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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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육체들이 어둠과 빛 사이에서 몸을 흔들어 댔다. 심장을 울리는 거대한 박자와 귓전을 때리는 음률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꼭 고대의 의식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태고의 족속들이 신에게 바치는, 기괴하고 음탕한 제전(祭奠).

김철현은 사방에서 춤을 춰대고 있는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죽음 같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건… 물론 그도 예전에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자기 몸에 술을 뿌리고 있는 사람들과 곳곳에 서로의 몸을 밀착하고 있는 남녀를 목격하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분노보다는 황당함에, 황당함보다는 충격에 가까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철현은 한숨을 내쉬고 흐느적대는 청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버스에서부터 추격해 온 남자는 불과 몇 미터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적이 불현듯 떠올랐다. 버스에서 내린 뒤 이곳, ‘포테리 클럽’이라고 하는 지하공간으로 오기까지 상당히 많은 거리와 가게를 지나왔다. 한적한 골목길에서 사람이 많은 번화가, 공장 지대, 주택가에서 다시 번화가, 그리고 마침내 여기.

생각보다 오랜 걸음이었다. 팔이 지치고 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그가 익히 아는 자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걸음걸이, 동작, 고개를 돌리는 방식은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사람, 이제는 먼 옛날이 된 것처럼 느껴지던 시절에 동행하던 이. 선생이자 삼촌이었고 아버지였던 이.

남자는 호반손님, 아슐링이었다.

철현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호반손님과 철현은 각별한 사이였다. 임진년의 싸움 이후로 둘은 늘 거동을 함께했으며 오랜 친구처럼, 또 부자지간처럼 서로 돌보며 살아갔다. 철종 시기 이후로 비록 헤어져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으나, 언젠가는 만나리란 원(愿)은 그가 지금까지도 품고 있는 신념과도 같았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남자는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나가 구석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철현은 그를 쫓았다. 캐리어에 정강이가 채인 사람들이 웅얼거리며 짜증을 냈다. 철현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계속 걸었다. 헤쳐 나간 사람들 가운데, 한 초록 머리 여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른 채.

구석에서는 어둠과 술병과 금지된 약물과 정사가 횡행했다. 어둠은 나머지를 둘러싸는 일종의 장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철현은 한 쌍의 민달팽이처럼 서로에게 들러붙어서 신음을 내뱉는 덩어리들에 눈을 찌푸리며 남자가 걸어가는 목적지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쿵쿵거리며 사방을 비추는 불빛은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닫지 않았다. 그로서는 단지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따라잡기엔 꽤 먼 위치에 있었다.

어둠을 한창 걸어가자 계단이 하나 나왔다. 그 위로 올라가면 2층 구역에 줄줄이 늘어선 문들이 있었다. 각각의 문 안쪽에서는 의뭉스러운 소리들이 가득 배어 나오고 있었다. 불길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남자는 벌써 한쪽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철현은 계단 위에서 남자의 행로를 눈여겨보고 바로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윽고 남자가 들어간 문을 찾아, 열었다.

문 안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같은 곳, 1층.

류원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본 장면이 언젠가 보았던 다다이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초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서천에 있어야 할 김철현이 방금 그 옆을 지나갔다.

"돌겠구만."

원시는 손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혀를 차고는 여태까지 자신에게 추근덕대고 있던 한 껄렁하고 머저리 같은 남자에게로 돌아섰다. 머저리는 클럽에 불순한 목적으로 온 남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눈빛을 하고 원시를 느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시는 재빠르게 머저리의 목을 내리쳐 기절시킨 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몸을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원시는 머저리의 재킷을 걸치고 비니를 눌러 쓴 채로 밝은 곳으로 나왔다. 어쩌면 굳이 다른 등신들과 함께 춤이나 추고 있지 않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원시는 철현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필경 역신이 도움되리라.


다시 2층.

철현을 포함한 방 안의 모든 사람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철현은 굳은 표정으로 자기 시야 앞에 놓인 광경을 천천히 인식했다.

방 안에는 그를 제외한 총 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다. 둘이 여자고 여섯이 남자였다. 다섯 명의 남자 중 넷은 츄리닝이나 껄렁한 느낌의 셔츠, 금목걸이, 문신으로 중무장을 했고, 남은 하나는 정말 보기만 해도 값나가 보이는 명품 양복을 입고 있었다. 명품 양복을 입은 남자 옆에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화장이 요란하고 거의 헐벗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 다섯의 남자에게서는 진한 폭력의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근육을 어떻게 단련한 건지, 보통의 수십 배는 더 큰 덩치들에 이따금 목 주위에 뿜어나오는 증기, 그리고 신체 곳곳에 드러난 기계 부품들은 날카롭다 못해 무겁게 위협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앞에 놓인 식탁 위에는 인간의 신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음식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현은 플라스틱 용기 안에 담긴 인간의 머리를 목격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근 때나 목격했던 짓거리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남은 한 사람이 철현이 여태까지 뒤쫓아 왔던 남자였다. 그가 호반손님이라면, 이 작자들이 여기서 무얼 하든 간에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어쭙잖은 정의감을 가장할 의욕은 이미 몇십 년 전에 동나고 말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철현을 바라보았다. 철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호반손님이 아니었다.

남자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인상에 전형적인 중년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선 호반손님과 닮은 구석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궁극적으로 남자의 인상은 그 어떠한 본능적 두려움도 주질 못했다. 철현은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얼굴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뚫어져라 본다고 해도 남자가 아슐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닌데도.

침묵 끝에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제일 상석에 앉은 고급 양복에게 고개를 까닥하며 입을 열었다.

"구락부 분들께는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석류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철현에게 눈길을 던지고 그를 지나쳐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덜컹 닫혔다. 이제는 철현 혼자만 덜렁 서 있는 셈이었다. 다섯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철현은 헛기침을 하며 손잡이를 잡았다.

"…좋은 식사 되시오."

식칼이 날아와 문에 꽂혔다. 그 서슬 퍼런 날 바로 1cm 옆에, 철현의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전조등 앞의 사슴처럼 굳어버린 목을 애써 돌려 다시 식탁을 향했다. 남자 중 제일 말석에 앉은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누구신데, 거, 허락도 없이 들어 오고 나가려 그래."

철현은 몸을 완전히 돌려 그자를 마주 보았다.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개조된 정도가 협소했다. 드러난 팔과 다리는 금속질로 빛났고, 그 위에 페인트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용인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낄낄거리며 중국어로 말을 이었다.

"보니까 그냥 쌩 샌님이네. 캐리어도 들고 가진 건 많아 뵈는데… 형님, 아니, 부장님. 어디서 온다는 말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보니까 꾼 따라온 작자야. 꾼은 근데 우리한테 일언반구도 안 했다고."

고급 양복이 대꾸했다. 양복은 벌써 누군가의 살점을 퍼먹고 있었다.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캐리어를 움켜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양복이 쩝쩝 소리를 냈다. "조지고 석류구락부 운송 화물에 하나 추가해."

말석이 킬킬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팔뚝에서 칼을 한 자루 뽑아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며 히죽댔다. 철현은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다가, 문짝에서 박힌 식칼의 자루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테이블 쪽에서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흡, 야, 막내야! 너이 조심 좀 해야겠다! 저 새끼 싸울라나 보다야."

이에 동조하듯 말석도 더 크게 히죽대었다. 그리고는 철현에게로 달려들었다. 철현은 등 뒤에서 그자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철현은 문짝에서 칼을 뽑아 달려드는 말석의 눈깔에 쑤셔 박고 물러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석의 성한 눈이 철현을 맹렬히 노려보았다가 뒤로 슬그머니 넘어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철현은 다시 주먹을 날렸다. 뼈와 뼈가 맞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말석은 턱이 돌아간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철현은 고개를 들어 당혹과 분노로 얼룩진 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평정심을 잃지 않은 자는 고급 양복으로, 아직도 제 식사를 꿋꿋이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철현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도 중국 말은 할 줄 아오. 내 앞에서 대놓고 아주, 담이 크구료."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내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는데. 어서 보내주지 않겠소?"

"뭐… 이 씹새끼가!"

말석의 옆, 상석의 왼편에 앉아 있었던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는 웃통을 까고 있었고 복부를 제외한 흉부와 두 팔, 목을 기계로 대체한 모습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두 남자 역시 일어섰다. 상석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머리를 민 모습으로, 껄렁한 셔츠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온갖 기계들이 슬그머니 보였다. 민머리의 왼편에는 뚱뚱한 덩치가 서 있었다. 덩치의 윗머리 반절은 사라져 있었고, 뇌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푸른색으로 번쩍이는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빨리 처리해. 밥 먹어야지." 상석의 남자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있잖습니까, 거기 오신 분. 난 말이에요… 식사 시간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해."

"해서, 내가 좋은 식사 되라 하지 않았소."

철현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복의 얼굴에 순간 웃는 빛이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양복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방해하셨는데요, 뭘. 너는…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여길 들어 왔잖아요. 그것부터 방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양복은 유쾌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왈가왈부하지 말고, 잘 죽어요."

양복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다고, 철현은 생각했다. 이내 상석의 남자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빨리 없애. 식겠다."

곧장 웃통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덩치와 민머리도 자리를 돌아 나왔지만, 그들이 없어도 웃통 혼자 철현을 해치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 분명했다. 철현은 가만히 웃통을 노려보다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웃통이 쇠를 긁어대는 소리로 낄낄대며 이죽댔다.

"그걸로 무어를 하시려고요, 이 존만아."

"말이 거칠군."

"아, 이 역꼰대 새끼가—"

웃통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코에 스마트폰의 모서리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우두둑하는 소리가 나며 코가 부러졌다. 웃통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다음 동작으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철현은 날렵하게 그가 내지른 왼팔을 붙들고 옆구리를 가격한 다음, 다시 얼굴을 때렸다. 스마트폰 액정에 피가 튀었다.

"저, 저 씨발 놈이!"

소리를 지르며 덩치와 민머리가 달려들었다. 철현은 웃통을 깐 남자를 바닥에 떨구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약효가 도는 느낌이 나면서 시간이 점차로 느려졌다.


층계.

2층으로 올라가는 경로는 험난했다. 원시는 눈먼 생쥐처럼 비틀거리며 거리를 더듬었고, 한참 만에야 역신이 행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층계는 어둡고 컴컴했으며 부적절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남자가 그 위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원시는 그를 위해 몸을 좀 비켰다가, 문득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남자가 의아한 눈치로 원시를 바라보았다.

"방금 여기 어떤 이가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어떤…?"

"캐리어를 들고 코트를 입은, 어딘가 빈곤해 보이는 남자 말요."

남자는 어딘가 깨달은 눈치로 대꾸했다.

"아는 사람이에요?"

"지나갔다는 게요?"

"뭐… 그렇죠. 방금 위층에서 마주치고 왔는데."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덧붙였다. "아가씨, 그 사람 따라가지 마요."

"어째서요."

"그 사람 죽을 거니까."


무지막지하게 큰 팔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생채기가 나면서 피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생생히 전해졌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몸을 뒤로 뺐다. 민머리는 끔찍할 정도로 날카로운 것들이 튀어나온 팔을 휘두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니 이리 아니 오니!"

민머리가 게거품을 물었다. 그는 팔 이곳저곳을 누르더니 곧장 갈고리와 기계 관절로 범벅된 흉기로 변모시켰다. 곳곳에서 증기가 튀어나왔다. 마치 잘 만들어진 전쟁 병기 같은 느낌이었다. 철현은 어깨로 날아드는 흉기를 피해 왼쪽으로 돌았다.

"쥐새끼 같은 놈!"

그리고 그곳에서 손도끼를 들고 덤비는 덩치와 마주쳤다. 덩치의 손도끼가 일순간 철현의 왼 어깨를 찍고 지나갔다. 그가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곧장 파고들어 절단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다행히 표피만 갈라졌을 뿐 근육은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철현은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거리를 가늠했다. 두 사내는 점점 정도를 더해가는 기묘한 기계 개조로 자기들을 일종의 병기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민머리의 팔뚝 아래가 전부 칼날로 변해버린 것을 목격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대만 맞아도 즉사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덩치와 민머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철현은 정신없이 날아드는 공격에 황급히 몸을 피했다. 덩치의 손도끼가 다시 왼쪽 어깨를 향해 내려왔다. 철현은 이를 피하는 동시에 스마트폰의 모서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방금 그의 오른 다리가 있던 곳을 내리친 민머리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민머리가 아파하면서 악을 썼다.

"너이 개새끼야!"

철현은 대꾸하지 않고 팔꿈치로 덩치의 턱을 날렸다. 덩치가 비틀거렸다. 그 찰나, 철현은 덩치의 손도끼를 쥔 손목을 붙잡았다. 덩치가 욕설을 내뱉으며 제 팔에 힘을 줬다. 곧장 푸른색을 띠는 증강 근육이 보기 흉하게 팔뚝에 솟아오르더니, 그 힘으로 철현의 목 쪽으로 날을 세워 힘을 가했다.

만일 그가 가모장을 보살피지 않았더라면 힘에서 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늙었지만 힘만은 온전한 다에바를 육탄전으로 제압하는 일은 분명히 근육 운동이 되는 일이다. 철현은 기를 쓰고 도끼의 하강을 막았다. 마침내 도끼가 위로 올라가자, 덩치의 얼굴에 일순간 당황한 표정이 어렸다.

옆에서 민머리가 달려들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철현은 잽싸게 덩치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다가왔다. 저 멀리서 민머리가 그 날카로운 팔을 꼬나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철현은 덩치의 팔을 끌어 앞으로 메치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픔, 뺨에서 느껴지는 따가움도 없다.

순식간에 민머리가 덩치의 어깨에 자기 손을 꽂아 넣었고, 동시에 철현의 메치기 동작으로, 덩치의 왼팔은 뜯겨나갔다.

끔찍한 고통이 수반될 때 으레 터져 나오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철현은 관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앞으로 총알처럼 날아갔고, 품 안에 덩치의 팔을 껴안은 채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힘을 잃어버린 손아귀에서 피 묻은 손도끼가 떨어져 나왔다.

철현은 이를 주워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덩치는 아이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민머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철현를 향해 욕지거리를 크게 내뱉었다. 철현은 돌아온 고통과 피로를 느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저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진했다. 민머리의 팔은 어느새 보통 팔로 돌아와 있었고, 때문에 철현은 거대한 나이프에 베일 걱정을 지워버려도 괜찮았다. 민머리가 날린 주먹을 막고 도끼로 내려찍었다. 그러나 도끼는 사내의 팔에만 흠집을 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아픈 기색도 없이, 민머리는 철현의 턱을 겨냥해 어퍼컷을 날렸다. 일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균형 감각이 상실되었다. 다시 자세를 추스르려고 애를 썼지만, 민머리가 날린 발차기에 그는 가슴을 얻어맞고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아, 이 개새끼야. 너 어드래서 온 종자인데 깝을 치고 지랄이니."

민머리가 의기양양하게 다가와 철현의 배를 걷어찼다.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구부렸다. 견딜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졸음을 견디지 못하면 큰일이 벌어지리란 건 자명했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민머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눈깔 파버릴라! 안 까니!"

민머리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철현은 손도끼도 놓치고 축 늘어진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단지 거친 숨을 내쉴 뿐. 숨 쉴 때마다 어깨와 늑골이 아파지는 게, 분명히 아까의 충격으로 어깨가 빠진 것이 분명했다. 철현은 눈에 힘을 주려고 애쓰며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야 했는데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단지 무릎을 꿇을 수밖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철현은 성한 오른팔을 살짝 들어 피가 아직도 배어 나오고 있는 뺨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움직일 때마다 밟힌 쥐 같은 소리를 내게끔 하는 왼팔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그냥 쓰러져 기절하고 싶게끔 하는 통증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민머리는 그가 뭘 하려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아새끼래 무스기 수작을 부리니!"

"…말이 거칠군."

그리고 철현은 두 손으로 민머리의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오른손에 묻은 피가 이젠 사내의 머리를 더럽히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철현의 입에서 속삭임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2층 복도.

한참 뒤에야 남자가 말한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명의 여자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방이었다. 원시가 그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하자, 그들은 군소리 없이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가라앉아 있는 품이, 아무래도 쫓겨난 듯싶었다.

"안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원시가 둘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 이 부장님이랑… 직원분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요. 갑자기 들어왔는데…"

"그냥 회사 야유회는 아닌 것 같은데."

원시는 문에 난 칼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어떤 사람이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코트를 입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던 남자요?"

"네! 아는… 사람이세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는데… 안에는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외부인을 이리 붙잡아 두고 있는 게요?"

그 질문에 답을 할 소음이 문 안에서 터져 나왔다.

"이 아새끼래 무스기 수작을 부리니!"


아무런 감각도 오지 않았다.

철현은 그저 진언을 외우며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헤맸다. 지금, 예전 같은 느낌을 회복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사용한 혈술은 효과가 없었다.

"이 개새끼야, 니 뭐하는 짓이야!"

민머리가 우악스럽게 철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반쯤 초인적인 힘으로, 그는 간신히 두 다리로 서서 민머리가 날리는 스트레이트 레프트를 피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달려드는 민머리의 관자놀이를 움켜잡았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금세 쓰러질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

아직도 오른손 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 피가 이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열쇠인 셈이다. 그 피에 지금 여길 나가느냐 마느냐가 달렸다. 철현은 옆구리에 와 닿는 민머리의 주먹을 받아내면서 고통 섞인 목소리로 다시 진언을 외웠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민머리는 머리가 아픈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연속으로 훅을 날리고 있었다. 흉부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철현은 개의치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까리 다바 이맘알야…"

민머리의 팔놀림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철현은 미친 듯이 뇌까리며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민머리 사내가 마침내 팔을 축 늘어뜨렸을 때서야 그는 혈술이 드디어 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민머리는 간신히 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내의 눈은 흰자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철현은 주먹을 날려 민머리의 턱을 갈겼고, 곧장 민머리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바깥.

원시는 칼자국 틈새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세 명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 중 둘은 기절하거나 죽은 것 같았다. 나머지 하나인 뚱뚱한 남자는 자기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 웅덩이에 빠져 훌쩍거리고 있었다.

"…처참하군."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은 서로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꼴이었다.

움켜쥔 사람이 바로 그 역신이었다.

원시는 숨을 들이켜고 집중했다. 곧장 역신이 뭐라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대하던 깡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역신이 그 깡패의 아구창을 날리자 원시는 몸을 움츠렸다.

그는 이제 나올 작정을 하는 듯싶었다. 역신이 쓰러진 깡패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웠다. 캐리어인 것 같았다. 원시는 그가 다가오리라 예상하고 문에서 몸을 조금 떼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제 존재를 드러낸 건 방 전체를 울린 총소리였다.

원시는 황급히 자국에 다시 눈을 가져다 댔다. 등 뒤에서 여자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해석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으니까.

역신이 천천히 뒤로 엎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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