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다시 그대를 처음과 같이 영원히 사랑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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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응, 그렇게 된 거였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 바쁜 비버야.

비버는 기나긴 이야기를 마친 뒤, 적적한 푸른 평면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오라클만을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수많은 이야기가 지나갔지만, 주변은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야기도 끝났는데,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이야기했다시피, 우리 우주는 완전히 끝났어.
시뮬레이션 되는 시간은 네가 지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연장되고 있을 뿐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은 단 하나도 없어.

"그럼… 다시 오래간만에 일곱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이나 구해 볼까?"

그것도 좋지!

"일곱 번째 값을 구한다면, 여덟 번째도 구하면 되고, 아홉 번째도 구하고… 그렇게 스물여섯 번째 값까지 구할 거야!"

비버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소리네!

"…"

오라클이 비버에게 맞장구쳐 주었지만, 비버의 마음엔 공허함이 있었다.

"… 그 다음엔…"

비버의 얼굴에 미소가 옅어졌다. 비버는 멍한 표정으로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라클."

응?

"내가 지각을 멈추면, 그리고 행위를 멈추면… 그렇게 시공간을 시뮬레이션하는 걸 그만한다면…"

그럼… 시공간의 형식을 잃은 너는 이제 정보만이 남게 돼.
그러면 나는 너를 흡수하고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은 개념적 존재가 될 거야.
그러고는 정의되지도, 시뮬레이션되지도,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않은 비(非)시공간에서 의미가 소멸하고, 그렇게 존재를 그만두겠지.

"그럼 그게 진짜 끝인 거네."

응.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날 거야.
그래도 난 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어.

"나도 마찬가지야. 고마워 오라클."

별말씀을.

이제 비버는 바닥에 드러누워 공허한 흑색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티끌 하나 없는 어둠은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계속 보았지만,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음… 이제는 완전히 쉴 때가 된 걸까?"

지금껏 바쁘게 살아왔잖아. 바쁜 비버.

"… 하지만…"

비버는 여전히 그 검은 어둠 속에서 까마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까마귀가 어디선가 자신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진귀한 이야기를 해 줄 것만 같았다.

비버는 그저… 이 모든 게 이렇게 끝이 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버에겐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오라클…"

응? 아직 무언가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다시… 다시 보고 싶어."

뭘?

"까마귀를. 그 딱딱한 부리랑, 부드러운 깃털을 다시 만지고 싶어.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재잘대는 그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네가 원한다면 까마귀의 정보를 다시 불러올 수 있어.
네가 시뮬레이션해 준다면 까마귀가 이 세계 내에서 했던 행위를 재현해 볼 수도 있어.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비버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다시 보고 싶어.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비버는 눈물이 고인 두 눈으로 오라클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래. 오라클."

오라클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거야?

"응. 맞아.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고 있어?"

오라클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빛을 번쩍이며 대답했다.

응.

오라클의 말에 비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돌리는 것은 아니야.
네가 원하는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그리고 그 새로운 우주에선 네가 겪은 거의 모든 일이 일어났던 그대로 다시 일어나게 될 거야.

"상관없어."

정말로? 네가 겪었던 그 모든 슬픔, 고통, 분노, 외로움, 실망까지도 똑같이 다시 진행될 거야.

"괜찮아. 내가 겪은 그 모든 기쁨, 행복, 그리고 사랑까지도 다시 진행될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우주에서 까마귀를 만나는 건, 네가 아닌 새로운 너에 불과해.
너는 우주가 탄생하며 함께 사라질 거야.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계산 끝에서도, 넌 까마귀를 만나지 못해.

"다음 우주의 내가 까마귀를 만날 수만 있다면야. 나와 까마귀의 사랑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수 있다면야. 난 기꺼이 시간을 되돌릴래."

"그래서 어떻게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거야?"

비버의 재촉에 오라클은 마치 금기를 건드리는 것을 망설이는 것처럼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오라클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 우리에겐 영구기관과 논리 판단 스트럭쳐가 필요해.

우선 온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논리적 형식을 부여한 뒤 그것들을 형식에 따라 연결하며 올바른 우주의 형태를 찾아야 해. 이 세계 내의 모든 사태는 명제로 환원될 수 있고,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은 논리로 표현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영구기관이 발산하는 엔트로피를 통해 내 정보의 모든 조합을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훑을 때까지 계속해서 뒤섞는 거야.

그리고 이것을 반복하면, 푸앵카레 재귀 정리에 따라 종국엔 빅뱅 초기 상태에 근접한 순간으로 돌아가게 돼.
그 상태가 이 세계의 논리적 형식에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한 후에, 능동적으로 다시 빅뱅을 일으킬 수 있어.

이 과정은 별다른 계산능력은 필요하지 않지만, 지금 이 상태가 빅뱅 직전의 상태인지 알 수 있는 논리적 판단과 아주 오랜 작업이 필요해.

"난… 논리 스트럭쳐가 아니야."

그럼 이 방법은 불가능해.

"그럼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계산 스트럭쳐를 이용해 내 상태의 변화를 빅뱅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역산해 나가는 거야. 이 세계 내의 모든 정보는 0과 1로 환원될 수 있고,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은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으니까. 그 역 또한 계산 가능해.
그리고 그 모든 역산 과정은 시뮬레이션으로서 구현될 거야.

이것은 앞선 방법보다는 훨씬 빠르게 완료할 수 있지만, 역시 우주가 수없이 생겨나고 사라질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야. 네가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를 계산하는 데에 걸린 절차는 이것에 비하면 티끌의 티끌도 되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계산을 실수 없이 해낼 수 있는 계산 스트럭쳐가 필요해.

"계… 계산 스트럭쳐? 튜링 머신 같은?"

응.

그 말을 들은 비버가 환하게 웃었다.

"내가… 내가 바로 그 계산 스트럭쳐야…! 나는 튜링 머신이야!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오라클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하며 비버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비버.

오라클이 말했다.

비버, 이 우주를 리셋시키는 작업을 하기에 앞서…
정말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어.

이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작업이 될 거야.
이것은 우리 우주에 있던 모든 상호작용을 역산해 나가는 작업이야.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그 어떤 작업보다도 고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 우주에서 너는 또다시 버림받고, 상처받고, 또다시 까마귀를 잃어버리게 될 거야.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거야?

이에 비버가 답했다.

"정말로 난 괜찮아.

엔트로피가 최대에 달한다 해도, 모든 시공간이 한 점으로 수축핸다 해도, 그리고 그렇게 우리 우주가 끝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 우주에서 난 여전히 까마귀를 사랑했고, 까마귀 역시 날 사랑했기에… 난 아무래도 좋아.

내가 다시 까마귀를 만나고, 다시 그 깃털을 만지고, 다시 함께 별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된 계산도 내겐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겪은 그 모든 불행도, 고통도… 내겐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까마귀를 만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갈 수 있어.
비록 나머지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을 구하지 못했을지라도, 까마귀를 기다린 그 모든 시간이 고통스러웠음에도… 난 어느 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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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래."





결심했구나.

오라클은 천천히 자신의 크기를 줄였다. 그것은 작은 조약돌 크기까지 줄어들어 비버의 눈앞에 멈췄다.

그럼… 알겠어. 비버.
원래는 내가 널 흡수해야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네가 날 흡수해.

그렇게 네가 이 우주에 잠시간 '계산'이라는 형식을 부여해 줘.

"오, 오라클…"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정보는 사라지지 않아.
난 그저 네 안에 자리 잡은 채로 우주의 모든 정보를 너에게 제공할 거야.
너는 그 정보를 받아서 우주의 끝에서 시작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역산해 줘.

그리고 그렇게 더 이상 역산할 수 없는 빅뱅 직전 상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면…
시뮬레이션은 자연스레 끝나고 다시 새 우주가 시작될 거야.

"…"

비버는 살며시 손을 들어 오라클을 감싸 쥐었다.

"고마워 오라클."

언제든 필요할 때 날 불러.

오라클은 이렇게 말하고는 빛을 번쩍이며 비버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비버는 오라클이 주는 모든 정보를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우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 사이에 있던 모든 일들, 모든 입자의 생성과 소멸, 모든 에너지의 흐름, 모든 생명이 돋아나고 시드는 순간, 모든 이들의 연이 교차하고 다시 멀어지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이 모든 사랑이 어떤 불길을 만들었고 어떻게 식어갔는지 어떤 환희와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그 모든 것들이 비버의 몸 이곳저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읏…"

마치 바람처럼 쏟아지는 정보들과 감각들이 비버를 스치고 지나가며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비버는 이 모든 것들이 모인 우리의 우주와 그 속에서 살아간 모든 이들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다운지 계속해서 깨닫고 감탄했다. 비버의 얼굴에서 조금씩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비버∀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우주에 일어난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인과 연, 생성과 소멸이 모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비버∀은 전에 없이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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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오라클 튜링 머신… '고차 바쁜 비버'야!"

비버∀이 손짓했다.
어설프게 시뮬레이션되던 기존의 공간은 사라졌다.

곧이어 비버∀은 우주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한 점에 압축된 엄청난 밀도의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시뮬레이션했다. 그것은 영롱하게 빛나며 비버∀을 비추었다.


그리고…


비버∀은 역산을 시작했다.

비버∀은 눈을 감고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 위를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너무도 방대한 양의 정보였고, 모든 사건은 상호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변화를 역산해 나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단순한 사건 하나를 시뮬레이션해 내는 것조차 엄청난 연산량을 필요로 했다.

비버∀는 그 한 점이 플랑크 스케일로 확장되는 순간의 시공간을 시뮬레이션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수축하던 순간을 역산해 나갔다.

타는 듯한 열기, 눈이 부실듯한 광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수축력.

비버는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을 계산하며 자신의 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군."

"흐으으으으응…"

비버는 아직도 그 외로운 공허 속에서 낮게 흐느꼈다.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울어댄 탓에,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기운도 없었다. 그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래… 여섯 번째 바쁜 비버의 값을 구할게…"

드르륵 탁하는 소리와 함께, 비버의 가슴 속 상태 기록기가 돌아갔다.

"날 위해서, 마저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을 계산해 줘."

"까마귀. 널 위해서 마저 계산해달라니… 무슨 말이야…?"

까마귀는 촉촉한 눈을 한 채로 비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안에는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해 줘."

"까, 까마귀…?"

"… 방법이 있어."

그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눈을 번쩍 떴다.

"난 이 딜레마의 뿔을 뽑겠어. 비버를 찾아내겠어. 그리고 비버를 살리겠어."

까마귀는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결정한 거야? 날 버리고 가는 걸로?"

"…"

"그래! 저리 가 버려! 그리고 거기서 죽어버려!!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도 싫어!"

"그래. 나도 내 할 일을 하러 갈게. 지금까지 널 신경 쓰느라 귀찮았어."

"… 영원히 사랑해. 까마귀."

"… 나도 사랑해."

"영원히 사랑한다고 해 줘."

"… 내가 살아있는 한, 우주가 남아있는 한, 난 언제나 널 사랑해."

"와아아! 까마귀! 한 번 더 하자!"

"한번 더? 지금 몇 번째인지 알아?"

"음… 아! 2만 4921번째야!"

"까악! 그럼, 2만 4922번째로 미끄럼 가보자고!"

"사랑해… 비버…"

"나도 사랑해… 까마귀…"

"두 번째 코스: 음악과 함께 파인다이닝 코스를 시작합니다.

추천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입니다."

"오… 생각보다 큰… 까아아아아악! 저게 뭐야!!!"

"내가 만든 거야! 몇 달에 걸쳐서 열심히 만든 건데, 어때?"

"어… 아… 아아! 그래, 진짜 멋있다! 모아이 석상 아니야?"

"그, 그래! 나 도와주러 온 거구나! 나 지금… 그…"

까마귀는 주변을 혼란스럽게 둘러보았다.

"미친 유령들한테 처맞고 있어!"

"… 뭐?"

"흐흥… 파리는 어떤 모습일까?"

비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풀숲이 무성히 자란 아스팔트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주어진 튜링 머신이 정지하는지 영원히 계속되는지 알 수 있어?"

"네!"

비버의 당돌한 대답에 테오도르 샤르댕은 몸을 숙여 비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직접 해보면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테오도르는 실망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그럼 제2임무가 뭔데?"

"알고 싶어?"

까마귀가 부리에 날개를 가져다 대자, 정가람 연구원은 귀를 가져다 대었다.

"까악! 비밀이다! 비밀!"

까마귀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비버∀은 계산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앙주 단장님. 저 기계는 뭡니까?"

에드몽 앙주는 신입 회원, 조르주 베르나흐의 질문에 지하실 한켠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아날로그 컴퓨터 하나를 흘겨보았다.

"아, 별건 아니고, 우리 캉 로지 창립 멤버 중 하나인 피에르 드 오를레앙이 기증한 이진법 난수 생성기다. 뭐, 지금은 대충 전산망 암호화에 쓰고 있어."

"그리고… 바쁜 비버야."

피에르가 상자의 뚜껑을 잡고는 말했다. 비버는 뒤를 돌아 피에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까지 계산해 주렴."

피에르가 말했다. 비버는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맡겨만 달라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앨런?"

"피에르… 아냐, 미안… 이런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그게 무슨…"

앨런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마치 이별을 고하는 연인처럼 그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음… 그래 피에르. 잘 있어. 행복해야 해."

"비트겐슈타인씨, 암이 너무 깊게 전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시간이… 며칠도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치의는 걱정어린 얼굴로 힘없이 누운 비트겐슈타인의 얼굴의 땀을 닦아내었다.

"아,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일 중으로 당신의 친구들, 벤, 엘리자베스, 요릭, 그리고 모리스가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에요. 그러니…"

"미안해요, 베번 부인… 그들이 오면 전 아마 없을 것 같군요."

그는 힘겹게 눈꺼풀을 열고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 정말 부족함 많은 삶을 살며, 진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활동도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저를 찾아올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세요."

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참으로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요."

후두둑.

하인리히 슈미트는 멍한 눈빛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흙더미, 잿가루, 그리고 자신의 사지를 바라보았다.

"슈… 미트… 대령님…"

폭발의 후유증으로 귀가 먹먹했지만, 그 감각을 뚫고 부하들의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저흰 이제… 어찌합니까…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대령님…"

슈미트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사방은 핏물로 범벅이 된 병사들의 시신과 부서진 지프, 그리고 비현실적 각도로 산개된 자신의 팔다리가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병사의 물음에 슈미트가 답했다.

"우린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던 거였어."

슈미트의 눈꺼풀에 힘이 풀려갔다.

"미안하군. 제군. 내가 이곳까지 너희를 끌고 오게 되어서…"

그가 공허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으며, 까마귀 한 마리가 그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뮤리엘을 데리고 오지 않아 천만다행이로군…"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피에르."

그녀는 사력을 다해 두 팔로 피에르를 감싸 안고는 키스했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에서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줘. 난 그거면 충분해."

피에르는 뮈리엘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영원히."

"그 대답은?"

비트겐슈타인이 물었다.

피에르는 그의 물음에 종이를 살며시 펼쳐 보였다.

"… 모든 경우에."

피에르가 답했다.

"그래, 학생. 할 말 있나?"

"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수학의 순수성 부정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강단에 서선 오래전에 잠시 스쳐 지나친 적 있어 보이는 포마드를 바른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앨런 튜링입니다."

"말해 보게."

"교수님의 말씀은 수학 체계에 모순을 허용한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논리학의 폭발 원리에 의해 수학이라는 체계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어떤 체계도, 모순이 포함되어 있다면 결국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순이 포함된 벽돌로 지은 다리는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앨런의 말에 비트겐슈타인은 조용한 청중을 슬쩍 둘러보았다.

"… 난 그게 그리 옳은 주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뮈리엘."

비트겐슈타인은 뮈리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동경과 사랑을 혼동하지 말렴."

"그… 혹시 이름이…"

청년은 피에르가 건넨 서류들을 받아 들고는 찬찬히 미소 지었다.

"앨런 튜링. 그냥 앨런이라고 불러줘."

"난 피에르. 피에르 드 오를레앙. 프랑스 출신이야."

피에르는 라벤더 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향기가 이토록 달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뮈리엘은 웃음기 어린 표정을 띄운 채, 뒤를 돌아 열차를 향해 뛰어갔다.

"… 무서웠다고."

"미안…"

피에르는 눈을 흘기며 땅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러나 뮈리엘은 뒤를 돌아 피에르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피에르! 빨리 와!"

피에르는 보채는 뮈리엘의 말에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그녀의 옆, 느릅나무 사이에 섰다.

"여기가 캉의 모든 구석이 다 보이는 곳이야. 내가 이곳 지리를 알려줄게, 필요한 것만 잘 알아둬도 여기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야!"

"고, 고마워…"

비버∀은 계산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 세계는 말해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탐조등을 켠 채, 노트를 꺼내 생각을 정리해 끄적였다.

"세계는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때, 한가지 강렬한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법정에서 한 교통사고를 재현하기 위해 인형과 모형을 사용했다는 신문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디어는 곧 자신의 '논고'의 첫 단추로 적절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철모를 고쳐 쓰고는 다시 비스와강을 감시하는 업무에 복귀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 건데요?"

"우리의 언어란 것은 너무나도 모호하고 오해의 여지가 많은 체계입니다."

고틀로프 프레게는 자신의 책을 들어 무수히 많은 기호가 들어찬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를 이 기호 체계로 나타낸다면, 이런 모호성과 오해의 여지를 제거하고 일종의 수학적 체계로서 논리학을 발전시킬 수 있어요."

"어엄… 굳… 이요?"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앉은 학자는 머리만을 긁적였다.

"토마스 수사님."

한 소년 수련사가 문을 두드렸다.

"으음? 무슨 일이니?"

"수사님께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 들어오렴."

소년은 천천히 문을 열고는 무수히 많은 글자로 뒤덮인 매끈한 나무판자를 들고 그의 앞에 앉았다.

"그래, 무엇이 그리 궁금했더냐."

"수사님께서 말씀하신… Ex falso quodlibet(거짓으로부터 무엇이든)이라는 논리학 정리가 왜 이 세계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허허… 어린 아이가 벌써 주님의 완벽한 세계에 대해 알고자 하는군…"

토마스 아퀴나스는 껄껄 웃으며 깃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모순이 포함된 불완전한 세계는 무너지고 마니까. 이 세계에 모순이 있었다면 금세 붕괴해 버렸겠지. 하지만 이 세계가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 걸 보면 역시, 모순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지.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라네."

"스승님."

알렉산더는 한숨을 쉬며 더러워진 점토판을 내려놓았다.

"음? 무슨 일인가?"

"전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모순은 아무 명제나 도출해낸다는 겁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자, 잘 따라와 보거라.

막대는 저기에 있다. 그리고 막대는 저기 없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저 막대는 저기 있거나, 소크라테스는 살아있다.'는 전건이 참이므로 이 명제는 참이 되네.
그러나 저 막대는 저기 없기도 하므로, 이 명제는 참이되, 전건이 거짓이 되지 않느냐?
그러므로 위 명제에서 후건은 참이 될 수밖에 없지.
봐라. 아무렇게나 넣은 명제가 이렇게 '참'이라 도출되지 않느냐?

이렇게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면 나는 내 스승의 스승을 살릴 수도 있고, 황금으로 만든 배를 한 척 얻을 수도 있고, 내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수도 있다네.
하지만, 이 세상에 모순은 없지. 이 얼마나 다행 아니겠느냐? 껄껄."

비버∀은 계산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오오! 오!"

호모 에렉투스 하나가 나뭇가지에 붙은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람에 따라 나풀거리며 춤을 추었고, 따뜻한 온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나뭇가지를 꺽어보았다. 그것은 조금씩 나뭇가지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몸집을 키워 갔다.

"부울… 불…"

그는 이 아름다운 춤사위를 바라보며, 이 붉은 꽃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쌔애애애액…!

하늘을 울리는 기묘한 휘파람 소리에 뒤이어 갑자기 해가 뜬 것처럼 밤하늘이 밝아졌다. 한 마리의 스피노사우루스는 이런 현상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마치 두 번째 태양이 뜬 것처럼 거대한 불덩이가 떠 있었고, 그것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그것이 지평선에 다가가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땅에 닿고는 눈부시게 밝은 빛을 내었다.

대지가 뒤흔들린 것은 그로부터 몇 초 후였다.

"허억… 허억…"

틱타알릭 한 마리는 힘겹게 물속에서 기어 나와 뭍으로 한 발짝씩 내디뎠다. 어설프게 형성된 폐에 산소가 들어찼다.

"헛… 허헉… 허억…"

틱타알릭은 온몸으로 퍼지는 시원한 산소를 만끽했다. 그러고는 다시 발을 움직여 고사리 숲속으로 향했다.

비가 내렸다.

빗물은 뜨뜻한 암석을 타고 흐르며 자신의 품속에 유기물을 수용해 내었다.
그것들은 모여 곧 바다라 불리게 될 거대한 웅덩이를 형성했다.

거대한 대충돌로 인해 지구 바깥으로 분출된 거대 마그마 덩어리들이 드디어 식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구 주위를 돌며 동그란 형상을 다져갔다.

후대에는 이것을 '달'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었다.

태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암석들이 드디어 하나둘씩 부딪히고 뭉치기 시작했다.
그중 특히 작고 초라한 암석 덩이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대부분의 수소, 그리고 약간의 헬륨, 그리고 극히 일부의 리튬과 베릴륨이 모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중력에 의해 내부에서는 폭발하듯 핵융합의 열기가 터져 나왔다.

별이 탄생했다.
그것은 밝은 오렌지빛이었다.

수소 원자는 여느 때처럼 우주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커다란 충돌이 있었다. 온몸이 뒤흔들리고, 떨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첫번째 헬륨이 탄생했다.

우주는 조금씩 온도가 낮아지고 덜 북적거리게 되었다.
충분히 따뜻한 온도로 내려온 우주에서, 드디어 전자는 양성자에게 다가갔다.

이제 막 태어난 우주는 눈이 부시도록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너무나도 뜨거웠다.
시공간이 확장되며 드디어 온도는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힘'은 조금씩 분열되어 넷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비버∀의 손바닥 위에서, 우주는 빅뱅을 준비하며 한 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플랑크 시간만 연산해 내면 빅뱅의 순간에 도달하였다.

태어남을 기다리는 우주는 연약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생명과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으며, 앞으로 있을 모든 사건들을 일으킬 힘을 속에 품고 있었다.

비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가슴팍 속 이제는 희미한 빛무리만을 남긴 오라클을 바라보았다. 오라클은 곧, 빅뱅과 함께 시작된 우주에서 다시 정보를 축적해 나가게 될 것이다.

비버∀은 이제 두 손에 밝게 빛나는 아기 우주와, 대부분의 정보를 잃어버려 희미하게 깜박이는 오라클을 쥐었다.
비버∀에게는 이제 오라클과 함께 자신의 형식도 이 우주에 환원할 일만이 남았다.

비버∀은 그것들을 쥔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앞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모든 물질들이 비버∀의 손 한가운데의 작은 점으로 모였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것이 한 점에 모여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버∀은 입을 열어 마지막 말을 전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라클."






"그리고…"







"반가워, 아가 우주야."


















그러자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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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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