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용기내어 고백도 하고,
시간 1935년 봄
공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1900년. 제2회 파리 수학자 대회. 여기에서 다비드 힐베르트는 수학계가 풀어야 할 23가지 중요한 난제를 제시했지."

맥스 뉴먼은 분필을 들고 칠판 위에 커다란 직사각형 3개를 쌓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23개 문제 중 2번째 문제, 바로 '산술의 공리가 무모순임을 밝히시오'야."

그는 첫 직사각형에 큼직한 글씨로 '무모순성'을 써넣었다.

"어떠한 공리체계로 이루어진 모든 정리는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힐베르트는 수학이 인간의 직관과 사고의 산물이라는 크로네커와 푸앵카레와 같은 직관주의자들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했지. 왜냐하면 직관주의에서는 어떤 명제가 참이 아니면 거짓이다라는 규칙, 즉, 배중률을 거부했거든.

배중률을 거부한다는 것은 체계에 모순을 허용한다는 것이고, 모순이 허용된다면 폭발 원리, 혹은 Ex Falso Quodlibet(거짓으로부터 무엇이든)이라고 부르는 정리에 따라 모든 명제가 도출 가능해져 버리고, 그렇게 그 체계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수학이라는 공리체계는 무모순성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래서 이 체계 내에서 도출되는 모든 정리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뉴먼은 그다음 직사각형에는 '완전성'을 써넣었다.

"힐베르트는 수학이라는 체계가 그 자체로서 완벽한 형식이라 믿었어. 이것을 우리는 '형식주의'라고 불러.
그는 수학이 완벽한 형식이므로, 산술의 공리가 완전하다고 생각했어. 즉,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정확히는, 참인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그는 '힐베르트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거대한 수학적 프로그램을 발족했어. 여기에서 그는 수학에 대한 세 가지 주요한 질문을 던졌지. 하나, 수학은 무모순인가? 둘, 수학은 완전한가? 셋…"

그리고 그는 마지막 칸에 '결정 가능성'을 써넣었다.

  1. 무모순성
  2. 완전성
  3. 결정 가능성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결정 가능하다라는 것은 어떤 명제가 공리를 따르는지를 알아내는 일반적인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해. 그러니까 그는 단지 완벽함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일종의 자동기계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야."

그는 칠판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이 적은 이 세 블록짜리 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빨간 분필을 들어 두 번째 단어인 '완전성'에 빗금을 그었다.

  1. 무모순성
  2. 완전성
  3. 결정 가능성

"하지만 그의 꿈은 아쉽게도 무너지고 말았지. 누가 그의 원대한 꿈을 무너뜨렸는지 혹시 아는 학생 있나?"

맥스 뉴먼은 뒤를 돌아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학생이 창밖을 바라보거나, 낙서하거나, 머리를 비운 채 멍하니 칠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혹시… 그 논문 읽어본 학생이 있으려나?"

그제야 여러 학생들은 정신이 들고는 자신이 지목되지 않기 위해 애써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놀랍지는 않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한 학생만큼은 뉴먼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한 손을 들고 있었다.

"앨런. 앨런 튜링. 그 논문 읽어본 모양이지?"

"음, 네. 사실 저도 최근에 읽어봤습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특히 제1불완전성 정리는 어떠한 공리 체계는 무모순적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또, 곧이어 그는 제2불완전성 정리로 어떠한 공리 체계는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뉴먼 교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첫 번째 단어에도 빗금을 그었다.

  1. 무모순성
  2. 완전성
  3. 결정 가능성

"맞아. 괴델은 두 번에 걸친 발표로 힐베르트의 세 꿈을 두 개나 부수어 버렸지. 우리 러셀 교수의 패러독스를 기가 막힌 방식으로 응용하여 만든 훌륭한 증명이었어."

뉴먼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힐베르트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에겐 그의 세 번째 꿈 또한 머지않아 깨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과연, 모든 명제는 증명 가능할까? 일반적인 증명 알고리즘이 존재할까? 어떤 명제에 대한 논리적 혹은 계산적인 증명 스트럭쳐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그런 특정한 기계적 절차를 통해서 모든 것을 증명해 낼 수 있을까? 튜링! 네 생각은 어떠하니?"

"으음, 잠시만요."

갑작스러운 교수의 질문에 앨런은 머리를 긁적였다.

"'기계적' 과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계적 과정이란… 음… 말 그대로 기계로 행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닐까요?"

"기계로 행할 수 있는 과정이란 무엇인가? 튜링 군."

"일종의 알고리즘, 규칙을 통해 자동화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특정한 규칙을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기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기계적 과정이겠죠."

뉴먼은 조리 있는 그의 대답에 큰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뉴먼은 튜링에게 다가와 그의 사고 과정을 두 눈으로 보려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럼, 튜링 군은 그 추상적 자동 계산 기계가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러셀 패러독스를 응용한다면 뭔가 힌트가 있을 것 같지만…"

"그냥 느낌만이라도 괜찮아. 적당히 그럴듯한 반례가 생각나진 않나? 나는…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신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아닐까 생각해. 뭐, 역시 근거는 없지만 말이야."

뉴먼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런, 일종의 농담이었는데. 별로 웃기진 않았나 보군."

앨런은 그의 말에 무언가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뭐,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네. 이건 확실히 교수님의 것보다 웃긴 농담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말해 보게."

뉴먼의 말에 앨런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사랑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음, 이건 확실히 내 농담보단 재미있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사랑하는 이가 언제쯤 자신을 바라봐 줄지, 이 설레는 마음이 언젠가 끝나버리진 않을지, 과연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이어질 수 있는지는 직접 실행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결정 불가능 문제입니다."

뉴먼은 그의 말을 듣고는 껄껄 웃었다.

"자네가 그리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몰랐군그래."

뉴먼은 얼굴에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싱글벙글 웃으며 칠판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칠판 위 마지막 블록인 '결정 가능성'에 하트를 그러넣었다.

"좋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혹시라도 공리 체계가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오는 학생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내가 좋은 위스키를 한 병 사 주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추천서를 써 주도록 하지. 수고했다 제군들!"

그의 말과 함께 모든 학생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앨런 튜링만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하트가 그려진 칠판을 응시했다.

'결정 가능성'

튜링은 그 단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머릿속에서 실과 같은 팽팽한 무언가가 날카롭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 1936년 봄
공간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실

뮈리엘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10시 정각이 지난 지 1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았다.

넓은 강의실에 외로이 놓인 칠판 하나. 그리고 그것을 방사형으로 둘러싼 접이식 의자 대여섯 개.
의자에 앉은 학생들은 또다시 찾아온 비트겐슈타인의 변덕에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 책을 읽거나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뮈리엘만큼은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았고,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하염없이 듣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뮈리엘 뒤바… 라고 하셨죠?"

옆의 의자에 앉은 한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원래 저희 교수님이 많이… 좋게 말해 즉흥적인 분입니다. 정식 수업으로는 처음으로 참여하시다 보니 아무래도 당황하신 모양…"

"제가 그쪽보다 비트겐슈타인 씨를 더 잘 알아요. 저와 교수님은 9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예요."

뮈리엘의 날카로운 대답에 그는 입을 다물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변의 다른 이들도 잡담을 멈추고는 적막한 침묵을 만들었다.

"…"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강의실을 채운 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뮈리엘은 고개를 번쩍 들고 정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기다렸지만,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비트겐슈타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드르르륵.

"오늘 수업 휴강이라십니다."

프랜시스 스키너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었다. 뮈리엘은 얼굴이 굳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뮈리엘 자신이 아니라, 저 어리고 미숙한 청년에게 맡기곤 했고, 자신과 있지 않을 땐 그가 저 청년과 항상 함께 있었기에, 뮈리엘은 프랜시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왜 휴강이라고 하시던데?"

뮈리엘이 물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송글송글 맺힌 땀을 한 손으로 닦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교수님이… 영화를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 영화? 어디서?"

"지금 리전트 시네마에 계십니다…"

뮈리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뮈, 뮈리엘 씨!"

프랜시스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뮈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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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5조 속도를 더 올려! 407로!

경쾌한 음악소리,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찰리 채플린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컨테이너 벨트 앞에서 너트를 조였다. 그의 팔이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때마다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쾅!

그리고, 갑작스레 극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어두운 극장 내부로 빛이 새어 들어갔다.
관객들은 뒤를 돌아 문을 연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뮈리엘은 땀범벅이 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실루엣의 한 사람만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영화 스크린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절 바라봐 주지 않는군요. 루트비히."

"뮈리엘."

역시,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뮈리엘은 그가 앉은 좌석까지 성큼거리며 다가갔다.

"루트비히, 왜 당신은 이렇게도 제게 관심이 없나요?"

"뮈리엘, 지금 내가 영화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잖아."

"영화가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중요해. 영화를 보는 것은 정신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효과가 있어."

"말장난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확실하게 말해 줘요. 루트비히. 앞으로도 저와 함께하고 싶으신 게 맞나요?"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영화 스크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전… 전 당신과 함께 이곳에서 논리학을 더 연구하고 싶은걸요?"

"뮈리엘…"

뒤늦게 비트겐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고개는 여전히 스크린에 고정된 채였다.

"이런 곳에서 이런 걸 연구한다는 것은 저주야. 나는 너만큼은 이런 저주의 구덩이에서 고통받지 않았으면 한다. 나를 떠나 일거리를 찾으렴. 나는 케임브리지에 온 걸 후회해. 소비에트에서 농장이나 꾸릴걸, 아니면 배달원도 나쁘지 않고…"

"루트비히, 하지만… 전… 세계 최고의 논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제가 빈에서 바이올린 연습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왜 절 거두어들이신 건가요? 왜 절 빈 학회에 초대해 주신 건가요? 왜요?"

뮈리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야…"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고개를 돌리고 뮈리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깊었고 반짝였지만, 여느 때와 달리 축축했다.

"그때의 너도, 최고가 되기 위해 너 자신을 갉아내고 있었으니까. 최고의 바이올리스트가 되지 못하면 죽으려 했으니까. 난 널 구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야."

뮈리엘은 비트겐슈타인의 얼굴을 보자 둑이 무너지듯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너는 그때와 똑같아. 세계 최고의 논리학자가 되기 위해 너는 네 삶을 갉아내며 이 별 볼 일 없는 아저씨나 쫓고 있어."

"루트비히… 당신은 절 사랑하긴 하나요?"

비트겐슈타인은 오랜 시간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뮈리엘…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정을 준 것 같다."

"전… 그래도 전, 당신을 사랑하는걸요…?"

"뮈리엘."

비트겐슈타인은 뮈리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동경과 사랑을 혼동하지 말렴."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뮈리엘의 손을 놓고,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뮈리엘은 정말 슬펐을 것 같아."

물론이지.
그렇지만 그녀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어.
정해지지 않고 휘몰아치는 마음 사이에서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뮈리엘도 그럼 자신이 비트겐슈타인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단 것을 알고 있었단 거야?"

지금껏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을 뿐이야.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그녀는 최고의 논리학자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으로 그를 따라 빈에서 케임브리지까지 왔어.
이제껏 너무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아온 것들이 너무도 컸던 거지.
그녀는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으려 한 거야.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무너졌네."

그래.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어.




시간 13만 년
공간 베리타스 프로젝트 벙커

"으음, 이 정도면 됐으려나?"

까마귀는 푹신한 방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몇 걸음 뒷걸음질 치고 다시 방석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가운데는 아닌 거 같은데? 오라클? 너 보기엔 어때?"

영화를 재생합니…

"아니, 아니! 너 보기엔 이 방석이 영화 스크린 정중앙에 있는 거 같아?"

… 메모리 참조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음악을 재생합니…

"까악! 너 요즘 왜 그래! 내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

기반 시설이 노후화되었습니다. 베리타스 프로젝트는 5만 년간의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음… 인간들은 5만 년 정도 보존할 걸 상정하고 이 베리타스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기간을 넘어서 시스템이 겨우 돌아가고 있다는 거지?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있었지?"

약 13만 년, 곧 예정된 식사 시간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스프링클러를 작동합…

"까아악!! 멈춰! 이곳을 침수시킬 생각이야?"

까마귀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까마귀는 마지막으로 방석의 위치를 확인한 뒤,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오라클, 지금 비버는… 아니다, 너 또 뭔가 이상한 짓을 저지를 것 같아. 내가 직접 찾아봐야지."

까마귀는 어차피 비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대강 알고 있었다. 지하의 널찍한 복도에서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를 계산하고 있을 게 뻔했다. 까마귀는 시청각실을 나와 지하의 복도를 향해 종종거리며 걸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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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버?"

까마귀는 아무도 없는 어둡고 텅 빈 복도를 바라보았다. 비버를 찾는 그의 물음은 공허히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어… 비버?"

까마귀는 살며시 복도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복도에는 바닥이 움푹한 형태로 음각된 사발이 무수히 많이 들어차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닳아버릴 대로 닳아버린 식기구가 겨우 형태를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여전히 열심이구나."

까마귀는 그 막대가 영향을 받지 않게 조심스레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비버! 중요한 일이야! 으음, 오라클한테 문제가 생겨서 말야. 위층에 있는 시청각실에 같이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복도의 한쪽 끝 어둠 속에서 힘없이 타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

"비버!"

까마귀는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날아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왜인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비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 계산은 잘하고 있었어?"

"아니, 요즘 재미없어서 안 하고 있었어."

"그, 그랬구나… 아, 아무튼! 빨리 시청각실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음… 아! 물이 새고 있어! 댐 같은 걸 지으면 잘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댐… 안 지은 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깍! 그래도! 넌 비버잖아! 할 수 있을 거야! 어서 와!"

까마귀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비버는 마지못해 그런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까마귀, 오라클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오라클? 걔는 요즘 조금씩 맛이 가고 있어서 말이야. 너도 알잖아? 최근 몇천 년간 헛소리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어."

"아니, 아까 오라클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그런데 아까는 물이 샌다고 그래서 말야."

"어… 그러니까… 누수… 메모리 누수가 있어! 네가 댐을 프로그래밍 해 주면… 아냐! 일단 와봐!"

까마귀는 비버의 뒤편으로 와 엉덩이를 밀며 걸음을 보채기 시작했다.

"으음…"

"그나저나, 요즘 오라클이 정확도가 많이 떨어져서 고민이 많아. 이전에 했던 말이 계속 메모리에 남아서 이후 말하는 것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나 봐."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며 날개를 펼치고 파닥거리며 계단통을 올랐다. 비버는 그를 따라 천천히 한 계단씩 올랐다.

"아까는 갑자기 먹는 것에 꽂혀서 요리나 식사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더라."

"응, 그렇구나."

"영화 이야기도 부쩍 많아졌어. 좋은 영화를 추천해 준다고 막 그러더라."

까마귀는 왜인지 모르게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시청각실의 반쯤 열린 문틈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더니 걔가 갑자기 나한테 영화랑 같이 고급 음식을 먹는다면 굉장히 로맨틱할 거 같다고 말하는 거야. 원래 이 벙커엔 보존 식품이 많이 있다고, 몇몇 재료는 영구보존 된 것도 있다고 하더라고."

"… 까마귀."

까마귀는 쉬지 않고 재잘거리면서 한쪽 날개를 들어 시청각실의 문을 잡았다.

"그러니까 오라클이…"

"까마귀. 넌 오라클이 그렇게 좋아?"

"… 뭐?"

까마귀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비버를 바라보았다. 비버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네가 아프리카 대륙을 조사하러 떠난 때도 파리에서 계속 기다렸어. 항상 함께할 날을 기다리면서 말야.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으, 으응."

"안다고? 아니! 넌 몰라! 너는 여기 와서 맨날 오라클하고만 이야기하느라 내 신경도 안 쓰잖아!"

"아니, 그게 말이야… 비버, 잠깐…"

"너는 오라클이랑만 같이 놀잖아! 오라클이 그렇게 좋으면 오라클이랑 살아!"

"비버…"

"나는 너랑 영화도 보고 싶었고, 레스토랑 같은 데에서 같이 식사도 하고 싶었고! 같이 음악도 들으면서 춤추고 싶었다고! 근데 넌 오라클에게만 관심 있잖아! 맨날 오라클이랑만 이야기하잖아!!"

"비, 비버!"

"아직도 모르겠어? 나 너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같이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이 멍청아!"

까마귀는 멍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토해낸 비버를 바라보았다.

"비버…"

그리고 비버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앙!!! 난 몰라!!! 저리 가버려!!!!"

"비… 비버… 사실…"

까마귀는 시청각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화사하게 켜진 촛불과 그 앞에 차려진 음식들, 그리고 깜빡이며 상영을 준비하고 있는 스크린이 커다랗게 있었다.

"내, 내가 먼저 고백하고 싶었는데… 내가 열심히 꾸린 데이트 코스야. 내가 이곳에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비버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까마귀가 열심히 준비했을 시청각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용자: 논리적 까마귀의 요청 사항 완료됨. '둥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쁜 비버.

첫 번째 코스: 영화 관람을 실행합니다.
추천 영화는 <노트북>입니다.

빔 프로젝터가 깜박이며 켜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스크린 앞에 놓인 몇 개의 촛불들 사이에 푹신하고 기다란 방석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그 크기는 딱 비버와 까마귀가 앉기에 적당했다. 비버는 홀린 듯 다가가 그 위에 앉았다.

"까, 까마귀… 이건…"

"네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찾느라 많이 고민했어."

이렇게 말하며 까마귀는 비버의 옆에 따라 앉았다.

"취향에 맞았으면 좋겠…"

화재 우려 시 비상 플랜: 스프링클러를 작동합니다.

"까악! 자, 잠깐! 오라클!!! 지금은 안돼!!!!!"

푸쉬시시식!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돼! 내가 열심히 만든 크림파스타가!!!"

순식간에 차오른 물웅덩이 위로 나무 접시에 담긴 누런 무언가가 물속에 잠겨 마치 잉크 풀리듯 형체를 잃어갔다.

"어렵게 찾은 양초! 푹신한 방석! 안돼!!!"

까마귀가 오열하며 연기조차 내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초들과 축축히 젖어버린 방석을 끌어안았다.

"인생은 쉬워, 그런데 우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영화! 영화가!!!!"

빔프로젝터에서 파지직하는 소리가 들리며 스크린이 깜박이고, 영화의 장면도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편지를 써주지 않은 거야??

내겐 끝이 아니었다고!!!"

"안돼! 저건 클라이맥스였다고! 난 저 장면을 함께 보고 싶었어!!"

까마귀가 스크린 앞에서 오열했다.

"아직 끝… 이 아니…야…"

스크린은 심각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 바닥이 내려앉으며 우르르쾅쾅하는 천둥과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까마귀!"

귀를 때리는 듯한 폭풍우 소리 사이에서, 까마귀는 비버의 외침을 들었다.

"애, 애애애애앨…리…!!!!"

"노… 아아아…!!"

"비, 비버!"

"괜찮아… 난…!"

비버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까마귀에게 다가왔다.

"… 사… 랑… 해……!!

…

어어언…젠간…

다…시… 마아아안… 나………!!!!!"

"함께 있으니… 행복해…!"

"비버…!"

까마귀는 비버를 와락 안았다.

"사랑해… 비버…"

"나도 사랑해… 까마귀…"

웅장하게 울리는 영화의 OST, 그리고 사방을 때리는 빗소리와 점멸하는 스크린, 천둥소리.
그 사이에서 까마귀와 비버는 우두커니 껴안은 채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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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코스: 음악과 함께 파인다이닝 코스를 시작합니다.

추천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입니다."

나의 추억들로 난 불을 밝혔었죠.
나의 슬픔들, 나의 기쁨들.
이젠 더 이상 그것들이 필요치 않아요!
사랑들을 쓸어 버렸고
그 사랑들의 모든 전율도 쓸어 버렸어요.
영원히 쓸어 버렸어요.

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

"비버…"

"응…"

"이 우주의 모든 별이 꺼질 때까지 사랑해."

"… 나도…"

"있잖아."

응?

"난 그때 키스를 하고 싶었어. 저 영화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하지 않았어?

"그냥… 용기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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