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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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초상방재원 제██차 정기 회의 기록 중

수사국장: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이 태구련이라는 노인은 재단 측에서도 그동안 갈피를 못 잡았던 수신도와 연관된 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철현이라는 자도 그렇고 호야의 옆에 있었던 모리안이라는 자까지. 이건 그동안 얻었던 자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원장: 제가 걱정하는 것이 그 부분입니다. 두레원이 유도했다면서요? 근데 그 유도 과정에서 우리 방재원에 노출된 각각의 주시 단체 인원들이 몇 명입니까? 무슨 목적으로 우리 요원과 그 단체 소속 사람들을 접촉하게 한 겁니까? 그게 의문이라는 겁니다 지금.

국가초상방재원 임시 청사.

정기 회의는 순조롭게 끝났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 대부분이 회의실을 나섰고, 두 사람만이 회의실 안에 남았다. 류민화 국가초상방재원장과 김진현 첩보실 사회국장은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요는 쓰라린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그건 뭐였던 겁니까?"

"상설주시자산과에 따르면 한국의 신격이 주시 단체 인원들에 의해 억제된 사건으로 보인다는군요."

김진현 사회국장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만사에 신중한 성격의 그는 류민화 원장이 신뢰하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그런 그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장은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이 가난한 시절이었다.

"자세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에 다양한 주시 단체가 연관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태화산에 존재했던 신격을 유인, 무력화시킨 신원 미상의 인물 세 명은 물론이고, 능구렁이 손과 두레원 인물들이 자체적으로 사건의 여파가 민간인들에게 닿는 것을 막았다는군요."

"그 신원 미상의 인물 셋에 대한 정보는 아직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두레원 농장 내부에 잠입한 오유찬 요원이 모종의 정신재해에 당한 상태였던 게 뒤늦게 밝혀졌기에… 오유찬 요원이 실시간으로 보고한 내부 참석 인원에 대한 정보는 신뢰할 만하나,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류 원장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느낌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장님."

"우리에게는 정보가 참 없습니다. SCP 재단은 유능한 동료지만 그들이 만드는 그늘은 너무나 크고, 우린 그 그늘 속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맨눈으로 상황을 보고자 하는데, 정작 보아도 해석할 능력이 없으니 결국 재단이 주는 편리한 안경에만 의존하지요."

방재원장이 등을 돌려 사회국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차분한 시선 너머로 찌르는 듯한 기백이 서려 있었다. 사회국장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런 세상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열성적으로 상황을 파헤칠 인재가 필요합니다. 설사 우리가 당장은 해석할 수 없을지라도 계속 덤벼들어서 연속성을 찾아낼 준비가 된, 그런 인재 말입니다."

"…이번 일을 일으킨 오유찬 요원과 양수택 요원을 말씀하심이군요."

"그렇습니다." 류민화 원장이 빙긋 웃었다. "김 국장, 저는… 그 두 젊은이 같은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재원은 신생 조직이지요. 이 신생 조직에 걸맞는… 가장 비밀스럽고도 가장 선봉에 설 수 있는 요원들이 우리는 더 필요합니다."

"다만 그 두 요원은 중징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초동개입국장이 직접 결정한 징계라고 들었는데, 엄격한 인물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쉽사리 결정을 고치지 않을 텐데요."

사회국장이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그러나 원장은 딱히 놀라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압니다. 그러니 소속을 바꿔야지요?"

"예?"

"김 국장, 초동개입국과 더불어 사회국은 대한민국의 눈과 귀이지요. 그 눈과 귀를 진두지휘하는 김 국장이라면, 유망한 젊은이들을 잘 이끌어줄 수 있을 겁니다."

김진현 국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서야 방금 원장이 자신에게 무얼 떠넘겼는지 깨달았다.

"제, 제가 "

"저는,"

류 원장이 선수를 쳤다.

"사회국장 믿어요."

대답은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능구렁이 손 근거지.

"그래도 다 잘 끝났네."

"잘 끝나긴요."

이림의 말에 량다희가 삐딱하게 답했다. 둘은 능구렁이 손 근거지 한쪽에 놓인 소파 양옆에 앉아 있었다. 소파 앞에는 TV가 놓여 있었는데, 외국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듣기로는 스리포틀랜즈에서 방영 중인 연속극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림이 보기에는 그나마 희지 취향이 아니었으면 한 번도 틀어지지 않았을 드라마였다.

"왜? 그래도 문제는 다 해결했구만."

그 말대로였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둘은 문제의 세 남자를 돕고 호야와 모리안과 함께 근거지로 돌아왔다. 미리 인근 지역 전체에 교란 신호를 뿌려, 옥리나 분서꾼에게 흔적이 잡히지 않도록 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물론 이 모든 일이 전부 유쾌한 일이었다고는 못할 것이었다. 림은 문제의 무리에게 다가갔을 때를 기억해 내고 진저리를 쳤다.

희어멀건한 눈에 온통 검은 한복.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기운을 뿜어대던 그 남자. 손에는 검이 들려있고, 피처럼 검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그 아저씨 때문에 그런 거야?"

림의 질문에 다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신기한 술수를 부리긴 하던데. 그래도 나중에 위협이 되고 그러진 않을 것 같아."

"위협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다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깊고 조용한 두 눈동자가 림에게로 향했다.

"저는 그저…"

"왜, 네가 보기에 그 아저씨한테 뭔가 있어?"

"아저씨가 아니라, 철륭이요. 아니, 말하자면 둘 다겠네요."

림이 다희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신들의 세계는 현대의 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동시에 나름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공간이에요."

"그런데?"

"왜 서천의 신들은 그 아저씨를 보내서 이 일을 다루라고 했을까요? 그것도 스스로 흘려보낸 옛 권능까지 다시 회복하는 것을 방관하면서."

림이 턱에 손가락 관절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 서천이 그 아저씨한테 권능을 그냥 줬을 리는 없다는 거지? 네 말대로라면."

"물론 권능을 회복한 건, 지금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진 상황이니 자연스럽게 돌아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신격에게 그 정도의 권능을 사용하게 두는 건 서천의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네 말대로라면…"

"서천이 뭔가 계획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다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우리가 거기 크게 엮일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경기도 광주, 두레원 농장 앞.

바람이 스산했다.

"생각보다 더 늦는군."

"서울에서 온다고 했으니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거요.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다 올 테니…"

김철현과 태구련, 구현수는 말없이 농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한바탕 싸움이 일고 나서, 셋은 철현을 데리러 올 김세경 교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요한 침묵은 셋 모두 진이 빠진 상태 때문임을 서로 모르지 않았다.

온통 싸움이 끝나고 난 뒤의 세상은 이토록 잠잠했다.

철현은 눈을 감고 눈두덩에 손등을 올렸다. 침침한 눈에 자꾸만 꺼지는 몸뚱어리. 일시적으로 신이 되었던 후폭풍인지, 몸에서 체력이 자꾸만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농장까지 돌아왔는지.

"그, 이제 그 상태에서는 벗어나신 거예요?"

"그 상태라 함은 무어냐."

"마지막에 변하셨던 모습 있잖아요. 완전 창백하고, 눈까리는 희번덕희번덕해서… 아, 죄송해요."

멍하니 중얼거리던 현수가 아차 싶었는지 냅다 사과했다. 철현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오늘 이 청년이 맞닥뜨린 것만 해도 이미 허용치를 넘었을 것이니.

철륭을 베어낸 뒤, 그들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사인의 힘으로 억제된 철륭을 제 신체(神體)에 봉인한 뒤 냅다 농장으로 돌아온 것이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그새 파운데이션이니, 혹은 연합군이니 하는 조직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다행히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는 듯했다.

"내 몰골이 그리 심하였느냐?"

"몰라서 묻소?"

구련의 농 섞인 쏘아붙임에 철현은 입을 다물었다. 신으로 화하였을 때도 평범한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고, 다시 인간 김철현의 형상으로 현현되자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피를 쏟기까지 하였으니.

그나마 몸은 다시 회복되었다. 비록 온몸의 관절이 뜯어졌다가 우악스럽게 봉합된 느낌은 오래 남았지만.

"그런 게 가능한 거였소?"

구련이 물었다.

"그런… 힘을 불러오는 것 말이오. 그때의 도령은 마치…"

"역신 같았다?"

구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현이 힘없이 대꾸했다.

"백강이 이전의 날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오."

잠긴 목소리로 철현이 말하자, 구련이 피식 웃었다. 노인은 옆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바람처럼, 산은 말이 없었다.

"그야 그때 그 살덩어리 짓하고 다닌 건 기억나지, 이 사람. 헌데 시간도 많이 지났고, 더욱이 도령이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런 힘은 다 없어진 줄 알았다 이거요."

철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태화산을 바라보았다. 구련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힘, 곧 역병신으로서의 힘이 충만하던 시기였다. 세인(世人)들에게 역병을 퍼뜨리며 신으로서 군림하던 그 나날들. 그저 무감각하게 존재하기만 할 때의 젊음이었다.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소. 이…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역병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내 힘도 점점 돌아왔지.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역병신으로서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오."

철현이 한숨을 쉬며 검을 어깨에 메었다. 임시방편으로 끈을 묶어둔 상태였다.

"옛일에서 아주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등 뒤, 저 너머의 농장에서는 농군들이 저마다의 일을 헤쳐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조용히 불어와, 철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오후의 햇살은 노곤하게 땅에 스며들었다.

"그래도 전처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거요. 저 밖의 사람들은 병에 대처할 방법을 아주 잘 찾지 않소. 이번 일은 이례적이나, 곧 사그라들 일에 지나지 않소."

철현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상태로 돌아가기 싫고."

구련과 현수가 철현을 바라보았다. 철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 자신됨이라는 개념을 매우 늦게 얻었소. 내가 무얼 원하고 어디로 걸어가고자 하는지… 그것을 늦게나마 내 스승과, 아내와, 내 새로운 가족들이 깨우쳐 주었지. 그 목표에 역병을 주관하는 업은 더는 없소. 아니,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모두 떠난 뒤 한동안 목표란 것은 소실되고 없었으니까.

철현은 뒷말을 흐리고 다시 태화산을 응시했다.

"넌 이제 어찌할 거냐."

철현이 문득 생각난 듯 청년에게 물음을 던졌다. 현수는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당황한 듯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네 조모를 돕겠다 하지 않았느냐. 이번 일이 네게는 클 듯한데."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조용히 대답했다. 살짝 기운이 없는 목소리에, 철현은 고개를 돌려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 어두워진 얼굴이었지만, 현수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저런 괴물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저것만큼이나 위험한 것들을 상대로 할머니는 여태 힘써오신 거예요. 저런 것들을 마주하고 상대해서, 두레원이 나아갈 방법을 터득하신 거니까…"

현수는 고개를 들어 철현을 바라보았다. 기진맥진한 인상이었지만, 청년은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어요. 할머니께 말씀드리려고요. 할머니처럼 이런 미지의 것들을 면대면으로 마주해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맞서보고 싶어요. 그게 제가 배워야 할 길이에요."

문득 철현은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일본의 두술사 일족, 니카호 일족의 일원 니카호 아리노부가 떠올랐다. 일본이 근대의 물결을 맞이할 즈음, 아리노부는 당당히 신시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었다. 그 젊음, 그 기백을 철현은 현수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너는 능히 할 수 있을 게다."

철현은 조용히 현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만치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철현은 도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 교수의 차가 산을 바삐 오르고 있었다. 철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구련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일어나는 게 좋겠소. 교수가 철륭을 그리 의자로 쓰는 걸 보면 황당해할 거요."

구련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구련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한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 상자 안에 장독이 들어있었다. 철륭이 봉인된 장독이었다.

"도령, 나중에 작업장으로 놀러 오시오. 내 제자들과 아이들이 반겨줄 거요."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구련이 선뜻 말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금속 재질의 손을 철현은 말없이 잠시 내려다보았다.

"악수하자는 것 처음 보오?"

"꼭 80년 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철현이 손을 잡았다.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80년 전 그때도 이런 감각이었더랬다. 경성의 고요한 밤처럼.

한복 입은 사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허허, 악수하는 게 그리 기분 좋을 일이오?"

"이 사람을 아는 자가 서천 저 너머 어딘가에 아직 있다, 이게 자못 유쾌한 사실 아니오."

철현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러고는 농을 던졌다. 실로 오랜만에 던지는 농이었다.

"가서 봉변이나 당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소."

구련이 웃으며 대꾸했다.

"살덩이 티만 내지 마시오."

"그럼…"

철현은 구련과 현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봅시다."

철현은 상자를 들고 세경 쪽으로 거닐어 갔다.

세경은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는 철현을 보자, 세경은 이해한다는 듯 철현에게로 걸어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별일은…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렇게 어려운 적이라는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세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적임자로 김철현 씨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런… 존재를 묶어두기에는요."

세경이 잠시 말없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상자는 미동도 없이 고요한 형태를 유지할 뿐이었다. 철현은 세경의 눈에서 쉬이 정돈되지 않을 수많은 내력을 읽어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학회는 잘 끝났습니까?"

"덕분에요."

철현은 조용히 세경의 차량에 올라탔다. 입구를 등지고 현수와 구련의 모습이 보였다. 차량이 출발하면서 손을 흔들던 둘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 사람의 주인과 한 사람의 나그네를 태우고, 차량은 덜컹거리며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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