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싸우고,
시간 1940년 여름
공간 프랑스 캉

점령은 순식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퇴각 중이었고, 남쪽에서부터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들로 캉은 혼란스러웠다. 늙은이, 어린아이, 여성들뿐만이 남은 캉에 남은 주민들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포탄소리, 총소리, 그리고 군홧발 소리가 땅거미와 함께 가까워져 오는 걸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들렌은 어두운 시내의 광장을 뛰어다니며 파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수많은 이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뮈리엘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 속에서 마들렌의 신문을 받아 들었다. 신문에는 에펠탑에 걸린 하켄크로이츠가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휘파람 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왔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난 뒤라, 어둠 외엔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캉의 남쪽,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뮈리엘 뒤바의 저택에 포탄이 떨어졌다. 밝은 섬광,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대저택의 절반이 폭삭 내려앉았다.

"잠깐… 내, 내 증명 알고리즘…!"

뮈리엘이 소리치며 불이 붙어 무너져 내리는 저택을 향해 뛰어가려 했지만, 빵집의 아주머니가 뮈리엘의 손을 잡아챘다.

"뮈리엘! 안돼! 위험해!"

"아, 아주머니… 저기에 제 모든 것이 있어요… 제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논리 스트럭쳐가…"

"정신 차려! 네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까아아아아아악!!!!"

익숙한 까마귀 울음소리에 뮈리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반쯤 부서진 새장이 붉게 타오르는 화마의 빛을 받아 번쩍였다.
뮈리엘은 그것을 보고는 거칠게 아주머니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뮈, 뮈리엘!!!"

아주머니의 외침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까, 까악!!!"

검은 날개가 부서진 새장의 빈틈을 비집고 뻗어 나와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까마귀는 조금씩 새장의 틈을 벌려 머리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까마귀!"

까마귀는 곧이어 몸 전체를 부서진 새장 안에서 빼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까악! 즈, 증명하라… 검지 않은 모든 것은…"

"자, 잠깐! 까마귀! 아직 아니야! 너는…"

"까마귀가 아니다!! 까아아아아악!!!!"

논리적 까마귀는 크게 날갯짓을 하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안돼! 이리 와!!!"

"뭐, 뭐야! 주인님! 주인님이 나한테 명령했잖아?! 검지 않은 모든 것이 까마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까마귀가 소리치며 더욱 높이 떠올랐다.

"아냐! 말할 수 없는 명제를 증명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함을 보이는 것이 바로 네 역할이야! 난 네가 필요해! 그래야… 그래야…"

"까악! 난 주인님의 증명 요청을 수행하겠어! 이 세계의 검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거야!"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게 뭐지?"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립니다!"

독일군이었다.

"발포하라!"

총성과 함께 총알이 쉭쉭거리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아아악!!! 까마귀 살려!!"

"안돼!!! 네가 있어야 내가 사피르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 제발…"

"까아아아아악!!!!"

까마귀는 허둥대며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곧이어 총성도 잦아들었다.

뮈리엘은 공허한 하늘을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까마귀… 제발… 돌아와…"

사방에서 군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녀의 뒤편에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뮈리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뮈리엘은 천천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지."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들려왔다. 척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병사들이 멈췄다.
뮈리엘은 불길을 등진 채로 자신 앞에 선 한 독일 장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지러이 일렁이는 불길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뮈리엘은 망연자실하여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일제히 십수 명의 병사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뮈리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슈미트 대령님. 이 여자는 어찌합니까?"

"마을 주민들도 저기 많이 있습니다."

"…"

슈미트 대령은 말없이 그녀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뮈리엘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에게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이 여자는 이 저택의 주인인 모양입니다. 아직 쓸만한 부분이 많은데, 이 자는 죽이고 저희가 저택을 점령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그는 유심히 뮈리엘의 얼굴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 이 자는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이 저택은… 원래대로 수리해 놔. 우리 전초기지로 쓸 만하군."

"알겠습니다."

"… 주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청소합니까?"

"아니. 청소는 나중으로 미루지. 여기는 영국으로 향하는 요충지다. 이곳 주민들에게 벌써부터 밉보이면 골치 아파진다."

"넵. 알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고는 뒷짐을 지고 불타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까딱하자, 병사 둘이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함부로 다루지 마라. 그러다 깨진다."

슈미트 대령이 무심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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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940년 여름
공간 영국 블레츨리 파크 Hut 8

"피에르. 이게 오늘 자 독일군 통신 자료야."

앨런이 쪽지 하나를 피에르에게 건네었다. 피에르는 쪽지를 받아 들고는 그곳에 적힌 무작위의 알파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역시 애니그마로 암호화되어 있어."

"레지스탕스에서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어제 파리가 함락되었다고 해요."

조안 클라크가 말했다.
그녀는 최근에 이곳 정보통신본부 블레츨리 파크에 채용되었다. 조안은 매우 총명했고, 특히 언어에 대한 감각이 탁월해서 암호 해독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앨런 튜링과 합이 잘 맞았다.

"그리고 캉도요."

그녀가 덧붙였다. 피에르는 익숙한 지명이 등장하자 흠칫 놀랐다.

"이 문자열 중 파리, 혹은 캉에 해당하는 문자열이 있을 수 있어요. 전체 문자열이 길지 않으니, 단순한 점령 보고일 가능성이 있고… 독일군 입장에선 캉에 비해 파리가 더 큰 의미가 있을 테니, 이 마지막 5글자가 PARIS일 가능성이 높아요."

조안이 조목조목 설명했지만, 피에르는 그녀의 어떤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피에르. 뮈리엘이 아직 캉에…"

그런 피에르의 표정을 읽은 앨런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마 여전히 캉에 있을 거야."

"음… 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알기론 그분에게 독일놈들이 꼬투리 잡을만한 혈통이 없잖아요."

조안이 어두운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을 얹었다. 피에르는 그런 그녀의 격려에 얼굴을 풀고는 손을 비볐다.

"… 네, 말씀 고마워요, 조안. 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이 암호를 해독해야 캉의 상황도 알 수 있는 거니까요. 좋아, 앨런. 다시 작업에 들어가 보자고."

"그래, 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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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940년 가을
공간 영국 케임브리지

"… 이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지?"

"엄… 토끼? 저기에 길쭉한 귀가 있네요."

"전 오리로 보입니다. 저건 귀가 아니라 오리의 주둥이예요."

"…"

비트겐슈타인은 학생들의 말에도 멍하니 칠판을 쳐다보았다. 칠판에는 오리처럼도 보이고, 토끼처럼도 보이는 기묘한 그림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이…건… 토끼로 보고 싶다면 토끼고. 오리로 보고 싶다면 오리인거야. '이것은 토끼이다.'가 참일 수도 있고, '이것은 오리이다.' 역시 참일 수도 있어. 내가 무엇에 집중하여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음, 여기 내 논고를 읽은 멍청이가 없다면…"

"그…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교수님."

"미안, 아직 내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은 걸까…"

비트겐슈타인은 또다시 가만히 서서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칠판을 주먹으로 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칠판이 휘청였다.

"교, 교수님?? 괜찮으신가요?"

"아니, 잠깐. 미안하네. 지금 내가… 밖에선 전쟁 중인데, 내가 왜 여기서 이딴 강의나 하는 건지… 조금 혼란스럽고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서 그래. 그…"

그는 고개를 돌려 칠판을 둘러싸고 안락의자에 앉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세. 아니, 이 강의 자체가 여기까지야. 종강이라고. 지금까지 수고했네. 제군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뒤로 한 채, 강의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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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940년 겨울
공간 프랑스 캉

"…"

뮈리엘은 한 손에 찻잔을 든 채로 눈이 살포시 내린 캉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따끈한 차의 온기가 그녀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무거운 공기와 텁텁한 침묵이 내려앉은 응접실에서, 뮈리엘은 겨우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마셨다. 맛은 그저 그랬다.

"차는 어때?"

"… 맛있네요."

그녀가 기계적으로 답했다.

"물론이지. 동프리지아 지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최고급 홍찻잎으로 우려낸 거니까."

"감사합니다. 하인리히 슈미트 대령님."

그리고 응접실은 다시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편하게 앙리라고 부르는게 어떤가."

"…"

뮈리엘은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창밖에 고정했다.

밖의 캉은 기괴하리만치 일상과 미묘하게 유사했다. 빵집 아주머니는 여전히 빵을 굽고 있었다. 그녀의 뒤편엔 총을 든 독일군이 있었다. 마들렌은 여전히 뉴스와 우편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녀의 뒤편엔 언제나 총을 든 독일군이 있었고, 그녀가 건네는 모든 우편과 뉴스는 독일군의 엄격한 검사를 받았다. 수상한 톱니바퀴가 걸린 성당은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었다. 가끔 무언가를 기대하듯 안을 뒤적이는 독일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은 언제나 허탕을 쳤다.

"논리학을 연구했다면서?"

하인리히가 말했다. 뮈리엘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흐음, 그럼 고틀로프 프레게를 알겠군."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세운 수학자이죠."

"내가 그 프레게라는 자와 같은 비스마르 출신이라네."

"그렇군요."

차갑게만 대꾸하는 뮈리엘에 하인리히는 머리를 긁적였다.

"뮤리엘. 긴장 풀게. 이런 분위기 난 원하지 않아."

"당신들이 제 저택을 점거한 뒤에 본래 주인인 저를 이곳에 포로로 잡아 가둔 상황에서 퍽이나 긴장을 풀겠어요."

뮈리엘의 말에 하인리히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는 맨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오, 뮤리엘, 이건 상부의 명령이라서 말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나도 마음 같아선 이곳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우리 연대가 영국으로 가는 바닷길로 잠시 쓰고, 온 유로파에 우리 총독의 뜻이 전해지면 그땐 다시 평화롭게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려고 해. 이곳도 우리 대독일의 영토로서 더 많은 지원도 받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뮈리엘은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 뮤리엘, 혹시 추가로 필요한 건 없나?"

"편지지요. 긴히 편지를 보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오, 하하하. 그건 곤란하지. 곤란하고 말고, 하하하하!"

하인리히는 뮈리엘의 대답이 마치 웃긴 농담이라도 되는 한 손가락을 까딱이며 웃었다.

"우린 한 배를 탔어. 당신도 나름 우리 군의 인원이란 말이야. 아무리 내가 당신에게 잘 대해줄 수 있어도, 군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는 것까지 내가 도울 순 없지."

"으음."

"대신 읽을 수 있는 책 정도는 넣어 줄 수 있지. 원하는 책 있나?"

"…"

"딱히 없는 것으로 알겠어. 그냥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 정도나 몇 개 넣어줄게. 그때까진…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게. 혹시라도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주고."

하인리히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장갑을 손에 끼웠다.

"그럼. 안녕히."

그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철컥이며 방문이 바깥에서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뮈리엘은 방 안에 홀로 남아 아직 온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찻잔을 마저 기울였다.

"… 왜 사람들은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뮈리엘이 말했다.




시간 10100
공간 최후의 블랙홀 주변 버려진 행성.

300억 년이 지났다.

비버는 그동안 총 5조 개에 달하는 규칙표를 추가로 확인했다.
그는 총 15조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90%였다.

비버는 이제 녹초가 되었다. 규칙표 하나하나의 정지 여부 판정은 갈수록 길어졌고, 그 과정은 점점 재미 없어졌다.
그는 가끔씩 계산을 멈추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밝은 빛을 내는 블랙홀의 강착원반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비버는 그 강착 원반 어딘가에 까마귀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비버는 가끔, 아니 꽤 자주, 까마귀가 실수해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꿈을 꾸곤 했다. 꿈속에서 까마귀는 끝없는 검은 심연 속으로 떨어지며 비버를 불렀다. 비버는 언제나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고는 언제나 그것이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고 되뇌이며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또다시 300억 년이 지났다. 비버는 그동안 1조 하고도 5천억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다.
그는 그렇게 총 16조 하고도 5천억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99%였다. 이제 비버는 대략 1천억 개의 규칙표만 확인하면 되었다.

"까마귀랑 함께하던 때에 대충 1천억 개의 규칙표를 계산했었는데. 그때는 노느라 바빴었어. 그래서 계산은 뒷전이었지. 이제는 딱 그만큼만 더 하면 돼."

비버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 규칙표 하나당 연산량이 부쩍 늘어난 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언제 한 번은 데이터를 일렬로 표현하다 보니 행성을 한 바퀴 횡단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계산은 더욱 많은 데이터를 표현하기 위해 더 긴 테이프의 역할을 할 표면이 필요해질 것 같았다.

"온 행성의 표면을 기호로 채워도 자리가 부족하면 어쩌지?"

이 걱정은 점차 현실이 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버는 한 규칙표를 계산하기 위해 행성을 스무 바퀴를 돌게 되었고, 이제는 방법을 찾을 때가 되었다.

"그래도, 이젠 감이 잡히는 것 같아. 굳이 내가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계산할 줄 안다면 이런 물리적인 한계는 극복할 수 있어."

이후로 비버는 초거대 블랙홀이 바로 앞에 보이는 행성의 가장 북단에 자리를 잡고 납작한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아 마치 명상하듯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테이프는 내 머릿속에 있어. 규칙표도 내 머릿속에 있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계산도 다 내 머릿속에 있어. 그러니까… 아마도 난 오로지 생각만으로 계산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다행히도, 이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조금 미숙했지만, 비버는 꽤 능숙하게 계산을 해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기에, 비버의 몸 이곳저곳에 돌가루가 정전기로 인해 달라붙기 시작했다. 비버는 그것들이 굳어 자신이 돌 석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가끔 몸을 움직여 줘야 했다.

그렇게 300억 년이 또다시 지났다.
비버는 8천만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다. 99.9%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제는 백만 개의 규칙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비버는 마지막으로 까마귀를 본 지 대략 1천억 년이 지나게 되었다.

"다른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데 얼마나 걸려?"

글쎄,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하지만 너는 단연 이 우주 내에서 가장 긴 기간 동안 사랑하는 이를 기다린 존재야.

그리고 어느 날.

"… 끄응…"

비버는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달라붙어 굳은 돌덩이가 바스러지며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어. 날짜를 세는 것도 이제는 귀찮아."

비버는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오랫동안 계산을 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조금 흔들거리며 어지러웠다.

"… 비버."

비버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버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오… 오랜만이야."

까마귀가 말했다.

비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강착원반의 빛을 받아 번득이는 부리와 검은 깃털을 한 논리적 까마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까마귀?"

"얼마나 시간이 지났어? 1억 년? 5억 년?"

"…"

비버는 손을 들어 까마귀의 부리를 후려쳤다.

"천억 년! 천억 년이 지났어!!"

"…"

비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까마귀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 난…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고! 그냥 죽은 걸로 치고 싶었어! 영화에서처럼 장례식을 치르려고도 했었다고!"

"… 비버, 그러니까…"

까마귀는 고개를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자고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널 걱정하는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 그 모든 정보의 95%를 수집했어. 그 5% 남짓의 정보를 수집한다면… 그리고 블랙홀 바깥의 정보는 이곳을 배회하면서 수집한다면… 난… 드디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난 드디어 진리를…"

그런 그의 말을 들은 비버는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놈의 정보, 그놈의 진리, 그놈의 임무!! 난 이제 지긋지긋해. 넌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야? 넌 어떻게 이렇게 항상 똑같아??"

"하, 하지만 비버… 내 주인님이 나에게… 부탁한…"

"나는 임무보다도 너와 함께하고 싶었어! 임무는 아무래도 좋아! 너도 그때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우리가 우리의 은하단을 떠날 때, 신의 비존재 증명 따위, 이젠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 줬잖아?"

"미안 비버. 하지만…"

"하지만?"

"…"

까마귀가 고개를 들고는 비버를 바라보았다. 비버는 그의 눈에서 갈등과 미련이 뒤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 남은 5%의 정보. 그걸 수집하기 위해 또 날 떠나버리고… 날 여기다 내버려두고 갈 거야?"

"…"

"대답해!"

"… 미안. 이제 정말…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비버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넌… 정말… 잔인하구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바보 같아… 넌… 진짜로…"

비버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진리야, 나야?"

비버의 물음에 까마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선택해. 진리야, 나야."

까마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선택하라고! 이 멍청아!!"

비버가 소리치며 까마귀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까마귀는 비틀거리다 다시 섰다.

"선택하라고! 이 바보 멍청이… 나쁜 새끼야!!! 선택해… 진리랑 나랑…"

비버는 양손으로 까마귀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 까마귀는 묵묵히 서서 그것을 맞고만 있었다.

"진리를 선택한다면 그냥 떠나버려. 나한테 찾아오지 마!"

비버는 이렇게 소리치며 까마귀의 가슴팍을 세게 때렸다.

'콰직!'

그때, 까마귀의 심장에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찌르는 고통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만…"

"그만하라고? 너나 그만해!"

비버는 이렇게 소리치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어어어어어엉…"

까마귀는 그런 비버를 쳐다보다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 비버. 꼭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래. 난…"

까마귀는 블랙홀을 바라보았다.

"응. 난 선택했어. 비버.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말한 까마귀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 결정한 거야? 날 버리고 가는 걸로?"

"…"

"그래! 저리 가 버려! 그리고 거기서 죽어버려!!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도 싫어!"

"그래. 나도 내 할 일을 하러 갈게. 지금까지 널 신경 쓰느라 귀찮았어."

그는 이렇게 말하며 날개를 펴곤 블랙홀을 향해 날아갔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흐어어어어엉… 허으으으윽…"

그렇게 비버는 또다시 홀로 남게 되었다.
외로운 행성에는 한동안 비버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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