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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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는 죽었다.

조만간 그렇게 될 줄 파멜라는 알고 있었다. 그걸 이유로 어머니는 하워드와 관계를 쌓는 걸 반대했는데, 그 말씀이 맞는 모양이었다. 미래를 그리며 펼쳐놓던 낭만적 상상들이 흐릿하게 바래 가던 와중에도 파멜라는, 항상 하워드가 안전하길 바랐다. 옷, 신발, 비싼 향수에 모두 보이지 않는 별표가 붙어 있었다. 하워드를 볼 때마다 따라다니던 그 별표가.

이렇게 끝이구나. 하워드의 마지막 편지를 들고 파멜라는 생각했다. 텅 빈 집의 고요 속으로 에어컨의 미약한 위잉 소리만이 들렸다. 하워드가 이렇게… 극적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유치한 편지로 내가 걔를 기억해야 하는 거야?

가구는 어디다 둘지, 애 이름은 어떻게 붙일지 쪼잔하게 싸우던 시간을 기억해.

항상 하워드는 과거를 미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파멜라는 애를 두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 문제 때문에 툭하면 말다툼이 붙었기 때문에, 아니 그것 말고도 수백 수천 가지 이유 때문에 파멜라는 하워드가 둘의 관계를 영원하게 만들자고 말하면 또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 상관 없겠지만…

이 봉투에 담은 반지를 준비하느라 애먹었어. 반지를 껴 줘. 그러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도 우리는 함께일 거야.

그리고 또 하워드는 참 이상하게도 없어서 못 살다시피 하던 싸구려 로맨스 소설 속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결혼반지가 나이 들어가는 과부에게 의미 있는 물건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 딸려 쌓이는 시간의 더께가 없다면 껴 봤자 의미가 없어 보였다. 예쁘고 비싸 보였지만, 그건 귀고리도 마찬가지였고.

죽어버린 남자랑 결혼해 줄래?

이제는 못해, 이 유치한 로맨티스트야. 그래도, 결혼할 수 있었을까?

파멜라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 됐다.

파멜라가 존재하는 차원에서 반지 한 쌍에 딸려온 이 조그만 주머니 차원으로 처음 이동했을 때, 하워드는 몇 년을 걸려 지을 집을 완공하기 전에 파멜라가 찾아오면 어쩌나부터 걱정했다. 당장 하워드도 떨어져 죽고 눈 떠 보니 주위가 휑한 빈터고 건설 연장들이 널린 모습이 보이자 어느 모로 보나 적응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으니까. 여자 마법사는 반지를 팔 때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반지를 낀 자가 살 곳을 모두 지을 때까지 시간은 멈추어 있다네. 하지만 그래도 하워드는 마음 한켠의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뭐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다. 새 집은 돌담에 초가지붕을 이은 단출한 건물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비바람 맞지 않고 안에서 따뜻하게 지내기에는 확실히 어두컴컴한 겨울에 혼자 쓰던 텐트보다 훨씬 넉넉했다. 하워드는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에다 마지막 돌 한 장을 올려두며,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다 지었는지 혼자 감탄했다. 몇 걸음 물러나서 하워드는 신비한 여자 마법사가 오래 전 알려줬던 주문을 외웠다.

"사랑의 노동으로 지어진 돌집이여,
저 하늘들 위에서 내 부름에 답하오.
주택을 가정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
영원한 고독 속에 우리 지닐 것을 다오."

하워드는 다시 문앞으로 걸어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쉰 다음 문을 열었다.

아름다웠다. 마호가니 책장 옆으로 하워드가 벽에다 새겨넣은 벽난로, 그리고 우아한 공예 거실의자들이 있었다. 다른 벽에 붙은 침대는 두 사람이 잘 크기였고, 그토록 오랫동안 바깥에서 지내다 보니 인생에서 그만큼 이끌리던 것이 미처 기억이 안 났다. 부엌은 투박했지만 팜이 맛있는 걸 만들어줄 준비물은 충분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기도. 언젠가 요리하는 법을 배우겠다고 파멜라에게 약속했던 걸 하워드는 기억했다.)

하워드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들고 의자에 앉았다. 일하는 시간은 그렇게 찾아왔다가 잠시 머무르고 드디어 지나갔다. 지칠 줄 모르고 작업한 장소는 이제 인생 하나뿐인 사랑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


"500달러 드리죠."

의심쩍은 눈으로 전당포 주인은 파멜라를 바라봤다. 잘 모르게 생긴 이 여자한테 약간은 남겨먹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지만 이번 기회는 아니었다. 파멜라는 요구 금액을 600달러로 높여 제시했다.

"600달러요? 오버하십니다, 아가씨. 멋진 반지지만 더 멋진 것도 제가 받거든요. 그리고 제 예감입니다만 이 반지 빨리 치워버리고 하시는 눈치신데요."

파멜라는 갑자기 불편한 기색이 되더니, 협상력을 재빨리 떨구고 동정을 사는 작전으로 선회했다. "이 반지… 남자친구 거였어요. 이걸로 프로포즈하려고 했다가 죽어버렸죠."

"아 정말요? 어떻게 대답하려고 하셨나요?"

"저기요, 그것까지 신경쓰실 건 없지 않을까요."

"'안돼'였나 보네." 전당포 주인은 손가락 위로 자꾸 굴리면 값어치라도 불어나는 것마냥 반지를 게속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하시죠. 아무래도 착하신 분 같으니까 제가 550까지 쓰겠습니다. 그 이상은 안돼요."

"알았어요." 파멜라가 지갑에서 체크카드를 꺼내 카드 리더기에 꽂아넣었을 때, 화면에 빨간색 X자가 떴다. 너무 빨리 넣었나, 파멜라는 생각했다.

"침착해요, 레이싱 같은 거 아니니까. 점검해볼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시죠." 전당포 주인이 점검하는 동안, 파멜라는 반지를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이런 짓을 하워드가 알았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 사소한 것이 왜 고작 전당포에 잡히는 것 때문에 기분 불편하게 할까?

"남친이 생각나시나 보죠?" 의식의 흐름 속으로 전당포 주인이 또 끼어들었다. "이해합니다. 제 친구 중에도 여친한테 프로포즈를 했는데 다음날에 세상을 떠났던 놈이 있었죠. 10년 동안 그놈의 반지를 붙들고 살더라고요."

"그 이상의 반지였어요." 파멜라가 대답하며 리더기에 카드를 다시 한 번 꽂았다. 그러냐는 듯 전당포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전에 유치한 편지 한 장을 남겼어요. 이 반지라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고. 마치 그 사람의 한 조각 같달까요."

"상상일 뿐이죠.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공수래공수거라고."


파멜라는 오지 않았다.

두 번째 책장의 마지막 책을 하워드는 마쳤다. 몇 년이 지나다 보니 마음속에서 시간은 더는 흐르지 않았다. 파멜라를 기다리며 시간은 흐릿해졌고 또 비틀려졌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인정하기를 자꾸만 미뤄 왔지만, 하워드가 읽은 마지막 책,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결국 둑을 터뜨려 버렸다.

얼마인지 모를 괴로운 시간이 흘렀을 때, 하워드는 스스로 규칙을 하나 세웠다. 책장의 책을 전부 다 읽되, 오디세이아는 맨 마지막에 읽겠다고.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처럼, 오두막에 깔린 침묵과 주머니 차원 속 영원한 봄날의 부드럽고 잔잔한 소리 가운데서 팜을 기다리겠다고. 초가집 주변의 나무들이 구혼자가 되어 이제 그만 단념하고 자기들 품에 안기라고 부를 때도,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하워드는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는 넘어가 버렸다. 이타카는 다시 평화로워졌고,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는 다시 결합했다. 그리고 하워드는 혼자 있었다.

"미안해, 팜." 딱히 들을 사람 없이 크게, 하워드는 말했다. "더는 못 기다리겠어."

그리고 정문을 열고 나가 문을 닫았다. 아무 쓸모 없었던 자기의 피조물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며, 하워드의 얼굴을 눈물이 타고 흘렀다.

반지만 끼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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