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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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동아시아에서 SCP 재단이 최초로 접촉한, 역사적으로는 그 의미가 큰 국가.

하지만 좁은 영토 덕에 실질적인 중요성과 존재감은 주변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국가.

이런 대한민국 현지에서도 그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대부분의 가구가 멸치잡이로 먹고사는 남부 지방의 조그만 섬마을에도, 재단의 시설이 있었다. 기상청의 연구 시설로 알려진 이곳은, 눈에 띄지 않고 비밀스러운 활동을 하기에 더없이 적합하게 조용하고 한적한 시설이었다. 외국인이 들락날락했다간 지나치게 눈에 띌 만큼 외진 곳이니만큼 한국계 인원만 근무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상 현상 관측’처럼 구체적인 목적도 없이 형식적인 목적으로나 존재하는 이런 시설에 소위 말하는 ‘글로벌한’ 협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장소가 으레 그렇듯이, 제4-K5 기지라 알려진 이곳의 가장 활기찬 시간은 역시 점심시간이었다.

물론 별 투자를 못 받는 여느 소규모 시설처럼 이곳의 구내식당 역시 썩 좋은 음식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여 여 멸치 꼬라지 봐라.” 기지에 두 명 있는 이 섬의 토박이 중 하나인 윤지환 연구원이 주걱으로 멸치볶음을 뒤적거리며 툴툴거렸다. 오랜 외지생활로 표준어와 사투리가 애매하게 섞여 있었지만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기서 5분만 걸어나가면 좋은 멸치가 언덕빼이로 쌓이가 있는데 왜 우리가 이딴 걸 퍼먹어야 하는 거야?”
“여기서 출하되는 멸치는 대도시 백화점에서 작은 거 한 박스에 10만 원도 넘어가는 최상품이야. 이 기지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몇 번을 얘기하냐.” 조리실 안쪽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정도 되니까 그런 재료 받고도 이만큼 맛있게 만드는 거 아니겠니. 삽으로 맞기 싫으면 반찬투정 하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먹으세요.”
“쳇, 요즘 같은 때엔 그냥 내려가서 멸치 좀 얻어와도 상관없잖아.” 윤지환 연구원은 툴툴거리면서도 얌전히 자신의 음식을 담았다.

윤지환 연구원을 시작으로 첫 번째 무리의 인원들이 식사를 하려 하나 둘 몰려들었고, 구내식당은 곧 일상적인 대화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라 고작 6명의 연구원으로도 북적이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재단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SCP를 직접 본 적도 없고, 변칙적인 현상이래 봤자 한 번밖에 겪어보지 못한 연구원들에게 한때 다른 기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다른 몇몇 연구원이 자신의 경험이나 옛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듣는 이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괴한 사건 사고 소식을 들으며 그런 흥미롭고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하고, 말하는 이는 일단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연구원들이 식사를 마쳐갈 때쯤, 새로운 무리가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두 명의 일반인 경비원과 경비원으로 위장한 두 명의 전투 요원이었다.
“여, 김말이!” 이 섬의 또 다른 토박이이자, 재단에서 채용을 고려하고 있는 유능한 경비원 손민우 실장이었다. ‘김말이’라는 외침이 식당에 울리자 식사를 하던 연구원들이 짧게 큭큭거렸다. “나는 멸치볶음 싫은데 냉장고에 참치 캔 있는 거 꺼내주면 안 되냐? 원래는 어제가 내 차례였는데.”
‘창의력이라곤 없는 윗대가리들… 가명을 줘도 꼭 이따위로 대충…’ 근무지가 근무지이다 보니, 한국계 외국인이라면 일개 조리사에게까지 현지에 어울리는 가명을 부여하는 섬세한 재단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원래의 이름인 마리안느에서 ‘마리’를 따고, 한국에서 흔한 성씨인 ‘김’을 붙여 만든 무성의한 이름은 ‘김말이’라는 별명을 만들기에 딱 적당했다. 물론 직원들은 충분히 어른스러웠고, 굳이 저런 별명을 당사자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손민우 실장은 달랐다.
유치하게 이름가지고 지랄이야, 지랄이…초딩이냐? 반찬투정 하지 마.” 마리안느가 조리실에서 나와 다 떨어진 반찬을 새로 채우며 말했다. “ 그냥 주는 대로 먹어. 내가 식단 짰냐? 앙? 이 섬 인간들은 왜 이렇게들 음식을 가려?”
함께 들어온 위장 요원은 미안한 듯 마리안느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대신 답했다.
“마리 씨가 이해하세요. 똑같은 메뉴가 자꾸 돌고 도니까 좀 질리시나 봐요.”

요란스러운 등장 직후 식당에는 일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손민우 실장을 비롯한 단 두 명의 일반인을 위해 모두가 조금 더 ‘일상적인’ 화제를 찾아 말을 돌리려는, 사실 큰 의미는 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폐쇄적인 직장의 사회성 떨어지는 연구원에겐 조금 벅찬 과제였고, 매 순간 찾아오는 이 1초의 침묵은 두 명의 경비원을 불편하게 했다. 손민우 실장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자신들의 등장 때문에 생기는 순간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유치한 장난이 그 이유라고 생각하여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크흠, 뭐, 오늘도 너는 야근하지?”
“응. 임수현 박사님 저녁밥 해 드려야지.”
“…아. 그래. 매번 똑같네.”
“…임박사님 아니면 할 사람도 없잖아.”
젠장. 야근 이야기는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임수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묘하게 변한 식당 분위기에 손민우 실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먹을 음식을 담으며 조리실로 들어가는 마리안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맞다, 야, 마리, 내 참치는!”
“…임박사님이 오늘따라 참치찌개가 드시고 싶으시대. 한 번만 양보해라. 그분 평소엔 뭐 먹고 싶다고 안 하시잖아.”
“…아. 그럼 당연히 양보해야지.”
젠장. 그까짓 참치가 뭐라고 내가 또… 손민우 실장은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거의 마쳐가는 임수현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영원히 밤새 일해온 것만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잠깐의 소란이 가시고 경비원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정말 기상관측 하는 곳이 맞긴 합니까?” 손민우 실장과 같은 일반인 경비원이 말을 꺼냈다. “제가 여기서 일한지도 꽤 오래됐고, 지금의 사태를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닥쳐. 이제 겨우 2개월 일한 주제에.”
2개월이라고요? 그래요, 연초에 시작했으니, 2개월 일한 거 맞죠. 근데 기분 같아서는 2개월이 아니라 2백 년, 아니 2천 년은 일한 것 같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세는 건 포기했어요.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 제가 매일같이 여기 출근하는 것도,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닥치라고 했다.”
“조그만 섬동네의 별 볼 일 없는 기상 관측소에 무슨 놈의 박사가 6명이나 있습니까?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요. 온 세상이 제정신이 아닌데 여기만 멀쩡한 것도 수상하고, 이 정신 나간 사태의 시작이 여기라는 것도 수상하지 않습니까? 다들 우연이라고는 말하지만, 배운 거 없이 무식한 저도 여기가 수상하단 건 알 것 같다고요. 여긴 분명 정부의 비밀 연구소 같은 게 틀림없습니다. 이곳에서 한 실험이 잘못돼서, 우리가 이 꼴을 당한 게 분명하다고요.”
“그 같잖은 음모론이 말도 안 된다는 건 너도 잘 알테고.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3월 2일이 되기 전에는 배가 없어 이 좆같은 섬에 꼼짝없이 갇힌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매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이 좆같은 점심도 지긋지긋합니다. 내일이 오면 항상 남아있는 참치를 11명이 돌아가면서 처먹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모두 절대 폰을 보지 않고서 지금의 사태를 애써 모른 척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요!” 경비원은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들 왜 이렇게 침착한 겁니까? 여긴 뭐 사이코패스만 모였어요? 아니면 저만 모르는 무슨 ‘아무리 좆같아도 침착할 수 있는 매뉴얼’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네. 사실은, 진짜로 있어요.” 손민우 실장이 뭐라 말을 꺼내려 할 때, 위장요원 한 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반인 경비원은 당황하여 건너편에 앉은 경비원을 바라봤고, 손민우 실장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둘은 거의 동시에 물었다.
“있다니. 뭐가?”
“‘아무리 좆같아도 침착할 수 있는 매뉴얼’요. 정확히는 <E급 시간 재난 시나리오 대응 매뉴얼>이라고, 여기 사람들은 민간인인 손실장님이랑 윤대리님만 빼고 다 갖고있어요.” 위장요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국을 한술 떠먹으며 대답했다.

매뉴얼을 안다는 인간이 저러고 앉았어? 식당의 모두가 경악하여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위장요원을 바라봤지만, 위장요원은 개의치 않고 밥을 먹으며 말을 이었다.

“아, 저는 민간인 경비원으로 위장한 진짜 경비원이고, 제 진짜 이름은 제이슨 티빙입니다. 한국계 캐나다인이죠. 우리 밥 해주시는 김마리 씨의 본명은 마리안느, 저처럼 한국계. 사실 여기서 세번째로 높으신 분이에요. 인사과 분이시거든요. 손 실장님의 채용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시죠. 옆에 이 경비원 친구도 위장요원인 최민혁.”

자신의 실명이 거론되자 다른 위장요원이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했지만 제이슨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곳은 제4-K5 기지라고, 이 섬에 시간 균열이 있어서 세워진 연구소인데 그래서 시간 재난에 대한 매뉴얼이 지급된 거죠. 그리고 이 기지와 우리들은 기상청이나 정부 소속이 아니라 SCP 재단이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을 관리하는 다국적 민간단체 소속입니다.”

이쯤 되자 그곳에 있던 모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제이슨을 바라보거나, 서로 눈치를 보며 물을 마실 뿐이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혼자만 힘든 것처럼 징징거리길래 선배가 말씀하신 음모론에 살 좀 붙여 봤어요. 농담도 못 하나. 밥이나 드세요.” 조리실 안에서 턱을 괸 채 이번 사태만 끝나면 넌 내가 책임지고 감봉시켜주겠다는 눈빛을 보내며 지켜보던 마리안느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불평을 하던 민간인 경비원은 눈에 띄게 서먹서먹해진 분위기에 불만이 쏙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후배의 실없는 농담에 그저 허탈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 그도 지루한 일상에 지쳤을 뿐, 정신이 불안정하거나 한 건 느낀 적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자살을 해도 몇 번은 했을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또다시 용기를 내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선명하게 2011년 2월 30일이라는 날짜가 찍혀있었다.

어제의 날짜도 2월 30일이었고, 내일의 날짜도 2월 30일일 것이며, 언제까지 2월 30일지 모를 것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경비원은 한숨이 나오는 걸 스스로 막을 수 없었다.

“다들 최근 생긴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여서 기운들 내시라고 없는 재료 털어다 만들어봤어요.”
마리안느는 마법의 조미료를 넣으려다 말고,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급하게 만들었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과일 샐러드를 들고 나왔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애처럼 좋아하며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어머니. 제가 안전한 곳에서 근무해야 안심이 된다며 기어코 이곳으로 전근시켜 주시더니, 재단 아니랄까봐 이 기지라고 멀쩡하진 않네요. 뭐, 일단 안전은 한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할지…’
식탁을 붙여 둘러앉아 후식을 먹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마리안느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조리실로 되돌아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의. E급 기억 소거 물질’이라 적힌 조미료통의 뚜껑을 닫아 다시 주방의 금고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주의. C형 정신조작 물질’이라 적힌 통에 담긴, 마리안느만이 지급받은 상관 전용의 ‘아무리 좆같아도 침착할 수 있는 매뉴얼’에 따라 매일 점심식사에 넣어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에 심란해질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또 다른 마법의 조미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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