸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뭐, 뭐? 뭔 문제가 생겨?"
"직접 봐 봐요."
덕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열차의 꼬리 칸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눈치가 빠른 형섭이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자 금줄이 풀리고 부적이 떨어진 수상한 항아리가 보였다.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민승을 불러 무어라 속닥거리기 시작하였다. 초상 세계에 무지한 민승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지만, 재단에 무속학부라는 부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아는 형섭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형섭은 잠자코 있던 인질들에게 소리치기까지 하였다.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저 칸에 있는 항아리는 여기로 옮기고, 우리는 저 칸으로 이동한다. 항아리 옮길 때 깨지지 않게 해!"
"굳이 그러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요?"
마키노리가 정중하게 던진 질문에 형섭은 덕희를 가리키며 답하였다.
"저 여자가 아까 항아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거든. 보니까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금줄이 사방에 흩어져 있지를 않나, 뭔가 위험한 상태였다. 만약 저 물건이 지금 그 자리에서 변칙성을 발현한다면 우리는 접근하지 못하는 칸 사이에 갇히는 꼴이 되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위험한 물건을 망자 칸 쪽에 놓아 버려야 최후의 탈출구가 생기지 않겠나?"
"여차하면 열차의 꼬리에 최대한 달라붙어 시간을 벌겠다는 거구먼."
"그런 셈이지."
희성의 비아냥 섞인 말에 형섭은 어느 정도 동의를 표하였다. 항아리의 변칙성은 무속학부에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사항이었다. 윤현과 덕희는 그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항아리에 금줄을 둘렀다고 설명하였고, 두 인질범은 항아리가 이동하다가 일으킬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상황에 변화를 주기로 하였다.
옆 칸으로 이동한 범인들과 인질들은 항아리를 둘러 서고 있었다. 자양은 조심스럽게 금줄과 부적을 주워 손에 쥐었다. 저절로 떨어졌다기에는 금줄의 상태는 멀쩡하였다. 처음부터 금줄을 헐겁게 묶은 것은 아닐지 홀로 추측만 하였다. 형섭이 신경질적으로 윤현에게 말하였다.
"이거 맨손으로 만져도 되는 거지?"
"예, 상관없습니다. 보통 취급할 때는 장갑을 끼든가, 상자에 담아 들고 가든가 하는데, 별문제 없을 겁니다."
"똑바로 말해! 만져도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됩니다, 된다고요. 봐요, 아무 문제 없잖아요?"
윤현이 항아리에 손을 대었지만, 그의 장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섭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치였지만, 민승은 윤현의 말을 믿고 얼른 해치우자고 그에게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윤현과 준이 항아리 입구의 양 끝을 잡고 바닥을 손으로 받들며 옆 칸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자양은 금줄 꾸러미를 들고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짧은 소란 끝에 항아리를 옮기고 금줄을 다시 두르는 작업이 끝났다.
이제 사람 하나 없이 항아리만 덩그러니 놓인 칸은 어쩐지 으시시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민승은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보기 꺼림칙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의자 아래에서 금줄 마디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분명 그 중국인 연구원이 애써 금줄을 주워 다닌 것이 기억났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의 발에 치이다가 그의 시야에 들지 않는 구석에 금줄 마디가 밀려간 것 같았다.
"형섭아, 이것도 저기에 묶어야 하는 거 아냐?"
"야, 그런 것까지 나한테 물어서 해야 하냐?"
"아니, 뭐, 꼭 모든 금줄을 묶어야 하나 싶어서…"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 슬슬 열 받으니까."
"뭐?"
갑자기 벌어진 두 사람의 다툼에 모든 인질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윤현은 그제서야 그 금줄 마디가 덕희가 앉은 자리 아래에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사소한 일에도 형섭의 눈치를 보는 민승의 기질을 덕희가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아까부터 너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하다 하다 인질한테 휘둘려서 역으로 인질이 되지를 않나, 이젠 통제도 못 하데? 몇 사람 앉히는 것도 버겁냐?"
"야, 너… 아까는 내가 방심했어. 미안해.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
"씨발, 나도 처음이야! 자꾸 어리숙하게 굴지 말라고 눈치 줘도 못 알아먹어? 너 진짜 크게 한탕해서 팔자 좋게 만들려는 놈 맞아?"
"이 개… 그럼 네가 알아서 다 하든가! 나도 너 좆같아! 사람 깔보고 무시하는 거 내가 눈치 못 챌 거 같았냐?"
"그래, 그래. 대단하다, 어.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 작은 일 정도는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해. 고등학교 때 배짱은 다 어디 가고 뭔 등신이 돼서 왔어…"
"개새끼가 진짜… 그래, 씨발. 나도 이제 네 눈치 안 볼란다. 인질들 통제는 네 알아서 해. 나는 해 봤자 삽질만 하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은연중에 품은 열등감과 짜증이 폭발한 듯 거센 말이 오가고 겨우 진정한 민승이 먼저 자리를 떴다. 옆 칸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항아리에 다가섰다. 생각보다 불안정한 둘의 관계에 윤현은 크게 놀랐다. 덕희가 이런 것까지 알아차리고 수를 쓴 것일까?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는 덕희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씌인 듯.
덜컹―
"어, 벌써 다음 역에 도착한 건가?"
"아냐,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았어. 뭐야? 불이 꺼졌는데?"
열차 내의 조명이 모두 동시에 꺼졌다. 열차 안은 검은색 침묵으로 가득하였다. 덜컹거리면서 몇 없는 손잡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소리만 날 뿐, 모두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을 쓰느라 고요가 이어졌다. 문제를 처음 인지한 것은 자양이었다.
"이, 이 문 열리지가 않아요!"
"열리지 않는다니? 으윽, 진짜 안 열리네? 잠겼어!"
희성이 안간힘을 쓰며 손잡이를 당겨 보아도 문은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형섭이 달려와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암흑 속에 둘이서 있을 민승과 항아리를 향해서.
"야! 허민승! 허민승, 이 새끼야! 장난치지 말고 얼른 문 열어! 뭐 하려는 거야!"
"토모메 씨, 이 문 잠금장치는 없어 보이죠?"
"어, 네. 일본이나 한국이나 지하철 칸을 잇는 문은 열려 있거나 쉽게 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데, 이건 왜 이렇게 굳게 닫혀 있을까요?"
"어어, 무슨 소리 안 들려?"
쿵
알 수 없는 소리에 자양이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형섭이 계속 문을 두드리며 민승에게 윽박지르는 사이에 마키노리가 소리의 원인을 마음속으로 추측하였다. 방금 전 덜컹 하는 소리는 열차 전체에서 난 것이었다. 근원을 파악할 필요도 없이 이 칸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쿵 소리는 문에 가까이 있던 이들만 느낄 수 있었다. 자양보다 훨씬 뒤에 있는 윤현이 그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냐고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이 문 바로 건너편에서 충격을 가하는 소리였다.
쿵
"이거… 설마…"
"저 민승이라는 양반, 문을 부술 작정인 거야?"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거지?"
"아마…"
덕희가 어두컴컴한 창문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그 말은 윤현만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말의 내용은 얼마 안 가 모두에게 전해졌다. 멀리 갈 것 없이 잔뜩 일그러진 민승의 절규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문 열어! 열어, 열라고!" 열어줘열어줘열어줘열어줘열어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이 문 잠겼어요!"
"열라고! 어서! 이상한, 이상한 연기 덩어리가—" 너무추워기분이상해너희가우릴불렀잖아
"씨발, 뭔 개소리야! 허민승 미친놈아, 지랄 말고 문 열라고!"
"열어 줘, 제발, 제발, 열어! 열어!" 열어줘열어줘열어줘열어줘열어줘
쿵
논리도, 맥락도 없이 마구 지껄이는 그의 단말마에 모두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절규 속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창문을 손톱으로 긁는 소음까지 들려왔다. 무언가 심하게 흔들리며 덜컹거리는 소음도, 귀를 막고 온몸을 떠는 자양의 울음소리도, 오직 윤현만 들었을 덕희의 코웃음 소리도 한 데 뒤섞였다.
"이건 도대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문의 잠금이 풀리는 대로 상황을 확인해 봐야죠."
마키노리가 침착하게 사람들을 달래었지만, 별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기괴한 사태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민승의 비명이 차츰 줄어들었다. 그제서야 아까는 제대로 듣지 못한 소리까지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문으로부터 멀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넋이 나간 형섭은 인질 따위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가만히 멍하니 앉아 있었고, 마키노리와 토모메가 일본어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곧 다음 역에 도착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논하는 것이었겠지만, 윤현은 그 이야기에 낄 마음이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라앉히고 스스로 진정할 뿐이었다. 손은 여전히 떨렸다. 지난번에 꾼 그 거지 같은 악몽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는 손깍지를 쥐고 말없이 그 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덕희가 창문을 계속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둔 것을 목격하지는 못하였다.
열차의 조명이 복구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문을 연신 두드리던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흉터로 가득한 문이 저절로 열렸고, 그 자리에서 민승이 쓰러져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잃고 문에 기댄 채 기절해 있던 것이었다.
"맥박은 있어요. 의식을 잃은 것 같으니 의자에 눕혀야—"
"잠깐만."
처음으로 사색이 된 표정을 짓는 형섭이 민승의 목덜미와 상의의 소매를 가리켰다. 소매를 걷으니 그의 두꺼운 팔이 드러났다. 그동안 윤현이 좁은 문 너머로 본 항아리는 금줄이 잘 묶인 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는 듯이.
다시 쓰러진 민승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의 목덜미와 팔뚝에 나타난 붉은 자국이 보였다. 자국의 개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크기는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가뜩이나 세게 잡았는지 보라색 멍까지 나 있었다.
이 흔적이 어떤 자들의 손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망자 칸으로 이어지는 문은 여느 때처럼 검게 물든 창문이 달린 채로 굳게 잠겨 있었다.
반차오역(우한)
오전 12시 17분
열차가 생각보다 늦어진 데 뤼자오싱 요원은 어떤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오랫동안 국가안전부 변칙문제관리국에서 근무하며 쌓은 경험이 이럴 때 유용하였다. 이타바시역에서 일본 공안부 특사과 측이 인질 교환에 나선 것처럼 이곳에서도 협상이 이루어지리라 예견하였다.
이곳에서마저 범인을 놓치면 최종 목적지인 광저우 반차오역에서 판을 뒤집어야 하였다. 그것은 중국 지부의 다른 기지에서 관리할 업무이지만, 이왕 자신에게 사건이 전달된 만큼 성과를 거두기를 바랐다. 한국 지부에서 처음부터 사건을 잘 수습하였다면 밤을 샐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말이었다.
"열차가 들어옵니다."
"인질들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운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협상은 내가 주도한다. 샤오캉, 여차하면 바로 광저우의 차이 대장에게 연락할 준비 하고 있어."
"예. 그런데 팀장님…"
"왜?"
"그, 얼굴이 어두운 건 범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샤오캉의 말마따나 문 앞에 선 범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재단과 각국 수사 기관에 쫓기느라 피로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자오싱은 그렇게 된 데 분명 또 다른 사유가 있었을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범인 쪽이었다.
"여기에서 인질 2명을 석방한다. 교환할 필요 없어."
"바라는 다른 조건은?"
"없어. 됐고 얼른 데려 가."
이시쿠라에게서 들은 바와 달리 범인은 콧등에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계속 들어 올리고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어설픈 모습을 계속 드러내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가 인질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뒤에서 인질 2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번 역에 원래 내렸어야 할 리자양 연구원과 그를 부축하는 유라즈키 토모메 요원이었다. 그들도 저 범인처럼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체로 패닉에 빠질 만한 문제라도 일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 나머지 공범은 어디에 있나?"
"그딴 거 알아서 뭐 해? 더 이상 인질 석방은 없어. 이대로 광저우까지 가서 그때 모두 풀어준다. 내가 탈 이동 수단도 마련하고."
"허, 꽤나 단도직입적인데. 하나만 묻지. 어쩌다가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건가?"
괜찮은 대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한 형섭은 피식 웃고는 그 질문에 답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전에 크게 저지른 일이 있었거든. 돈 좀 빼돌려서 어느 벤처 기업에 투자한 게 걸려서 잘릴 위기에 놓였어. 분명 재단에서는 나한테 기억소거제를 먹이고 사회에 내던질 텐데, 쓸모없는 잉여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큰 거 한 방을 노리고 싶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충분히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지. 마음을 추스리고 뭐라도 했다면…"
그는 중간에 말을 끊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에 인질 2명이 열차에서 나와 기동특무부대에 인계되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자양은 의무 팀이 관리하고, 토모메는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형섭이 말하였다.
"하지만 이런 짓도,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어."
"왜?"
"… 재미있잖아. 스릴 넘치고. 안 그래?"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그의 표정을 보던 자오싱은 속으로 불쾌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사회에서 바라는 대로 살아온 사람이 한 번 저지른 일탈에서 느끼는 쾌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더 이상 공범을 입에 담지 않는 점도 신경에 거슬렸다.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유희를 위하여 위험한 길을 택한 사람에게 짐이 되는 동료는 쉽게 버리는 카드일 테니까.
결국 자오싱은 공범에 관하여 굳이 캐묻지 않기로 하였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만, 방금 전에 풀려난 인질에게서 상황을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열차가 다시 출발할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당신들, 칸을 옮겼군."
"눈썰미도 좋네."
서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둘은 스크린도어를 가운데에 놓고 갈라섰다. 열차가 궤도를 힘차게 달리며 쇳소리를 울렸다. 망자 칸의 새까만 창문이 유독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정신이 팔릴 틈이 없었다. 광저우의 반차오역에서 도착하기 전에 열차 내부 상황을 파악해야 하였다.
"유라즈키 씨라고 하셨죠? 혹시 이타바시역에서 반차오역으로 이동할 때 무슨 문제가 발생했나요?"
토모메는 아까와는 다르게 결연하게 고개를 들고 자오싱을 바라보았다. 어떤 큰 사명을 지기라도 한 듯이.
"열차에 신격 독립체가 함께 타고 있어요."
반차오역(우한) → 반차오역(상하이)
오전 12시 28분
"덕희."
"응? 왜요?"
인질극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인질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어도 더 이상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어차피 형섭의 목적은 광저우의 반차오역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고 태국이나 미얀마 등으로 도피하는 것이었기에 이제 인질의 거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인질들의 긴장도 다소 누그러졌다. 그래서 윤현이 덕희에게 물음을 던질 수 있던 것이었다.
"아까 그 금줄 마디를 떨어뜨린 거, 너 맞지?"
"음, 네.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아까 자양 씨가 다 줍지 못한 걸 하나 찾았는데, 그때는 이미 항아리를 들고 가 버린 후여서요. 하나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죠."
"괜찮을 줄 알았다고?"
윤현이 목소리를 순간 크게 높였지만, 열차가 속도를 줄이면서 굉음이 난 덕분에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덕희를 향한 윤현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평소였으면 직접 나서서라도 철저하게 준비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가끔은 도전을 즐겨 봐야지 않나요?"
"솔직하게 말해 봐."
덕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현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판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의 덕희는 그가 잘 알던 덕희가 맞을까? 영험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영험한 신에게 잘 휘둘린다고 들었다. 어쩌면 덕희의 몸에 깃든 정신은 덕희의 것이 아니라…
"맞아요, 아니에요."
"뭐?"
"아까부터 거기 둘, 뭘 속닥거리고 있는 거야?"
한동안 인질에게 간섭하지 않던 형섭이 갑자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대화를 계속 엿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덕희가 방금 전의 사건 때문에 어떤 신격 독립체에 빙의당한 것이 맞다면 이 사실을 함부로 알려서는 안 되었다. 당장은 그것을 비밀로 두어야 하였다. 마음이 다급해진 윤현이 먼저 수습에 나섰다.
"아, 아닙니다. 나중에 업무로 복귀하고 저 항아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지랄하네. 다 들었거든? 그 금줄 마디 어쩌고 하는 이야기 말이야, 허민승 저 새끼를 골로 보내려고 한 수작 아냐?"
형섭의 귀가 생각보다 밝았던 탓에 최악의 경우가 현실이 되었다. 긴장이 풀려 있던 인질들이 다시 한번 몸이 굳었다. 그나마 준과 마키노리가 곧바로 달려들 자세로 형섭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차오역에서 인질극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빨랐다.
"야, 너 이름이 뭐야?"
"나?"
"그래, 씨발, 너! 그러고 보니 아까 허민승한테 다가간 새끼도 너잖아? 너 씨발 도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덕희는 대답하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서고 형섭과 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교환하였다. 흔들림은 없었다. 오히려 그 광경을 보는 윤현이 긴장한 나머지 어찌할 줄 모르고 같이 일어서려고 하였다.
"자네는 가만히 있어."
덕희의 말투가 이상해졌지만,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지금의 덕희는 덕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윤현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열차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나?"
"몰라, 알아서 뭐 하게?"
"타지에서 객사한 이들이 원래 터전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당연하지만 고향을 등지고 살아간 이들은 죽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끊임없이 소망을 되새기기에."
"뭐라고?"
"물론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이성 따위 작용하지 않게 되네. 오직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한 무언가가 되지."
두 사람의 대치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서히 형섭이 그 조용한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들을 자극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나? 먼 타지에서 고향 땅을 밟기를 바라는 이들을 유혹한다면?"
"저 항아리가… 문제였다는 거야?"
"항아리…"
윤현이 떠올린 대로 그 항아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이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항아리를 빚은 도공의 감정이 항아리 자체에도 전해졌다고 한다면, 망자 칸에 타고 있을 영혼들이 항아리에 이끌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덕희의 몸에 깃든 무언가도 그 영혼들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하면 덕희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망자 칸의 승객들을 타자로 여기며 말하였다. 본인이 그들 중 하나라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에게 이성이 남아 있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한 가지뿐이다.
현의옹. 그가 직접 나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저 친구를 따라 같은 경험을 해 보면 좋겠군."
덕희가 저 멀리에 여전히 기절한 채 누워 있는 민승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말하였다. 다음 역에 가까워지면서 열차의 속도가 크게 줄었다.
"뭐, 뭐? 그게 뭔 개소리야?"
"이 열차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다. 망자의 마지막을 위한 위로의 수단이다."
"웃기지 마, 내가 왜 그런…"
형섭이 품에서 밈적 인자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려고 하였지만, 동작만 취하였을 뿐 팔을 끝내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몸이 그야말로 굳어버렸다. 두려움 때문에 다리가 떨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아까는 재미있다면서? 이제는 무섭나?"
"자, 잠깐만, 살려 줘. 역에 도착하면 바로 자수할 테니까. 아아, 몸이 안 움직인다고!"
"곧 편해질 거야. 저 망자들이 바라는 건 고향의 흙냄새뿐만이 아니니까."
"안 돼, 잠깐만!"
"말벗이 하나 더 늘면 좋겠지."
덜컹
조명이 다시 꺼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생자 칸의 문이 동시에 열린 것이었다. 스산한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조금씩 형섭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공포에 찬 절규만 열차에 가득 찼다.
"안 돼! 이거 놔! 이거, 이거 놓으라고!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외로워외로워외로워외로워
"수단을 올바르게 쓰지 못한 데 따른 벌이라고 생각해라."
"안 돼, 안―" 같이가자같이가자같이가자같이가자
형섭의 단말마조차 끊기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시야가 가려졌지만, 윤현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 그림자만 남아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윽고 문이 잇따라 닫히고 조명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깐 동안 어두웠을 뿐인데 새하얀 빛에 눈이 시렸다.
잠에서 막 깬 듯 몽롱한 눈빛의 덕희가 윤현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 뭐야? 나 잠에 들었던 거야?"
반차오역(광저우)
오전 12시 34분
의식을 잃은 형섭이 발견된 장소는 생자 칸과 망자 칸을 잇는 문 앞에서였다. 그의 가방에서는 금은방에서 도난된 금괴와 장신구로 가득하였고, 품 속의 밈적 인자는 안전하게 회수되었다. 기동특무부대 寅鼠-1("무파봉강")은 중무장한 장비로 열차 안을 수색하였지만, 추가적인 무기나 폭발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형섭과 민승은 초짜 범죄자였다. 그들의 패기가 재단과 여러 기관을 당혹하게 만들었지만.
토모메가 직감으로 알아차리고 마키노리가 그를 석방 대상으로 추천한 사실 덕분에 재단은 일찌감치 신격 독립체, 특히 SCP-911-KO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현의옹이 열차에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사태가 종결되자마자 그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가 빙의하였던 덕희의 모습을 옆에서 관찰한 윤현과 준의 증언이 사건 분석에 도움을 얻었다.
문제의 항아리는 결국 변칙성을 알아내지 못한 채 일본 지부에 전달되어 그곳 기지에서 보관하고 있다. 가끔씩 항아리가 덜컹거리면서 스스로 흔들린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형섭의 영혼이 그 안에 갇혔다는 괴소문만 돌 뿐이었다.
윤현은 그 일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하려고 하였지만, 그때 본 덕희의 모습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그것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현의옹에 관하여 재단이 알아내지 못한 면이 수두룩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절대로 횡령 같은 짓은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굳게 생각하였다. 돈과 엮여 팔자를 그르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나 싶었다.
« 회귀물 | 장르 혼합 앤솔로지 | 추리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