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에 제가 찍어준 주소로 오시지요."
기자는 연락을 받고 얼떨떨했지만 일단 향했다.
그는 이런 곳에 한정식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정식집에 들어서자, 기자를 부른 사내가 이미 방을 잡고 앉아 있었다. 기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단독 인터뷰를 요청하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던 기자는 멈칫했다. 곽해걸의 분위기가 너무나 살벌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자를 살펴보던 곽해걸은 멋쩍은지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이유는 별 거 없습니다. 저에 대해서 너무 좋게 써주셔서 감사 인사도 드릴 겸 모신 거죠."
곽해걸은 기자가 쓴 신문 기사를 펼쳤다.
곽해걸. 겁쟁이인가? 챔피언인가?
기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곽해걸이 누구인가? 겁쟁이 챔피언이다 뭐다 말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던 간에 무려 삼대천 지하격투장의 챔피언이다.
그 챔피언이라는 자리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기자는 새삼스럽게 곽해걸의 팔뚝을 보았다. 언제나 왜소하고 호리호리한 아웃복서 타입의 선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자신 정도는 새끼손가락으로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기자의 떨리는 대답에 곽해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뇨, 아뇨. 왜 그러십니까? 제목은 조금 도발적입니다만, 조회수가 필요한 직업이니 이해합니다. 저는 본문 내용이 워낙 감명깊어서 기자님께 대접해 드릴 겸 부른 것 뿐입니다."
세계 최대의 지하격투기 대회인 삼대천 지하격투기. 50년 가까운 역사를 거치며 무수한 챔피언이 탄생했다. 그 중 최강의 챔피언을 고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질긴 챔피언을 고르라면 쉽게 한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있다.
"크, 이 부분 정말 좋았어요. 질긴 챔피언. 딱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거든요."
기자는 당황했다. 자신이 글을 쓴 의도는 구독자들로 하여금 곽해걸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기는 했지만, 곽해걸 본인이 자신의 글을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또 그걸 좋아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세요. 뭐든지 좋아요."
기자는 프로 의식을 발동했다. 당황스럽기는 해도 이럴 때가 아니라면 언제 챔피언에게 말을 걸어 보겠나. 사람 머리가죽을 썰어버리는 코스칼이나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거 같은 바에아 같은 전 챔피언들에 비하면, 곽해걸은 그래도 사람 같았다. 충분히 용기를 내서 질문해 볼 만 했다.
"왜 계속 챔피언을 하시는 겁니까? 방어전을 거의 치르지 않으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타이틀 반납만 열 네번째고, 이번에 이기시면 열 다섯번째 타이틀 획득입니다. 보통 챔피언이 아닐 경우 5회전 이내로 죽거나 지하격투장을 떠나는 게 대부분인데…곽해걸 님은 매우 특이합니다. 이제 곧 50전이니까요."
지하격투는 아주 과격하며 한 경기 한경기에 걸려있는 액수가 천문학적이다. 그렇기에 선수 생명도 매우 짧다.
챔피언이 3회 방어전을 치르면 그대로 벨트를 반납하게 되니, 아무리 강한 챔피언도 공식전을 10경기 이상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오히려 강한 챔피언일 수록 정말 적은 경기만으로 챔피언을 졸업하고 유유히 떠나는 경향이 짙었다. 그렇기에 곽해걸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단은 돈이죠."
곽해걸은 겁쟁이였다. 적어도 싸움꾼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겁쟁이인지 몰랐다. 오랜 기간 평범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억울한 점도 있다. 싸움이라는 세계에 내몰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자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곽해걸은 겁쟁이기에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돈…물론 많이 버시겠지만, 챔피언을 졸업하면 그냥 계속 싸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돈을 얻지 않습니까?"
"그게 내 한계인 거지요."
곽해걸은 순간 움찔거리는 팔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전 싸움을 잘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정말 많이 하죠."
"……"
"경기장에서 변칙을 이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 예측능력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경기에서 이기고, 질 경기는 언제나 기권으로 하지 않는 모습에서 의심하기는 했습니다."
그 말에 곽해걸은 웃었다.
"예측이었다면 정말 편했겠네요. 하지만 제 건 좀 더 잔인한 겁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니까요."
기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특종을 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한 기자의 태도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곽해걸을 말을 이었다.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제가 정말 겁쟁이여서 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어느정도 자의적으로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는 올랐지만, 여전히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이란 건?"
"죽을 위기를 느껴야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어요. 죽거나 큰 상해를 입으면…그 위협을 느끼기 직전으로 돌아가죠."
곽해걸은 복싱선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국대회 레벨은 아닌 아마추어 수준. 안 그래도 좁은 대한민국 복싱 판에서 그 이상 넘어갈 생각은 없었고, 성인이 되면 가업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부모님이 사채업자들한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첫 싸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싸움은 그날 시작되었다.
그전까지의 싸움은 싸움이 아닌 투닥거림 또는 경기였다.
무작정 달려든 이후 사채업자의 칼이 자신의 배에 들어갔을 때, 곽해걸은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곽해걸은 죽고, 다치고, 죽고, 또 다쳤다.
죽을 때마다 언제나 힘들었지만, 그것이 모든 것에 재능 없었던 자신의 유일한 재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지하격투장이었다.
그의 진정한 재능은 끈질김이었지만, 세상 그 누구도 그의 끈기를 인정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재도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경기 시작합니다."
상대는 강하다. 하지만 곽해걸은 이미 198번째 녀석을 상대해 봤다.
시작은 언제나 레프트 훅. 피하고 카운터를 먹인다.
녀석은 기절한 상태에서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근육 덩어리인 저 꼬리로.
곽해걸은 저 꼬리 때문에 30번 넘게 재시작 했다. 하지만 이제 파훼법을 안다.
곽해걸은 꼬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한 뒤 무릎으로 상대의 명치를 찍었다. 그 뒤 요동치는 꼬리를 붙잡은 채 상대를 짓밟았다. 꼬리가 완전히 경직될 때까지.
"그렇다면 기권패한 상대들 역시 한번쯤 싸워봤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가장 강력한 상대는 누구였습니까?"
유치하지만 기자로서는 꼭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무수한 삼대천 지하격투장의 챔피언들과 모두 붙어본 존재는 정말 드물었다.
"음…코스칼도 소름끼쳤고…태완이도 엄청 쎄긴 했죠."
"저도 장태완씨는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얼마만의 노예 출신 챔피언이었는지…"
"그랬죠. 그래도 보기랑 달리 착한 애지만요."
"또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음…가장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모리안이라는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모리안이요?"
"예. 챔피언은 아니었지만요."
"기권하겠습니다."
곽해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일랜드인은 다 이렇게 쎈가. 손가락을 튕기니 미간이 뚫린 순간, 일반적인 복싱으로는 저 여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모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심하군."
"하하, 죄송합니다. 바로 기권하는게 좋게 보이지는 않겠죠."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너, 예언가라도 되나? 한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곽해걸은 쭉 소름이 끼쳤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하, 하하…"
"실망이군. 여긴 적어도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첫 상대부터 이 모양이라니. 안 봐도 뻔하겠네."
"저 말고는 강한 사람 많은걸요."
모리안은 입술을 비틀었다.
"너같은 녀석은 흔해빠졌지. 힘을 가졌으면서 세상에 순응하려는 존재. 재미없어."
"허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리안은 곽해걸의 말을 무시하고 날개를 펼친 뒤 심판에게 크게 소리쳤다.
"기권하겠다!"
"그런 사람이 있었군요.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네, 정말 힘들었죠. 아, 후련하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뭡니까?"
기자는 말을 하자마자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흥분한 거다.
"아, 어짜피 잊으실 꺼에요."
곽해걸은 웃으며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기자가 반응하지도 못할 그 짧은 순간, 곽해걸의 동공은 수축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고 있다는 듯, 곽해걸의 온 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겁쟁이 곽해걸의 뇌수가 사방에 튀었다.
곽해걸은 심호흡을 했다. 평상시에도 언제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다는 자각. 그것을 깨달으며 곽해걸의 능력은 또 한번 도약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여유로워져서도 안된다. 겁쟁이가 겁을 안 먹는 순간, 능력은 사라질 지도 모르니까.
곽해걸은 태연하게 기자를 향해 웃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단독 인터뷰를 요청하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여기 식으면 맛이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