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遺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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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지난 두 달 동안 제 정신은 많이 피폐해졌습니다. 제 심장에 충만한 보라색 소리는 더 이상 활력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글을 쓸 수 없는, 그저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떠나온 지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렇습니다. 제 생각보다 당신에 대한 미련이 흘러넘쳤나봅니다. 당신이 알던, 언제나 턱을 괴고 허공을 쳐다보던 소년은 이제 없습니다. 대신 사람이 말을 걸기만 해도 놀라기에 이어폰을 꽂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심약한 존재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미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요, 내가 늘 말하던 '이미지' 말입니다. 난 그 이미지를 종이 위에 써내는 것 하나만으로 견뎌왔습니다. 제 집착이 뒤틀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새로운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보이는 건 제가 숱하게 써 왔던 것들 뿐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해안가의 가로등에 앉은 소년. 납골당 앞에 서서 휴대폰을 바라보는 남자. 절벽에 걸터앉아 보라색 석양을 보는 흰 머리의 어린아이. 없어요. 새로운 게 보이지 않아요. 전 누군가 태엽 감는 법을 잊어버린 인형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의 날씨는 덥습니다. 집에 있을 때에는 꼭 에어컨을 틀도록 해요. 왼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붉으니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따끔따끔 거리기는 하는군요. 더운 날씨에, 더운 물에 손을 집어넣고 있으니 나름대로 세상은 제게 따뜻함을 보여주는군요. 조금은 우울하네요. 모처럼 따뜻하니 글도 잘 써지지 않습니다. 조금은 제게 어울리는 죽음이 저체온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냉장고 안에 들어가니 도무지 추워서 이 글을 쓸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아, 그러고보니 내가 이 말을 안 하고 있었군요. 사실 이 글은 세번째 쓰는 겁니다. 저도 되도록 이런,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의 글쓰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두 번째의 시도에서도 만족 할 만한 글이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리즈가 얘기해주었듯 저는 분명히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에요. 시간이 다 되기 전에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전 데뷔한 글도 한시간만에 쓴 사람이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초안은 다 쓸 게 확실하죠. 퇴고는 진짜로 시간싸움이지만.

재미있는 사실 하나. 제가 그동안 써 왔던 이미지의 사람들은 전부 남자들밖에는 없었어요. 주인공을 한번쯤은 여자로 기용했었어야 했을까요. 이런 종류의 이미지는 왜 듣지 못했는지, 슬프네요. 당신이 있었을 때 조금이나마 색다른 시도를 해 봤어야 했는데. 내게 사진들이 샘솟았을 때 그것들을 미리 써놓아야 했었는데. 하지만 제게 남은 이미지는 이것 하나밖에 없네요. 그래요, 사실 얼마 전에 내가 이 이미지를 들었을때 나는 굉장히 기뻤죠.

남자가 정장을 입고 있어요. 그는 식탁에 앉아 있죠. 그의 왼편에는 작은 고무 대야가 놓여있고, 왼손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와요. 오른손에는 노트북으로 타자를 치고 있네요. 여기서 조금의 변경을 가했어요. 타자를 치는 건 좀 멋지지 않으니까. 펜으로 종이에 쓰는걸로. 깃펜이면 더 좋고. 그렇게 글을 쓰다가 중간에 완성하지 못하고 푹 쓰러져버립니다. 그런 이미지가 들렸어요. 한 3일 전에.

알다시피 난 그동안 두 번 이미지를 써보려고 했어요. 될 리가 없었죠. 이건 내가 그동안 들어왔던 이미지가 아니니까요. 조금 다르고, 음울한. 정장의 색이 검은색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이미지. 알겠나요? 이건 제 이미지였기 때문에 쓸 수 없던 거에요. 언젠가 내가 가야 할 길이었으니까. 나의 아픔이 진보가 아닌 퇴보를 명령하는 순간 나는 세상에 존재할 의미가 없어지니까.

도망치는게 왜 나쁘냐고 해 준 적이 있었죠. 생각해보면 당신 말 대로 도망치는것도 길이었어요. 저는 아플 때마다, 누군가 나를 찌를 때마다, 문자메세지가 제 핸드폰에 올 때마다 도망쳐왔죠. 그렇게 도망친 끝이 이곳이에요. 먼 길 돌아와보니까 이미 눈 앞에 제 발자국이 놓여있네요. 전 그걸 버틸 수가 없어요, 리즈. 제가 걸어왔던 길이 어디로라도 이어지지 않고 그저 원을 그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머릿속의 회색 비명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호흡이 고통스럽기 시작하네요.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회한이 저를 찌릅니다. 달콤한 슬픔이 저를 떠나고 있습니다, 리즈.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요. 초안은 완성하고 끝내야 하는데. 조금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오래된 습관이 있습니다. 모르셨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사실 글을 쓸 때면 오로지 한 노래만 들으면서 작업합니다. 배경음악은 제 작업환경에 굉장히 중요해서요. 여러가지 다른 노래의 분위기나, 혹은 아무것도 없는 정적에서 작업하자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하나의, 3분 후반대의 어느 세심하고 정렬된 노래가 보여주는 사열식이야말로 제 마음 속 안식의 근원입니다. 같은 가사를, 같은 멜로디를. 반복해서 듣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이미지는 하나인데 노래가 바뀌면 안 되니까요.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도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있는 편이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트랙리스트 속의 음악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훈련해놓으면 정작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무난하게 넘길 수 있죠.

두 번째 습관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말을 두 번씩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제 동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얻지 않으면 저는 자기혐오에 집어삼켜져버립니다. 그 위장 안에서 커터칼과 밧줄 사이에 녹아버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되겠죠. 다시 말해서 글을 못 쓰게 되어버립니다. 내 단어 선택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감각적으로 집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습관은 제때제때 잡아내지 못하면 어느새 지면을 가득히 메우는 아주 나쁜 것이기 때문에, 저도 퇴고할 때 중점적으로 보고는 합니다.

바깥에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긴급재해를 알리는 문자 메세지가 붉습니다. 한때는 저도 빗소리를 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이미지는 남아 있습니다. 비 오는 날 발코니에 나가, 하얀색 흔들의자에 앉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상당히 게을렀습니다. 별은 여러번 보았지만 비를 볼 만한 인내심은 없었던 걸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빗소리는 참 좋아합니다. 예를 들자면 몇몇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흐르는 빗소리들입니다. 그 인공적인 자연에 섞여 들리는 드럼 소리가 좋습니다. 정신에 물을 들이붓는 목소리가 좋습니다. 익사하면서 내는 마지막 단말마가 좋습니다. 평온하지 않은 모든 것들의 집합체인, 복제할 수 없는 것을 복제하려는 그 부질없는 노력이 제 어딘가에 남아있던 치기 어린 마음을 자극합니다. 저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내가 사실 숨겨진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던 어린 나이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노력을 하면 어디라도 닿을 것 같았던 마음을 잠시나마 받아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런 의미 없어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는것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본 이미지 안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활짝 웃는 벽지의 비명을 들려주기 위해, 다 제가 고안한 결과물입니다. 철저하게 계획되고 배치한 일련의 결과물이 무질서해보이는 이야기로 구체화되서 나타나는 겁니다. 작곡가는 저의 무의식이고, 장소 협찬은 빠져나가는 붉은 액체가, 연주는 저의 오른팔이 해주었습니다.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조금씩 멍해져가는데도 멈추지 않으니까요. 의식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는건 참 행복한 것 같아요.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리즈? 왜, 명절날이나 중요한 날, 평소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던 친척들이 갑자기 우리 집에 나타나고, 나를 짓밟고 무너트리던 사람들이 내게 악수를 건네고. 저는 거기에 웃으면서 인사하고. 그걸 자연스럽게, 외부에서 관조해본 적이 있나요? 마치 무거운 비닐을 뒤집어 쓴 것 마냥, 투명한 미소와 악수가 교차하는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멍하니 멈춰본 적이 있나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럴 때가 제일 좋아요. 저항을 포기하고 떠내려가는 기분의 상쾌함이나, 몇 달동안 갈고 닦아왔던 증오가 간단히 꺾여버리는 무력감. 기계적이라는 형용사의 표본을 보여주는 의미 불명의 몸짓. 멍하게 되버립니다. 멍하게 되어도 누군가 저를 운반해주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글에 쉼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프로가 아니고, 따라서 제가 글에 부릴 수 있는 재주는 한정되어있으니까요. 아무래도 퇴고하려면 시간이 조금 빠듯할 것 같습니다. 리즈,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 예상인데, 이 초안은 곧 끝날 것 같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관리실에서 피난가라고 온 것일까요. 아니면, 옆집 사는 남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저번에도 제가 허공에 말했던 그 치료사 말입니다. 제가 가진 병을 치료하겠다고 절 찾아오던. 아, 그러고보니 왜 그랬죠? 제가 무슨 병이 있었나요? 잘은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리즈, 당신이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제 글을 보고 있다면.

사실 친구들이 도와주려고도 했어요. 당신 이름을 알려고 애 썼죠. 그런데, 그게 난 되게 슬펐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현실의 당신이 아닌걸 이미 알고 있거든요. 당신은 3년 전 쯤에 죽었죠. 당신의 그림자는 두 달 전까지 내 곁에 있어서 내게 산소를 공급해주었지만, 당신은, 내 머리에서 지겹도록 떠나지 않는 카운터 앞의 소녀는 3년 전에 죽었다구요. 왜 안 왔어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아니, 아니에요. 잊어버리세요. 오래 전의 일이에요. 지금은 당신도 나도 잊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은 일이에요.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아는 여자들은 많아요. 사귄 사람은 한 명이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 모두 착하죠. 착하기 때문에 슬퍼요.

내 모든 문단에서 슬프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에요. 내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틀렸어요. 난 지금 매우 슬프고 우울해요. 조금만 더 지나면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겠죠. 이미지도 못 보겠죠. 사람과 대화할 수도, 지금처럼 우울감에 잠겨서 글을 휘갈길 수도 없을 거에요. 난 그게 슬픈 거에요. 그래서 글을 쓰고 있죠. 슬프기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쓰기 때문에 더욱 슬퍼져요. 그래요, 슬프다는 표현은 그냥 제 마음의 솔직한 고백이에요.

마루 불을 끄는 걸 까먹었어요. 전기세 많이 나갈텐데. 해가 지고 있네요.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가 석양이 넘어가기 시작했으니 곧 어둠이 아파트에 몰려오겠죠. 심장 소리가 들려요. 심장은 등불이 될 수 없지만 북소리는 되겠죠. 미안해요. 사실 거짓말이었어요. 심장소리따위는 들리지 않아요. 내가 듣는 모든 소리는 식탁 위에 앉아 깃펜을 휘갈기고 있는 남자와, 이어폰에서 내 정신에 뿜어내는 불길한 숨결밖에는 없어요. 심장소리나 천둥은 들리지 않아요. 번개는 선명하게 보여요. 아, 그렇다. 해는 보이지 않아요. 해가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래요, 나는 방금 내 삶의 마지막에 서서 이미지를 다시 보고 만 거에요. 석양에 넘어가는 해. 도대체, 왜 지금 온 건가요, 리즈. 어째서 조금 일찍 오지 않았나요. 조금이라도 일찍 저 해를 보여주었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 곁에서 머무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요, 나는 당신 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었어요. 졸업 앨범의 한 코너에서 내 사진과 당신 사진이 맞닿았을 때 처럼 말이죠. 당신 방의 트로피가 되고 싶었어요. 당신이 배구부에서 따놓은 상들, 상패들, 상장들. 그 모든것이 되고 싶었어요. 당신이 입는 티셔츠가 되고 싶었어요. 당신에게 집착해보고 싶었어요. 밝은 곳에서. 당당하게 집착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내가, 부숴지고 던져진다고 해도 한번쯤은 해 보고 싶었어요. 취향의 차이니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난 어릴 때부터 당연히 손목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걸. 만일 내가 용기가 있었더라면 높은 층에서 당신을 향해 내 정신을 던져버렸을지도 모르죠. 오래 전에. 그걸로 좋은 걸까요. 어느 결말이던 조금 더 좋을 수는 없을까요. 어, 그러니까 내가 페이스북에서 당신의 진실 게임 대답을 보지 않는 것 같은 거 말이죠. 나를 사랑해본 적 있냐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클릭한 걸 내가 모르는 세계 같은 곳은 갈 수 없는 걸까요. 애시당초에 왜 아니요 버튼은 파란색이었죠. 나 파란색 좋아하는데. 차라리 빨간색이었으면, 조금쯤 심적 부담이 덜 할 지도 모르는데.

눈 앞이 어둡네요. 리즈, 도망가지 말아요. 부디. 끝까지 들어줘요. 당신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난 무서워서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늘 그랬던 것 처럼 거기에 있어줘요. 카운터에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면서. 안 돼요. 사라지지 말아요. 아, 그래요. 좋아요. 사라져도 좋으니까, 듣기라도 해 주세요.

더 이상 당신이 보이지 않아요. 듣고 있어요? 리즈. 제발 부탁이니까 들어줘요. 리즈. 리즈? 듣고 있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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