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 1936년 가을 |
|---|---|
| 공간 | 프랑스 캉 |
"이로써 모든 상속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주인님."
"… 왜 날 주인이라고 부르는 거지?"
"전 주인님의 부탁입니다. 앞으로도 아가씨의 집사로서 헌신하기로 아가씨의 아버님, 오귀스트 뒤바 씨와 약속했습니다."
"…"
"그리고… 그분의 상속재산 중에 이것도 있습니다."
"이건 뭐지? 편지봉투들?"
"… 죄송합니다. 전 주인님의 명령이었어요."
"이, 이건…"
"주인님께서 빈으로 떠나셨을 때, 피에르 씨가 매주 찾아와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전 주인님께선 그것들을 받아선 제게 불태워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바이올린 연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요. 저는 전 주인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그것들을 이렇게 보관했습니다."
"… 피에르가? 몇 년 동안…?"
"25년 겨울부터 31년 봄까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279장의 편지를 부탁했어요."
"왜…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거야?"
"… 죄송합니다."
"…"
"주인님…?"
"… 좋아요. 르클레르 씨.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하겠어요."
"자, 자유라뇨, 아가씨? 전 언제나 성심껏 뒤바 주인님 밑에서 일해왔고, 또 그렇게 뒤바 양에게도 헌신할 겁…"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말해 주죠. 에티엔 르클레르 씨, 당신은 해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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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936년 가을 |
|---|---|
| 공간 | 프린스턴 대학 앞 한 다리 |
"알론소 처치 교수님?"
"음? 오! 자네가 바로 앨런 튜링이로군! 만나서 반갑네."
"반가워요! 튜링 씨!"
"엇, 저분은…"
"아, 이쪽은 내 제자 존이네."
"안녕하세요, 존 폰 노이만입니다."
"폰 노이만이라고요? 그…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반'을 쓴"
"오? 제가 쓴 그 책을 읽어보셨군요?"
"물론이죠! 제가 얼마나 그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요!"
"뭐야. 튜링 군, 나랑만 통할 줄 알았는데, 존이랑도 통하는 게 있었을 줄이야. 자리라도 비켜줘야 하나?"
"아하하, 아닙니다. 이제 람다 대수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죠."
"물론 농담이었네. 미국은 좀 적응할 수 있을 거 같나? 앨런? 앨런이라고 불러도 좋지?"
"하하, 물론입니다. 교수님."
| 시간 | 2×105 년 |
|---|---|
| 공간 | 적도. 한때 오세아니아 대륙 |
"식물도 이제 없나 봐."
"20만 년 만에 대부분의 생명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네."
"아마 우리가 베리타스 프로젝트 벙커에 있는 동안 빙하가 온 지구를 덮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식물이 모두 죽고, 식물을 먹던 초식동물도 죽고, 초식동물을 먹던 육식동물까지 모조리 죽은 모양이야."
"그래도, 살아남은 동물들이 있을까?"
"음, 아무래도 찾기는 힘들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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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3×105 년 |
|---|---|
| 공간 | 지구, 열권. |
"성층권 너머까지 왔지만, 어디에도 식물은 보이지 않네."
"지구가 이렇게 심심했던 적은 처음이야."
"괜찮아, 비버. 다른 재미있는 곳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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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4×105 년 |
|---|---|
| 공간 | 달, 고요의 바다. |
"하하! 이거 봐! 까마귀! 나 폴짝폴짝 뛸 수 있어!"
"달은 중력이 작거든. 아! 이걸 봐! 이건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흔적이야."
"우와! 이것도 인간이 만든 거야?"
"응. 1969년 인간이 달에 착륙할 때 썼던 우주선이야."
"신기해!"
| 시간 | 1936년 겨울 |
|---|---|
| 공간 | 영국, 케임브리지의 한 은행. |
"어떤 일로 오셨죠?"
"대출을 받으려고요. 지난 폭설에 집 지붕이 내려앉았거든요. 오백 파운드를 대출 받고자 합니다."
"어어… 대출 기간은요?"
"2년이요."
"잠, 잠시만요… 으음… 현재 저희 은행의 대출 이자율은 연 5%입니다. 그러니까…"
"네 천천히 하세요."
"… 그러니까… 음…"
"피에르! 이러다 해가 지겠어. 너 케임브리지 수학과 출신 맞아? 그 정도는 암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 시간 | 4×105 년 |
|---|---|
| 공간 | 화성, 타르시스 고원. |
"어때? 영화에서 보던 거랑은 다르지?"
"완전… 완전 파래! 땅은 빨간데, 하늘은 파래!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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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2×106 년 |
|---|---|
| 공간 | 목성의 위성, 이오의 상공. |
"으아! 냄새! 방귀냄새 같아!"
"유황 냄새야. 이오는 화산 활동이 활발해서 유황이 많거든."
"우와…"
"그거 알아? 이오는 목성의 기조력 때문에 행성이 찌그러지는 힘을 받고 있어. 그래서 저렇게 화산이 많은 거야. 만약 이오가 조금만 더 목성의 안쪽으로 들어간다면 완전히 찌그러져서 부서져 버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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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107 년 |
|---|---|
| 공간 |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의 한 설원. |
"와아아! 까마귀! 한 번 더 하자!"
"한 번 더? 지금 몇 번째인지 알아?"
"음… 아! 2만 4921번째야!"
"까악! 그럼, 2만 4922번째로 미끄럼 가보자고!"
| 시간 | 1937년 여름 |
|---|---|
| 공간 | 프랑스, 파리.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뮈리엘 양.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네, 베르네 씨. 약속하신 대로, 캉에 사피르 로지를 설치하고 제가 그곳의 단장을 맡고자 합니다."
"오, 제 편지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이로군요. 음… 그러나, 그때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사항이 있는데요…"
"… 뭔가요."
"먼저 학회를 설립하시고 학회 활동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게… 저희 사피르의 공통 지침이라서요. 아무리 영재 '뮈리엘 뒤바'께서 원하신다 하더라도, 예외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잘 아시잖아요? 합리성에 예외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 뭐, 그렇게 하죠. 지원금은 얼마나 되나요?"
"그야, 연 2000프랑1 정도."
"네? 아니, 그 돈으로 대체 뭐, 어떤 활동을 하라는 건가요?"
"학회에는 지원금을 많이 줄 순 없어요. 지금 우리 사피르에는 로지의 열 배는 더 되는 수의 가맹 학회가 있으니까요. 부족한 금액은 학회비를 걷어서 운영해야죠. 거기에 더해서 다른 학회 활동도 좀 도와주거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지원금을 더 타갈 수도 있고요."
"… 로지로 승인된다면 얼마를 지원받게 되나요?"
"그때가 되면 이제 제약이 훨씬 풀리죠. 기본적으로 인원수에 비례하게 주고, 연구 실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더 많은 지원금이 나오고요."
"그래서 정확히 얼마인데요?"
"… 연 25만 프랑2부터 시작합니다. 연구원들 급여와 건물 임대료 등을 생각해서 말이죠."
"…"
"어때요? 구미가 당기지 않나요? 똑똑하시니 이런 기회 흔치 않다는 걸 잘 알 겁니다."
"…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캉에 가서 회원 적어도 3명을 모아 오세요. 그럼, 제가 정식으로 캉 학회를 사피르에 가맹시켜 드리겠습니다."
| 시간 | 3×108 년 |
|---|---|
| 공간 | 지구의 정지궤도 부근 |
"저길 봐! 모든 대륙이 하나로 합쳐져서 거대한 대륙이 되었어. 예전의 인류는 저 대륙을… '아마시아'라고 부르자고 한 거 같은데."
"하지만 저기엔 생명체가 없네."
"음, 이렇게 보니 지구도 별거 없네. 이제 좀 멀리 나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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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109 년 |
|---|---|
| 공간 | 황소자리 구역, 게성운 주변 |
"까악! 360도 스핀이다!"
"아하하하! 이거 진짜 웃겨!"
"그럼… 이번엔 반대 방향 스핀이다!!!"
"꺄하하하하하! 그만! 어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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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5×109 년 |
|---|---|
| 공간 | 태양계 바깥, 오르트 구름 외곽 |
"와! 까마귀, 저거 봐봐! 불꽃놀이다!"
"아냐, 비버. 저건 헬륨 섬광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야. 태양이 수명을 다하면 저렇게 핵이 수축하면서 부피가 다시 작아지는 거야."
"그럼 지구도 다시 나오는 거야?"
"아니. 아주 오래전, 적색 거성이 되었을 때 지구는 태양에 잠겨 사라졌어."
"그래? 우리가 같이 봤던 파리 시내랑, 뉴욕의 돌탑이랑, 베리타스 벙커는 돌아오지 않는 거야?"
"응. 한참 전에 모두 사라졌어. 모든 건 언젠간 사라지기 마련이야."
| 시간 | 1938년 봄 |
|---|---|
| 공간 | 아일랜드 더블린 |
"루트비히."
"… 모리스."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게 병합되었어요."
"… 저도 방금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일어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일어났군요."
"…"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실 건가요?"
"제 가족들이 아직 오스트리아에 있어요. 모리스."
"미친 짓이에요, 루트비히. 내로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오스트리아에서 도망치고 있어요. 프로이트 씨도 지금 빈이 심상찮게 흘러가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빈 정신분석학회는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해요. 그분은 런던으로 망명을 갈 생각 중인가 봐요."
"… 그렇지만… 모리스."
"루트비히, 제발요. 저와 케인즈, 당신 친구들을 믿어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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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938년 여름 |
|---|---|
| 공간 | 미국 프린스턴 대학 |
"튜링 씨."
"아, 폰 노이만 씨."
"꼭 영국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지금 유럽의 정세가… 심상찮다는 걸 알잖아요."
"심상찮기에 더욱이 가봐야죠."
"앨런… 영국은 동성애가 범죄잖아요. 이곳, 미국에 남아서 같이 연구를 계속해요. 이곳이라면 안전해요."
"폰… 미안해요. 전 제 친구를 버릴 수 없어요. 제 조국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절 기다리고 있어요. 친구도, 조국도… 절 필요로 해요. 힘들 거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앨런… 당신이란 사람은 참…"
"하하… 괴짜 같지요?"
| 시간 | 2×1010 년 |
|---|---|
| 공간 | 나선은하 NGC 4216의 한 중성자별 주변 |
"까악! 저길 봐! 중성자별에 가까이 간 행성이 기조력 때문에 으스러지고 있어."
"중력이 엄청 센가 봐!"
"하지만 지난번에 봤던 블랙홀 있지? 그게 훨씬 세다고!"
"근데 그거는 이렇게 가까이서 못 봤잖아!"
"그야, 위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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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1011 년 |
|---|---|
| 공간 | 국부 은하군과 처녀자리 은하군 사이의 공허 |
"이제 우리 은하단을 떠나는 거야?"
"더 놀고 싶었어?"
"아니! 나는 다 즐겼어. 그래도, 너는 더 조사해야 할 것이 있는 거 아니야?"
"음, 사실 이제는 상관없어졌어. 신의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이제 나한텐 중요한 임무가 아닌 것 같아."
"왜?"
"이미 놓쳐버린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사실 이것 때문에 예전부터 실패한 건 아닐까 생각이 많이 들었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뭔데?"
"난 그냥 너랑 있는 게 더 좋거든."
| 시간 | 1938년 가을 |
|---|---|
| 공간 | 영국 케임브리지의 한 하숙집 |
쿵쿵거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르는 소파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곤 문을 바라보았다.
"피에르! 피에르!"
누군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와 다시 쿵쿵거리는 노크 소리. 피에르는 잠시 비몽사몽인 상태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피에르! 얼른 나와봐!"
그리고 이내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불현듯 생각이 나 벌떡 일어났다.
"앨런? 앨런!"
피에르는 활짝 웃으며 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익숙한 그 얼굴이 자신을 반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앨런! 돌아왔구나!"
"응, 나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땄거든. 이제 미국에서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어."
"축하해. 난 뭐, 그동안 잘 살고 있었어."
피에르는 황급히 곱슬거리는 머리를 정돈하고는 앨런을 안으로 들일 수 있게, 문을 고정했다.
앨런은 조금 어수선하게 물건과 옷가지가 널린 피에르의 하숙방을 바라보았다.
"은행원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일은 잘 돼 가고 있어?"
"음, 보면 알겠지만 금세 잘렸어. 지금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나 전전하는 중이야. 그리고 잠시 고향 캉에도 들러볼 예정이고."
"아하… 그나저나 뮈리엘은…"
"음…"
피에르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아냐, 그냥…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라 조금 당황했을 뿐이야."
"아… 만난 적은 없고…?"
"응… 음, 그나저나 앨런. 너는 이제 여기서 뭐 하려고?"
피에르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눈치챈 앨런은 그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아, 난 맥스 뉴먼 교수님의 추천으로 적당한 일을 하나 찾았어. 피에르, 너도 함께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거 같아."
"뭐, 뭔데?"
"피에르, 같이 암호학교에 들어가자. 거기서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구한대. 거기서라면 우리 전공을 살려서 쏠쏠히 돈 벌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피에르는 생각에 잠긴 채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제안이지만, 내가 그 정도 실력이 없진 않을까 해서 말야."
"무슨 소리, 케임브리지의 졸업장이면 충분해. 캉에 잠시 갔다 온다고 했지? 갔다 오면 함께 그곳에서 같이 일해 보자."
"… 뭐, 그래. 적어도 은행원보다는 재미있겠지."
피에르는 이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얼마 뒤 오를 위스트르앙행 배와 캉의 전경, 그리고 뮈리엘에게 있었다.
앨런은 그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 시간 | 1013 년 |
|---|---|
| 공간 | 섀플리 초은하단 내 버려진 한 행성 |
"별이 전보다 많이 안보이는 것 같아."
"우주에 수소와 헬륨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거든. 그래도 한동안은 백생왜성이 빛을 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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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015 년 |
|---|---|
| 공간 |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백색왜성 |
"백색왜성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어."
"응. 백색왜성이 식어서 흑색왜성이 되며 굳어버리고 있어. 이제 우리 우주에서 빛이라고는 블랙홀의 강착원반 정도밖에 없게 되었네."
"… 까마귀."
"응?"
"이 우주의 모든 별이 사라질 때까지 사랑한다고 했었지?"
"그랬었지."
"그럼, 우리 사랑의 기한이 끝나버린 걸까?"
"아니, 비유적 표현에 불과했지. 이 우주에 있는 별이 모두 식어버려도. 이 우주 안에 우리가 남아 있는 한, 나는 앞으로도 널 계속 사랑할 거야."
| 시간 | 1938년 여름 |
|---|---|
| 공간 | 프랑스, 캉. |
"… 지금은 너무 늦었겠지."
뮈리엘은 얼마나 고쳐 썼을지 모를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 10년도 넘게 지났잖아. 지금쯤 아마 약혼녀가 있을 거야."
뮈리엘은 편지를 도로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뮈리엘은 고개를 숙이곤 한참을 고민했다. 그녀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만이 홀로 남은 대저택 안을 서성였다. 공허한 발소리가 대리석 벽을 때리며 이리저리 울렸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찬 바람이 휙 불어왔고, 한쪽 벽에 걸린 배너가 살며시 펄럭였다. 뮈리엘은 '사피르 캉 학회'라고 쓰인 그 배너가 힘없이 흔들리는 걸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규 인원도 필요하고… 그 귀납 명제 증명 알고리즘을 만들기 위해선… 앨런 튜링의 그 기계가 필요해…"
뮈리엘은 다시 편지지를 한 장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딱딱한 어투로 새 편지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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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938년 여름 |
|---|---|
| 공간 | 영국, 케임브리지. |
1938년 1월 12일. 친애하는 피에르에게.
다시 캉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정말 환영이야. 안 그래도 너의 도움이 필요하던 차였어.
너의 친구 앨런이 이야기했던 그 장치. 아직까진 추상적인 기계라고 했었지만, 내가 실체화할 방법을 찾았어. 너의 도움이 필요해. 네가 잠시 이야기했었던 그 청사진이 필요해. 그것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계산할 장치를 만들 수 있어. 그 장치가 귀납적 명제까지 증명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린 신이 없다는 것까지도 증명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우리는 분석철학의 새로운 역사를 써낼 거야.
이를 위해선 준비물이 필요해.
너 예전에 빵집 옆에 있던 성당 기억나? 어릴 적에 억지로 끌려간 적 있어서 대충 알던 곳인데, 최근 이야기 들어보니 거기 신부가 몇 년 전에 파문당했다고 하더라. 근데 내가 조금 찾아보니까 그 신부는 거기 남아서 밤마다 알 수 없는 이교 숭배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더라. 관련 사람들까지 모아서.
중요한 건, 거기 사람들이 내가 딱 원하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는 연산장치를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앨런 튜링이 이야기했던 그거 말이야. 튜링의 기계는 조금 추상적이지만, 이건 기계역학에 기반한 시스템이야. 난 현재로서 이게 내 논증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캉에 도착한다면, 그 성당에서 만나. 십자가 대신 톱니바퀴가 달려있을 거야.
그 청사진과 계획서 꼭 챙기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 봐.
-뮈리엘 뒤바
편지를 받아 든 피에르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
복잡한 감정이 이리저리 솟구쳤다. 왜 이제야 편지를 보낸 것인지 야속한 마음도 들었고, 그리고 그게 결국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도움 요청에 불과하다는 것에 실망감도 들었다. 거기에 더해,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들었다.
피에르는 답장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아 편지지를 하나 뽑아 들었다. 무엇을 적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그는 어렵사리 펜을 들고 조금씩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939년 1월 21일. 친애하는 뮈리엘.
다른 일정이 많아서 올해 7월 5일에나 캉에 들를 수 있을 거 같아. 그때 거기서 보자.
그리고…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앨런의 기계 이야기보다는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나 같이 한잔 마시는 게 어때?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해. 캉에는 며칠 동안만 있을 거야.
P.S. 요즘 국제 정세가 불안정해. 특히 독일 말이야. 비트겐슈타인 씨는 전쟁은 절대 날 리 없다고 말했지만, 난 그 말을 신뢰할 수 없어. 캉을 떠나 나와 같이 영국으로 가자.
— 피에르 드 오를레앙
모든 글을 적어 내려간 뒤, 피에르는 편지를 반듯이 접어 편지봉투에 넣었다. 어느새 태양은 지고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겨울의 한기가 굳게 닫힌 창문을 뚫고 그에게 도달했지만, 그의 얼굴은 뜨뜻했고, 심장은 여전히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편지의 봉인을 마친 피에르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누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던 꼬마 뮈리엘이 뛰놀고 있었지만, 간헐적으로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있던 뮈리엘의 모습도 뇌리에 박혔다.
그리고 피에르는 조금 심술궂게도, 비트겐슈타인이 프랑스에 없다는 사실에 미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아직도 내가 그 중년 교수를 질투하고 있다니."
피에르가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 시간 | 1027 년 |
|---|---|
| 공간 | 헤라클레스자리-북쪽왕관자리 장성의 한쪽 끝 |
"자, 잘 봐. 이 우주에서 간만에 일어나는 재미있는 사건이야."
"뭔데?"
"이 넓은 우주에서 아직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은 흑색왜성 둘이 곧 충돌하게 될 거야."
"우와!"
"이걸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오! 잠깐잠깐! 곧 충돌하나 봐!"
"와! 와아아아! 예전에 우리, 같이 불꽃놀이 봤던 거 기억나?"
"불꽃놀이가 아니라 헬륨 섬광! 우리 태양이 백색왜성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지."
"진짜 오랜만에 이런 광경을 보는 것 같아."
"아직도 생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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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 1067 년 |
|---|---|
| 공간 | 호킹 복사로 소멸하는 블랙홀 앞 |
"블랙홀도 증발하는구나."
"응. 호킹 복사라고 해. 블랙홀조차도 영원하진 않네."
"까마귀, 영원히 사랑해. 우리 사랑만큼은 영원할 수 있겠지?"
"… 영원한 것은 없어. 언젠간… 모든 것이 끝나고 말 거야."
"그렇지…"
"언젠간, 이 우주의 모든 질량과 에너지가 한 곳으로 뭉쳐서 초거대 블랙홀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 블랙홀도 언젠간 증발하겠지. 그리고 우리 우주는 모두 한 점으로 모여 사라지게 될 거야."
"…"
"비버,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사랑해."
"치! 난 그것을 넘어 더 많이 사랑해."
"으음… 그래, 나도 그만큼 사랑해."
| 시간 | 1939년 봄 |
|---|---|
| 공간 | 프랑스 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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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피르 정기 수학 세미나가 올해 7월 5일로 앞당겨졌습니다.
뮈리엘 양도 여기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때야말로 당신이 이야기한 '명제의 귀납적 추론 알고리즘'을 가지고 오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피르 캉 학회는 해산입니다. 아직까지 인원이 세 명뿐이라지요?
적어도 네 명은 되어야 정식 학회로 승인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다는 것. 똑똑하시니까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 사피르 파리 로지 단장, 프랑수아 베르네 올림
"제기랄…!!!!"
뮈리엘은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그녀의 손이 논리기호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이렇게 되면…"
뮈리엘은 두 눈을 부릅뜨고 탁자 위에 이리저리 난잡하게 펼쳐진 수많은 편지와 문서를 바라보았다.
1939년 1월 21일. 친애하는 뮈리엘.
다른 일정이 많아서 올해 7월 5일에나 캉에 들를 수 있을 거 같아. 그때 거기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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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렇게 또 엇갈리게 되는 거야…?"
뮈리엘은 깊은숨을 내쉬고는 편지를 들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아래에 있던 신문 기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칼 구스타프 헴펠, 사피르 가맹 캉 학회를 향해 '의미 없는 짓 그만하라'
지난 7일 시카고 대학의 학자, 칼 구스타프 헴펠은 캉 학회장, 뮈리엘 뒤바가 제시한 귀납적 논증 체계에 대해 '어떤 명제를 귀납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덧붙여 현재 사피르 학회가 계획하는 귀납적 논증 체계는 실질적으로 무의미하고 인력, 시간, 에너지, 그리고 자원 낭비에 불과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캉 학회는 반발하며 곧 헴펠의 주장을 반박하겠다 발표하였다.
"역시 헴펠 아저씨야. 이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벌써 알아차리다니…"
뮈리엘은 시선을 돌려 무수히 많은 소포 더미를 바라보았다. 몇몇 소포에는 큼직한 톱니바퀴 문양이 낙인되어 있었고, 몇몇은 국제 우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아냐, 난… 난 해내겠어. 미안 피에르, 시간이 없어. 튜링 머신까지 필요 없어. 그 대신 내가 얻은 이것을 사용한다면 널 완성시킬 수 있어."
뮈리엘은 손을 뻗어 나무상자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조르주 르메트르가 보낸 아인슈타인 장 방정식 조정기… 헤트비히 라마르의 1종 영구기관… 이것들은 이미 논리 스트럭쳐에 적용한 기술이고… 아. 찾았다."
그녀는 단단히 밀봉된 소포를 잡아 들었다. 소포의 겉에는 멀리 해외에서 왔다는 걸 알리듯 국제 우표가 켜켜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상자의 라벨에 정갈하게 적힌 글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발송: 멕시코 멕시코시티, 프리다 칼로
수취: 프랑스 캉, 뮈리엘 뒤바
설명: '영혼 채집기'
"까…… 까아…아악……"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은 깃털이 뒤엉킨 무언가가 움찔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뮈리엘은 논리적 까마귀의 미완성품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아주… 아주 조금만 뽑아 넣는다면…"
| 시간 | 10100 년 |
|---|---|
| 공간 | 우주의 중심.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블랙홀 주변. |
"행성이다! 비버! 아직 형체가 남아 있는 행성이 있어!"
"크기도 지구랑 비슷해!"
까마귀는 날갯짓하며 황량하고 차가운 행성의 표면 위로 착륙했다.
비버는 까마귀의 등에서 땅을 향해 뛰어내렸다. 몇 해 년 만에 밟는 땅의 질감에 비버는 신이 나 그 위를 폴짝폴짝 뛰었다.
"와아! 까마귀! 이거 봐! 하하!"
"중력도 지구랑 비슷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 이곳에서 남은 시간 동안 같이 있자. 저 초거대 블랙홀이 호킹 복사로 사라지기 전까진 여기서 지낼 수 있을 거야."
"음, 다른 재미있는 거 보러 가면 안돼?"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이제 사실상 이 우주엔 더는 재미있는 게 없어서 말야. 대부분의 물질은 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어."
"그래? 그럼… 여기서 뭐 하고 놀까?"
"아! 비버, 간만에 바쁜 비버 함수를 여기서 계산해 보는 건 어때? 그거 얼마나 계산했어?"
"으음… 16조 개 중에… 한 1,000억 개? 지금껏 너랑 같이 노느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그럼, 여기서 마무리 지어보는 게 어때? 그게 네 꿈이잖아."
"뭐, 좋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언젠간 다 할 수 있겠지!"
"까악! 응원할게!"
까마귀는 날개를 퍼덕이며 웃었다.
"아, 막대 필요한 거 있어?"
"아냐! 막대가 없어도 바닥에 선을 그으면 돼! 그럼 까마귀, 넌 내가 계산할 동안에는 뭘 할 거야?"
"으음… 글쎄? 아! 한번 블랙홀의 주변에 한번 가 보고 싶어. 지금까지 위험하다고 한 번도 가까이 가 본 적 없잖아. 한 번은 그 주변을 보고 싶어."
"그러다 블랙홀 속으로 빠져버리면 어떡해!"
"괜찮아! 난 시공간을 휘는 워프 드라이브가 있으니까!"
"으응… 그럼… 거기서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면 나한테도 이야기해 줘야 해! 나도 궁금하니까!"
"물론이지!"
확신에 찬 까마귀의 대답에도 비버의 마음은 무언가 석연찮았다. 비버는 우물쭈물하다 까마귀의 날개 한쪽을 잡았다.
"… 다시 돌아올 거지?"
"으응? 난 떠나는 게 아니야! 까악! 잠깐 갔다 오는 거라고! 걱정하지 마! 난 언제나 널 생각하고 있으니까."
비버는 그렇게 답하는 까마귀를 빤히 쳐다보다 와락 안았다.
"… 영원히 사랑해. 까마귀."
"… 나도 사랑해."
"영원히 사랑한다고 해 줘."
"… 내가 살아있는 한, 우주가 남아 있는 한, 난 언제나 널 사랑해."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고는 날개로 비버를 더욱 꼭 안았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
·
·
| 시간 | ??? |
|---|---|
| 공간 | ??? |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피에르와 뮈리엘의 이야기는 곧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게 돼.
"나와 까마귀의 이야기도 이제 끝이 나려 하고 있어."
비버,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쯤, 넌 내게 사랑이 영원하냐고 물었었지?
"응. 넌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했잖아."
맞아. 그렇다면, 넌 뭐라고 생각해?
"난 사랑이 정지문제와 동치라고 했었지. 그 말은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지, 혹은 언젠가 끝날지는 튜링 머신인 나 혼자로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 이 모든 걸 겪어온 너의 직감은 뭐라고 말하고 있어?
"난…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까마귀의 말이 맞았던 거 같아. 사랑은 절대 영원하지 않아. 영원할 수 없어. 시작한 모든 것은 결국 끝나기 마련이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난 이렇게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틀리길 내심 바라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계속 혼란스러워. 너라도 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응.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야.
그렇지만, 나와 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너의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너는 아직 결론에 이르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얻지 못한 걸 수도 있으니까.
"… 그럼, 네 이야기를 마저 들려줘. 나도 내 이야기를 마저 들려줄게."
좋아, 그럼… 나 먼저 시작할게.
이 이야기는 피에르가 캉으로 돌아간 어느 날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