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풀러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러의 서커스는 그날 문을 닫았다. 풀러의 해산 선언이 있었다. 몇 사람은 자신의 생계를 걱정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즉시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 배, 열차에 올라탔다.
천막이 허물어지고 동물들이 천천히 제 서식지로 떠났다. 몇 마리는 도시로 가서 문제를 벌이겠지만, 풀러의 신경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풀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떠났다.
미스터 다크는 어느 날 재무회계 사업계획서를 받아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크의 검은 눈동자에는 시선이 없었다. 늘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이 사그라들게 된 지 어느덧 오 분, 십 분, 이십 분.
그리고 그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앞주머니에 넣었다. 의자를 책상 깊숙이 밀어 넣고, 계획서 더미를 조심스럽게 그러쥐어 정리했다. 삐죽이 튀어나온 곳 없이, 깔끔하게.
이것도 무슨 소용이지.
다크는 막 정리된 종이 뭉치를 바닥으로 던졌다. 종이가 흩날리며 바닥을 가득 메웠다.
미스터 다크는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방을 나섰다. 흰 종이에 구두 자국이 가득 찍혀, 구두의 주인이 향하는 길을 선명히 드러냈다.
미스터 다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 참이었다. 평소 가던 레스토랑에 예약이 되어 있을 터였지만, 딱히 이제 끌리지 않았다. 사실 다크에게는 새로운 계획이 있었다.
맥도날드. 해피밀. 그리고 한참은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L.S.는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냈다.
뱀의 손에서 활동한 지 15년은 지난 시점이었다. 모든 것은 여느 때와 같았다. 연합과 항쟁하고, 재단의 뒤통수를 치고, 오행결사를 엿먹이고. 이런저런 일들.
그리고 L.S.는 오늘 책장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방랑자의 도서관에서 선보이는 가장 큰 자랑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그 책의 양과 비례하는 수준의 어지러움을 감당해야만 했다.
어쩌면 도서관 시스템을 개편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도서관을 좀 더 알아보기 쉽게, 책들을 이용하기 쉽게 개편하는 건 어떨까.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시대에 따라 분류하고, 그 분류를 보기 쉽게 라벨로 정리하는 거지. 혹은 기호를 사용하든.
어쨌든 사용자 편의는 중요하고,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간의 편의가 허용되어야 하니까.
일단 중요한 건 자신 몫으로 점거해 둔 책장을 정리하는 제일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도서관을 고치는 건 그걸 완수하고 나서도 상관없겠지.
D. C. 알 피네는 오전 11시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가끔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를 통해 모든 일정을 취소한 알 피네는 집무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천장은 변함이 없었고, 알 피네는 그것을 3시간 30분 동안 바라보았다. 천장은 날카로운 흰 빛으로 도색되어 있었고, 그 편집된 맥락이 가끔은 날카로웠다.
가끔은 연민이 생기기도 했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가만히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알 피네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O5-1은 텅 빈 집 마당에 서 있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 있었다. 이제 그들은 집 밖에 있다. 다른 곳을 집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땅속 깊은 곳이 집이 되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제 O5-1도 그곳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1은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봉투는 뜯겨 있었지만, 1은 편지지를 봉투에서 꺼내지 않는다.
품속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편지봉투 끄트머리에 불을 놓는다.
봉투가 천천히 타오르면서, 예상보다 더 빠르게 불이 커졌다. 열기에 손을 놓치자, 편지봉투는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한다.
마른 마당의 풀들에 불이 옮겨붙었다.
마당이 불꽃으로 휩싸이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은 문간에 앉아 마당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멍하니 불이 너울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꼭 세상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