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 1931년 가을 |
|---|---|
| 공간 | 영국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
따스한 햇볕이 피에르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피에르는 기분 좋게 포근한 이불에서 두 팔을 꺼내 기지개를 켰다.
대학에서 첫 수업을 듣게 된다는 사실에 너무도 설렜던지, 밤동안 그는 수차례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에서 깨 뒤척였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 깊이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따스한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 이상하게도 개운한 아침.
… 이상하게도 개운한 아침.
"…"
피에르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기랄!"
케임브리지의 1931년, 첫 학기를 맞이한 피에르가 내뱉은 첫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첫날부터 지각은 안 되는데!!"
겨우 옷을 걸친 피에르가 황급하게 기숙사의 문을 박차며 튀어나왔다.
그는 아직도 덥수룩한 머리를 어떻게든 매만지며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조여 맸다.
"큰일 났다. 선형대수학 강의실이… 어디지…"
피에르는 우왕좌왕하며 기나긴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출구가 있는 방향을 기억해 내곤,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피에르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기숙사의 출입문을 통과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자, 피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바로 앞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 또 다른 청년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늦게 알아차렸다.
"… 어?"
"어어?"
두 청년은 보기 좋게 탄성 충돌을 일으켰다. 피에르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앞으로 넘어져 바닥을 서너 바퀴 굴렀다. 청년도 손에 잡고 있던 종이들을 하늘 위로 놓치며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꽈당 넘어졌다.
"아아악!"
"아야야… 세상에…"
하늘에서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종이들. 그 청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 비틀거리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피에르에게 다가갔다.
"저, 그… 괜찮아?"
"… 별로 안 괜찮아."
피에르는 온몸이 쑤시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피에르를 부축하기 위해 그의 옆에 쪼그려 손을 건네었다.
"그… 일어날 수 있겠어?"
"음, 그게…"
피에르는 그의 손을 잡았다.
"으쌰."
피에르는 그에게 기대어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피에르를 일으켜 세운 뒤에 몸을 숙여 주위에 널브러진 문서들을 줍기 시작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피에르는 힘겹게 몸을 숙여 문서를 줍는 것을 도왔다.
"뭐, 괜찮아. 나는 그렇게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니까."
피에르는 바닥의 종이들을 모두 모아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그… 혹시 이름이…"
청년은 피에르가 건넨 서류들을 받아 들고는 찬찬히 미소 지었다.
"앨런 튜링. 그냥 앨런이라고 불러줘."
"난 피에르. 피에르 드 오를레앙. 프랑스 출신이야."
"말투 보니 그런 거 같더라."
"그, 그럼, 난 수업에 늦어서… 이만 빨리 가 볼게."
"어떤 수업? 선형대수학?"
"어? 맞아. 그거야."
"그거 이미 오리엔테이션 끝났어. 난 그거 끝내고 남은 시간에 쉬려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이었거든."
"하아… 이런… 헛수고했네."
피에르는 앨런의 말을 듣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잔디밭 위에 그대로 쓰러져 대자로 뻗었다.
그것을 본 앨런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옆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앨런, 넌 왜 또 그러는데?"
"뭐, 너 혼자 그러고 있으면 무안할까 봐.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이라도 구경하는 줄 알겠지."
"… 넌 참 괴짜 같네."
"넌 칠칠이 같고."
"… 아니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변명하는 것까지 칠칠이 같아."
"… 무적의 논리로군."
이렇게 말하고 둘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같이 바라보았다.
피에르는 이 낯설지만 친절한 이, 앨런 튜링을 볼 때마다 미묘하게 뮈리엘이 떠올랐어.
그리고 앨런은 이 칠칠맞지만 인간적인 이, 피에르를 볼 때마다 마음속 공허히 자리 잡은 옛 친구 모컴을 떠올리게 했지.
그렇게 둘은 말없이 하늘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은 서로가 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친구 삼기 좋은 이라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인해 이제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었다. 그 덕에 까마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방향을 잡기 훨씬 수월해졌다.
수십 개의 별들이 폭발해 사라졌다. 별자리에는 하나둘씩 공석이 생겨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밤하늘은 이전처럼 아름다웠다.
빙하기는 더욱 심해졌다. 지구의 상당 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자취를 감추었다. 북극곰이나 바다표범, 북극여우와 같이 북극에 살던 생물들이나 가끔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몇 달에 한 번 꼴이었다.
파리엔 이제 나무가 없다. 매일 내리는 눈은 조금씩 쌓여 설원을 형성했고, 비버는 그 눈 덮인 평원 위에서 까마귀가 이전에 선물한 금속, 플라스틱 막대, 혹은 얼음을 깎아 만든 막대를 이용해 여전히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을 계산했다.
이렇게 비버는 지금까지 이를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약 800만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다.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0.00005%였다.
| 시간 | 10512년 |
|---|---|
| 공간 | 한때 파리였던 설원 |
여느 때처럼, 눈이 쌓인 굴에서 비버가 기어 나왔다. 휘몰아치는 강풍을 타고 칼날 같은 추위가 몸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러나 비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발로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음. 눈밭. 나무 한 그루 없는 눈 덮인 언덕.
매번 같은 풍경을 반만 년 가까이 보고 있자니, 비버는 이제 조금 싫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 지구의 날씨는 너무도 단조로웠고, 몇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초신성 폭발을 기다리는 것도 지루했다.
비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제는 흔적만이 남은 자신의 아지트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린 이후, 나뭇가지를 엮어 천장을 덧대어 보기도 했지만, 몇백 년이 지나자 금세 썩어 사라지고 말았고, 더 이상 나뭇가지를 수급할 곳도 마땅찮아졌다. 비버는 이제 눈을 뭉쳐 천장을 만들었고, 이후로 계속해서 눈이 적층되고 압축되어 이제는 단단한 천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비버의 아지트는 바깥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눈 언덕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비버는 언젠간 다시 올 까마귀가 자신의 아지트를 찾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버는 하염없이 까마귀를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이 기다림이 언젠가 끝이 날지, 혹은 영원히 계속될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난 이게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이 기다림에 끝이 있을까?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이 언젠간 끝이 날지, 아니면 영원히 계속될지 그 여부를 계산할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이이이이야~ 호오오오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한껏 격양된 목소리의 환호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설원 위에 쓸쓸히 앉아 있던 비버는 화들짝 놀라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내, 동쪽 하늘에서 검은 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비버! 드디어 제1임무가 완료되었어!"
까마귀는 하늘에서 공중제비를 몇 번 돌더니 지상으로 착륙했다. 까마귀는 해맑은 표정으로 비버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드디어 드디어!! 내 궁극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어!"
까마귀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와아아! 축하해 까마귀!!"
비버는 까마귀를 따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 근데 어떻게 '검지 않은 모든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증명한 건데?"
"사실 잘 모르겠어. 얼마 전에 지구에 남은 마지막 까마귀가 얼어 죽어서 그런가 봐. 그래서인지 자동으로 제1임무가 완료 처리되었고, 제2임무가 활성화되었어."
"제2임무가 뭔데?"
비버의 물음에 까마귀는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모든 것.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조사할 것이야. 그렇게 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해 낼 거야. 내 주인님의 마지막 궁극의 요청이지."
"… 어떻게 그런 명제를 증명할 건데? 네가 과연 신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똑같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 아니다.'와 동치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돼. 그러기 위해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조사해야 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지금껏 나한테 잠겨있던 기능들이 해제되었어."
"잠겨있던… 기능…?"
바쁜 비버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논리적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자, 잘 봐. 이제 난 이것까지 가능하다고."
이를 눈치챈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며 눈 덮인 바닥에 엎드리며 몸을 낮추었다.
"조심해. 충격파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비버는 그 말을 듣고 몇 발짝 물러났다.
까마귀는 이를 확인한 뒤에,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으아아악!"
까마귀의 실루엣은 순식간에 하늘 속으로 사라졌고, 푸른 하늘에는 밝은 태양과 함께 새하얗게 뜬 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달이 떠 있던 방향의 하늘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까마귀가 돌아와 얼음 바닥에 꽂히다시피 착지했다.
"헉… 헉…"
까마귀의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고, 까마귀가 딛고 있는 설원은 치익거리며 녹아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까마귀는 고개를 들어 부리에 물고 있던 돌멩이 하나를 놀란 비버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돌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아?"
"어… 어딘데?"
까마귀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부리로 하늘에 뜬 달을 가리켰다.
"이거 월석이야. 나, 이제 우주 어디든 갈 수 있어. 제2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야."
"와아아! 축하해!"
"하지만 비버. 아직은 아냐. 난 아직 이 지구에서 얻어야 할 정보들이 많이 남아 있어. 난 이제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날 거야."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고는 비버를 빤히 쳐다보았다.
"… 비버."
"으, 으응?"
"난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
"뭐, 뭐 말이야?"
비버는 까마귀가 무엇을 말할지 직감하고 있었지만, 조금 심술이 돌아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마음은 정했니? 같이 나와 함께 아메리카로 가는 것에 대해?"
"으음… 그건 말이지…"
비버는 일부러 시간을 끌며 까마귀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나의 임무가 있어.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를 계산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규칙표를 확인해야 하는데…"
비버는 슬쩍 까마귀의 표정을 살폈다. 비버는 잔뜩 긴장한 까마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래도, 난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좋아! 같이 여행하자!"
"후아!"
까마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는지 조금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전히 널 기다리게 하는 날이 많을 수도 있어. 이제부턴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단지 사물에 국한되지 않거든. 도서관 같은 곳… 그런 곳이 남아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 곳에서 몇 달간 나오지 않고 책만 읽고 있을 수도 있어."
"괜찮아. 그럴 땐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를 계산하면 되지. 너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난 상관없어."
비버의 대답을 들은 까마귀는 어안이 벙벙해져 비버를 바라보았다.
"비, 비버…"
비버는 그런 까마귀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앗! 너무 빤히 바라보면 부끄럽다고!"
"미! 미안! 그게…!"
그 말에 까마귀는 애써 눈을 피했다.
"그러면, 널 어떻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너, 내 위에 올라탈 수 있겠어?"
"으음… 한번 해 볼 게…"
비버는 뒤뚱거리며 까마귀의 등에 올라탔다. 까마귀는 묵직한 중량이 다리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끄응…"
"까마귀, 날 수 있겠어?"
"공기역학적으로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번에 새로 얻게 된 기능이 있으니까."
까마귀는 날개를 천천히 폈다.
"자, 꽉 잡아 비버.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응!"
까마귀는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잠시 일렁이더니, 까마귀와 비버는 하늘로 솟구쳤다. 까마귀는 비버를 등에 올려두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회전하며 비상했다.
"으아아아아아! 너무 높아!"
"까악! 아직 다 안 올라왔어! 좀만 참아!"
비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까마귀를 꼭 안았다. 폭풍에서나 느낄 수 있던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펄럭이는 소리가 났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한 햇볕이 느껴졌다. 비버는 그제야 눈을 살며시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 우와…"
한때 파리라 불리던 설원 일대가 까마귀와 비버의 아래에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늘막에 쌓인 눈과 태양에 녹아 지면이 드러난 부분이 대지의 굴곡을 따라 기묘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이제 흔적도 알아볼 수 없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비버는 평소 저 멀리 보이던 산맥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새삼 이렇게 하늘에서 보니, 그렇게 넓어 보였던 이곳이 너무도 비좁아 보였다.
"어때? 비버?"
"예뻐… 너, 이런 거 매일 보고 있었구나?"
"뭐, 맞아. 나한테는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별 감흥이 없지만 말이야."
까마귀는 몸을 젖혀 태양이 비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비버. 어디부터 가 볼까?"
"난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몰라. 까마귀 네가 추천해 주는 곳부터 가볼래!"
"뭐, 그럼. 좋아! 조금 더 속도를 내 볼게. 꽉 잡아 비버!"
비버는 까마귀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까마귀는 부드럽게 가속하며 하늘을 갈랐다.
| 시간 | 1933년 겨울 |
|---|---|
| 공간 |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의 도서관 |
"이거 봐봐."
앨런이 피에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피에르는 과제에서 눈을 떼고 그가 건넨 책을 슬쩍 흘겨보았다.
"…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반?"
"존 폰 노이만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야.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따고 엄청난 논문들을 많이 썼다나 봐."
앨런은 낮게 속삭이며 책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젠 양자역학까지 마스터하려고? 막스 보른 교수님에게도 잘 보이고 싶은 거야?"
"뭐, 어쩌면? 하지만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야. 내가 전부터 생각하던 아이디어가 이 책을 읽고 나니 꽤 실현 가능해 보이기 시작했어."
"뭐? 어떤 아이디어인데?"
"강령술."
"… 뭐?"
"하하, 농담이고, 그냥 사람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0과 1로 표현하고 그 내부의 프로세싱 과정을 모두 알고리즘화한 뒤에 그것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 그게 강령술 아냐? 일종의 기계적 강령술."
"뭐,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턴 '시뮬레이션'이라는 멋진 용어를 써 보자고."
피에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앨런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된 건데? 이상한 펄프 픽션에서 본 건 아니야?"
피에르는 그에게 가볍게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그러나 앨런의 표정은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무언가 공허하고, 슬퍼 보였다.
"… 친한 친구가 있었어."
어색한 침묵 후에 앨런이 입을 열었다.
"… 그 친구가 나한테 보여준 싸구려 펄프 픽션에 나오던 내용이었나 봐! 하하!"
앨런이 이렇게 말하며 키득거렸다.
"앨런! 조용히 웃어! 여기 도서관이야! 여기서 떠드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피에르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엇."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이야기했던 앨런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도서관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에르는 앨런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계속해서 입구를 쳐다보았다.
피에르는 그제야 도서관 내의 사람들이 모두 입구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피에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결국 그들과 같이 입구를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머리, 축 처진,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담긴 눈매, 결코 큰 키는 아니지만, 흩날리는 코트로 인해 훤칠해 보이는 키를 가진 깡마른 남자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하며 도서관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서관을 가로질러 책장의 숲 사이로 들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내부에 있던 학생들은 숨을 죽여 술렁이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래?"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진짜 저분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여기 오길 잘했어."
피에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앨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래?"
"요즘 엄청 유명한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야. 1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면서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써서 내고는 곧바로 잠적했는데, 몇 년 전에 갑자기 자기가 틀렸다면서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사람이야."
"논리… 철학 논고?"
피에르는 되물으며 기억 속 이물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예전… 어릴 적에 친했던 친구가 그 책을 읽었던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아마 네 기억이 잘못된 걸 거야. 그 책은 어렵기로 소문난 책이거든."
"… 그 애는 좀 유별나게 똑똑했었어."
"그래도. 아직도 논쟁의 중심인 책이란 말이야.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전부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 사람과 잘못 이해한 사람,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걸. 너, 저 사람이 빈 학회에서 자기 논고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는 벽만 바라보며 시만 읊었다는 이야기 들었어?"
그렇게 숨죽여 대화하는 사이, 가까운 책장 사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한 손에 푸른 가죽을 덧댄 노트를 펼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에르와 앨런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책장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노트에 끄적였다.
"… 우리가 말하는 걸 들은 모양인데?"
앨런이 속삭였다.
"…"
피에르는 고개를 숙이고 과제에 집중하는 척 비트겐슈타인을 곁눈질로 계속 바라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한참을 서서 책들을 바라보더니 노트를 살며시 덮었다. 그는 몸을 돌려 앨런과 피에르를 향해 걸어왔다.
"핫…!"
피에르는 긴장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피에르와 튜링을 슬쩍 쳐다보고는 둘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스쳐 지나가 출구로 향했다.
"… 왠지 별난 사람이야."
앨런이 말했다.
"…"
그러나 피에르는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고향에 오랜만에 돌아온 느낌. 포근한 느낌. 피에르는 이상하게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름만 어렴풋이 들어본 한 교수에게서 기묘한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그리고 이내 피에르는 이 낯설도록 익숙한 감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아차렸다.
"라벤더 향…"
"뭐?"
"… 라벤더 향수 냄새…"
앨런은 그 말을 듣고 키득거렸다.
"중년이 다 되어가는 교수가 그런 소녀들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뿌렸겠어?"
하지만 피에르는 그 향기가 너무도 선명히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는 절대 이 향기를 맡았던 때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
"… 피에르? 너 괜찮아?"
"음, 어? 뭐?"
"너… 얼굴이 엄청 빨개."
"그… 그래?"
피에르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피에르는 앨런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 왜지?"
피에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때의 라벤더 향, 기차의 기적 소리, 겨울의 찬 바람, 그리고 조금은 흐릿해진 뮈리엘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