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올랐다. 이번엔 어깨가.
의학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철현으로써도 이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왼쪽 어깨를 못 쓸 수도 있으리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등을 뜨듯이 적시는 액체의 감촉이 느껴졌다. 코트가 분명 젖을 것이었다.
김철현은 몰려드는 잠을 애써 쫓아내고 벽면으로 등을 밀었다. 홀로 일어서기엔 몸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를 넘는 사건들이 오늘 하루에만 계속 몰아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고급진 양복을 입은 사내가 구두 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 진짜. 당신 정체가 뭐야?"
양복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철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을 느꼈다. 입가 가장자리에 베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미소였다. 양복 사내는 복심에 아주 날카로운 칼, 아니, 적어도 돌격소총 정도는 품고 있는 듯했다. 좋지 않았다. 특히 그가 정말로 총을 가지고 있을 때는, 정말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철현은 기침을 하며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다잡았다. 양복은 관자놀이를 권총의 총열로 긁고 있었다. 권총의 종류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항은, 저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방금 자신의 어깨를 꿰뚫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왼쪽 어깨를 감싸고 신음했다. 뼈가 어긋난 상황이 최악일 줄 알았건만, 아예 박살이 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철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양복을 노려봤다. 양복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니, 당신 생각 좀 해 봐. 어떤 모지리 새끼가 여길 들어와서 방금 내 수족들을 갈아버렸다구. 상식적으로 이해가 돼, 안 돼? 응?"
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안에서 피 맛이 더 진해졌다.
"어디서 보냈어?"
"게 무슨 말이오."
"당신 어디 파냐고, 이 새끼야."
양복은 그렇게 물으며 철현의 가슴을 걷어찼다. 철현은 기침을 터트리며 방금 이 더러운 하루의 업적 중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갈비뼈 부러뜨리기.
"아 어디 파냐고! 살덩이파? 환쟁이파? 어딘데?!"
철현은 흐릿한 눈빛으로 양복을 올려다보았다가, 간신히 입을 달싹여 말했다.
"…서천…"
"서천?" 양복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되물었다. "그건 또 어디야?"
그 정도면 충분했다.
철현은 오른손을 까닥여 수인(手印)을 만들어 보였다. 즉시, 엎어진 민머리의 몸뚱아리에서 살로 이루어진 부분이 녹아내리고, 다시금 재조립되었다. 아주 긴, 송곳 같은 모양으로.
그 끝은 양복의 목을 향해 있었다.
퍽, 하는 짧은 파열음이 나면서 양복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철현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긴 살덩어리 송곳이 양복의 목을 뚫었다. 양복의 발은 지표면에서 0.5cm가량 들려서 떠 있었다. 고급 양복은 가쁜 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하려 애썼지만, 오직 입에서 비어져 나오는 건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곧장 양복의 고개가 축 처졌다.
철현은 벽면을 짚고 일어났다. 식탁은 저 멀리에 아직도 건재했고, 식사를 즐기려던 존재들만 자기 식사와 비슷해져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양복이 방금 떨어뜨린 권총을 주웠다. 양복은 뜬 눈으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철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슬슬 뒷걸음질쳤다. 이제 이곳은 진절머리가 나는 수준이었다. 제발 빨리 서천으로 돌아나 갔으면.
그리고 일순간 양복이 다시 숨을 내뱉었다.
철현은 캐리어를 줍다 말고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인 움직임에 다친 뼈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양복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철현은 양복 사내의 목 주위를 등뼈에서부터 연결된 듯한 실리콘 관이 에워싸는 광경을 멍하니 목격했다. 남자의 몸에서 나온 기계들은 자가수복을 시행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제 주인을 기존보다 더 기이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양복은 이전보다 더 깊게, 그리고 더 높게 미소 지었다.
철현은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더듬어 문 손잡이를 찾았다. 양복이 지상에 착지하고는 그를 향해 폭소하며 걸어왔다.
"어딜 가려고 그래, 이 새끼야!"
철현은 대답 대신 사격했다. 첫발은 양복 사내의 어깨에 맞고 으깨져 떨어졌고, 두 번째는 목 주위의 실리콘 관을 뚫고 지나갔다. 양복은 조소하며 팔에서 칼을 빼고, 던졌다. 칼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철현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왼팔이 바닥에 부딪히며 지옥의 영혼들이 지를 법한 비명을 질렀다. 칼은 철현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부딪혀 떨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벽면에 커다란 흠집이 난 것을 발견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철현은 이를 악물며 바닥에 떨군 권총을 다시 집어들었다.
"빨리 안 나와?!"
몸뚱아리에서 길게 뻗어 나온 금속 기계 다리가 바닥에 흩어진 살점들을 찍으며 기지개를 켰다. 철현은 한구석에 넘어진 탁자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양복을 노려보았다. 양복은 어느새 기계 곤충과 고릴라 사이의 어느 중간 수준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철현은 숨 쉴 때마다 불꽃이 폐를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다시 양복을 겨냥하고, 발사했다. 총알이 날아가며 양복의 귀를 맞추었다. 그러나 별반 타격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양복이 대수롭지 않게 남은 귀를 뜯어버리고는 외쳤다.
"그 장난감으로 안 돼 이 새끼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번째 총알이 허공을 갈랐다. 총알은 아주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비웃음이 어린 양복의 얼굴, 그중에서도 이마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다. 양복은 얼떨떨한 얼굴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에러 현상으로 전혀 해석할 수 없는 언어가 튀어나왔다. 철현은 제자리에 붙박여 서서 경련하는 양복을 흘낏 보고는, 밖으로 걸어나왔다.
여전히 제자리에서 춤추며 여가를 보내거나 술과 금지된 약물에 손을 대며 인생을 낭비하는 두 종류의 청춘을 다시 목격하자 철현은 어떤 안도감마저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겪었던 일들과 비교해 보면 이제 이러한 광경들은 죄다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혈술이 성공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30년간 두술은커녕 아주 기초적인 혈술도 연습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천운이 따른 일이었다. 그는 더러워진 캐리어를 끌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시간을 정확히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자정은 넘어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을 너무나 허비한 것이다.
그때였다.
"야, 저 새끼 잡아!"
철현은 아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걸어 나온 곳에서 어느새 또 회복한 고급 양복이 흐트러진 머리를 넘기면서 난간에 기대어 소리치고 있던 것이었다. 흡사 강시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좀비.
그러나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은 춤을 추던 사람 중에 즉시 철현을 향해 돌아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철현은 무표정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주머니 사이로 버터플라이 나이프 등의 흉악한 연장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철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포테리 클럽 바깥.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 되자 밖은 더 추워졌다. 편의점 알바생은 교대 시간이 다 되었을 때즈음에 다시 찾아온 이 초록 머리 여자를 의뭉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대체 이 여자는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류원시는 그런 눈길에 개의치 않고 아까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초조한 마음이 앞섰다. 그는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포테리 클럽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아직 나오는 사람이라곤 벌써 취한 부류나 내일 아침을 대비하는 부류 말고는 없었다.
김철현은 아직 안에 있었다.
원시는 헛개수를 들이키며 아까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았다. 그와 두 여자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서 조직의 일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말 그대로 클럽 바깥으로 집어던진 일이 기억났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류원시 탐구 인생 수년 만에 맛본 고배였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역신의 생존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원시는 눈앞에서 목격한 김철현의 피습 상황을 계속 떠올렸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심장이나 머리에 맞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역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볼 수 있으리라. 원시는 수심에 잠겨 마지막 남은 헛개수를 비우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졌다.
입구에 맞고 튕겨 나갔다.
"제길…"
원시는 짜증을 내며 허리를 숙여 병을 주워 쓰레기통에 다시 넣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역신이, 김철현이 캐리어를 들고 클럽 입구에서 달려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 드디어."
원시는 재빨리 그에게 손을 흔들려고 했다. 이제야 나오다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들을 이야기가 많을 터였다. 원시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한 손은 계속 들고 있다가…
그러다가 역신의 뒤를 쫓는 다섯 명가량의 조직원들을 목격하고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원시는 입맛을 다셨다.
"대체 저 작자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거리와 사람과 가게가 순식간에 한 덩어리가 되어 스쳐 지나갔다. 철현은 미친 듯이 다리를 놀렸다. 팔과 다리의 찔린 상처가 무지막지하게 따가웠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따돌리고 보는 것이 급선무다.
클럽 내에서 상관의 명령을 듣고 철현에게 덤빈 조직원들은 전부 일곱. 그 중 둘은 그가 간신히 떼어버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다섯이 문제였다.
철현은 모퉁이를 돌며 캐리어를 내던졌고, 가슴에 이를 얻어맞은 조직원이 뒤로 자빠지면서 다른 조직원 하나를 넘어뜨리자 내심 안도하며 시장가로 들어섰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뒤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등 뒤에서 판자가 날아왔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철현은 목을 움츠렸다가 옆으로 피해 달렸다. 새벽 달빛이 주인 없는 가게 가판에 으깨졌고 바람은 아플 정도로 거셌다. 그는 길가를 가로막고 있는 광고판을 넘어뜨리고 지나갔다.
어느새 시장 골목 끄트머리에 도달해 있었다. 철현은 입구에 있는 국밥집 조리대 옆으로 슬라이딩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아까 넘어뜨린 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세 명은 기겁할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삼켰다. 클럽에서 총을 맞은 이후로 약발은 싹 달아나고만 상태였다.
철현은 몸을 일으켰다. 국밥집 외벽에는 돼지 머리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곧장 가장 먼저 달려오는 조직원의 얼굴에 내던졌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놈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이 새끼가!"
뒤따라오던 조직원 하나가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철현은 잽싸게 움직이려고 했지만, 다리가 뒤엉키면서 뒤로 넘어졌다. 몸은 더는 그의 명령을 들을 마음이 없는 듯싶었다. 사실 지금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능력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멍하니 나이프가 그에게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멈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휘두르려던 조직원과 그 뒤를 따르던 조직원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철현은 멍한 눈길로 그 뒤에서 어딘가 익숙한 초록색 머리가 나풀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 머리칼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정말 익숙한 어떤 이목구비가 보였다. 그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경찰이다!"
류원시가, 크롭티 위에 재킷을 걸치고 비니를 한 손에 말아쥔 원시가 다른 손으로 무언가를 치켜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조직원이 움직이자 철현은 애써 초점을 맞추었다. 원시가 들고 있는 것은, 믿기 어려웠지만 경찰 뱃지였다. 철현은 몸을 애써 일으키면서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분명히 영롱하게 빛나는 경찰 뱃지였다.
"무슨…"
철현이 조리대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지금 원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분명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경찰 뱃지는 새 하루를 시작하기에 충분히 이상한 일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조직원들은 경찰에 대해 전혀 예의를 갖출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뭐야, 이 년은!"
두 개의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툭 튀어나왔다. 사내들은 당황하지도 않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이 으르렁댔다. 달빛이 나이프에 번들거려 위협적으로 빛났다. 원시가 자못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니들 다, 다 잡혀가고 싶냐?!"
"지랄 마! 이 미친년이 클럽에서 술 처먹다 돌았나!"
원시는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듯했다. 철현은 그가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철현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움켜쥐었다. 팔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몸이 축 젖은 세탁물처럼 늘어졌다.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지쳐 죽을 것만 같았다.
"나 경찰이라고오!"
"옘병, 이짝 경찰들 면상 다 확인해 놨는데 어데서 구라질이야!"
조직원 중 까까머리 사내가 동료에게 눈짓하며 나아갔다. 동료는 철현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막는 임무를 받은 듯했다. 동료가 철현을 주시하며 뒤로 슬금슬금 올 때, 까까머리는 칼을 크게 휘두르며 원시에게로 접근해 갔다. 철현은 원시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 가게에서 무언가를 주워드는 모습을 보았다.
말린 북어였다.
"이 년이 진짜 돌은 건가…"
그리고는 까까머리가 달려들었다. 철현의 시야에서, 까까머리의 등판이 일순간 움찔했다. 날리던 칼이 북어에 꽂혀 빠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철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뒤에서 보고 있던 꽁지머리 조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나이프로 위협했다.
"너 이 새끼, 도망갔다가는 죽을 줄 알라!"
철현은 대답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꽁지머리는 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나이프를 꼬나 들었다. 철현은 그를 상관하지 않고 목을 빼서 원시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원시는 한 가판대에 몸이 밀어붙여진 상태였다. 까까머리가 욕설을 간간이 퍼부으며 북어에서 칼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원시가 까까머리의 고간을 걷어차자, 사내는 얼빠진 얼굴로 뒷걸음질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개년이! 뼈를 부숴버릴라!"
철현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아무리 원시가 강하다 한들 상대는 폭력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였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그는 운동하는 이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사학자가 아닌가. 철현은 그 생각에 더딘 발걸음을 애써 재촉했다.
"뒤지고 싶니?!"
목에 칼이 들어왔다.
철현은 눈앞에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겨누고 인상을 쓰고 있는 꽁지머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희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라. 바로 목에 구멍 나게 해줄 테니."
어느새 원시 쪽의 상황도 정리되어 있었다. 까까머리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원시의 머리채를 잡고 그들 쪽으로 끌고 왔다.
"이 년, 니가 시켜서 왔지, 응?" 까까머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원시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 년 뒤지는 꼴 보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야 할 거다."
철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원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꽤 많이 다툰 것 같았는데,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되려 투지로 가득 찬 얼굴을 내보이는 모습은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철현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잠시 비틀거렸다. 조직원들은 이제 목표를 잡았다는 승리감에 도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씨, 운 더럽게 없네." 원시가 웅얼거렸다. "그냥 가세요. 내가 알아서 해 볼 터이니."
시간을 생각하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원시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바람이 차갑게 감돌았다. 시간이 몇 시인지 알고 싶었지만 차마 시계를 볼 수는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렇게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일 뿐이었다.
두 손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다.
이미 혈술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철현 자신의 지친 몸뚱아리도, 다른 사람의 몸뚱아리도 사용하기 힘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혈술이 가당치 않았다.
다른 종류의 술법이 필요하다.
철현은 옛날을 떠올렸다. 처음 불타오르던 때를 기억했다. 수백 년을 떠돌아다니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때를 기억했다. 드넓은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지르던 때를 기억했다. 아비규환의 고향을 기억했다. 오랜 적을 기억했다.
나스챠 코렐이 열차 너머로 사라지던 때를 기억했다.
철현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 바닥은 땅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는 합장했다. 손바닥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원시와 조직원들 쪽에서 놀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철현은 합장을 푼 뒤, 수인을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어제도 한 것마냥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윽고 그는 뇌까리기 시작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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