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러다 엇갈리다,
시간 1936년 여름
공간 영국 포츠머스

포츠머스의 항만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프랑스 위스트르앙으로 떠날 예정인 배가 파도를 타고 출렁였고, 그 옆에는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거대한 배가 있었다.

피에르는 위스트르앙행 선박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영국으로 오기 위해 탔던 그 배와 비슷한 크기였다. 피에르의 기억 속의 그 배는 정말 거대하게 느껴졌었지만, 뉴욕행 배와 나란히 선 그 배에 비하면 너무도 조촐해 보였다.

앨런과 피에르는 함께 서서 그 두 배를 따로 쳐다보았다.

피에르는 위스트르앙행 배를 바라보며 5년 전 여름을 추억했다. 그때의 시원한 바닷바람. 정들었던 캉을 떠나 타지로 떠나는 불안감. 이 모든 것이 다시 생생하게 기억났다.

앨런은 앞으로 있을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삶을 생각했다. 또, 그는 뉴먼 교수의 프린스턴 대학 입학 추천서를 받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나게 될 알론소 처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분명, 그와 이야기가 잘 통하리라.

"앨런. 미국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글쎄, 내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질 때? 혹은 천재지변이 생길 때?"

"천재지변?"

"국제 정세가 심상찮잖아. 특히 독일 쪽 말이야."

앨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나는 미국 쪽에서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지만… 피에르 너는…"

앨런은 걱정이 어린 눈으로 피에르르 바라보았다.

"응, 전에 이야기했듯, 난 영국에 남아 있을 거야. 변변찮은 성적이긴 해도, 그래도 케임브리지 수학과의 졸업장이면 어디든 어렵지 않게 취직할 수 있을 거야."

피에르는 가볍게 말했지만 자신과 앨런에게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뒤늦게 눈치챘다.

"…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설마 적당한 직업도 못 얻을까 봐? 아니면…"

"하하, 그래 내가 상상력이 너무 나간 모양이야. 설마 대전쟁이 또 터지겠어?"

앨런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피에르 역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따라 웃었다.
그때, 승선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둣가는 점차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고, 선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피에르. 난 이제 떠날 시간이네."

앨런이 말했다.

"잘 갔다 와. 앨런. 보고 싶을 거야."

피에르는 양팔을 벌리고 앨런을 꽉 껴안았다.

"피, 피에르 잠깐…"

갑작스러운 포옹에 앨런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앨런은 저 때, 잠깐 피에르의 뺨이나 이마에 키스하고 싶었어.

"… 하지만 그러지 못했네."

응. 그에겐 용기가 없었거든.

"… 연락할게. 앨런."

"… 으, 으응…"

앨런은 왜인지 모르게, 피에르가 마치 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자신을 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문득, 그가 이러한 형태의 헤어짐을 이전에도 겪은 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피에르, 뮈리엘은 그때 이후로 본 적 있어?"

"뭐?"

피에르는 앨런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음, 아니.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런데 그건 왜?"

우물쭈물하는 피에르를 본 앨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서 걔한테 가서 용기 내어 고백해 봐."

앨런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잠시나마 뒤를 돌아 피에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다잡았기에, 더 이상의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애, 앨런…"

피에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앨런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참, 괴짜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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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뮈리엘 아가씨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오귀스트 뒤바 주인님께서 지난 13일에 영면하셨습니다.

3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시다, 그날 아침 해를 보지 못하고 떠나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평온하셨습니다.
장례식은 오늘 진행되었습니다. 주인님의 유산과 아가씨에게 남긴 유언장이 있으니 필히 오셔서 주인님의 마지막을 마무리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 위로를 담아, 아가씨의 영원한 집사, 에티엔 르클레르 올림

뮈리엘은 몇 번이고 확인했을 그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 편지는 고급스러운 종이에 푸근한 상아색을 띠고 있었다. 감촉은 보드라웠으나, 평소와는 달리 너무도 얇았다.
복잡한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였다. 뮈리엘은 이 심란함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함이 역력했다.

"후우…"

뮈리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편지지를 도로 접어 안주머니 안에 넣었다. 잠시간은, 이 생각에서 벗어나 머리를 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뮈리엘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시끌벅적하게 에워싸며 배를 기다리는 승객들, 그리고 포츠머스 부둣가에 정박하여 천천히 흔들거리는 배들을 바라보았다. 위스트르앙행 배는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배의 옆에는 뉴욕으로 향하는 육중한 선박이 있었다. 뮈리엘은 분주히 움직이는 승객들과 선원들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어차피 영국에서 학술 활동을 이어가기는 힘들 것은 자명했다. 그토록 비트겐슈타인을 쫓아다녔지만, 그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렸기에, 더더욱이 그녀는 마치 바람에 이리저리 떠내려가는 호수 위의 나뭇잎이 된 느낌을 받았다.

뮈리엘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걸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그 안에서 조금 전 집어넣은 아버지의 부고 편지와, 언제나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 뻣뻣한 푸른 명함이 겹쳐 있는 것을 손가락의 감촉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보았다.

"사피르…"

사피르의 명함은 태양빛을 받아 푸르게 번쩍였다. 금속이 첨가된 것인지, 각도에 따라 그 색상은 반사광을 받아 번쩍이기도 하고, 미묘하게 알록달록한 색을 품기도 했다.

뮈리엘은 자신이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곳이라면, 유의미한 학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지는 않을지 생각했다.

"그놈들은 언제나 신 존재 증명… 아니, 신의 비존재 증명에만 관심이 있지. 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명제에 불과해. 그런 넌센스를 쫓아다니는 건…"

뮈리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이건 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에 불과하잖아. 새로운 나만의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어. 이제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해."

뮈리엘은 자신의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생긴 나쁜 버릇이었지만, 언제나 집중을 도왔다.

"생각, 생각… 생각해 보자. 세계, 사실, 사태, 형식… 이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고전적인 논리 체계에서부터 시작해 보자고. 어떻게 하면 신의 비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연역 체계상에서 할 수 있는 여러 논증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많이 등장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감의 신호가 된 것처럼, 무언가 독특한 생각이 뮈리엘의 뇌리를 스쳤다.

"연역 논증이 아니라, 귀납 논증이라면? 관측한 사실을 바탕으로 논증을 이어갈 수도 있잖아. 하지만… 과연 우리가 신을 관측할 수나 있는 것일까?"

뮈리엘은 어릴 적 빈 학회에서 논쟁을 벌이던 여러 학자 중, 한 인물의 말이 생각이 났다.

"칼 구스타프 헴펠. 검지 않은 것이 까마귀가 아님을 확인한다는 것은 까마귀가 검다는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뮈리엘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까마귀 역설을 이용한다면 적어도 사피르에게 '신의 비존재 증명 알고리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뮈리엘은 이것이 진정한 학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그저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 이건… 그냥 엔터테인먼트야… 하지만…"

뮈리엘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뮈리엘은 생각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벗어난 지금은 우선 조금이라도 학회에 소속되어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활동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했다.

"곧 출항합니다!"

그러나 그때, 뮈리엘은 자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자신만이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뮈리엘은 그제야 조금 전에 울린 종소리가 승선을 알리는 종소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요!!"

뮈리엘은 조그만 위스트르앙행 배에 설치된 탑승교를 치우려는 선원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뮈리엘은 한 손에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에 핸드백을 든 채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선원은 뒤늦게 뮈리엘을 발견하고는 손짓하며 교량의 해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곧 뉴욕행 배가 출발하였기에, 그 배를 타기 위해 뮈리엘의 경로를 가로지르는 다른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뮈리엘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달려 나갔다. 무거운 캐리어와 핸드백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뮈리엘은 중심을 잡기 힘들어 휘청거렸다.
급박한 마음이 무색하게도, 한 거구의 남성이 뮈리엘의 경로를 가로지르며 느릿느릿 걸어갔다. 뮈리엘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의 주변을 빙 돌아 내달렸다.

그리고… 뮈리엘은 그 너머에 있던 마른 체구에 포마드로 누른 머리를 한 청년과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꺄악!"

"으아아!"

그리고 청년의 슈트케이스가 열리고, 하늘에서 눈보라처럼 종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야야… 세상에…"

그 청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괘, 괜찮아요. 그쪽은요?"

"저도 괜찮습니다. 이런 적이 전에도 한 번 있어서요."

그는 방긋 웃으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뮈리엘은 재빠르게 바닥에 널린 그의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 아니에요. 그쪽이 지금 훨씬 급할텐데…"

그러나 그때, 뮈리엘은 그 논문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계산 가능한 수에 대한, 결정 문제의 응용…"

"아, 이건… 제 논문입니다. 힐베르트의 결정 가능성 문제에 대한 거예요."

"… 대단하군요."

뮈리엘은 논문 표지에 적힌 그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 앨런 튜링 씨."

"네, 그게 제 이름입니다."

"저, 저는 뮈리엘이에요. 뮈리엘 뒤바."

"… 뮈리엘이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앨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네? 무, 무슨…"

뮈리엘은 혼란스러움이 밀려 들어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피에르 드 오를레앙 아시죠? 전 피에르의 친구에요."

"… 피, 피에르라고요?"

뿌우우우우우우…

바로 그때, 뱃고동 소리가 울려왔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이! 아가씨! 위스트르앙행 배 안 타실 거요? 우리가 먼저 나가야 뉴욕행 배가 제대로 출항할 수 있소!"

"아! 네! 가, 갈게요…!"

뮈리엘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그리고 앨런은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피에르는 아직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멋진 남자가 사랑하고 있다니, 당신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요. 그는 아직 부둣가에 있을 거예요."

앨런은 이렇게 말하고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는 완전히 얼어붙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논문을 슬쩍 빼내더니 뒤를 돌아 뉴욕행 배의 선착장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뮈리엘은 여전히 굳은 채로 멀어지는 앨런을 바라보았다.

"…"

"아가씨! 우리 곧 출발해야 한다니까?"

뮈리엘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손짓하는 선원이 있는 선착장과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부둣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떡하지…? 선택, 선택을 해야 해…"

뮈리엘은 주머니에 있을 사피르의 푸른 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릴 적 빈으로 떠나기 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소년 피에르를 생각했다.

"선택해야 해… 사피르 혹은 피에르…"

뮈리엘은 자신의 논문을 읽는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논문을 칭찬하고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에게 박수치는 상상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지난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주겠다는 사피르 단장 프랑수아 베르네의 말도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녀는 어릴 적 피에르와 했던 약속도 생각했다.

'난 세계 최고의 논리학자가 되겠어.'
'언젠가 둘 다 수리논리학자가 되어서 다시 만나자.'

뮈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피르 혹은 피에르…"

그리고, 뮈리엘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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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렇게 난 혼자가 되었네."

피에르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출항하는 배를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저 배에 탔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저 배라면 앨런과 더 함께할 수 있었을 테고."

피에르는 왜인지 모를 아쉬움이 사무쳤다. 그의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차차 떠나갔지만, 피에르는 부둣가에 계속 남아서 배를 바라보았다.
큰 배는 선회하여 새빨간 노을 속으로 사라졌고, 작은 배는 그 노을빛을 한껏 받으며 어둠이 드리우고 있을 동쪽으로 떠나갔다.

피에르는 그 두 배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곳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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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조금 전
공간 영국 포츠머스, 위스트르앙행 배 앞

뮈리엘은 결정을 내렸다.

"천재가 아니라면 죽음을…"

뮈리엘은 빈에 있을 때 항상 되뇌이던 그 말을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선착장을 향해 뛰어갔고, 그렇게 배에 올랐다.

교량이 치워지고, 닻이 오르고, 배는 출항했다.

태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뮈리엘은 영국을 떠났다.

피에르는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둘은 교차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또다시 멀어졌다.




시간 18만 년
공간 어느 황무지. 오래전에 하버드 대학이 있던 곳.

황무지 사이에 뭉툭한 무언가가 솟아 있었다.
얼핏 보기엔 그 문은 황무지의 다른 돌들과는 달리 붉은 색깔과 뭉툭하지만, 꼿꼿이 선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끼기기긱…

그리고, 그것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그리고는 안에서 까마귀 한 마리와 비버 한 마리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우와!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여기 전부 눈밭이었는데!"

"간빙기가 다시 시작된 모양이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왔지만. 오라클이 아직 작동한다면 뭐라도 좀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 예전엔 식물도 많고 그랬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빙하기 동안 대부분 죽었나 봐. 적도 부근엔 아직 식물이 남았을 수도 있어."

"이제 뭐 할 거야? 까마귀?"

"음, 뭐, 예전처럼 같이 여행이나 가자."

"더 수집해야 할 정보는 없어?"

"응, 이제는 딱히 필요 없어. 그냥 비버, 너와 같이 있는 게 좋아."

"나도 좋아!"

까마귀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럼, 어딜 가볼까? 적도에 가볼까? 아니면 태평양? 아니면… 달에 가볼래?"

"맞아! 너 우주도 갈 수 있다고 했지?"

"흐흐, 어디든 말만 해. 내가 데려다줄 수 있으니까."

"히히히… 어디든 좋아!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말야!"

비버는 까마귀를 와락 껴안았다.

까마귀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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