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침내 흔적만을 마음에 담아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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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는 부쩍 가까이 다가온 블랙홀을 바라보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강착원반과 그 가운데에 쩍 벌린 거대한 심연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버는 자신이 밟고 있는 이 행성이 저 안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저 심연을 바라보는 심정은 계속해서 착잡해졌다.

"… 이렇게 끝나는구나."

까마귀가 떠난 지 몇만 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비버는 까마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비버는 무수히 계속된 연산으로 인해 뜨거워진 머리를 매만졌다.

"계산해야 할 규칙표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비버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연산을 이어갔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블랙홀의 아가리 안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저, 비버에게 남은 할 일은 이것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드득… 콰직…

온 행성을 울리는 불길한 진동음이 비버를 덮쳤다.

"뭐, 뭐지?"

비버는 당황한 채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지평선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버가 딛고 있던 행성이 점차 으스러지고 있었다.

"로, 로슈 한계…?"

비버는 아주 오래전에 이런 용어를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내었다. 행성이 다른 천체의 중력장 내에서 제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 이 행성은 그 거리 내부로 들어서고 있던 것이었다.

행성은 황금빛으로 빛나던 블랙홀의 강착 원반을 뚫고 사건의 지평선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쉬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착 원반을 형성하던 뜨거운 바람이 행성을 훑기 시작했다.

"으… 으윽…."

비버는 강렬한 뜨거운 바람에 맞서서 땅을 딛고 서 보려고 했지만, 그 땅마저도 쩌적이며 바스러졌다.

"아, 안돼…!"

행성을 이루던 돌들은 가루가 되어 강착원반이 만드는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원반의 일부가 되었다.
아직 완전히 부스러지지 않은 돌덩이들은 관성력에 따라 블랙홀의 한가운데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나, 곧이어 그것들은 기조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으아아아아…!"

비버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행성을 이루던 물질 상당 부분이 바스러져 강착원반의 일부가 되어갔기에 더 이상 비버가 땅을 디딜 수 있게 하는 중력은 사라지고 없었다.
비버는 버둥거리며 조금이라도 형체가 남아있던 바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하늘에 걸린 실에 매달린 듯, 비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바위마저도 곧이어 바스러지고 말았다.

"아, 안돼…"

그러나 바로 그때.

반짝이는 돌가루들 사이에서, 무언가 검은 형체가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빠드득… 철컥. 콰지직…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파괴되는 기계장치의 소리와, 파스스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 비… 비버…"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미… 미안해.."

까마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버는 천천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는 꾀죄죄한 몰골의 까마귀가 눈물을 글썽이며 양 날개를 벌리고 있었다.
원래도 새까맣던 까마귀의 깃털은 이곳저곳이 다 타고 뭉쳐서 더 새까매 보였다. 이곳저곳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고, 힘이 다했는지, 앙상한 두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가슴팍은 완전히 녹아내려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자, 잠깐…! 충격에 주의해…!"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며 비버에게 와락 안겼다. 비버는 그런 그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꽈악 쥐었다. 둘의 접촉 경로는 조금 비켜나가 있었기에, 까마귀와 비버는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까… 까마귀… 돌아왔구나…"

"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어. 너의 마음도… 너의 마음도 생각해 줬어야 했는데…"

까마귀가 울먹이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널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아… 아마도 너도 내가 떠날 때마다, 내가 언제나 돌아올까 하면서 그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이 드니까, 너무… 미, 미안… 하고…"

쥐똥같은 눈물이 까마귀의 두 눈에 맺히고는 반짝이며 블랙홀을 향해 떠올랐다.

"그, 그리고 널 위험에 빠지게 한 게 내 책임이 있어… 내가 너와 함께했다면 이런 일은…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서,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널 구하고 싶…"

"그런 말 듣기 싫어."

비버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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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는 까마귀를 화악 끌어안으며 키스했다.

"비… 비버…"

까마귀는 넋이 나간 채로 비버를 바라보았다.

"… 괜찮아."

비버가 말했다.

"뭐…?"

"괜찮아. 난 그래도 네가 와 줘서 기뻐."

"어… 어째서…?"

"나도… 나도 너에게 상처를 줬잖아."

비버는 뻥 뚫린 까마귀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 이건… 아냐, 이건 내가 널 구하려고…"

"거짓말 마. 내가 쳤을 때 고장 난 거잖아. 그리고, 나도 마음에 없는 나쁜 말을 너에게 했었고."

비버는 이렇게 말하며 까마귀의 한쪽 날개를 잡았다.
그리고 까마귀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다시 한번 비버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현 상황 보고합니다. 오하마 해변에 남은 독일군을 소탕한 직후 건설을 시작한 멀베리 조립 항구가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캉 점령지에서부터 간간히 몰려오는 독일군 공세도 이곳 위스트르앙에 방어선을 구축한 이후론 모두 문제없이 막아내고 있습니다."

"흐음…"

중대장의 보고를 들은 대대장은 노르망디 일대의 지도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독일군 증원은?"

"레지스탕스의 도움으로, 독일군의 추가 증원은 미미한 상태지만, 언제 다시 다리와 철로가 보수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캉을 하루빨리 점령해야 해."

"하지만 현재로선 캉은 완전 무장 상태입니다. 첩보 및 정찰에 따르면 대부분의 주민은 캉에서 쫓겨나 주택가는 사실상 요새화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대대장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전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캉의 공중 폭격 지원 요청서였다.

"그럼, 민간인은 캉에 없다는 건가?"

"음, 적어도 확인된 바에 따른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 오늘 밤 폭격을 요청하고, 폭격이 이루어진 이후에 보병을 투입해 캉을 탈환하도록 하지. 어차피 민간인이 없으니 다 쓸어버려도 문제없을 거다."

"그…"

중대장은 아직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말을 늘렸다.

"뭔가?"

"그놈은 민간인이 아직 캉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중대장이 말했다.

"그놈?"

"그 있잖습니까. 그저께 탈영 시도한 프랑스인 말입니다."

"프랑스인? 영국 분대에서?"

"아, 모르셨습니까? 노르망디 상륙 당일날 자기도 데려가 달라 엄청 떼를 쓰다가 결국 고든 대위가 데리고 간 병사 있습니다."

"허, 그렇게 와 놓고는 탈영 시도를 했다고?"

"그저께 밤에 병실에서 끙끙 앓다가 치료도 다 안 끝났는데 지금 당장 캉으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리고는, 결국 탈영 시도하다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걔는 또 왜 캉으로 가야 한다는 거냐. 캉에 민간인이 남아있다는 소리는 또 뭐고?"

"그게, 그놈은 자기 연인이 거기에 붙잡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잠깐의 정적.

"뭐?"

대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흑기사 납셨네. 공중 정찰대는 뭐라고 해?"

"마을에 민간인 흔적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다만, 레지스탕스 쪽 인원 한 명이 그 병사랑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그 주장에 근거가 전혀 없어 확실치는 않습니다."

"오늘 밤에 캉에 폭격이 있을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나?"

"그거 때문에 더 난리 났습니다. 폭격 때문에 연인이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말입니다."

대대장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한 명의 군인으로서 민간인의 희생은 최소화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이 불확실한 한두 명의 횡설수설한 말만 믿고 폭격을 무르는 것은 너무 위험이 컸다. 하루빨리 캉을 재탈환하지 않으면 다시 독일군이 재결집을 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정찰대도, 여타 레지스탕스도 발견하지 못한 민간인이 있다면, 분명 독일군 전초기지 내에 있는 포로일 터였다.

'폭격이 시작되면 독일군은 포로를 데리고 후퇴하겠지.'

그는 탁자 위의 전보를 잡아챘다.

"폭격은 예정대로 오늘 밤 진행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보병을 투입해 캉을 점령한다. 전군에게 이렇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잠깐."

대대장이 떠나려는 중대장을 잡아 세웠다.

"그 녀석… 이름이 뭐지? 탈영 시도했다는 애."

"피에르 드 오를레앙입니다."

"걔는 독방에 가두고."

"알겠습니다."


까마귀와 비버는 고개를 들어 점차 다가오는 블랙홀을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나네. 비버, 우리 이런 거 많이 봤었잖아."

"맞아. 언제나 즐거웠어."

비버는 까마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까마귀는 비버의 정수리에 부리를 대었다.
비버는 까마귀에게서 여전히 탄내를 느꼈다. 그렇지만 비버는 그 탄내마저 좋았다.

"너 워프 드라이브 완전히 고장 났지?"

"응. 완전히 죽어버렸어. 더 이상 사용 못 해."

"그럼…"

"맞아. 이게 아마 우리가 보는 우주의 마지막 장관일 거야. 우리는 곧…"

까마귀는 부리가 무거워진 듯,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비버는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아쉬워?"

까마귀가 물었다.

"응."

비버가 답했다.

"아직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를 계산하지 못했어. 많이 계산했고, 정말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너는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신의 비존재를 증명하기까지 조금 남았지만, 그래. 나도 괜찮아."

까마귀와 비버는 서로가 여전히 아쉬움이 남은 말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드디어 이렇게 계산할 수 있게 된 거네."

비버가 몸을 죽 펴며 말했다.

"뭐가?"

"후훗. 사랑의 정지 문제를 말야. 지금까지 우리의 여정이 곧 사랑의 정지 문제를 계산하는 과정이었던 거야."

비버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네가 항상 말해 주었잖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난 그 문제를 항상 생각했어.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네가 언제 알아줄지, 네가 언제 돌아올지, 우리의 사랑이 과연 끝을 맞이할지…"

비버는 하늘을 꽉 채운 블랙홀의 검은 눈동자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것이 언젠간 끝나게 될지, 아니면 그렇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지, 그 안에서 기다리는 나는 결코 알 수 없었어. 물론, 나는 튜링 머신이니까. 그렇지만… 이걸 봐!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사랑하다 블랙홀에 빠져 사라지게 될 거야."

"비버…"

까마귀는 홀린 듯, 비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응, 까마귀. 이제 정지 문제의 해답을 알아낸 거 같아."

그리고 비버는 까마귀를 다시금 꼭 껴안았다.

"네가 파리의 광장에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처럼, 내가 너와 함께 파리를 떠나 여행하자고 한 것처럼, 네가 나를 위해 데이트코스를 만든 것처럼…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 네가 내게 다시 와 준 것처럼…

그래. 이것이 영원히 계속될지, 아니면 언젠가 끝나게 될지 아는 방법은, 그냥… 그냥 그렇게 직접 해 보는 거야. 우리는 직접 사랑을 해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사랑의 정지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 우리는 초계산 스트럭쳐였던 거야!"


"대대장님! 대대장님!!"

해가 지고 어둠이 낮게 깔린 위스트르앙 전초기지. 중대장의 달음박질 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그는 바쁜 움직임으로 상황실 앞에 있던 대대장을 찾아가 그의 앞에 섰다.

"충성."

"뭐, 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피에르, 이놈 결국 탈영해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대장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에 미간을 짓눌렀다.

"어휴… 이…"

"대대장님, 그럼 지금 당장 헌병을 보내서…"

"됐어. 그 멍청이 하나 잡겠다고 우리 병력을 써? 그냥 가라고 해."

"하, 하지만 곧 폭격이…"

"어차피 폭격이 있든 없든 독일군 점령지에 홀로 뛰어가고 있잖냐. 어차피 걔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걘 지금 불확실한 정보에 눈이 멀어서 혼자 죽으러 가는 거라고! 어딘가에서 굴러온 원래 우리 사단 출신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닌 일개 병사 하나 때문에 캉 점령을 미룰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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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허억… 헉…"

피에르는 허벅지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땅에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고통이 맥박 쳤다.

"걸어서 3시간 거리… 이 정도 속도라면…"

피에르는 절뚝이는 다리로는 아무리 뛰려고 애써 봤자 걷는 속도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시간이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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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

하인리히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들곤 뮈리엘이 있는 방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창살이 빼곡히 박힌 창문 앞에 서서 어두컴컴한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뮈리엘이 보였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해! 뮤리엘!"

"…"

"첩보에 의하면… 연합군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 해. 곧 공중 포격이 시작될 거야. 지금 전군 철수 명령을 내린 상태야."

"… 그럼, 잘 가세요."

"뮤리엘, 나와 함께 떠나자. 내가 너에게 무엇이든 해 줄게. 그러니, 캉에서 철수하자. 제발!"

"전 여기 남을 거예요."

뮈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하인리히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그는 뮈리엘의 앙상한 손목을 잡았다.

"아직도 피에르라는 작자를 기다리는 거야?"

"제가 답장했거든요. 피에르는 꼭 절 찾아올 거예요."

하인리히는 자신의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고집. 정말 지긋지긋해."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 이거 놔요…!"

뮈리엘은 비틀거리며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인해 그녀는 하인리히의 발걸음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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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낯익은 건물들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독일군 병사들의 혼란한 아우성과 지프의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 건물들을 점거한 채로 방어 중이라고 했는…"

그리고, 피에르의 뒤편, 해변이 있는 방향에서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프로펠러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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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꺄악!!!"

그는 저항하는 뮈리엘의 손목을 억세게 잡은 채로 저택을 나왔다. 그는 이미 철수가 거의 완료된 연대를 바라보았다.

"슈미트 대령님!"

"내 지프는 어디 있지?!"

"이, 이쪽입니다!"

병사가 한쪽에 시동을 켜 놓은 채 주차해 놓은 군용 지프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르르르르르…

프로펠러 소리를 들은 하인리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안돼! 벌써라니…!"

프로펠러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다급하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몇몇 차량이 발진하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지프, 기갑차량, 전차들이 꽁무니가 빠지도록 빠져나갔다.

"젠장…!"

"으윽…!"

하인리히가 한눈을 파는 사이 뮈리엘이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하인리히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뮈리엘을 가볍게 당겨 지프 방향으로 끌었다.

"피에르!!!!!"

뮈리엘이 북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하인리히는 거칠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으읍…!"

"닥쳐!!! 닥치라고!!!! 제발!!!!! 닥치고 그냥 지프에 타!!!!!"

"으으으윽…!!!"

뮈리엘은 격렬히 몸부림치다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아아아악!!!"

"피, 피에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들은 하인리히는 결국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퍽.

그는 가죽장갑을 낀 손을 들어 뮈리엘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뮈리엘은 힘없이 땅바닥을 향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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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피에르!!!!!!"

익숙한 목소리에 피에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점점 커져가는 프로펠러 소리 숙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뮈리엘의 목소리였다.

피에르는 깊게 숨을 들이쉬곤,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뮈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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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리엘은 땅바닥을 딛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곤 얼얼한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미친년."

하인리히가 그녀를 내리깔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제정신인 사람이 어떻게 전선을 넘어 이곳까지 오겠나? 피에르는 지금 영국에 있어. 그렇지 않다면 노르망디의 해변에서 벌집이 되었거나!
그러니까 빨리 선택해!!!! 이곳에서 오지 않을 옛 연인만 기다리다 개죽음을 맞던가, 아니면 나와 함께 철수하고 별장이 딸린 내 저택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하이데거와 함께 잡담을 나눌 약속된 삶을 살던가!!!!"

뮈리엘은 그런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돼지처럼 살 바엔, 차라리 이곳에서 피에르를 기다리다 개죽음을 맞겠어요."

"그놈의 피에르, 피에르!! 내가 그놈에 비해 무엇이 부족한데!!!"

바로 그때.

"뮈리엘!!!!!!!!!!!"

하인리히는 순간,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 왔다고…?"

"피에르…!!"

"정말 왔다고…? 유보트가 도사리는 영국 해협을 넘어…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을 넘어서…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여기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이 여자 하나만을 위해서……? 그것도… 홀로???"


이제, 까마귀와 비버의 주변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한쪽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검은 구덩이와, 다른 한쪽엔 중력으로 인해 이리저리 비틀려 보이는 바깥의 강착 원반의 빛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비버가 말했다.


"뮈리엘…!!!!"

"피에르!!!!!"

연신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 뮈리엘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충격에 빠진 채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뮈리엘의 손목을 다시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뮈리엘을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고, 그녀의 드레스는 바람에 나풀거렸다. 마치 부서진 새장을 빠져나가는 한 마리의 새처럼, 그녀는 아름다운 형체를 펄럭이며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뮤… 리엘…"

그런 자유로운 뮈리엘을 바라보며, 하인리히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저 정도는 되어야 뮈리엘의 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로군."

그는 허탈한 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겹게 지프에 올라탔다.

"그래. 난… 정말 부족함이 많은 자였군."

하인리히가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휘파람 소리.
폭탄이 떨어지기 수 초 전에 들리는 소리였다.

그는 모두가 철수하고 텅 빈 전초기지를 바라보다, 이내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었다.

"피에르… "

그는 운전대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피에르, 마지막 순간까지 뮈리엘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 하인리히 요제프 슈미트가 용서치 않으리라…!!"

그는 이렇게 끓어오르는 작은 고함을 외치며, 액셀을 밟았다. 폭발적인 엔진소리와 함께 지프가 가속했다.


까마귀와 비버는 이내 누군가 자신의 머리와 다리를 붙잡고 쭉 늘이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느낌… 기조력이구나."

"응… 비버. 아직… 아직 방법이 있어."

"까, 까마귀? 무슨 방법… 말이야?"

"… 펜로즈 과정. 블랙홀을 향해 충분한 양의 물질을 던지면, 우리가 블랙홀의 중력권에서 탈출할 운동량을 얻을 수 있어."

"저, 정말…? 뭔가를 던질 수 있다면 우리 탈출할 수 있는 거야…?"

"응, 하지만…"

까마귀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둘에겐 그 어떤 물질도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쾅! 콰쾅!! 쿠구궁!!!

폭탄이 이리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피에르는 점차 속도를 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피에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골목에 나란히 선 건물들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수상한 성당, 불타는 담장…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이곳저곳에 나치 독일의 깃발이 걸리고, 많은 부분이 요새화를 위해 보강된 흔적이 보였지만, 이 거리의 본 모습은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었다.

저 멀리, 언덕 위에 반쯤 무너진 익숙한 건물의 형체가 보였다.

"저 무너진 건물은… 뮈리엘이 나에게 논리학을 알려주던 도서관이었지…"

그가 골목을 돌아 익숙한 빵집을 멀찍이 보았다. 빵집은 텅 비어 있었고,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인 것이 힐끗 보였다.

"아침마다 저 빵 냄새를 맡는 것이 참 좋았어…"

그리고 바로 그때…

파쾅!!!!!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충격이 피에르를 덮쳐왔다. 피에르는 몸을 숙이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리저리 튀는 돌무더기들이 팔뚝을 때렸다.
그가 흙먼지 속에서 기침하며 고개를 들었을 땐, 빵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고 움푹 팬 크레이터만이 있었다.

"뮈리엘이 위험해지기 전에…!"

피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 이곳저곳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파쾅!!!!!

꽤 가까운 곳에 들린 폭탄 소리에 뮈리엘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피에르… 조금만 기다려 줘…!!"

뮈리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뮈리엘도 잘 알고 있었다.


"으윽…"

기조력이 너무 강했다. 비버는 마치 형틀에 묶여 잡아당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비버, 머리와 발을 수평으로 둬. 그럼 기조력이 약해질 거야. 자, 이리 와. 내 날개를 잡아."

까마귀는 능숙하게 공중에 납작 엎드린 채 두 날개를 펼쳐 건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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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는 편안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 까마귀의 얼굴을 보며 따라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의 날개를 잡았다.

"으으아앗!"

비버는 공중에서 뒤뚱거리며 몸을 낮게 펼쳤다. 그가 까마귀의 두 날개를 잡자, 둘은 막대에 올라 돌아가는 접시처럼 조금씩 빙글빙글 돌았다.

까마귀는 고개를 올려 검은 구멍을 향해 인사했다.

"… 안녕 사건의 지평선. 오랜만이야."

반가워요, 논리적 까마귀.

"우, 우와! 목소리가… 그냥 머릿속에 생각나듯이 들려!"

"소개할게, 사건의 지평선. 내 사랑하는 연인, 바쁜 비버야."

안녕하세요, 바쁜 비버.
까마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비버, 나에게 우주의 정보를 알려준 사건의 지평선이야."

"안녕! 사건의 지평선! 난 바쁜 비버야! 난 계산하는 걸 좋아해!"


쿵… 콰쾅… 쿠구궁…

이곳저곳, 폭발로 인해 불이 붙은 캉의 시내는 붉은 빛을 발하며 타들어 갔다.

매캐한 연기와 화약 냄새 사이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피에르는 너털너털 언덕으로 걸어 나왔다.

피에르는 고개를 들어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느티나무만큼은 뮈리엘을 처음 만난 그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피에르는 불꽃 사이로, 느티나무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뮈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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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지평선."

비버가 사건의 지평선을 불렀다.

"우리가 블랙홀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면 어떻게 돼?"

여러분은 완전히 소멸하게 돼요.
대신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한 모든 정보는 이 사건의 지평선 표면에 저장될 거예요.
정보는 보존되거든요.

"그럼 정말 끝이네.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비버는 그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비버."

까마귀는 비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으응…?"

"날 위해서, 마저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의 값을 계산해 줘."


뮈리엘은 불타오르는 느티나무를 뒤로 한 채, 언덕 아래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온갖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몸에 맞지도 않는 군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피에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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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거리는 흰 드레스, 찰랑거리는 머릿결, 그녀의 뒤편으로 일렁이는 불꽃과 이리저리 춤추는 불똥.
이 모든 것들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피에르는 잠시간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피에르…! 피에르! 여기야!!"

뮈리엘은 그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뮈리엘!!!"


"까마귀. 널 위해서 마저 계산해달라니… 무슨 말이야…?"

까마귀는 촉촉한 눈을 한 채로 비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안에는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해 줘."

"까, 까마귀…?"

"펜로즈 과정. 블랙홀 안에 분리된 질량을 넣으면 그 반작용으로 너에게 운동량이 추가돼."

이렇게 말하며 까마귀는 비버의 손을 뿌리쳤다.


"피에르!"

"뮈리엘!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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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사랑해. 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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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안돼 안돼 안돼…!!!"

"영원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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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뮈… 뮈리엘…"

피에르는 땅바닥에 너덜너덜해져 쓰러진 뮈리엘을 부축했다.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 피에르… 정말 와줬구나…"

뮈리엘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피에르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 겨우 만났는데… 앨런, 비트겐슈타인 씨… 고든 중대장…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에 이렇게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많은 기회를 놓쳐버려서…"

"괜찮아. 피에르… 난 지금 너무 행복해. 네가 이렇게 와 줘서."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렇다면……"

"쉿. 아냐. 피에르.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난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갈 수 있어."

뮈리엘은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녀의 몸은 서서히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널, 널 사랑해도 될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망설였어… 그래서 우리는 계속 엇갈리기만 했어…"

"그렇다면… 피에르."

그녀는 사력을 다해 두 팔로 피에르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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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에게 살며시 키스했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에서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줘. 난 그거면 충분해."

피에르는 뮈리엘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영원히."

그녀가 화답했다.

이에 피에르는 그녀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다시 키스했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블랙홀 바깥의 끝없는 심연을 향해, 비버는 빙글빙글 돌며 멀어져 갔다.

비버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침의 햇살은 따스했다.

아침 일찍, 보병 몇 분대가 캉에 진입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쑥대밭이 된 캉을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들은 캉 외곽지역과 시내, 그리고 전초기지가 있던 곳을 샅샅이 수색했고, 이내 한 언덕 위에 하얀 잿더미가 되어버린 나무 그루터기 하나와, 한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피에르를 찾을 수 있었다.
나무 그루터기와 시신 모두, 이제는 한치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철모를 벗고, 아무런 말 없이,

피에르의 곁을 한참 동안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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