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프란치스코, 내 방탕하고… 그러니까… 방탕하나 충, 충실한 시종이여… 하아… 아니, 이게 아니야."
방은 고요했다. 그리고, 또 어두웠다. 오로지 맥없는 나의 독백만이 침묵하는 어스름을 간질였다. 고요는 거슬린다는 듯 나를 신경질적으로 옥죄었다. 불쾌했다.
"오, 루도비코, 내 방탕하나 충실한— 아니 충직한— 쯧."
숨이 턱턱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터져버릴 듯 갑갑했다. 정적이 다시금 어둠에 똬리를 틀어 방에 좌정하고야 만다. 나를 비웃고 있다. 앗아간 나의 창의성을 들먹이며 나를 조롱하고 있다. 저것이 나의 재능을 고매하였다.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오, 프란치스코— 루도비코? 방탕하디 충직한, 충직하디 방탕한… 안토니오의 시종 프란치스코, 곤잘로의 시종 루도비코. 아니지, 그 반대던가?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루도비코. 곤잘로. 뒤오. 뒤오?"
역정이 났다. 얽히고 설킨 호흡이 탄식이 되어 천장에 안착했다. 나는 천장에 붙은 그것을 보았다. 어두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허공에 열린 무저갱은 나의 한탄을 담길 거부하였고, 작은 종이 쪼가리를 삼킨 문장에 행렬 역시 나의 입을 통해 표출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입이 내뱉은 마지막 단어를 곱씹었다. 뒤오. 그래, 나는 검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검어 홀로 방황케 하는 그러한 꿈을.
굶주린 예술가는 꺾인 날개를 품고 허황된 비행을 꿈꾸는 새와도 같다. 꺾인 꿈. 꺾인 이상. 비극이다. 나는 강제로 연기되는 비극에서 비극을 연기하는 비천한 배우이다. 웃기지, 정작 손에 들린 이 비극의 각본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며 막을 내린다. 안토니오는 왕위를 되찾고 소르티노의 딸 알린다와 혼인하며 축배를 든다. 나는 안토니오를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토니오가 아니다. 아니, 과연 그럴까.
방황하던 나의 시선은 이내 매끄러운 유리판에 안착했다. 그것은 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피상을 복제하는 신비로운 문이었다. 빛은 그것을 투과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빛을 담아냈다. 그리고 나의 존재 역시 담아냈다. 안토니오를 담아냈고 나를 담아냈고 굶주린 예술가를 담아냈다. 유리는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진실 역시 거짓되고야 말았다.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당연하지, 나의 방탕하나 충직한 시종은 언제나 사물 본연의 모습을 투영했으니까.
안토니오. 트린쿨로의 진실된 왕자이자 국왕. 참으로 건실하고 정의로운 영웅. 그는 참으로 알레가넨의 황자였다. 대사가 그 위엄을 깎아내리기 전에도, 그 고귀한 풍채는 망령된 손아귀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안토니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수 없었다.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울은 안토니오가 아닌 나를 비추었다. 나는 곧 굶주린 에술가였기에, 거울은 굶주린 예술가를 비추었다. 흠 많고 불완정성으로 그득한 나의 피상을 비추었다. 그 피상이 곧 나의 본연이었기에, 거울은 나의 가장 밑바닥의 거하는 찌꺼기로서 나를 재구축했다.
"안토니오…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루도비코. 루도비코, 곤잘로. 아니, 곤잘로가 아닌 뒤오. 루도비코가 아닌 뒤오. 알레가넨의 반역자 뒤오. 그렇다면 스포르차는? 스포르차의 유령은? 나는 무얼 보았고, 무얼 말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거지? 왜 말할 수 없는 거지?"
나는 나를 비추는 업경을 어루만졌다. 그 하찮은 유리판은 나를 꿰뚫었으나 나는 감히 그 유리판을 꿰뚫을 수 없었다. 나는 명예로운 왕과 귀족이 아니었다. 나는 배우요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배우는 타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본인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나아가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허상의 탈가죽을 뒤집어 써 스스로를 게워내는 목각인형이었다. 그렇기에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나만이 목매달린 왕의 비극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방은 고요했고 또 어두웠다. 눈을 감아서 어두운 것이 아니었고 어두워서 눈을 감은 것이었다. 꿈을 꿀 수 있도록. 박제된 현실을 뒤로하고 유동하는 꿈을 꿀 수 있도록. 필시 그것이 검은 꿈이라 하더라도, 꿈결의 몽롱함을 다시금 맛볼 수 있도록. 다시금 뭍으로 돋을 수 있도록.
뭍으로 돋는다라. 비록 추락했을지언정 이카로스는 태양을 향해 돋아났다. 그러나 빛에서 다시 깊고 어두운 심해로 추락한 그보다는, 깊고 어두운 심해에서 은은한 빛이 잔류하는 뭍으로 돋아나는 것도 역시 가치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실로 어둠을 찢고 한 줄기 조명이 나를 비추기 전까지는. 나는 뭍으로 돋지 않았다. 강제로 건져 올려졌다. 발가벗겨져 빛의 아가리 속에 박제되었다.
나는 거대한 극장에 전시되었다. 최초의 인류처럼 장대한 초원에 놓여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숭고함을 일절 담아내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숭고했는가? 어쩌면 내가 더 숭고하지 않을까? 무한한 관객석을 덮은 웅장하고 위대한 어둠은 고작 나 하나를 감싼 빛줄기를 침투하지 못했다. 극장이라는 무대로 해방되어 더욱 광대한 신당에 좌정한 고요는 나를 가만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나는 박제되었다. 그러나 대가로 수천만의 관객을 얻었다.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 것일까? 자기애적 망상장애가 갑갑한 현실을 뚫고 이카로스가 되려 하는가? 나는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오만한 자신을 꾸짖어야 하는가?
나는 그저 눈을 꿈뻑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나의 관객들을 응시했다. 내 행위, 내가 그려내는, 내가 연기하는 작품을 감상할 관객들을 응시했다. 그들에게 나는 뭘까. 나의 껍데기를 처음으로 행한 안토니오? 그들의 삶을 나만의 껍데기로 채워넣어 새로운 측면을 밝힌 독창적인 배우? 혹은 우매한 어중이떠중이로도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유상무상 어중이떠중이에 지나지 않았다. 경솔하게도, 감히 목매달린 왕의 비극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은 가면을 썼고, 강렬하게 찬란해야 할 니그레도, 알베도, 치트리니타스, 그리고 루베도의 색체는 흐리고 또 탁했다. 왜 강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강렬해야만 찬란한가? 나는 가면 쓴 군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들은 그들이 아니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그 무엇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우매로 빚어진 허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은 나에게 나의 예술을 펼쳐보라고 종용했다. 그들의 예술을 펼쳐보라 종용했다. 어디 껍데기를 연기내어 보라고 종용했다. 그래서 나는 성대를 울렸다. 내가 안토니오를 모방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 역시 왕의 비극을 노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가면을 쓰고 나의 역할을 연기했다.
나는 가면을 써 그들을 마주 보았다. 희멀건 자기질 가면을 들고, 우아한 무도회의 복장을 빼어 입어 한껏 알레가넨의 백성을 흉내내어 보았다. 그러나 알레가넨은 알라가다고 트린쿨로는 알레가넨이나 알라가다는 트린쿨로가 아니듯이, 나의 얼굴을 덮은 것은 곰팡이진 흉측한 목재 가면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수치가 엄습했다. 안토니오는 이따위 흉물을 쓰지 않을 것이었기에. 나는 그렇게 나의 최초의 시도를 애증의 구덩이에 던져넣었다. 차마 죽이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과오이다.
가면의 군중은 묵묵히 나를 응시했다. 그 가면 너머 텅 빈 공허는 나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매달린 왕의 비극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연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탈을 다시 건져내어, 이국을 망명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성대는 삐걱거리고 동작은 딱딱했다. 이로써 나는 한낱 고장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안토니오가 아닌 프란치스코를 연기해야 했음을 깨달았다. 우매하게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무대의 뒤편을 향해 나아갔다. 조금 과거로 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조명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는 이 작은 조명을 탐하고 있었기에, 이 빛줄기를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과오이다. 이는 망자의 이야기로써 관철되었다.
나는 20세기의 퇴색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연기했다. 두 예술가의 조우를 노래했다.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한듯 보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착각은 금세 직시되었고, 나는 무너져내리는 이상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했다. 안토니오의 뼈와 살을 뒤집어 쓸 그러한 이야기를.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쓸어내리며 굽은 몸으로 관객을 바라보았다. 트린쿨로의 백성들은 나를 안토니오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어쭙잖은 비극을 노래했다. 반역자 곤잘로와 알레가넨의 검은 장군, 즉 뒤오의 추방을 빙자하여 추잡한 극을 연기했다. 아니, 아니다. 순서가 바뀌었다. 나는 망령된 유령을 연기하고는 곧바로 나의 극본을 선보였다. 그러고는 무채색의 두 인영을 연기했다. 나는 발악했다. 트린쿨로를 욕보였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과오이다.
울분이 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터졌다. 나는 결코 안토니오를 연기할 수 없었다. 괴로웠다. 스포르차의 유령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곤잘로였다. 아니, 곤잘로조차 되지 못한 쭉정이였다. 나는 루도비코였다. 적어도 나는 코르나리이고 싶었다. 그래서 허름한 백의를 걸쳤다. 새하얀 가면을 썼고, 독일제 오덕도를 빼 들었다. 그러고는 그를 연기했다. 다리를 절었다. 절고 절고 또 절었다. 절음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나는 칼로 두 다리를 베어버리고는 다시 걸었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조명은 여전히 나를 비췄다. 빛이 미웠다. 더 이상 그 손아귀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가면 쓴 이들은 여전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되받아치지 못했다. 잘린 다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어둠 속으로 기어갔다. 벌레처럼 기어갔다. 기는 연기조차도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나는 절규했다.
관객들은 일제히 무대를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비탄을 토하고 절규할 수록, 화려하게 치장한 조각상의 행렬은 탁한 색체를 탈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우리의 색체가 아니라고. 내가 노래하는 트린쿨로는 알레가넨이 아니라고. 알라가다가 아니라고. 막간에 걸친 코르나리와 근위병의 우스꽝스런 익살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내 얼룩을 바라보았다.
얼룩은 번지고 번져 무대를 좀먹는 벌레가 되었다. 극장을 좀먹는 버러지가 되었다. 나는 어느 마귀의 노래, 두 탈옥범을 뒤쫓는 부패한 옥리들, 그리고 나의 검고도 검은 꿈을 이야기했다. 정신없이 저질의 이야기를 토해내었다. 그것은 극장을 병들게 했다. 나를 다시 삭막하고 칙칙한 방으로 쫓아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밧줄과 갈고리가 있을 뿐이다. 가장무도회의 벌레가 관객석을 넘어 무대로 기어올라온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된다.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광기와 유희와 노란 하늘에 뜬 검은 별이 되고야 만다. 그래, 저것이 안토니오다. 저것이 곧 스포르차의 유령이자 곤잘로, 프란치스코, 루도비코, 코르나리, 근위병, 그리고 세 명의 대사였다. 밀라노. 피렌체. 알라가다.
나의 살점이 창에 후벼 파이고 갈고리에 꿰뚫렸다.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피가 아니요 다만 나의 꿈이었다. 뒤오의 꿈이었다. 나는 밧줄에 매달려, 진정 꼭두각시로 변모하고야 말았다. 별의 덩어리는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저 속삭였다. 밧줄은 나를 교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속삭였다. 밧줄은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속삭였다.
꺾인 꿈, 꺾인 날개, 꺾인 이상. 날개가 썩어버린 새는 다시 날 수 없으니, 크로노스의 낫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새에게는 두 다리가 있다. 걸어라.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라. 걷고 또 걸어라. 그리고 보라. 탁한 색체를 탈피하려 찬란해진 저들의 날개를 보라. 그리고,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인형극은 참으로 화려했다. 그 인형극의 주인공은 나였다. 나는 참된 꼭두각시였다. 격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연기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치면 또 다른 이야기로.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나를 고정하는 밧줄과 살을 파고드는 갈고리에 몸을 맡긴 채 비상했다. 반복적으로, 나는 우로보로스의 꼬리를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피는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었다. 꿈은 흐르고 흘러 별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돌아와 이 모든 이야기를 반복했다. 우로보로스는 참으로 참을성 많은 짐승이었다.
그들은 물었다. 어째서 저 강을 다시 들이키지 않느냐고. 흘린 피를 다시 삼켜보라고, 그들은 종용했다. 꿈을 다시 목구멍 너머로 흘러넘기라고. 그 같잖은 시늉과 광대놀음을 우리 모두가 고대하고 있노라고. 그들이 말하는 우리. 스포르차, 신의 모양을 한 구멍, 알레가넨의 황제가 다스리는, 트린쿨로, 알라가다, 알레가넨. 다시 말하지만 트린쿨로는 알레가넨이요 알레가넨은 알라가다이나 알라가다는 트린쿨로가 아니다. 나의 결점은 트린쿨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알레가넨을 거쳐 알라가다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마지막으로, 나는 안토니오의 대사를 읊었다.
"오, 프란치스코, 내 방탕하나 충직한 시종이여. 이라 나와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 거룩한 혼령께서 고하시니, 곧 그분이 내 아비요 억울히 살해당한 트린쿨로의 위대한 스포르차 국왕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나는 거울 앞에 섰다. 하늘은 검었고 별은 누랬다. 나는 걸었다. 어꺳죽지를 매만지며 앞으로 걸었다. 걷고 보고 걷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걸었다. 그리하면 볼 수 있을 테니까. 하늘은 누렇고 별은 검을 테니까.
그래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