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김포공항 내부 카페에 녹초가 된 채로, 둘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류원시는 제 에스프레소 컵에 고개를 박은 채 거의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고, 김철현은 무의식중에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고 있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적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미라처럼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누구든 일단 의아하게 생각할 테니 말이다.
철현은 시켜놓은 허니브레드를 밀어 놓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 허니브레드라는 음식은, 그가 생각하기에 전혀 호감이 가질 않았다. 너무나 달았고 너무나 색상이 요란했으며, 궁극적으로 생긴 건 고구마 맛탕처럼 생겼으면서 고구마 맛은 전혀 안 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음식이 ‘한식’이라니. 철현은 원시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며 말한 것을 기억했다. 아마 잠에 취해서 그랬으리라고, 그는 넘겨 짚었다.
철현은 녹차라떼를 홀짝이면서 초록색 미역 줄기에서 시선을 옮겼다. 수라꽃 궐련 생각이 간절했다. 온몸을 으깼다가 다시 펴 놓은 듯 고통이 난무하는 이 시점에 궐련 하나, 딱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갈앉을꽃 알약을 한 줌 쥐어 삼켰다. 오는 길에 계속 삼켜서 그런지 어느새 알약은 세 알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그거 그만 좀 드세요."
미역 줄기가 졸린 눈을 비비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아까 약 줄인다고 안 하셨수?"
"꽤 아파서."
"그래도 내가 아까 뼈도 맞춰주고 처치는 그럭저럭 해줬구만."
"몸도 아픈 건 맞소." 철현은 감겨 오는 눈을 애써 뜨려고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그리 사달을 냈으니… 허나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건 그런 아픔이 아닙니다…"
"뭣인데요, 그럼."
"…금연…"
철현은 겸연쩍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 라떼를 홀짝였다. 원시는 그렇게 행동하는 그가 퍽 우스웠는지 허니브레드 한 쪽을 갉아먹으며 연신 피식 댔다. 철현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금단 현상이 그를 갉아대고 있는 사실 하나는 자명했다.
비록 원시 앞이라 내색할 수는 없었으나, 아까부터 계속 궐련 생각이 나면서 내장 한 구석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철현은 그 현상이 바로 금단 현상의 전초 증상임을 익히 알았다. 이후로는 차례로 신경과민과 수전증, 피해망상, 공황, 환각 등에 시달릴 것이었다. 불 보듯 뻔했다.
이 일련의 금단 부작용은 일전에 한 번, 더는 약에 의존치 않겠다 다짐한 적이 있을 때 경험한 일이었다. 장장 두 달간의 약 끊기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곡절도 많았고 고난도 많았지만 결국 풍족한 결과를 얻었다. 그 풍족한 결과란 다음과 같다. 손님 한 사람, 얻어맞음. 손님 중 몇 사람, 그를 혐오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조롱함. 직원 대부분, 예의 주시.
염치 불구한 장기 투숙객으로써는 퍽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여기서 조금 나아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전담하다시피 한 동자, 영태의 변론 덕이었다. 철현은 눈을 감고 지금도 서천에서 일을 하고 있을 영태를 떠올렸다.
바삐 투숙객들의 안내를 돕고 있겠지… 어쩌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손님들의 짐을 옮기고 있을 수도 있고…
그가 영태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나타나는 모습들은 항상 이러했다. 아이는 언제나 바삐 일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세월 언제나.
언제나…
그는 또다시 밀려오는 죄책감에 이를 악물었다.
"안 먹어요?"
"…괜찮소."
"이 맛있는 걸." 원시는 우물거리며 툴툴댔다. "먹어둬야 상처도 빨리 낫지 않겠수."
철현은 대답하지 않고 녹차를 홀짝였다.
"그런데 나 궁금한 거."
"무엇이오."
"아까 두술… 쓴 게 맞죠?"
철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분명히 기남 씨한테 했을 때는, 그런 반응은 안 나왔잖습니까? 왜… 지금은 그런 거에요? 설마… 마약 끊었어요?"
"수라꽃 궐련을 말하는 거라면, 1년 동안 꽤 줄이긴 하였소. 하루에 스무 개비를 폈다면, 요즈음엔 열다섯 개비를 피우는 식으로… 그리고 한 가지 말해주자면 이는 마약이 아니라 진정—"
"그게 마약이지 어디서 넘어가려 그럽니까?"
철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원시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에도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그 골목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되감기
시장가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이 어느덧 푸른색으로 바뀔 기미를 보이는 그 시각에, 시장에는 총 네 사람이 서 있었으며 그 중 셋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경해 하고 있었다.
"니, 니 개수작 부리지 말라!"
꽁지머리가 반쯤 겁먹은 목소리로 칼을 빼 들고 슬금슬금 철현에게로 접근해 왔다. 철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수 없었다. 진언은 이제 저 스스로 생명력을 갖춰,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승천하듯 그의 입에서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손 끝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일순간 공기가 일그러졌다. 철현은 그 느낌이 스스로 꿈틀대는 모양대로 놔두지 않고, 춤추듯 어루어 만졌다. 그리고는 원시에게 눈짓했다.
오른쪽으로.
원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다시 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약한 열기가 손 전체를 휘감았다. 그는 흘끗 앞을 보고, 곧바로 원하는 곳으로 쏘아 보냈다. 열기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이는 꽁지머리와 까까머리의 구강에 처박혔다.
윽,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꽁지머리와 까까머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곧장 기침을 연거푸 해대기 시작했다. 약한 기침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동시에 원시가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고, 철현의 손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다친 어깨 때문에 몸을 기울여야 했다. 그는 숨을 내쉬고, 그 상태로 숨을 참았다. 마침내 원시가 몸을 빼어 바닥으로 몸을 날렸을 때, 철현의 총이 불을 뿜었다. 곧장 까까머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 이 미친 새끼!"
꽁지머리가 경악하며 외쳤다. 철현은 그에게 총을 겨눴다.
"쏘지 마요!"
원시의 목소리였다. 철현은 흠칫 놀라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빠르게 꽁지머리에게로 돌진해 바닥에 업어치는 원시를 보고 입을 벌렸다.
"총소리는 한 번이면 충분하니, 이제 갑시다."
철현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까까머리와 꽁지머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까까머리는 어깨에 총을 맞아 신음하고 있었고, 꽁지머리는 등으로 착지한 덕인지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철현은 꽁지머리의 오금을 쐈다.
"아니, 그냥 가재도!"
원시가 황급히 철현의 팔을 붙잡았다.
"아,아…"
상처가 난 곳이었다. 원시는 화들짝 놀라 손을 풀었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았다. 철현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메치기 한 번으로 저자는 쓰러지지 않을 테요. 계속 쫓기기보다야 아예 여기서 걷어내는 게 낫소."
꽁지머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원시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철현을 노려보았다. 철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같이 가요!"
신음하는 조직원들을 뒤로하고 둘은 시장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현재
"그래서 거긴 왜 갔던 겁니까?"
원시가 졸린 목소리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당신이 조왕신과 성주신을 만나러 간다니 못내 따라오긴 왔지만…"
"못내가 아니라 아주 잽싸게 따라오던데."
철현이 무미건조하게 지적했다. 원시는 눈썹을 까닥여 보이며 대꾸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여튼 그래서, 대체 왜 간 겁니까?"
"나도 똑같았소. 조왕신과 성주신을 만나러."
"그 클럽에 두 가택신이 있을 것 같진 않던데요."
"맞는 말이오."
원시가 감긴 눈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으르렁거렸다.
"수수께끼 놀이는 집어치우쇼."
"뭐, 좋소." 철현은 제 녹차를 들이켰다. "가는 길이었소. 단지… 사람을 잘못 봐서 다른 길로 들었을 뿐."
"누굴 보았는데 그래요?"
철현은 주저하며 다시 한 모금 홀짝였다. 녹차 맛은 서천보다 좋지 않았다. 사실, 서천보다 좋으면 이상한 일이긴 했다.
"…호반손님."
원시의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호반손님? 아슐링? 그 사람이요?"
"기억하는구료." 철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대꾸했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나 기억력 좋습니다. 그때에서 1년도 안 지났거든요. 세상에, 호반손님이라니…"
"잘못 본 게요." 철현이 딱 잘라 말했다. "닮은 구석이 있었으나 결국은 다른 자였소."
"김 샜네."
철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친 데는 괜찮아요?"
"괜찮소."
괜찮지 않았다. 철현은 아직도 숨 쉴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야 물론 회복력이 빠르긴 했지만, 결코 그게 '울버린' 같은 힐링 팩터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울버린은 어떻게 된 걸까. 철현은 녹차를 흔들면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녹색 괴물을 뒤쫓는 것까지는 봤었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원시의 물음에 철현은 퍼뜩 기억에서 벗어났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에 찔린 상처는 피부만 상해를 입었지 근육은 다치지 않았소. 어깨는… 아까 처치를 해준 덕에 누가 잡지만 않아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군."
"갈비뼈도 부러졌잖아요."
원시가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철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가 물었다.
"어찌 안 겁니까?"
"아까부터 계속 숨 쉴 때마다 아파하는 것 같던데. 그리고 내가 그것도 처치 안 해줬을까 봐요? 비몽사몽 하더라니, 진짜 기억을 못 하시는구만."
원시는 끄응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철현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원시를 바라보았다. 철현의 코트는 피에 젖어 까매져 있었다. 원시는 택도 없는 의심하지 말라는 듯이 혀를 차 보이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게 무엇이오?"
"아, 이거 구하기 어려운 건데…"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초리로 물체를 바라보며, 원시는 큰 결정을 내린 사람의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동포끼리만 거래하는 귀중한 건데… 이게 주사하면 그 부위 근방의 뼈를 다시 이어주는 일종의 치료제에요. 뼈의 절단면을 철로 잇고—"
"…예?"
"철로 잇는다고요."
철현은 멍한 표정으로 원시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리 보지 마쇼. 마음 같아선 그놈의 잘난 육공예인지 뭔지나 쓰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도와주는 거 아녜요."
철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는 중국어로 툴툴대며 물체의 포장을 뜯어냈다. 알고 보니, 물체는 피하 주사기였다. 섬뜩한 푸른빛이 감도는 액체가 그 안에서 출렁거렸다.
"벗어요."
철현은 목에서 우둑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원시를 올려다보았다. 경악이 서린 눈동자가 떨렸다.
"벗…으라고?"
"네엡."
"여기서?"
"그럼 어디서?" 원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철현은 대답 대신 더 커진 눈으로 원시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장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시의 손이 우악스럽게 코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만 튕기고 좀 벗으쇼!"
"어, 어찌 이러시오!"
"주사를 그러면 옷 입고 합니까, 예?! 더군다나 이건 파는 양반이 환부에 직접 하라 했다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밖에서!"
"밖이고 자시고 살건 살아야지! 이 꼰대야!"
원시의 뒷말은 중국어였다. 철현은 꼰대가 뭔지 묻고 싶었지만, 아예 홀랑 벗겨들 것처럼 덤비는 원시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집중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원시는 학자치고는 정말, 정말 센 편이었다.
"뭐여?"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시와 철현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걸레를 든 청소부 하나가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둘은, 자세가 오해를 살 만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원시의 무릎이 철현의 다리 위에 올라와 있었고, 코트를 벗기느라 팔로 목을 감싸는 형세가 되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철현의 코트가 반쯤 벗겨져 있다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원시가 이를 벗기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청소부가 혀를 끌끌 찼다.
"거 아침부터…"
그리고는 멀리 지나가 버렸다. 원시와 철현은 멍하니 청소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철현은 눈을 감으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사투를 벌이던 아까까지는 정말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지금은 그저 울고 싶을 따름이었다.
"해서 내가 여기서 그러지 말라 하지 않았소…"
원시는 다리를 내리더니, 겸연쩍게 입가를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수다. 내가 제안 하나 하죠."
"또 뭘…"
"다 벗는 건 그래요, 내가 좀 심했다는 걸 인정할게요."
원시는 탁자에서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집어삼키며 말을 이었다.
"와이셔츠까지로 하죠. 얇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
"아니—"
"아 비행기 못 타고 싶어?!"
철현은 지친 얼굴로 일어나 코트를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피로 얼룩진 코트는 왼쪽 어깨 부분이 뚫려 있었다. 총알을 맞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식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내 검은 재킷을 벗고, 역시 검은 넥타이를 끌렀다. 마침내 피로 물든 흰 와이셔츠와 받쳐 입은 검은 티셔츠만 남았다.
"세탁 좀 해야겠군요."
원시가 사무적인 투로 입을 열고는 철현을 앉혔다. 그리고는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와이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철현이 식겁해서 원시의 손을 잡았다.
"와이셔츠만 둔다고 하지 않았소!"
"이거 왜 이러시나. 안에 티셔츠 입는지는 몰랐으니 그렇게 말했죠. 벗어요. 한 꺼풀만 내비둡시다."
철현이 입을 열자 원시가 엄한 눈길로 손가락을 하나 펴, 입에다 가져다 댔다. 그는 한숨을 내뱉고 단추를 풀었다. 다 풀리자, 이윽고 원시가 와이셔츠 자락을 한쪽으로 치우고 철현의 왼쪽 흉부 부위가 드러나게 했다.
"잠시만요."
그리고 원시는 뼈를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누를 때마다 심각한 고통이 잇따랐지만 원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골절 부위에 다다르자, 원시는 주사기를 꼽았다. 그리고는 주입했다.
그리고 고통이 다시금 잇따랐다. 약효는 너무나도 빨랐다. 견딜 수 없는 생장의 아픔이 전신을 지배했다. 철현은 탁자를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게 자신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고통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철현은 그제야 녹차를 한 모금 마실 수 있었다. 눈앞에서 원시는 생글거리며 비행기 출발 직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철현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쏘아붙였다.
"대체 사학자라는 작자가 이러한 것은 어찌 들고 다니는 겁니까?"
"긴 이야기죠." 원시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살아있는 사료들, 그러니까 내 말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료들과 늘 꽁해 있는 역사의 산 증인들을 만나다 보면 다치거나 죽을 일이 꽤 많거든요. 그런 걸 대비하는 용도랄까나…"
"허면 그… 경찰 뱃지나 여권도 그렇소?"
"단지 아주 조그마한 술수가 부려져 있긴 하지만, 여권은 내꺼 맞거든요."
"뱃지는 아니란 이야기군."
"잘 아시네."
런던으로 향하는 A380 여객기 탑승이 시작되었다는 정보가 전광판에 떴다. 원시는 철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드디어 신들을 만나볼 때가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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