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하는 방법
평가: +6+x

"청명아, 부탁인데…."

"제 이름은 청명이 아닙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스완 요원이 말을 흘리는 것을 보고 청명 요원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대우를 받기 마련인데, 스완 요원에게는 그것을 다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에 사용하는 되먹임 과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재단으로 파견 나온 군인인 청명 요원은 임무를 위해서라도 스완 요원의 길동무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니 이번 실험에 D 계급이 들어갈 걸 내 직권으로 바꾼 건 맞지만 나 대신 서류처리 해달라고 하는 거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유언 집행 처리입니까? 그 한쪽 다리가 사르킥 마법사의 의식용 도구로 된 건 저는 못 찾으니까 그런 부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건 부탁으로 안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내 몫 데이터 말소 처리 좀 해줘. 응?"

물론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거부할 수만 있었다면 청명 요원은 차라리 자기가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재단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쌓여있고 더 많은 데이터가 갱신되고 있다. 단순히 한 기지의 음성 데이터만 해도 수십 기간의 음성 분량이 하루 만에 기록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단은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데이터가 충분하다면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가 자세하다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 수 있다. 데이터가 세밀하다면 누가 죽게 되는지까지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재단에는 사고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재단은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사고라는 개념의 존속은 재단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재단은 데이터 말소를 통해 스스로 눈을 가린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전능함에 대해 겸허하게 숙이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말은 누군가는 이걸 다 보고서 일일이 감겨주는 반복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복작업이라는 언어는 전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남 보여주기 싫은 일은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음해, 약탈, 사내연애, 거짓말 등등…. 가끔 숨기지도 않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청명 요원은 그득그득하게 쌓인 데이터를 보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세면실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인공지능이 학습하면 안 된다고 디지털 처리도 되지 않는다. 물론 맞춤법 검사기 돌리다가 갑자기 볼일 본다고 사라지는 인공지능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청명 요원도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고는 싶었다.

-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청명 요원은 두 직원의 목소리가 섞이기 전에 나머지는 듣지 않고 바로 검은 줄을 그어 데이터를 말소시켰다. 뒤의 내용은 아마 다음 밀회 장소를 정하는 거겠지만 사실 그마저도 몇 가지로 한정된다. 다음 데이터는 간 크게도 재단까지 와서 약물을 찾는 박사였다. 그러고 보니 저 박사가 즐기는 장소와 밀회 장소가 겹치든가 했던 거 같은데, 둘이 마주치더라도 사실 청명 요원이 상관할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이전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터 말소시켰다.

- 누구든 도와줘요!

청명 요원은 이번에도 데이터 말소 처리를 이어나간다. 실행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 대상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흔적이 심하게 남기 때문에 지나치게 수고가 드는 것이 불만일 뿐이다. 감정적으로는 외부로부터 분리된 곳에서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진 않으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오히려 발생하는 행위에 대한 결과물 또한 분리되지 않기에 숨기기에는 부적절하다. 결국, 뒷처리에는 추가적인 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재단 기지는 기지 밖 최소한 주변 10km^2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개방된 임야를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계적인 작업이 끝나자 어느새 창밖이 어두워질 시간이 되었다. 한두 가지 건수가 남았지만, 청명 요원의 권한 밖이었다. 청명 요원의 사무실은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햇빛과는 상관없이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정말로 더는 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청명 요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끝났어?"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데이터 말소할 게 있어서. 너한테 보여주려고."

스완 요원은 데이터 말소라는 말을 구어체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청명 요원의 개인적인 느낌이었지만 스완 요원에게 데이터란 단순히 정보 값이 아닌 것 같았다. 스완 요원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능력 부족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표정을 보니까 서류에도 없고 그냥 요원님 머릿속에만 있는 내용인 거 같습니다만…. 대신 제 것도 하나 도와주십시오."

"아, 고마워. 다른 데이터 말소하고 다른 건 아니고 그냥 도움 안 되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줄여서 얘기할게. 무슨 SCP인지는 몰라도 되고, 그냥 내가 좀 오랫동안 보던 친구가 있는데 걔가 요즘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거든."

"누구 좋으라고요?"

"그걸 모르겠어. 사실 증언 말고도 교차검증 좀 하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이거든. 근데 재단 서류에서 편집할 때 일단 우선시하는 건 1차적인 면담 기록이고…. 교차 검증할 사료를 들고오자니 보안부서 눈치가 보이거든."

"보통 재단 직원들은 보안부서가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요원님도 그냥 책잡힐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너한테나 초상세계는 이세계인 거지 난 이쪽 출신이라서 어쩔 수 없어. 너는 북한에 가족 있다고 가족 안 만나?"

청명 요원은 이 말이 정말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직장 선배로서 첫 만남 때 스완 요원은 스스로 자신의 전 직장이 청명 요원의 소속이었다는 것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명 요원에게 국군이란 단순히 직장이 아니었다. 그 마음가짐은 스완 요원의 오빠에게 배운 것이었다.

"비유가 좀 극단적이라 오히려 공감되지는 않군요. 요즘 한국인은 명절 때 그냥 놀러 갑니다."

"이해했으면 됐어. 아무튼, 너는 보고서 쓸 때 모순된 정보이므로 데이터 말소 처리했다고 하고 빈 종이로 낼 거야?"

"일할 게 줄어서 오히려 좋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런 식이라면 직원 서류도 지금보다 분량이 늘어날 겁니다. 아마 제가 전부 지워서 남은 데이터가 하나도 없는 직원도 있을 테니 SCP라도 보고서가 비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니 말이 맞네. 그럼 나 기억 소거 하기 전에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얼른 얘기해줘."

청명 요원은 스완 요원에게 딱히 해줄 얘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완 요원이 유능하므로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분명 손해였다. 다행히 머릿속을 뒤져보자 잠들어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룰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바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룰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어떤 직원이 실험 중에 죽었는데, 이게 좀 미묘한 문제입니다. 재단의 이익과 무관하더라도 과도한 수위의 검열이 허용되긴 하지만, 정작 연구팀에서는 그래도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응? 그거 그냥 없애버려. 괜히 남겨봤자 네 책임이야."

"그래도 그 자료를 통해 뭘 알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도 없고 제가 책임지고 판단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린 현장 요원이니까, 현장의 일은 그 자리에서 판단하면 그만이야. 이 자료를 전달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현장이라고."

"죄송합니다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자료를 봤으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잖아."

"하, 저도 제가 이 정도로 감상적일 줄은 몰랐군요."

청명 요원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스완 요원은 아직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응?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네가 진짜 모르는 사람은 그걸 받아서 볼 박사님이야. 여기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게 어떨 거 같아? 그냥 조용히 있고 살아남기만 하면 저절로 끌어올려 지는 조직이 재단이긴 해. 하지만 재단이 연구 재단이라는 걸 기억하고 가만히 못 있다가 운도 좋으면 박사님이 되는 거야. 너는 그 직원을 그런 부류에 맡길 자신이 있어? 데이터 말소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청명이 네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왜 그걸 기억하고 다닐 거 같아?"

"청명은 제 이름이 아닙니다만…."

"아, 농담도 못하냐. 대답은 안 해도 돼. 사실 나도 모르겠거든."

청명 요원은 사실 그 이유가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 소거를 받으시면 스완 요원님은 방금 이 대화도 잊는 겁니까?"

"응, 아침에 서류 받은 기억까지 날아가니까 마무리까지 네가 해야돼."

"설마 그게 귀찮아서 기억 소거실로 도망치는 건 아니길 바랍니다."

"이런 건 부탁으로 안 하는 거니까 좋은 말 할 때 움직이자?"

"네, 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