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3일
이름 없는 숙박업소
어느 모텔 안, 트렌치 코트를 걸친 은발의 여성이 탁자에 앉아 흑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가장 싼값의 방과 가장 낮은 질의 의자였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니니.
"……"
굳이 이런 장소를 골라 단 둘만의 대면으로 의뢰를 넣겠다는 것. 이는 의뢰인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싶어함을 의미했다. 기억은 바람 앞의 성냥처럼 깜박깜박거린다만 통찰력은 단 한 번도 바랜 적이 없기에, 환물탐정협회의 미라는 그러한 맥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무슈... 창이라고 했나?"
드디어 도착한 의뢰인. 약간 푸른빛이 도는 흑단발과 벽안에 가까운 자색 눈동자가 사뭇 낯선 느낌을 보였다.
"예. 창이라고 합니다. 최단거리로 왔다만, 길이 막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더플 코트를 벗으려던 의뢰인은 스스로의 복장을 보곤 서둘러 옷깃을 도로 여몄다. 웬 메이드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업이 하녀라도 되었던 건가." 미라가 실언을 했다.
"아니요. 그냥 일 때문에 입어본 실험적인 복장일 뿐입니다." 창이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착석하며 답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옴을 미라는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렇지. 예로부터 하녀란 것들은 모두 목줄 잡힌 개들이나 다름없었으니. 주인에게 낑낑대고, 꼬리를 흔들며, 교태를 부리는 — "
총성이 울리고, 어느새 권총탄 하나를 손가락의 와인 오프너에 낑겨놓은 미라와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눈 창이가 탁자를 두고 마주보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그나마 가장 두껍고 단단한 도구를 꺼내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두개골에 환풍구가 생길 뻔한 상황이었다.
"…미안, 일종의 시험이었어. 내 추측이 근거없는 심증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확인해봐야 했거든. 화는 풀어."
"죄송합니다. 본래 직설적인 성격인지라… 최근에 뿌리친 재단의 추적 탓에 더욱 신경질적이 된 거 같습니다." 창이가 사과하며 자리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왼손의 총구는 연기가 나는 그대로였는데, 화를 억제하는 그녀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줬음에 따른 감사를 표했다.
"총이라…" 미라가 와인따개에서 창이의 권총탄을 빼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전에 전달을 받았던 정보다만, 직접 본 거는 처음이네."
미라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총열을 만지려 하자, 창이는 왼팔을 뒤로 빼곤 총열을 도로 손으로 바꿔 버렸다. 영 탐탁치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그것이 저의 본질입니다. 미라 씨를 선택한 것 역시 그 점과 관련이 있고요. 저 역시도 탐색한 바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 나 같은 네 동족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거구나. 맞지?"
"…맞습니다."
억측스럽다고 느낀 창이였으나, 미라의 당당한 어조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이었으니.
"역시나." 그새 와인 오프너를 손가락으로 돌려놓은 미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시는 대로, 저는 당신과 당신 같은 동족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 의뢰를 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흐음." 미라가 턱을 감싸며 말했다.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궁금합니다. 그들도 저와 비슷한 일생을 사는지, 비슷한 사람들과 사는지, 비슷한 능력을 갖췄는지 말입니다. 저도,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창이의 단호한 어조에, 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이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 거야. 듣고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창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미라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에 부유한 귀족의 딸인 브리지트가 있었어. 어느 날 외모도,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했던 마르티나를 알게 되었지. 꽤나 닮은 점이 많았던 까닭에, 브리지트는 그녀를 친구로 삼고 싶어했어."
"저에겐 약간 노골적으로 들리네요."
"무슈 창, 머리 좀 돌아가나 보네?" 미라는 창이가 속뜻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고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생각 외로 많은 차이가 있었어. 마르티나는 가난한 구두장이의 딸이었거든. 좋은 집에 살며 서재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 취미였던 브리지트와는 반대로 마르티나는 허름한 헛간에서 살며 매일같이 바깥에서 뛰노는 걸 취미로 삼았어."
"……"
"겉은 비슷해 보였지만, 사실 브리지트와 마르티나는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던 거야. 이런 상황에서 브리지트가 마르티나에게 다가간다 한들,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니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마찬가지야. 총과 칼은 같은 무기지만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 공통점에 흥미를 느끼고 가까워지려 할 수는 있겠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장담할 수는 없어."
"……" 부정할 수 없었다. 총과 칼 사이에는 둘을 구분짓는 명확한 분계선이 있었다. 그 선을 멋대로 넘는 건 어쩌면 그들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창이가 힘을 들여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에는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오류?" 미라가 기대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미라 씨는 브리지트와 마르티나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셨죠. 하지만, 본질이 다르다고 영원히 떨어져 있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애초에 다른 것을 이어붙이는 과정을 친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본질적인 차이는 이 이야기에서 논하려는 대상이 아닙니다. 브리지트가 마르티나와 친해질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바로 접근법입니다. 친해지는 건 한순간에 되는 일이 아니므로, 그에 맞는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담을 곧바로 뛰어넘는 게 아닌, 문을 두드리는 과정을 거친다면 서로의 본질을 조정할 시간이 생길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길은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라가 말했다.
"네. 돌아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경로였던 것입니다." 창이도 입을 맞춰 말했다.
"마음에 드네. 완벽히 이해한 것 같아서 말이야." 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가시려고요?"
"답을 스스로 냈잖아. 더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미라가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도로 창이에게 얼굴을 돌렸다.
"참, 내가 이걸 안 줬구나. 여기 내 전화번호야." 미라가 말하며 포스트잇을 창이의 얼굴에 딱 붙였다. 떼어 보니, 미라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칼은 여러 각도로 휘두를 수 있지만, 총은 한 곳만을 겨누지. 행동을 바꾸기란 어려울 거야. 그건 본질을 넘어선 본능의 영역이니까."
"그래도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그 문이 되어 주겠다고. 장벽의 안팎을 이어줄, 두드리기 위한 문짝 말이야. 준비되면 번호대로 연락 줘."
"…잠시만요!" 다시 문고리를 집으려던 미라를 창이가 잡아 세웠다.
"브리지트와 마르티나, 그 둘은 결국 어떻게 되었죠?"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흠." 미라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많이 어색했는데, 나중엔 BFF 됐어. 충분하지?"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좋아. 그럼 그걸로 된 거야." 미라가 이젠 정말로 문을 열고 떠나며 말했다.
"무슈 창, 너는 안 갈 건가?"
"잠시 생각 좀 하다 가겠습니다." 창이가 훗 하고 웃어보이며 말했다.
"방값이 아깝기도 하고, 빨리 출발한다고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