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실망하고,
시간 1939년 여름
공간 프랑스 노르망디 캉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마을 캉의 한 언덕.
피에르는 언덕 꼭대기에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느릅나무 아래에서 탁 트인 강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풍경은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피에르는 오직 자신만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변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7년 만이군. 마치 20년은 지난 것만 같아."

피에르는 빵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빵을 굽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도서관도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는 저곳에서 뮈리엘과 함께 형식논리학을 공부하곤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뮈리엘이 항상 수상하다 말하던 성당도 보였다.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곳에는 이제 십자가가 내려가 있었다.

"… 모든 게 변하지만, 때로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군."

물론, 전쟁이 일어난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1차 대전 당시의 기억은 그에겐 너무 희미해졌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부재와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험난한 감각만큼은 생생했다.

피에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힘 땀을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바쁜 비버는 간만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정말 알찬 하루였어! … 잠깐, 하루? 여기는 해가 없는걸?"

어떻게 표현하든, 비버는 오래간만으로 일정한 루틴에 따르는 생활을 시작했다.

"흐흥~ 오늘은 얼마나 더 계산할 수 있을까?"

비버는 틈이 날 때마다 이곳 흙바닥에 막대 기호를 그리며 계산했다. 사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머리로도 충분히 계산이 가능할 법도 했지만, 비버는 이편이 더 익숙해서 좋았다.
지난 몇만 년간, 비버는 이 일과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 왔고, 확인해야 할 규칙표 16,679,880,978,201개 중에서 대략 1,000억 하고도 몇천만 개 정도를 확인했다.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0.6%였다.

"후아! 이것도 끝! 지난 구골1 년 동안 미리미리 조금만 더 꾸준히 했다면 지금쯤 벌써 1%는 채웠을 거 같은데!"

비버는 이렇게 말하며 까끌거리는 버려진 행성의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정전기로 인해 모래들이 자꾸만 털에 달라붙었기에, 비버는 손으로 온몸을 털어내었다.

비버는 별빛 하나 없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없지만, 거대한 블랙홀의 주변을 도는 (한때 우주의 많은 부분을 이루었던) 물질들이 밝은 강착원반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그 빛이 행성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 까마귀는 잘 지내려나?"

블랙홀 주변을 구경하고 온다던 까마귀가 떠난 지 몇만 년이 지났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기에, 그리고 이렇게 까마귀를 기다리는 것은 익숙했기에 비버는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블랙홀 주변에는 뭐가 있을까?"

비버는 처음엔 까마귀가 위험한 곳으로 가려 하는 것 같아서 반대했지만, 이제는 그곳에 어떤 특별하고 재미있는 것이 있을지 궁금증이 앞섰다.

"뭐! 까마귀가 돌아온다면 더 알려주겠지!"

비버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다음 규칙표를 확인하기 위해 시작점으로 되돌아갔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성당 앞에선 피에르는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기다린 지 곧 1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에르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기묘한 톱니바퀴가 달린 성당의 문패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톱니를 피에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 오, 피에르니?"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피에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때보다 훨씬 주름이 파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아주 잘 컸구나. 케임브리지는 졸업한 거니?"

"네. 예전에 졸업하고 지금은 영국에서 이것저것 일을 찾아서 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 안 듣던 네가 외국에서 취업할 줄이야. 수학 쪽이니?"

"음… 비슷해요."

피에르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선생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넌 예전이랑 하나도 안 달라졌구나. 뮈리엘 기억하니?"

"물론이죠. 뮈리엘은 어떻게 지내나요? 여기 있긴 한가요?"

"음, 최근에는 여기서 학회 하나를 만들어서 활동하던데, 요즘은 파리 쪽 학회에 많이 참석하느라 잘 보질 못했네. 그나저나 여기는 웬일이야?"

"그게 사실 뮈리엘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음… 한번 집을 찾아가 보는 게 어때? 걔는 요즘 자기 저택을 개조해서 학회 활동을 하고 있거든."

"감사합니다."


"까아아아아아악!!!!"

익숙한 소리에 비버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비버! 비버!"

까마귀는 흥분한 채 날개를 퍼덕이며 비버의 옆에 내려앉았다.

"너 계산은 얼마나 진척되었어?"

"뭐, 얼마 안 했어. 몇천만 개 정도?"

그 수를 들은 까마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되물었다.

"… 뭐? 정말? 너 엄청 빨라졌다!"

"그, 그런가? 난 그렇게 빨리 계산한 거 같진 않은데? 물론… 태양이 없어서 시간 감각이 지구에 있을 때랑은 달라지긴 했는데…"

"… 너 몇 년 만에 그 정도 계산을 한 거 아냐?"

까마귀의 말에 비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너 떠난 지 몇만 년 정도 지났는데?"

까마귀는 비버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날개로 이마를 툭 쳤다.

"… 아! 그런 거였군… 내가 블랙홀 주변에 있어서 시간이 팽창된 모양이야."

"시간… 팽창?"

"크흠, 그게 말이지. 블랙홀 주변은 중력이 너무 세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

"오! 왜 그런지 알겠어! 우리 지난번에 엄청 큰 행성에 간 적 있었잖아? 그때 내 몸이 너무 무거워서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잖아! 시간도 나랑 똑같이 큰 중력에서는 느려지는구나!"

"… 일반 상대성 이론을 너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힘들 거 같고… 좋은 비유네! 아무튼, 내가 저 블랙홀에 가까이 가니까, 나한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서 내 입장에선 몇 년밖에 안 지났지만 너에겐 몇만 년이 지나 버린 거야."

"오오… 신기하다."

"나 없어서 힘들진 않았어?"

"뭐! 괜찮았어! 나도 간만에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를 계산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랬다면 다행이네."

까마귀는 피식 웃으면서 비버의 옆에 와서 앉았다.

"그래서, 까마귀. 블랙홀 주변에서 뭐 재미있는 거라도 찾았어?"

"아, 그건 말이지!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보 역설이라고 알아?"

"그게 뭐야?"

"양자역학에서 정보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정보는 어떻게 되냐는 질문이야. 옛날 지구의 과학자들이 이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해."

"그런데 그게 왜?"

"내가 그걸 해결한 거 같아."

"뭐 정말로?"

까마귀는 날갯죽지를 으쓱해 보였다.

"까악, 별거 아니더라고! 내가 사건의 지평선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말야…"

"… 사건의 지평선?"

"넘으면 그 어떤 것도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블랙홀의 표면 같은 거야."

"뭐? 너무 위험하게 가지 말라고 했잖아!"

"까악! 그래도 충분히 거리를 유지했다고! 아무튼, 내가 그 지평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

"무슨 일인데?"

"그게 나한테 말을 걸었어! 뭐랄까… 진짜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그냥 그 검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나한테 여러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

"진짜? 그게 뭐라고 했는데?"

"끄응… 이게… 뭐라고 해야 할까… 빅뱅이 일어난 뒤 4.2초 뒤쯤에 생성된 업쿼크 하나가 어떻게 저 블랙홀에 흡수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었어."

"… 오오오…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게… 대충 그 쿼크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다른 다운 쿼크 둘과 만나서 중성자가 되었고 양성자 하나와 만나 중수소의 원자핵이 될 수 있었대. 그렇게 걔는 항성의 핵에 있다가 초신성 폭발 뒤에는 우주에 흩뿌려져서 계속 혼자 있었대. 그러다 다운 쿼크가 베타 붕괴로 인해 업쿼크가 되고… 지나가던 고에너지 광자에게 맞아서 잠시 다운 반쿼크와 결합한 케이 중간자가 되었다가, 바로 붕괴해서 전자가 되어… 저 블랙홀에 빠지게 되었대."

"그렇구나!"

"까악! 이거 대단한 거라고! 우주의 정보가 소멸하지 않고 저 사건의 지평선에 새겨진 거라니까. 그리고 그 정보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건 정말 마법같이 대단한 거야!"

"응, 대단한 거 같아."

까마귀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비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이 발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오래전에 불가능하다고 여겨 포기했던 임무가 이제는 가능해졌다는 것을 말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내, 비버가 이 사실을 잘 이해해 줄지도 의문이었고, 비버가 그걸 고민하느라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비버를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피에르는 으리으리한 풍채의 흰 저택 앞에 섰다.
피에르는 어릴 적 매주 편지를 들고 이곳에 오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저택은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었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외부 정원은 관리가 잘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는 것과, '사피르 캉 학회'라 쓰인 팻말이 입구 주변에 꽂혀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피에르는 그때처럼 뮈리엘의 아버지가 자신을 반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화려하게 장식된 오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내부에서 인기척은 없었다. 피에르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피에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밀어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결국. 또 기다려야 하는구나."

피에르는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이게 과연 끝나기는 할까? 언제쯤 우린 만날 수 있는 걸까?"

피에르가 혼잣말했다.


"… 그래서 말인데."

까마귀가 말했다.

"응?"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안 돼?"

"뭐어? 왜?"

"…"

비버는 까마귀가 전과는 달리 깊은 생각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까, 까마귀."

"… 아직… 미련이 남아서 그래."

비버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

"… 네가 수집하지 못한 모든 정보가 저기에 있구나."

까마귀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블랙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직은 모든 정보가 다 저기에 등록된 것은 아니야. 아직도 흡수되지 못한 물질이 남아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까마귀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하지만, 저기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내 두 번째 임무를 완수할 가능성이 있어. 지금까지 이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한 그것이, 드디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거야."

"… 아직 완전히 포기 못 했구나."

"… 이 임무는 내 주인님이 내게 부탁한 거야. 네가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를 계산하는 것만큼이나 내겐 소중하고 중요한 임무라고. 그저… 이젠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포기했었던 건데…"

비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 알겠어. 갔다 와. 하지만 여기 자주 들러 줘야 해."

비버의 답변에 까마귀는 화들짝 놀라 비버를 바라보았다.

"고, 고마워 비버…"

비버는 그런 까마귀를 와락 안았다.

"… 그래도 몸조심해야 해. 사건의 지평선에 너무 가까이 가서 넘어가 버리고…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면… 난 정말 슬플 거 같아."

"… 알겠어. 명심할게."


시간 1939년 여름
공간 프랑스 파리

"뮈리엘! 뮈리엘! 뮈리엘! 뮈리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뮈리엘은 밝게 웃으며 청중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역시 영재 뮈리엘 뒤바로군."

"빈 학회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지."

"빈 학회? 괴델, 비트겐슈타인, 포퍼, 헴펠 같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나 다니던 곳 아냐? 오히려 빈 학회가 뒤바양에게 감사해야지."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군그래. 뮈리엘 양. 이제 드디어 우리 사피르의 시대가 올 거야. 이건 모두 뮈리엘 양의 천재성 덕분이지."

"거기다 정말 아리따우시고 말이지."

뮈리엘은 고개를 들어 올리곤 자신을 향해 박수갈채를 날리는 청중을 바라보았다.

'병신들.'

뮈리엘은 생각했다.

'저들은 내 알고리즘에 관심 없어. 저들이 원하는 건 그저 빈 학회의 영재 뮈리엘, 비트겐슈타인을 버리고 사피르에 온 뮈리엘, 그리고 그저 예쁘장한 뮈리엘일 뿐이야.'

그러나 뮈리엘은 내색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푸른 카펫 위에서 발을 구르며 환호하는 사피르의 회원들은 뮈리엘의 손 인사에 화답을 보내었다. 뮈리엘은 눈웃음을 지으며 새장을 집어 들었다.

"까, 까악! 너무 시끄러워…"

뮈리엘은 차가운 눈초리로 새장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이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인데.'

그녀는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를 뒤로한 채 강연장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불러 세웠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라운지로 향했다. 그러나 라운지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뮈리엘. 아주 인상적인 발표였어요."

사피르 파리 로지의 단장, 프랑수아 베르네가 입구에 서며 그녀를 막아 세웠다.

"과찬입니다. 단장님. 모두 단장님 덕이죠. 그러니, 이만 저는…"

"아, 뭐 이리 급할 게 있나. 조금 뒤에 있을 애프터 파티에도 참여하기로 하지 않았나?"

"일… 일정을 바꿨어요. 초대는 감사하지만, 전 바로 캉으로 돌아가 보려…"

"뒤바 양! 여기, 제 명함입니다. 출판 준비 중인 도서가 있다면 저희 출판소에서…"

"뮈리엘. 오늘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금 뒤에 있을 애프터 파티에도 참여하시죠?"

뮈리엘을 향해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뮈리엘은 새장이 찌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것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자, 잠시만요…!"

"까, 까악! 이거 뭐야! 저리 가!"

"뮈리엘 양, 애프터 파티 전에 잠시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 어떠신가요? 예약은 이미 완료했습니다. 기사분께서 밖에 정차해 둔 자동차에 타시면 됩니다."

어수선한 한가운데, 흰 정장을 입고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남성이 그녀에게 장미꽃을 건네었다.

"아, 아뇨!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

"뮈리엘! 이쪽을 봐줘요!"

팡! 하고는 플래시가 번쩍였다. 뮈리엘은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흔들었고, 마그네슘 냄새가 라운지를 가득 메웠다.

"잠깐. 저는… 저는 빨리 기차역에 가 봐야…"

"뮈리엘! 뮈리엘! 뮈리엘!"

물밀듯이 들어차는 군중들 속에서 뮈리엘은 표정을 관리하기 점차 힘들어졌다.

'저들이 원하는 건 그저, 박제된 뮈리엘일 뿐이야. 난 저들의 애완동물일 뿐이야.'

뮈리엘은 이를 꽉 깨물고는 마치 헤엄치듯 한 손에 새장을 든 채 군중을 뚫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그녀를 막아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뮈리엘! 어디 가시는 건가요!"

사람들의 아우성을 애써 무시한 채, 뮈리엘은 사피르 파리 로지의 정문을 나섰다. 그녀는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이미 깜깜해진 파리의 길거리 속으로 내달렸다.

"뮈리엘!"

프랑수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녀는 마치 새장을 나온 한 마리의 새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막한 골목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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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피에르 드 오를레앙?"

피에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캉은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곳곳에서 풀벌레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르 드 오를레앙 씨 맞죠?"

피에르는 어둠 속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피에르는 뻐근한 몸을 움직여 현관 계단에서 일어났다.

"오 정말 뮈리엘 씨가 말씀하신 그대로의 외모군요!"

"누, 누구시죠?"

"아, 미안해요. 잠시만요."

그녀는 손주머니에서 성냥을 주섬주섬 꺼내어 불을 붙이곤 한 손에 든 석유램프를 밝혔다. 주황빛 불빛이 어른거리며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푸석해 보이는 붉은 곱슬머리 위로 뉴스보이캡을 푹 눌러쓰고 있었고, 큼직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그녀의 땡그란 눈은 석유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조금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들렌입니다. 최근에 여기 집배원 일을 시작했어요."

"아. 반가워요 마들렌 양. 저에겐 무슨 일인가요…?"

"뮈리엘 씨께서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게 있어서요. 자, 여기요."

마들렌은 그에게 편지 하나를 건네었다.

"이, 이건…"

"뮈리엘 씨가 어제 파리로 가시기 전에 제게 전달한 편지예요. 오늘 당신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하셨어요."

피에르는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들어 펼쳐보았다.

친애하는 피에르,

정말 미안해. 이번에도 이렇게 엇갈리게 되네.
요즈음 학회 활동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네 도움이 필요하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일정이 꼬여버리면서 임시방편으로 튜링 머신 외의 방법으로 증명 알고리즘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

사실, 우리 학회는 지금 상당히 어려운 상태야. 외진 마을인 캉에서는 마땅히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서 항상 인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이 발표가 성공적이라면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선 인원 부족으로 해산될 위기야.

피에르, 미안하지만, 우리 학회에 가입해 줄 수 있겠어? 서류 상만이라도 괜찮아.

— 뮈리엘 뒤바

피에르는 곧바로 편지를 구기고는 바닥에 던졌다.

"엇, 즐거운 소식은 아닌가 보네요."

"… 헛발걸음을 했네요. 그냥… 영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피에르는 망설임 없이 터벅터벅 저택의 정원에서 걸어 나왔다. 마들렌도 그의 뒤를 따라 종종거리며 걸어 나왔다.
정문에까지 다다르자, 피에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마들렌을 불러 세웠다.

"… 마들렌, 편지지 여분 가지고 있나요?"

"배달원이니까, 항상 가지고 다니죠."

"편지를 하나 써야겠습니다."

"펜도 빌려드릴까요?"

"아뇨."

마들렌은 그에게 빳빳한 편지지 하나를 건넸다. 피에르는 품에서 단단한 커버의 책을 꺼내어 그 위에 편지지를 올려두었다. 곧이어 그는 만년필 하나를 꺼내어 빠른 속도로 편지를 휘갈겨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들렌은 석유램프를 높이 들어 편지지를 밝게 비추어 주었다.

"뮈리엘이 돌아오는 대로,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피에르는 반듯이 접은 편지를 마들렌에게 건네었다.

"네에… 알겠습니다."


까마귀가 떠난 지 대략 800만 년 이후.
비버는 그동안 100억 개에 달하는 규칙표를 확인했다.

그렇게 비버는 총 1100억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0.66%였다.

까마귀가 돌아왔을 때, 비버는 무수히 많은 입자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입자는 태어나자마자 광자로 붕괴했고, 어떤 입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홀로 있다 블랙홀에 빠졌다고 한다.
비버는 그가 해 주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까마귀는 아직 수집하지 못한 정보가 너무도 많다며 다시 블랙홀을 향해 날아올랐다. 비버는 그런 그가 안전하길 바라며 배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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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만남까지는 대략 1억 2천만 년이 걸렸다.
비버는 그동안 1500억 개에 달하는 규칙표를 확인했다.

그렇게 비버는 총 2600억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1.6%였다.

까마귀는 비버에게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 있는 입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둘이 처음 만난 날 비버의 아지트에 늘어서 있던 28번째 나무막대 속 탄소 원자를 형성한 전자 하나였다.
까마귀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의 씨앗에서 발아했고, 어떤 땅에서 자라, 어떤 벌레에게 파 먹히고, 비버에게 발견되어 어디가 갉혀 어떻게 비버의 계산을 도왔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비버는 이 놀라운 우연에 감탄하며 다음에는 까마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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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만남까지는 대략 10억 년이 걸렸다.
비버는 그동안 총 1조 개에 달하는 규칙표를 확인했다.

그렇게 비버는 총 1조 4천억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8.4%였다.
그리고, 이제야 비버는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비버는 가끔은 멍하니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블랙홀을 쳐다보기만 하기도 했고, 때로는 바닥의 흙을 이용해 까마귀의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이 행성의 흙은 정전기로 인해 쉽게 뭉치고 모양을 잡을 수 있어 이런 걸 만들며 놀기 좋았다.

물론, 계속해서 확인해야 할 규칙표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그는 계산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까마귀가 돌아왔을 때 비버는 너무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까마귀를 환영했다.
까마귀는 기다린 시간에 부응하듯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까마귀는 빅뱅이 있은 지 50억 년이 지난 시점에 무려 5개의 별이 동시에 충돌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해 줬다. 또, 빅뱅 7조 년 이후엔 어떤 적색거성이 초신성 폭발과 동시에 블랙홀이 되어서 마치 도넛처럼 생긴 성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못 본 게 아쉬워! 우리 그때 뭐 하고 있었지?"

"아예 다른 은하단을 구경하고 있었지. 진짜 오래전 이야기 같네."

"오래전 맞지. 히히. 구골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비버는 짧게나마 까마귀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즐거웠다.
그리고, 그 순간도 잠시, 까마귀는 다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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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100억 년이 지났다.
비버는 그동안 총 8조 개에 달하는 규칙표를 확인했다.

그렇게 비버는 총 10조 개의 규칙표를 확인했고, 이는 확인해야 할 전체 양의 약 53%였다.

비버는 규칙표 하나하나를 풀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몇몇 규칙표는 너무 길게 계산이 이어져서 계산을 완료시키는 걸 잠시 미뤄두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계산을 미룬 규칙표 중 하나가 비버가 찾는 '여섯 번째로 바쁜 비버 함수'에 해당하는 규칙표일 수 있었지만, 역시 그게 정말 최대의 수인지는 모두 전수조사를 마쳐야만 알 수 있을 테니, 비버는 우선 빨리 끝낼 수 있는 것부터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까마귀는 너무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이제 비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비버는 문득 까마귀가 실수해서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 까마귀는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워프 장치가 있다고! 아마…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까마귀는 오지 않았다.
비버는 몇억 년에 걸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비버는 자신의 기다림이 언젠가 끝날지, 혹은 정말 이렇게 버려져 영원히 오지 않을 까마귀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것도 정지 문제잖아! 이런 문제는 내가 못 푼다고!!"

비버는 머리를 쥐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행성을 일주해 보기도 하고, 온 행성을 기호로 덮어보기도 하고, 다시 지워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어느 날…

갑자기 까마귀가 돌아왔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악!!!"

"까, 까마귀????"

"비버 비버! 이번에도 내가 얼마나 멋진 걸 발견한지 알아?"

까마귀는 활짝 웃는 얼굴로 비버의 주변을 맴돌다 사뿐히 착지했다.

"이번엔 말야, 우리 예전에 봤던 그 중성자별의…"

"까마귀! 난 네가 블랙홀에 빠져 버린 줄 알았어. 나 무서웠다고! 난 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어!"

비버가 까마귀의 말을 끊었다.

"비버,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까마귀의 말에 비버는 한숨을 쉬었다.

"미, 미안해 비버. 하지만…"

"하지만 뭐?"

까마귀는 비버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 딱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안 돼? 이제 거의 다 되었다고."

까마귀가 애원했다. 그러는 그의 모습을 본 비버는 한숨을 푹 쉬었다.

"… 천천히 해도 되는 거잖아."

"아냐, 저 블랙홀… 호킹 복사로 인해 천천히 증발하고 있어."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맞아. 하지만 저렇게 증발해 버리면 내가 더 이상 정보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려. 정보는 남아도, 해석할 수 없게 바뀌어 버리는 거야."

비버는 미간은 문질렀다.

"… 좋아. 얼마나 더 하면 되는 건데?"

"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 중 거의 한… 80%의 정보를 수집했어."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줄게."

"저, 정말? 하하! 이해해 줘서 고마워 비버!"

까마귀는 활짝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비버는 그런 그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 저 말. 참말이었어, 거짓말이었어?"

80%의 정보를 수집했다는 말?

"응."

… 거짓말이었어.
까마귀는 저 때 30%의 정보만을 수집한 상태였어.
까마귀는 허락보다는 저지른 이후에 용서를 비는 것을 택한 거야.

"… 하아… 그 말을 믿은 내가 잘못인 걸까?"

너무 자책하지 마.
그래도, 까마귀는 정말 기뻐했어.

"그렇지만…"


시간 1939년 여름날 새벽
공간 프랑스 캉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기차가 멈추었다.
첫차로서 파리의 새벽 공기를 달려온 터라 한껏 달궈진 기차의 차체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뮈리엘은 재빠르게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아침 해로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에르… 아직 캉에 남아 있어 주길…"

캉은 간밤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역에 붙은 노면전차 정류장에도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길가에는 아침부터 출근하는 노동자 몇몇이 서성이기 시작했다.

뮈리엘은 역에서 나와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뮈리엘은 역에서 벗어나 곧바로 노면전차의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붉게 페인트 된 정류장 표지판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익숙한 얼굴의 소녀를 발견했다.

"마들렌!"

"엇, 뮈리엘 아씨!"

마들렌은 화들짝 놀라며 뮈리엘을 반겼다.

"그 편지는?"

"어젯밤에 피에르 씨에게 전달 잘했죠. 그리고… 피에르 씨도 답장을 보내왔어요."

"답장? 설마…"

마들렌은 뮈리엘에게 편지 하나를 건네었다. 뮈리엘은 잽싸게 그것을 받아 들고는 떨리는 손으로 펼쳐 보았다.

뮈리엘에게,

난 영국으로 떠나. 그리고 영국에 계속 있을 거야. 영국 시민권을 따냈거든. 거기다 이젠 영국군 소속 암호 학교에서 앨런과 함께 일해. 나름 기밀을 취급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앞으론 프랑스에 오기 힘들어졌어.
그런고로, 아마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었을 테야.

네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이 뭐야? 아마 빈으로 떠나기 전 기차역에서 멀뚱히 서 있던 꼬마 피에르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네가 케임브리지에 있었을 때, 비트겐슈타인 교수님과 함께 있던 걸 본 적 있어. 우린 그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우린 언제나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았지. 우린 언제든 만날 수 있었지만, 매번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기만 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네가 간만에 내게 편지를 보내 주었을 때, 난 정말 기뻤어. 난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널 다시 볼 날을 기다리고 기대했거든. 드디어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야속하게도 운명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좁은 틈만 남긴 채로 결코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바보같이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린 지금. 나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려 해.
뮈리엘, 내 질문에 솔직하게 답장해 줘. 그래야 내가 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이 미로를 포기해 벗어나고,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고, 그리고 그렇게 나도 이 마음을 말끔히 정리할지, 혹은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 너를 만나기 위해 뛰어갈지, 이를 결정 가능하게 말이야.

뮈리엘. 어떤 경우에나 우린 서로 만나게 될까? 어떤 경우에 너는 나를 바라봐 줄 수 있는 거야? 어떤 경우에나 나는 너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어떤 경우에 너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어떤 경우에 너는 나를 필요로 하는 거야?

— 피에르 드 오를레앙

뮈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들렌에게 물었다.

"피에르는… 이 편지를 건네고는… 떠난 거야?"

마들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위스트르앙으로 떠났어요."

"뮈리엘은 정말 아쉬웠겠어."

응. 당장이라도 영국으로 그를 찾으러 떠나고 싶었지.

"정말로?"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왜?"

결국 그 일이 터지고 말았거든.

"무슨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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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939년 9월 3일
공간 프랑스 캉의 한 빵집

치지지직…

"여보. 라디오 좀 고쳐 봐."

"뭐야. 당신이 고치기로 했었잖아."

"… 좀 툭툭 쳐봐."

"이렇게? 아, 됐다."

"그래. 라디오에선 뭐라고 그래?"

"… 잠깐만… 세상에… 맙소사…"

시간 1939년 9월 3일
공간 영국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한 사무실

"… 배달원을 하겠다고?"

"그렇습니다."

"루트비히. 자네는 참… 못 말리는 양반이로군. 뭘 어디서 어떻게 배달원을 한다는 건가?"

"… 알아둔 약국이 있습니다."

"하아, 뭐. 마음대로 하게. 그렇지만 남은 계약 기간 동안에는 이곳에 교수로 남아 있어 주게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지지직…

"… 잠깐, 루트비히. 라디오의 볼륨을 키워 주게."

"그저께 있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관한 소식이겠군요."

"… 어쩌면 그것보다 더 나쁜 소식일 수도."

시간 1939년 9월 3일
공간 영국 블레츨리 파크

"피에르! 앨런!"

"무, 무슨 일입니까? 싱클레어 중령님."

"곧 라디오 방송이 나갈 거야. 마음 단단히 먹게. 자네들의 손에 우리 영국의 운명이 달렸어."

"… 네?"

"그게 무슨… 설마…"

"… 체임벌린 총리께서 최종 결단을 내리셨다."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치지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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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닝가 10번지 내각실에서 전달합니다.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는 독일 정부로부터 11시까지 폴란드에서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소식이 없다면, 양국 간에 전시 상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답신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 나라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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